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있음 나 불 좀 빌려줘
월요일 아침.
손홍준 회장은 사장단 회의가 열리기 한 시간 전에 스너프 사장 정태를 그룹 본사 회장실로 불렀다.
“민수한테 전화 왔더나?”
정태는 여전히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불안하기만 했다.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떨군 정태가 힘겹게 대답했다.
“아뇨, 안 왔습니다.”
“사과할 마음이 없나 보네. 그래, 하지 말라고 해. 내가 사과를 받아야겠단 뜻을 정확하게 전달을 했는데도, 제 놈들이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는 가족끼리 그 정도도 못 해 주겠다는 건 애초에 그만큼 우릴 무시하고 있었다는 거겠지.”
“아버지….”
“그룹 안에서 네 포지션이 뭐냐?”
“스너프 사장입니다.”
“그래. 넌 스너프 사장이야. 더는 그룹 본사 상무가 아니야. 앞으로는 스너프 성장시키는 거에만 집중을 해라.”
“…….”
“그러라고 거기 앉혀 놓은 거니까. 우리가 부경과 붙는다고 해서 스너프에 손해가 날 일이 있어?”
“스너프만 놓고 보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모직, 식품 관련된 일까지 네가 신경을 써? 넌 네 자리에서 스너프 사장으로서의 네 역량을 증명해 내는 데에만 최선을 다해. 그럼 되는 거다. 그룹 전체를 살피는 건 내 역할이다. 네가 벌써 내 역할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면 아닌 거처럼 행동해.”
“…네, 죄송합니다.”
손 회장은 곧바로 스너프의 뱅크 시스템 적용 진행 상황을 물었다.
“언제쯤이면 뱅크 시스템 관련해서 내가 기본 가닥이라도 구경할 수 있겠어?”
“저번에 한번 보고를 드린 것처럼 금융을 추가시키는 게 되다 보니 따져 봐야 할 내용이 많습니다.”
“나 죽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따져 보기만 할 생각이야?”
“…….”
“우리가 직접 못 할 거 같으면, 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아. 왜 그렇게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고집을 부릴 거면 가능성이라도 보여 주든지, 그게 힘들 거 같음 고집을 좀 내려놔야 하지 않겠어? 미래금융이 플랫폼 뱅크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네, 그렇긴 한데….”
정태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손 회장이 자신의 앞에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모습을 너무 자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일전에 뱅크 시스템 도입에 관한 내용을 설명할 땐 충분히 이해를 하는 식으로 천천히 가더라도 꼼꼼하게 따져 볼 건 다 따져 봐 가며 일을 진행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식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한 사업임에도 재촉을 하고 있지 않나.
“뱅크 시스템을 포함시키면 어쩔 수 없이 대출 서비스도 함께해야 해. 아직 한 번도 우리가 가 보지 못한 길이다. 실력 있는 파트너를 옆에 끼고 같이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내가 조만간에 장 회장님을 한번 따로 만나 볼 생각이니까, 그 부분은 안 되는 거 억지로 해 보겠다고 미련하게 잡고 있지 말고, 다른 쪽이랑 함께하는 거로 알고 있어.”
“설마 미래금융 장태산 회장님 말씀이세요?"
정태는 더 크게 헷갈리고 있었다.
도대체 아버지가 왜 이러시지?
다른 사람도 아닌, 미래금융의 장 회장을 언급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계신다.
“아버지, 안 불편하시겠어요?”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더 불편해. 뱅크 시스템만 해결이 되면 날개를 달 수 있는데, 그걸 못 하고 있잖아. 유통 구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뀐다. 특히 요즘 시대는 더 그렇지. 트래픽 플랫폼이 언제 구식 유통판이 될지도 모르는 판에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할 거야?”
“…….”
“그럴 거였음 너한테 스너프 인수해 보라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 앞으로는 좀 스마트하게 비즈니스하자.”
“…네.”
손 회장은 마음이 안 좋았다.
어느 누구보다 정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손 회장이었다.
