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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하라고 전해 주게 (66/303)

사과하라고 전해 주게

피로연장 안의 모든 시선이 우리 테이블 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피로연 자리는 직계 혼주도 아닌 장민석이 마련한 자리이고, 또 이 모임 자체가 장민석과 부경 그룹을 중심으로 형성된 모임이라는 걸.

나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별로 안 좋은 상태였다.

그런데 고작 부경쇼핑 쪽 자식 놈이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재경 그룹 후계자를 마주 보고 앉아, 그 동생에게 시가에 불을 붙여 보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써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 상황 자체를 오로지 흥미로만 바라보고 있는 장민석의 속내가 훤히 보여 더는 놀아나 줄 기분이 아니었다.

요즘 놈들 트렌드가 유치함이라면, 그 트렌드에 내가 맞춰야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와인 잔을 들고서 이 테이블의 어색해진 분위기를 살피는 하늘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됐어, 그만해.”

정태를 진정시키겠다는 듯, 장민석이가 묵직한 눈빛으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이것도 연기였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말로는 그만하라고 하지만, 정태가 여기에서 감정 조절을 못 하고 가십거리가 될 만한 장면을 하나 정도 만들어 주길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

그러니 내가 나서야지.

어쨌거나 정태는 우리 재경 그룹의 후계자다.

최소한 이 자리에서만큼은 우리 재경의 얼굴인데, 그런 정태가 고작 장민수 같은 애송이 놈 하나 때문에 장민석이한테 놀아나는 꼴을 보이게 만들 순 없지 않겠나.

와인이 튄 바지 끝단을 물수건으로 털어 내고 있는 장민수에게 내가 말했다.

“잔 떨어뜨려서 옷 버리게 만든 건 미안한데, 암만 그래도 불붙여 달래서 친절하게 불까지 붙여 준 사람한테 새끼는 좀 심한 거 아냐?”

“뭐?”

아마 정훈이의 이런 모습은 다들 처음 보는 모양이다.

내가 눈에 힘을 좀 실었거든.

장민수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날 노려보기 시작했는데, 난 그런 장민수와 장민석이를 번갈아쳐다본 뒤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이럴 거였음 불붙여 보란 말을 하지를 말든가.”

“손정훈.”

장민석이가 아주 강압적인 어투로 날 불렀다.

하지만 강압적인 어투와는 달리 날 쳐다보는 눈빛엔 마치 내가 실수를 더 만들어 내길 은근히 바라는 듯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네놈이 어떻게 놀고 싶어 하는지 완벽하게 접수했다.

놀아 줄게.

장민석과 장민수, 그 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부경가 사람들을 천천히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그러게 왜 날 불렀어?”

“너 지금 이거 일부러 쏟은 거지?”

“뭘 또 물어서 확인까지 해? 내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도 일부러 했다고 믿어야 할 판에.”

"뭐? 너 이 새끼, 이거… 너 지금 제정신이야?"

그제야 장민석이의 얼굴에도 당황이라는 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이 정도로 대책 없이 상황을 악화시킬 줄은 몰랐던 모양이지?

결국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는 내가 만들어 가고 있는 상황이 자리의 분위기를 잡아먹을 정도로 심각해져 버리자, 장민석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정태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태가 다시 한번 내게 새끼라는 표현을 쓴 장민석을 쏘아보고 있을 때였다.

“그만. 정태, 정훈이 앉아라. 민수 너도 적당히 해. 아무리 사촌지간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거야. 보는 눈도 많은데, 우리끼리만 있는 자리도 아니고 불을 붙여 보라고 한 건 네가 심했다.”

“…….”

장민석이가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자신의 권위를 보여 주기 위해 어색해진 테이블의 상황을 정리하려고 할 때, 정태가 앉아 있는 장민수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행인 줄 알아. 아까 거기에서 라이터 달란 소리 나한테 다시 했었음 오늘 와인으로 너 머리 감았어.”

그런 다음 정태는 입고 있는 재킷의 주름을 바로잡으며 장민석을 쳐다봤다.

“고마워, 형.”

장민석은 실눈을 뜬 채 정태를 쳐다보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더는 이 모임에 안 나와도 되게끔, 그 명분을 오늘 형이 만들어 줬어.”

“…….”

“정훈이 가자.”

날 소파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정태를 향해 장민석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너 이렇게 가면 앞으로 서로 불편해진다?”

“어쩔 수 없는 거지.”

이번엔 장민수가 시가를 입에 문 채 이죽거리며 물었다.

“형 진짜 괜찮겠어?”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 장민수였다.

그 본색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태가 비웃어 버렸다.

