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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없지, 네가 지금? (65/303)

감이 없지, 네가 지금?

어쩌다 보니 내가 하늘이를 붙잡고 안 놔주는 꼴이 되어 버렸다.

몇몇 사람이 나와 하늘이를 찾아와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짧은 대화를 시도하는 동안에도 난 계속해서 하늘이를 따라다녔다.

“뭐 하는 거야? 왜 계속 졸졸 따라다녀?”

“왜 계속 말을 하다가 말아? 그니까 뭐? 그때 그 일이라는 게 뭔데?”

내가, 아니 정훈이가 하늘이에게 실수를 한 적이 있는 게 분명하다.

무슨 실수를 어떻게 했든 무조건 털고 가야 한다.

앞으로 난 태산이, 그리고 미래금융과 함께해야 할 일이 많다.

“오빠 너 자꾸 이러면 앞으로는 상대 자체를 안 해 버리는 수가 있어.”

“뭐?”

“오빠랑 나 사이에 서로 불편할 일이 그때 그 일밖에 더 있어?”

그니까 그게 뭐냐고!

하늘이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놓고 그 일이 뭐냐고 물어볼 수가 없다는 게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하늘이가 힌트를 하나 던져 줬다.

그 힌트를 주면서 내게 실망을 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식의 표정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정훈이로 살아가고 있는 내 입장에선 감수해 내야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요란다.”

“요란다?”

“최소한 중간에 끼어서 입장 난처하게 만들어 미안하게 됐다는 말 정도는 했어야 정상 아니야?”

대학을 같이 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하늘이가 말하고 있는 요란다는 영어식 여자 이름일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고 성급하게 넘겨짚을 필요는 없었다.

그저 해당 내용에 대해 알고 있다는 식으로, 적당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몇 차례 끄덕여 주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아, 그거….”

“아, 그거?”

하늘이의 두 눈에 담긴 경멸의 감정.

그 감정은 그간 정훈이에게 쌓여 있던 앙금의 일부일 뿐이라는 걸 짐작해야만 했다.

주위엔 사람이 많았고, 피로연장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꾸준히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감정 조절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해 들켜 버린 눈빛이었을 테니까.

여전히 나란히 서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나, 없나 각자의 표정에 신경을 써 가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하늘이에게 눈인사로 아는 척을 해 왔다.

하늘이는 그 상대에게 함께 샴페인 잔을 들어 보이며 화사하게 미소를 지은 뒤, 여전히 미소가 담겨 있는 눈으로 내게 말했다.

“요란다랑 내가 룸메였고, 학부 과정 듣는 동안 항상 붙어 다녔다는 거 다 알고 있었잖아. 몰랐어?”

“당연히… 알고 있었지.”

“요란다가 오빠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다고, 언제 다 같이 밥이나 먹자고 했지 내가 언제 오빠한테 요란다 가지고 놀아 보라고 했어?”

여전히 다른 사람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하늘이가 물었다.

요란다.

가지고 놀아?

이걸 어떻게 종합을 해 봐야 하는 걸까?

대충 그려지는 그림이 있긴 한데, 그래도 설마 정훈이 놈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런데 정훈이 이놈이라면 감히 내가 상상도 못 할 망나니 짓을 하고도 남았을 거 같기도 하고….

“그때 그 일은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사과하는 거잖아.

그 와중에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며 하늘이가 물었다.

“이렇게 나와 버리면 아무리 지난 일이라고 해도 내 입장에선 배신감 느껴지지 않겠어?”

꽁한 성격은 제 할아비를 쏙 빼닮았구나.

“나는 최소한 직접 이렇게 기회를 주면 변명이라도 좀 나올 줄 알았는데, 이럼 그동안 오빠한테 배신감 느껴 왔던 내가 뭐가 돼?”

뭐가 되긴, 장차 미래금융에서 한자리 차고 나가겠지.

“오빠 그렇게 먼저 졸업하고 한국 들어오고 난 뒤에도 난 오빠 덕분에 1년을 더 요란다한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인처럼 눈치 보며 학교생활을 해야 했어.”

“요란다가 너한테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다 맞을 거야.”

“뭐?”

“요란다 관련해선 내가 할 말이 없다고.”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었다.

“요란다 관련된 일은… 내가 너한테 참 실수를 크게 했다.”

“실수? 이야… 역시 손정훈. 인생 참 쉽게 살아?"