정훈이가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손 회장은 정태의 자질이 부족하단 생각을 크게 하지 못했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
오히려 그 짧은 기간 동안 회사 일을 배우며 빠른 성장을 해낸 정태의 역량을 손 회장은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둘째 정훈이가 남필우 사장과 조동희 전무를 감탄시키며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게 눈에 보였기에, 혹시라도 나중에 형제들끼리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아도 되게끔, 그 상황을 자신이 만들지 않아도 되도록 정태가 조금만 더 분발을 해 주면 좋겠다는 조급함에 더 정태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 * *
사장단 회의가 시작되기에 앞서 손 회장이 자리에 모인 모든 계열 사장단, 그룹 본사 임원들을 향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부경쇼핑의 장민수 백화점 사업 본부장이 내 아들놈들한테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시가에 불을 붙이게 만들었다고 하네.”
좀처럼 집안일을 회사로 가지고 나오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은 해당 일로 손 회장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 상태인지 바로 눈치를 챌 수 있었다.
“그쪽에선 아니라고 발뺌을 해도 그 의도는 명백한 거지. 그런데 거기에서 정훈이가 불을 붙였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자리에 모인 모두가 오만상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손 사장님은 그 자리에 같이 안 계셨던 겁니까?”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단 말이에요?”
“그걸 왜 또 붙여 줬답니까?”
정태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임원진의 반응이 이럴진대, 어째서 자신은 그 일이 있었던 당일, 본가 서재에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참아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던 걸까.
그날 손 회장이 보였던 불쾌함보다 더한 불쾌함을 표현하고 있는 임원진의 반응을 보는 순간 정태는 묘하게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자, 자. 다들 진정해. 그냥 불만 붙여 주고 끝난 일이었다면, 내가 창피하게 자네들 다 불러 놓고 이런 이야기를 왜 하겠나. 정훈이 이놈이 불을 붙여 줘 놓고 일부러 장민수 옷에 와인을 쏟은 모양이야.”
이번엔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더러는 통쾌하단 표정까지 지으며 언제 불편함을 표출했냐는 듯 킥킥거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손정태 사장은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임원진의 든든함에 취해 가고 있었다.
“그날 부경쇼핑 장 회장한테서 전화를 받았어. 그 친구가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아나?”
“뭐라고 하던가요, 회장님.”
“정태, 정훈이한테 이야기를 잘 해 줘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군.”
“무슨 이야기를요?”
“자식들 교육을 좀 더 잘 시켜 보라는 뜻 아니었겠어?”
회의장 안은 금세 부경쇼핑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 버렸다.
“어디 감히!”
“그걸 가만히 듣고만 계셨습니까, 회장님.”
“이쯤 되면 한번 해 보자는 거 아니야?”
“이건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될 거 같은데?”
임원들의 반응을 똑똑히 확인한 손 회장.
그는 정태를 쳐다보며 마치 이게 사업이라는 걸 가르치듯, 다시 한번 임원들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내가 장 회장한테 그랬어. 애들끼리 있었던 일이라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이런 전화까지 받으니까 그냥 넘어가 줄 수가 없겠다고.”
“당연하죠, 회장님! 이건 부경쇼핑 쪽에서 그간 우리 재경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다는 걸 대놓고 표현한 겁니다.”
손 회장이 임원들 가슴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내가 장 회장한테 사과를 시키라고 말을 했는데,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는 모양이야? 그래서 자네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서 자리를 마련했어. 부경쇼핑이 없으면 우리가 죽나?”
“아닙니다.”
“아쉬울 순 있겠지만, 이런 내용을 우리가 참아야 할 만큼 아쉬울 건 없습니다.”
“서로 등 돌리면 아쉬운 쪽은 저희가 아니라 부경쇼핑이죠.”
“네, 맞습니다, 회장님. 같이 물어뜯고 싸워 이겨 본들, 서로에게 이득이 될 건 없는 싸움이겠지만, 이번 기회에 정확한 위아래 정도는 알려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쉬울 게 있어도 이런 내용이라면 감수를 해야죠. 이 정도 사안이라면 부경에 관한 유통판 보이콧이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다시 손 회장이 임원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이만한 일로 자네들 입에서 유통판 보이콧 소리가 나오도록 유도를 하고 있는 내가 유치해 보이나?”
