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손을 내밀어 보시죠
통화를 끝낸 홍준이가 나와 정태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과를 받아 내라.”
그에 정태는 홍준이가 지나칠 만큼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게 불안하다는 듯 눈치를 살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외삼촌하고 통화를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으셨어요?”
정태가 그 질문을 하는 순간 안타깝게도 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정태가 홍준이의 생각을 읽어 내기엔 역량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그리고 내 눈에는 보였다.
정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두려움과 걱정을 홍준이 놈이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게.
그럼에도 스너프라는 칼이 이젠 손에 들려져 있기에, 그 칼을 뽑았기에, 그리고 자식들 앞이었기에 그 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시 칼집에 넣을 수 없는 입장이라는 걸.
정태가 다시 물었다.
“이참에 부경쇼핑 쪽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단 아버지 생각은 알겠는데, 만약 우리가 스너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오늘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똑같이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 앞이라서 그런 건지 홍준이는 정태를 모자란 놈이라 타박을 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홍준이었다면, 큰소리를 냈을 것이다.
어쩜 그렇게 새가슴일 수 있는 거냐고, 그렇게 몸을 사릴 거였음 어째서 그런 일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도록 피로연장에서부터 조심하지 않았던 거냐고.
정태가 하고 있는 조심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나라도 홍준이처럼 했을 것이다.
홍준이가 내게 물었다.
“정훈이 네 생각은 어떠냐?”
그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왜 우리가 이만한 일로 생각이라는 걸 해야 하죠?”
정태의 눈이 가늘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홍준이의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부경쇼핑 쪽에선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피로연장에서 있었던 일을 따지겠다고 회장님께 직접 전화까지 걸었어요. 여기에 무슨 예의가 있는 거예요? 이건 부경 전체가 아니라, 쇼핑 쪽 하나 한테만 우리가 무시를 당하고 있다는 증거잖아요. 이걸 참는다고요?”
정태는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갑갑한 한숨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과를 받아 내는 것 역시 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 같은데요? 그 사과 받아서 뭐 할 거예요? 그냥 그런 거 상관없이 우린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정훈아.”
정태가 날 말렸다.
“네가 아직 회사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형.”
정태에게 물어봤다.
“형은 아까 그 피로연장에서 만약 우리가 스너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어?”
“…….”
“이미 전제 조건 자체가 틀렸잖아. 우리한테는 이미 스너프가 있는데, 왜 없다는 가정을 해? 진짜 우리한테 스너프 같은 유통판이 없었다면 애초에 피로연장에서 장민수 그 자식이 형이나 날 그렇게까지 견제했을까?”
정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왜 우리가 이만한 일로 우리끼리 작전 회의 비슷하게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홍준이에게 말했다.
“돈 안 되는 사과 받아서 뭐 할 거예요? 그리고 그 사과가 부경쇼핑 회장한테 직접 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집 멍청한 아들놈한테 하라고 시키는 거라면 그건 협박이 아니라 차라리 구걸이나 마찬가지죠.”
“…….”
“의미 없는 명분 만들지 마시고, 그냥 회장님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
홍준이의 표정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사회 복지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명분이 더 필요해요? 부경쇼핑. 그거 원래는 우리 재경 거잖아요.”
“……!”
“우리 사업이 그쪽으로 넘어간 거보다 아직까지 그쪽 눈치를 보는 게 더 굴욕 아닌가요? 그 큰 굴욕을 당해 놓고 고작 그쪽 아들놈을 상태로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과를 받아 내라… 하고 있는 지금 우리 현실이 더 굴욕인 거 아니냔 말이죠.”
난 이번엔 정태를 쳐다보며 말했다.
“회장님이 제대로 붙어 보라고 기회를 주시잖아. 한번 붙어 보자, 형. 뒷감당은 회장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
그제야 정태의 얼굴에도 부경을 향한 승부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태가 홍준이에게 물었다.
“월요일에 사장단 모임을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가 직접 제안을 하면 되잖아.”
“그보다는 회장님 호출이 더 효과적일 거 같습니다.”
“필요하다면 내가 오늘 미리 연락을 돌려 놓을게.”
“알겠습니다. 아버지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지금부터 제대로 한번 붙어 보겠습니다.”