무슨 사건인지는 정확하게 알아낼 방법이 없었으나, 어쨌거나 요란다라는 인물만 중간에 끼어 있지 않았다면 하늘이와 정훈이는 같은 대학에서 유학을 하며 관계가 어느 정도는 가깝게 유지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 순간 이 상황을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 내 눈앞에 펼쳐졌다.

“우선 대학 졸업하고 한국 들어와서 내가 너한테 먼저 연락을 해도 되는 건지… 그 부분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

“뭐?”

“아까 식장 안에서 네가 그랬잖아. 우리 어렸을 때처럼 가족들끼리 연락도 자주 하고 왕래가 많았을 때가 그립다고.”

“…….”

“우선 요란다 일은 입이 열 개라도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한국까지 들어와서 집안끼리 현재 사이가 많이 어색한데, 그 일로 내가 너한테 연락을 한다? 그것도 좀 이상한 거 같은 거야.”

그 말을 던져 놓고 하늘이의 반응을 살펴봤다.

“오빠가 그렇다고 하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알았어. 나 역시 이제 와서 그때 그 일로 오빠한테 사과받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다 큰 성인 남녀 사이에 있었던 일 가지고 당사자였던 요란다도 아닌 삼자인 내가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거 자체도 웃긴 일이지.”

나와 하늘이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단단한 벽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내가 들고 있는 샴페인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붙였다 떼어 내며 하늘이가 말했다.

“보는 눈도 많은데, 계속 둘이서만 붙어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 난 가서 안면 있는 사람들이랑 빠르게 인사 정도만 하고 돌아갈 거니까, 우린 여기에서 인사하자.”

“조만간 내가 회장님께 다시 연락을 드릴 일이 있을 거야.”

“할아버지하고 관련된 일까지 나한테 다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는 거고.”

“어쨌든 알았다. 가서 사람들하고 인사 나눠.”

* * *

신랑 측 피로연장으로 쓰이고 있는 북 카페 안에는 크게 두 종류의 재계 자녀들이 모여 있었다.

테이블을 잡고 앉아 있는 무리와 그렇지 못하고 그 안을 어슬렁 돌아다니며 어떻게든 괜찮은 인맥을 만들어 보고자 기회만 엿보고 있는 무리.

가장 안쪽 소파 테이블에 정태가 장민석 일행과 함께 앉아 있었다.

벽으로는 클래식한 커버의 진열용 모조 책들이 느낌 있게 꽂혀 있었고, 테이블 위로는 케이스가 열려 있는 시가 통이 올려져 있었다.

연초는 허용이 안 되지만, 시가 흡연은 가능한 모양이었다.

정태의 손가락 사이에도 두꺼운 시가 하나가 꽂혀 있었다.

“어? 정훈이. 일로 와.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어?”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마치 자기 수하를 부리듯 장민석이가 날 자기 옆 빈자리로 초대했다.

시가를 들고 있던 정태도 고개만 살짝 돌려 날 확인하고는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 있게 시가를 한 모금 빨았다.

“정훈이도 이제 진짜 다 컸구나. 벌써 이 모임에도 같이 나오고. 어디 보자, 여긴 서로 다 알 거고… 조금 이따가 알아 두면 괜찮을 만한 친구들 오면 형이 소개해 줄게.”

적당한 거들먹거림.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귀엽게 봐 줄 만한 수준이었다.

정태 역시 적당히 자리를 즐기고 있는 눈치였고, 재경의 후계자로서 충분히 무게도 지켜 내고 있는 거 같았다.

그런데 내가 자리에 앉아서 그런 걸까, 장민석이 이놈이 정태가 맡아 나가고 있는 스너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근데 정태야. 이건 형이 어디까지나 걱정이 돼서 물어보는 거야.”

정태는 그저 장민석이를 쳐다보며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정도의 반응만 보여 줄 뿐, 따로 대답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금 재경은 다른 사업을 확장할 상황이 아니지 않아?”

정태 놈이 의외로 노련했다.

“스너프 말하는 거야?”

“그래, 그걸 왜 인수했어?”

그 자리엔 부경쇼핑의 장남인 장민수도 함께 있었다.

스너프 인수는 결국 재경이 자체 유통판을 확보하겠다는 움직임.

그 움직임 앞에, 그간 재경의 한쪽 유통판 역할을 해 주고 있었던 부경쇼핑의 감정이 썩 좋을 리는 만무.

이런 자리에서 치기엔 장민석이의 장난질이 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태는 침착했다.

“형도 알다시피 우리한테 다른 선택이 있어?”