그 말에 임원진은 앞다투어 흥분을 했다.
“사람 사는 게 결국은 다 유치한 거 아니겠습니까?”
“자식 일에 유치해지지 않을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저는 제 아들놈 어렸을 때 학교에서 친구 가방을 들어 줬단 소리를 듣고 다음 날 제가 직접 학교까지 찾아갔었습니다.”
“상대가 먼저 그렇게 유치하게 나왔는데, 거기에서 체면 때문에 함께 유치해지지 못한다면, 결국 유치한 상대한테 지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이만한 일입니까, 회장님. 고작 부경쇼핑 한 곳이 우리 재경 그룹 전체를 우습게 보고 있는 일입니다. 부경쇼핑 전체라고 해 봤자, 우리가 가진 항공 하나 정도 규모도 못 맞추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사업 규모를 놓고 볼 게 아니죠. 매너의 문제인 겁니다. 불을 붙여 보라고 했던 그 의도가 뭐였든, 그쪽 장 회장이 회장님께 직접 전화를 걸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 자체가 그들의 수준을 말해 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회장님. 이건 유치하고 안 유치하고의 문제는 아닌 거 같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조용히 넘어가 줄 사안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손 회장이 가볍게 손을 들어 흥분한 임원들을 진정시켰다.
“다들 내가 느낀 불쾌감을 똑같이 느껴 주는 거 같아서 고맙네. 나는 정태, 정훈이에게 꼭 사과를 받게 만들어야겠어.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방법을 손정태 사장과 함께 다 같이 만들어 봐.”
* * *
고작 사과 하나 받아 내는 데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재경은 그 사과를 받겠다고 부경쇼핑을 상대로 우리가 가진 무기를 총동원했고.
그럼에도 난 더 이상 지금의 재경과 홍준이의 무능을 탓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게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남 사장이 직접 부경쇼핑의 백화점, 아웃렛 사업부 쪽으로 우리 재경모직이 가진 모든 수입 브랜드 철수라는 강수를 뒀다고 들었다.
매장 쪽으로 보장해 주고 있는 월세가 너무 부담스럽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모직 쪽에선 매장 보장 월세가 합리적으로 조율이 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점차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 순서대로 철수를 하겠다고 부경의 백화점, 아웃렛 사업부를 압박해 나갔다.
그리고 식품 쪽에서는 재경식품의 대표 상품을 가지고 부경의 마트 사업부를 압박했다고 한다.
다른 회사, 다른 제품으로는 대체가 불가능한 품목들에 한해 한 마트당 납품량에 제한을 둬 버린 것.
제 살 발라 먹기식의 유통판 보이콧이었지만, 재경 입장에선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의 마이너스였고, 상대의 사업은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의 매출이 압도적이었기에 모직과 식품에서 동시에 들어가는 압박을 부경쇼핑에선 감당하기가 무척 버거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갈등이 장기전으로 이어지게 된다면, 타 오프라인 유통판과의 경쟁에서도 밀릴 수 있었기에, 가급적이면 빨리 해당 이슈를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고.
정태를 통해서 장민수가 따로 식사 자리를 만들어 보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해 들었다.
“뭐라고 하면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그래?”
―오해가 커진 거 같다네.
“오해는 무슨. 그래서 그러자고 했어?”
―어쩌겠어? 이런 갈등이 계속 이어져서 우리한테 좋을 게 뭐가 있어? 우린 우리더라도 현장에서 유통판들 상대로 영업 뛰는 직원들은 또 무슨 죄고.
“나는 오히려 지금 우리가 좀 더 확실하게 관계를 정해 둬 주는 게 직원들 입장에서도 앞으로 일하기에 더 좋은 환경이 만들어질 거 같은데?”
―형 말 들어. 이만하면 됐어. 남 사장한테 이야기 못 들었어?
“무슨 말?”