* * *
그날 밤 늦게 홍준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거의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내가 니들 돌아가고 곰곰이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너한테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를 걸었다.
“네, 말씀하세요.”
―내가 이렇게 할 줄 알고 민수한테 와인을 쏟은 거냐?
“그건 아닙니다.”
―아니다?
“네. 아니에요. 그건 아닌데, 아쉬울 게 없는 상대라는 확신은 있었어요.”
―좀 쉽게 이야기를 해 봐.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무리도 아니지.
내가 그 자리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어 봤나.
난 시작부터 결정을 하고, 모든 책임을 내가 다 짊어져야 하는 자리에서 재경을 일궈 낸 사람이었다.
이렇게 자식 놈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질 정도라면, 홍준이 이놈이 지금 많이 불안하고 외로운 모양이다.
“회장님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계시잖아요. 제 생각 역시 회장님이 하고 계신 계산과 같습니다. 지금 회장님께서 하고 계시는 걱정. 어쩔 수 없이 일부는 현실로 일어나겠죠. 그리고 회장님께서 하고 계시는 기대대로 결국은 부경쇼핑 쪽에서 숙이고 들어올 거고요. 우린 잃는 게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스너프가 크게 성장을 할 겁니다.”
그 말이 듣고 싶은 거겠지.
“부경쇼핑 신경 쓸 필요 있습니까? 그쪽은 우리 재경의 상품을 언제든 교체가 가능한 상품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죠. 오히려 부경쇼핑이 우리 입장에선 얼마든지 교체가 가능한 유통판인 겁니다. 딱 그런 확신만 가지고 간다면, 우린 아쉬울 게 없는 거죠.”
―언제부터였어?”
“뭐가요?”
―언제부터 이런 시야를 가지고 있다는 걸 숨기고 있었냐고.
“…….”
―갑자기 생긴 시야일 순 없는 거잖아. 혹시 너도 네 형처럼 너희는 형제들끼리 다투지 않겠다고 일부러 나사 하나 빠진 놈처럼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해 왔던 거였어? 엄마, 아빠, 네 형까지 속여 가면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그런데 욕심이 생긴 거냐?
“…….”
―좋아. 대답하기 힘든 내용이라면 더는 안 물어볼게. 애비 앞에서까지 그런 감쪽같은 연기를 해 왔을 정도라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실은 이 말을 해 주고 싶어서 이 시간에 전화를 건 거다. 뭐가 널 욕심 나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욕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내가 든든해지고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
“…….”
―내가 따로 네 형한테도 전화를 걸어서 말을 했는데, 오늘 일은 참 잘했다. 아주 오랜만에 너희 형제들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홍명이와 홍준이에게 이런 칭찬을 직접적으로 해 준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 거 같다.
아니, 없었다.
특히 기특했다, 자랑스러웠다… 와 같은 낯간지러운 표현을 직접 전화를 걸어 해 준다는 건 나 손중길이의 성격상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애비로서 한 번도 해 주지 않았던 칭찬.
그 칭찬을 이제야 힘겹게 시도해 봤다.
“저도 오늘… 아까 저랑 형 앞에서 작은 외삼촌과 통화하실 때 감동했습니다. 멋져 보이셨어요.”
얼굴을 안 보고 하는 통화임에도 온몸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뭐 그만한 일 가지고.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 봐.
“회장님께 부경 그룹은 어떤 의미입니까?”
바로 대답을 못 하길래, 내가 먼저 난 어떻게 부경 그룹을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주었다.
“저는 부경 그룹을 단 한 번도 제 외가라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이건 오늘 정태 놈이 피로연장에서 보였던 모습으로 짐작을 해서 말해 주었다.
“그건 저뿐만 아니라 정태 형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래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회장님께 부경 그룹은 어떤 의미인지, 과거사를 다 차치하더라도 처가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협력을 이어 나갈 사업적 파트너라고 생각을 하시는 건지, 아니면 오늘 저와 정태 형에게 보여 주신 모습대로 언제든 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너는 내가 부경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 거 같아?
“회장님의 생각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배가 아픕니다.”
―배가 아프다?
“네. 특히 아까 그 피로연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어요.”