“나는 괜찮을 거 같은데, 넌 괜찮겠냐?”

“…….”

정태는 우리 테이블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을 건성으로 쳐다본 뒤, 가소롭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리고 민수야. 이럴 땐 형 진짜 괜찮겠어? 라고 하는 게 아니라, 형 미안해. 내가 좀 심했어… 라고 하는 거야.”

* * *

폐백실 앞에서 정태가 홍준이에게 조금 전 있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장민수가 내게 시가에 불을 붙여 보라고 했다는 내용을 듣는 순간 홍준이 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내가 고의로 와인 잔을 장민수 쪽으로 쓰러지게 만들었단 내용을 듣고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위에 올라가서 수경이하고 승준이 데리고 내려와.”

“네, 아버지.”

곧바로 우린 본가로 향했다.

본가 서재에서 나와 정태는 홍준이 놈에게 피로연장 안에서 있었던 상황을 빠짐없이 모두 설명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사무 책상 위로 올려진 홍준이의 폰이 수차례 울렸다.

부경쇼핑 쪽 장 회장의 전화였다.

하지만 홍준이는 발신자 번호만 확인을 할 뿐, 전화를 받지는 않았다.

“보는 눈도 많았을 건데, 꼭 그렇게 유치하게 상대를 해야만 했던 거야?”

모든 질타가 정태에게만 쏟아졌다.

사고는 내가 쳤는데, 정태에게만 핀잔을 놓고 있는 홍준이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봤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참아야만 했다.

홍준이 폰으로 다시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후, 벨 소리를 줄이고 있는 홍준이에게 정태가 말했다.

“보는 눈이 많았으니까요.”

“뭐?”

“그간 어머니 얼굴 봐서 제가 많이 참았다는 거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정훈이까지 그 시답잖은 모임에서 부경 그룹 들러리나 하게 만들고 싶지가 않았어요.”

“그런 거였음 그냥 안 나가면 되는 거지, 그 정도 배짱도 없어?”

“그런 모임 하나 그만두는 데 무슨 배짱씩이나 필요합니까? 그런데 오늘은 어쩔 수 없었잖아요. 명색이 가족 결혼식 날이었어요. 명분은 피로연이었고.”

“흠….”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정훈이한테 불을 붙여 보라고 하는데, 제가 참아야 했던 거예요?”

어쩐 일인지, 정태의 말을 다 듣고선 고개만 끄덕이는 홍준이었다.

이번엔 나에게 묻네?

“일부러 와인 잔을 깬 거야?”

“네.”

“왜?”

정태처럼 대답을 하면 되려나?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형한테 불을 달라고 하는데, 제가 참아야 했던 거예요?"

너무 똑같이 따라 대답을 해 버렸나?

억지로 웃음을 참기 위해, 정태의 광대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보고 있자니 나도 웃음이 올라왔다.

홍준이 놈 권위를 생각해서라도 여기에서 내가 웃으면 절대 안 되는 건데, 아까 그 피로연장 안에서 있었던 일말의 유치했던 상황, 그 와중에도 동생을 챙겼던 정태 놈의 기특한 처세, 그 모든 게 한데 어우러져 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푸흡….”

홍준이 놈이 먼저 웃음을 터뜨려 버리네?

“하하하… 하하, 하하하….”

정태도 웃음을 들키고 있었다.

더는 솟아오르는 광대를 억지로 숨기지 않고 정태가 시원하게 웃기 시작했다.

홍준이가 웃음을 끝내 놓고 물었다.

“민석이 놈이 나잇값을 못 하는 편이지?”

정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그러니 그 모양 그 꼴이지. 민석이는 그렇다 치고, 민수 그놈은 안 그럴 거 같더니, 의외로 이상한 구석이 있는 놈이네.”

“물이 드는 거죠. 저도 잠시 그럴 때가 있었지만, 나이 들고 회사 일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런 모임이 중요하단 착각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다 보면, 물 드는 거 한순간이잖아요.”

“민수 그놈이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괜찮겠냐고 물었다고?”

“네.”

홍준이의 얼굴에도 상대를 가소롭게 여기는 자신감이 만연했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나는 괜찮을 거 같은데, 넌 괜찮겠냐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별말 안 하던데요?”

“민수 그놈이 버릇이 없구나.”

“그게 어디 민수 그 녀석만의 문제겠습니까?”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홍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날 쳐다보며 물었다.

“정훈이 너는 네 이종사촌 형들이 오늘 그 모임에서 왜 그랬다고 생각하냐?”

“저나 형을 무시하니까 그러는 거죠. 그리고 그 무시는 연기일 뿐인 거고.”