침착하면서도 솔직한 대답.

부경가 사람들 틈에 끼어 홀로 그들을 침착하게 상대해 나가는 정태 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리 그룹 안에 퍼져 있는 정태의 평판이 거품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질문에 장민석이가 어떤 대답을 하게 될지 궁금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민석이가 던진 미끼를 부경쇼핑의 장민수가 덥썩 물어 버렸다.

“형이 그렇게 말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뒤에서 형 욕해.”

장민석이 던진 미끼를 장민수가 문 것인지, 아니면 장민석과 장민수가 함께 작당하고 정태를 궁지로 몰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고 있던 중이었다.

정태가 싱긋이 웃으며 물었다.

“왜?”

“명색이 국내 30대 기업에 다시 올라선 재경한테 다른 선택권이 없다는 게 말이 돼?”

이거 지금 나만 불편한가?

지금 우리 재경은 겨우 30대 기업에 턱걸이를 하고 있는 수준이라는 걸 명심하라는 듯한 말투였다.

장민수의 그 말에 다른 부경 그룹 형제들도 비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고.

하지만 정태는 전혀 흔들리는 기색 없이 시가를 한 모금 깊게 빨아 천장을 향해 연기를 뭉쳐 놓고 날 쳐다봤다.

그리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나조차도 바로 분간을 못 할 정도로 빙빙 돌려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세상에 종합이 무슨 의미가 있어? 다 쪼개어서 개별로 봐야지. 개별로 보면 우린 항공만 겨우 체면치레하고 있는 거지, 식품이나 모직은 답이 없어. 잘 알 만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이라고 재경을 너무 띄워 주는 거 아냐?”

은근히 통쾌한 한 방이었다.

종합이 아닌 개별로 봤을 때, 재경보다 더 실속 없는 가지 비율이 높은 건 바로 부경이다.

현재 화학과 정보 통신, 그리고 생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부경 그룹 안에서 자체 수혈을 받고 있다.

하물며 부경 그룹 전체도 아닌, 고작 쇼핑만 따로 맡아 나가고 있는 집안에서 재경 그룹 전체를 상대로 평가질을 한다?

그 부분을 꼬집으며 정태가 말을 하자, 곧 장민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래, 정태야. 상대가 누구든 기죽을 필요 없다.

네 옆엔 지금부터 이 할아비가 있다.

“어쨌거나 형네 재경 관련해서 오프라인 마켓 쪽은 식품, 모직 할 거 없이 우리 아버지가 배려를 많이 해 주셨잖아.”

원래 우리 재경의 사업이었던 걸 업어 가 놓고, 그걸 이제 와 배려라고 표현을 한다?

하긴, 빼앗긴 놈이 무능한 거지,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 무능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피해자처럼 굴어선 안 된다.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정태가 대답했다.

“그 부분은 나뿐만 아니라 재경 전체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근데 어떻게 해? 오프라인 마켓 어려운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야? 지금처럼 계속 가다간 가라앉는 배에 의리 지키겠다고 다 같이 물에 빠져 죽게 생겼는데.”

“가라앉는 배?”

장민수가 꿈틀거리자, 곧 정태가 그놈을 향해 마치 가지고 놀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민수야. 오해는 하지 마. 쇼핑이 가라앉는 배라는 게 아니라, 오프라인 마켓 전체가 현재 그렇다는 말이었어.”

“형은 항상 그래. 꼭 오해를 하게끔 말을 해 놓고 오해를 하지 말래. 도대체 왜 그래?”

정태의 얼굴엔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에이, 왜 그러냐? 왜 갑자기 정색까지 하고 그래?”

“형은 못 느낄지 모르겠지만, 한 번씩 가족 모임에서 형이 말에 뼈를 박을 때마다, 그거 괜히 자격지심처럼 느껴지고 그래. 그러지 마. 그거 보기 안 좋아.”

어허….

이놈은 또 왜 갑자기 급발진을 하는 거지?

하지만 정태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는 모습이 장민수를 더 자극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그나마 같은 항렬 안에선 맏이인 장민석이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둘의 신경전을 말렸다.

“지금 뭐 하냐, 둘이?”

“…….”

“지금 이 자리에 우리만 있어? 다른 사람들 다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구경거리 만들어 줄 일 있어?”

“아니, 형. 형도 금방 다 들었잖아, 정태 형 하는 말.”

장민석이가 장민수 몰래 정태에게 눈치를 줬다.

좋게 좋게 넘어가자는 식으로.