―나도 그렇다. 좋을 수가 없지.
“그럼 회장님. 지금 현재 우리 재경에겐 우리 편이 있습니까?”
―…….
“부경이야 겉으로만 파트너지, 실상은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금방 나온 거 아닌가요? 부경까지 우리 파트너가 아닌 지금, 우리 재경의 편이 있는 건가요?”
―비즈니스에 편이 어디에 있나. 다 조건에 따라 관계가 바뀌는 거지.
“완전한 재경의 편을 만들어 볼 시도를 해 보신 적은 있으세요?”
바로 옆에 장태산이의 미래금융을 놔두고 이러고 있다는 게 답답해서 물어본 거였다.
“그럼 제가 다른 거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혹시 정태 형은 트래픽 플랫폼 비즈니스에 관해서 스너프를 인수하자는 기획이 제 기획이었단 걸 알고 있나요?”
―그건… 내가 말을 안 했다.
“그러신 거 같아서 여쭤본 거예요. 정태 형이 그간 저한테 아무런 말도 없길래, 제가 먼저 물어보기가 애매하더라고요.”
―섭섭하냐?
“아뇨, 오히려 정태 형이 모르는 거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잘하셨습니다.”
―잘했다?
“네. 아이디어는 누구라도 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걸 실행에 옮겨서 사업으로 완성을 하는 게 어려운 거지, 아이디어를 누가 낸 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어요?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선 저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겠습니다. 그런데요, 회장님. 뱅크 시스템 도입이 스너프 성장에 큰 역할을 해 줄 거라는 제 의견이 그때 올린 기획안에 들어 있을 텐데, 그 부분에는 큰 관심이 안 생기셨습니까?”
―아니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 관심이 많고, 네 형한테 그 부분에 대한 사업 확장을 만들어 내라고 지시까지 내려놓은 상태야. 그런데 인수할 당시 스너프에는 뱅크 시스템이 없었잖아. 이게 생각보다 뱅크 시스템 접목을 시키는 게 어려워. 일단 자본도 스너프 인수금만큼이나 더 필요하고, 운영에 대한 노하우도 어디에서 가지고 와야 하는데, 그걸 얻어 올 곳이 마땅치 않은 모양이야.
“스너프는 왜 인수 당시 투자를 일으키지 않고 백 퍼센트 그룹 자본으로 인수를 하셨던 겁니까? 정태 형 생각이었던 겁니까, 아니면 회장님 생각이셨던 겁니까?”
―네 형 생각이었다. 나 역시 그룹 내 유보금이 쌓여 있는 상태에서 굳이 투자를 일으켜야 할 필요를 못 느꼈고.
이러니 회사가 유지는 되고 있었지만, 아무런 확장을 해낼 수 없었던 거겠지.
“해당 기획을 올린 입장에서 감히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이야기해. 그리고 나는 아직 네가 나와 이야기를 할 때 이렇게 거리를 만드는 게 영 어색하다.
“스너프는 투자를 일으키셔야 합니다. 스너프는 단순히 유통판의 역할만 기대할 게 아니라, 재경 그룹의 아군을 모으는 역할도 함께 할 수 있도록 만드셔야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플랫폼 뱅크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기업들 쪽으로 투자 기회만 주면 얼마든지 그들의 뱅크 시스템 운영 노하우를 바로 업어 올 수 있는데, 그걸 왜 자체적으로 만들겠다고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렵게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세요?”
―…….
“트래픽 플랫폼 비즈니스는 그 사업 자체만으로는 큰돈을 벌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광고도 들어와야 하고, 그런 광고들이 붙어서 더 많은 트래픽이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흑자를 낼 수 있는 구조죠. 그걸 기존의 스너프 운영진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괜찮은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도 매각을 해야 했던 거 아니겠습니다.”
―거기에 대한 좋은 생각이 있어?
“미래금융이요. 장태산 회장님께 직접 손을 내밀어 보시죠.”
―누구? 장 회장님?
장태산이의 이름 앞에 홍준이가 기겁하고 있다는 게 눈에 다 보일 지경이었다.
“장 회장님만큼, 우리 손씨 집안 사람도 아니면서 우리 재경 그룹에 진심인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