“연기일 뿐이다?”

“무시를 하고 싶은데, 무시가 안 되는 모양이죠. 그래서 신경이 쓰이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신경이 쓰이고, 우리 재경이란 존재가 불편하기도 하고….”

“그런 게 네 눈에도 보이더나?”

설마 내 시력을 묻는 건 아닐 거 아냐?

이 와중에 무슨 이딴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어?

“설마 고작 부경 그룹이 우릴 신경 쓰고 우리 존재를 불편해하는 거 자체가 만족스러우신 거예요?”

“……!”

홍준이뿐 아니라 정태까지도 흠칫했다.

“저는 그 형들이 우릴 신경 쓰고 불편해하는 걸 그렇게 대놓고 표현한다는 거 자체가 상당히 불쾌하던데요? 그래서 와인 잔을 깬 거예요.”

“뭐라?”

“앞으로는 불편해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라고.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눈치를 보라고요.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고.”

“…….”

이쯤에서 정태를 조금 띄워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이미 다들 형한테는 꼼짝을 못 하는 거 같던데요?"

“민석이도 꼼짝을 못 하더나?”

정태가 있는 앞에서 그런 걸 확인받고 싶어 하는 홍준이의 그 마음 역시 충분히 이해가 됐다.

“제가 봤을 때 민석이 형은 그릇이 작아요. 자기 집 안에서나 까불지, 집 대문 밖에선 골목대장도 못 해 먹을 겁니다. 그런 인물을 어디 형한테 비교를 하겠어요.”

“그 정도까지는 아냐, 인마.”

정태는 민망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홍준이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홍준이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사무 책상 위로 올려놓은 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터치를 해서 화면이 올라오게 만들었다.

부재중 전화 두 통.

두 통 모두 부경쇼핑 쪽 장 회장의 번호였다.

통화 연결을 시도해 놓고, 마치 나와 정태에게 해당 통화 내용을 모두 공개하겠다는 듯 스피커폰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두 번의 신호음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네, 자형. 왜 전화를 안 받으세요?

“정태, 정훈이 불러 놓고 아까 식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 자네는 혹시 민수 통해서 이야기 들은 거 좀 있나?”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전화 드린 거예요.

“요즘 사업하기에 경기도 안 좋고 하다 보니까, 이놈들이 스트레스가 많은 모양이야. 기분 좋은 가족 잔칫날에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별것도 아닌 거로 말다툼이나 하고.”

―자형이 정태, 정훈이한테 이야기를 좀 잘하셔야겠어요.

홍준이 놈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다.

―정훈이야 회사 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니까 그럴 수 있다 쳐도, 정태는 이제 엄연히 재경 안에서는 사장단 아닙니까.

“그게 어쨌다는 거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조심이 들어 있어야 할 놈이 오늘은 많이 경솔했던 거 같아 걱정이 되어서 드리는 말이에요. 정태가 민수한테 저희 쪽 쇼핑을 가라앉고 있는 배라는 식으로 표현을 했다네요?

“그럴 리가 있나.”

―자형이 그렇게 말씀을 해 버리시면, 민수가 저한테 없는 말을 지어낸 게 되는 거 아닙니까?

“설마 없는 말을 지어내기야 했겠어? 하지만 중요한 말은 빠뜨렸을 수도 있지.”

그래, 유치한 일이긴 했어도, 그 유치한 일 때문에 조금은 홍준이가 회장처럼 보이네.

―뭐라고요?

“민수가 아까 그 자리에서 우리 정훈이한테 담배에 불을 붙여 보라고 했다던데? 그 소린 들었나?”

―다, 담배요?

“아니, 시가라고 했던 거 같네. 아무튼.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불을 붙여 보라고 했다네?”

―자형도 참. 그게 어땠다는 거예요? 사촌 형제들끼리 같이 한잔하다 보면 동생이 형한테 담뱃불도 붙여 주고 할 수 있는 거지.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속이 좁잖아. 자네는 열려 있고, 깨어 있는 사람이라 그런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 안 하는지 몰라도,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그런 부분에 대해 엄격하게 가르쳐 왔거든. 가족들만 모인 자리가 아니었지 않나.”

―자형이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면 제가 서운해집니다.

“나는 이미 자네 때문에 서운해.”

―자형.

“애들끼리 있었던 일이라 모르는 척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자네가 이렇게 전화까지 해서 불편한 소릴 해 대니 모르는 척 넘어갈 수가 없게 생겼네. 민수한테 조만간 정태, 그리고 정훈이 직접 찾아가서 정식으로 사과하라고 전해 주게.”

―뭐요? 자형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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