그 눈치에 정태가 어깨만 살짝 들었다 내리며, 저놈이 왜 저렇게 오버를 하는지 모르겠단 표정을 보여 준 뒤 시가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장민석이를 자극했다.

“너는 참 앞뒤 문맥 다 놓치고 꼭 네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듣는 이상한 능력이 있더라?”

“뭐?!”

언성이 높아진 장민수를 진정시켜 놓고 결국 장민석이 나섰다.

“민수, 그만해. 정태 너도 그만해라. 이래서야 어디 가족이라고 편하게 너 부르겠냐?”

정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지금 내가 실수한 거야? 실수를 했는데, 나만 지금 그 실수를 못 느끼고 있어? 야, 민수야. 도대체 내가 뭐라고 했다고 그래?”

여기에서 장민수 이놈이 아무리 사촌 간이라도 해선 안 될 실수를 만들어 냈다.

소파에 거만하게 기대어 앉아 다리를 꼬더니, 정태에게 불을 달라고 했다.

커터로 시가 끝단을 잘라 내면서.

“형, 나 그 불 좀 빌리자.”

정태가 피식하고 웃으며, 테이블 중간 정도로 금장의 얇은 사각 라이터를 밀어 넣었다.

여전히 소파에 등을 파묻고 앉은 상태로 장민수가 날 쳐다보며 말했다.

“정훈아. 그 라이터 좀 줄래?”

장민수가 날 찾으며 다시 라이터를 찾자, 정태 녀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장민석이의 얼굴에도 재미난 상황 앞에 미소가 올라오고 있었다.

“정훈아? 형 라이터 좀 달라니까?”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하며 자신이 테이블 정중앙에 올려놓은 라이터를 집기 위해 정태가 몸을 앞으로 숙이려고 할 때였다.

내가 얼른 정태의 무릎 위로 손을 올려놓고, 못 움직이게 말린 후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어냈다.

그리고 직접 라이터를 집어 장민수 앞으로 내밀었다.

근데도 이놈이 안 받네?

“불 좀 붙여 봐라.”

뭐라?

나한테 지금 불을 붙여 보라고 하는 건가?

허허허… 재밌네, 요즘 놈들.

그런데 바로 그때.

“민수야, 적당히 해라.”

정태가 결국 감정을 들키고 말았다.

그런 정태의 모습이 통쾌했던지, 장민수는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느냐는 식으로 이죽거렸다.

“에이, 동생이 형한테 불도 못 붙여줘?”

“정훈이 앉아.”

정태가 내 팔을 낚아채서 날 다시 자리에 앉히려고 할 때였다.

난 고개만 살짝 돌려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 팔을 잡고 있는 정태의 손을 떼어 냈다.

“담배도 아니고, 시가에 불이 어디 쉽게 붙나. 그 시가 줘 봐. 내가 붙여 줄게.”

난 장민수에게 커팅된 시가를 넘겨받아, 선 상태에서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불을 켜 놓고 그 불 위로 한참 동안 시가를 돌려 가며 고루 불을 붙였다.

적당히 불이 붙은 시가를 약하게 흔들어 연기가 잘 올라오는 걸 확인한 뒤, 그걸 장민수에게 전달했다.

그 모습을 바로 옆 테이블, 그리고 북 카페 안을 돌아다니는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 이걸 그냥 줄 순 없는 거지.

난 불을 붙인 시가를 넘겨주며, 실수인 척 장민수 앞에 높여 있던 와인 잔을 툭 하고 건드렸다.

“야, 야!”

그 와인 잔은 곧바로 테이블 아래로 떨어져 바닥에서 깨어졌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와인이 장민수 앞에서 사방으로 튀겨 회색 정장 바지와 구두에까지 모두 다 튀어 버렸다.

“아이고, 이거 어떡해! 형, 괜찮아? 바지에 와인 다 튄 거 아니야? 어디 좀 보자. 바지 버린 거야? 아이고, 다 버렸네. 이거 어떡해?”

“너, 이 씨!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이거 일부러 이랬지?”

장민수의 입에서 날 향한 새끼라는 표현이 나오고 1초도 안 지나서….

“장민수. 너 지금 정훈이한테 새끼라고 했냐?”

자세를 앞으로 당겨 앉아, 아주 무서운 눈으로 장민수를 노려보며 정태가 말했다.

“이 새끼가 지금 누구한테 불을 붙이라고 하고, 새끼라고 하는 거야? 감이 없지, 네가 지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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