―백화점, 아웃렛 쪽에서도 재경모직 쪽으로는 전 브랜드 매장 월세 수수료를 3퍼센트대로 낮춰 주겠다고 약속을 했나 봐. 그리고 무엇보다 나 요즘 이 일로 피곤해. 아무 생산성 없는 일에 아까운 시간, 내 에너지 다 빼앗기고 있는 기분이야. 엄마도 괜히 중간에 끼어서 입장이 난처하실 거야. 이쯤에서 정리하자.
“식사는 됐고, 그럼 그날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같이 커피나 한잔하자고 해.”
―왜 또 거기서 만나려고?
“사과는 확실하게 받아야지.”
그날 저녁 호텔 북 카페에서 장민수를 다시 만났다.
일은 자기가 만들고, 자기 아버지가 키운 거 아닌가?
근데 왜 이제 와 나와 정태가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꼬아 놨다는 식으로 서운한 표정을 만들어 보이는지가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게 꼭 이렇게까지 할 일이었어?”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약속 장소에도 가장 늦게 도착한 놈이 자리에 앉자마자 따지듯 나와 정태에게 섭섭하단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틀림없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 했지?”
결국 내가 정태에게 내 말이 맞지 않느냐고 물었고, 한숨을 내쉬는 정태의 모습에 장민수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장민수에게 내가 말했다.
“내가 사과 같은 건 주고받지 말자고 했었거든. 어차피 진심도 아닐 거 아냐. 받는 우리도 꼭 받아야 할 이유를 못 느끼는 사과였고.”
“…….”
“근데도 정태 형은 어쨌거나 가족인데, 풀 수 있음 푸는 게 맞지 않겠냐는 입장이었고. 난 사실 오늘 이 자리 안 나오려고 했어. 그냥 이참에 끝까지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거든.”
“야, 인마. 너는 그날 형한테 불 한번 붙여 준 게 그렇게 억울하냐?”
“나는 별로 안 억울했어. 나보단 형이 더 억울한 거 같은데?”
“뭐?”
정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장민수가 오기 전 내가 받은 약속 때문이다.
난 틀림없이 장민수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만약 정말 이렇게 나온다면 정태에게 내가 처리를 할 테니까 지켜만 봐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지금 억울하지?”
“적당히 해.”
“지금 이거 협박이야?”
“후우… 그만하자, 정훈아. 응?”
“그래, 그만하자. 나도 그러겠다고 자리에 나온 거니까. 근데 있잖아, 그만할 때 그만하더라도, 우리끼리는 계산을 좀 정확하게 하자.”
“계산? 무슨 계산?”
난 커트기로 끝단을 잘라 놓은 시가를 입에 문 채 장민수를 쳐다봤다.
“불 있음 나 불 좀 빌려줘.”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며, 억지로 미소를 유지한 채 장민수가 재킷 안 주머니에서 금장 라이터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난 그날 녀석이 했던 것과 똑같이 소파에 등을 깊게 묻으며 다시 부탁했다.
“뭐 해? 라이터 좀 달라니까?”
“…….”
입술을 좀 더 강하게 깨물며 테이블 위로 올려놨던 라이터를 내게 직접 건넸다.
난 그런 장민수와 마지막 계산을 끝냈다.
“차마 불을 직접 붙여 보란 말은 못 하겠다.”
“…….”
“근데 명심해. 내가 진짜 그 말을 못 해서 지금 안 하는 게 아니란 걸. 그럴 가치를 못 느끼고 있는 거뿐이야.”
그렇게 말한 다음 그날 장민수의 시가에 불을 붙였던 방법대로 라이터 앞에서 시가를 천천히 돌려 가며 불을 붙게 만들었다.
불을 붙인 시가를 장민수에게 건네며 말했다.
“불은 언제든지 붙여 줄 수 있어. 사촌끼리 불 한번 붙여 주는 게 대수야? 그런데 지금처럼 내가 붙여 주고 싶을 때가 있을 거고, 그러고 싶지 않을 때가 있을 거 아냐. 나도 사람인데.”
“…….”
“사과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하고 싶을 때가 있고,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겠지. 형도 사람인데.”
“…….”
“하고 싶을 때 해, 그리고 가능하다면 진심으로 해. 그래야 사과를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내가 좀 심했나… 하면서 미안한 감정이 같이 들지 않겠어?”
“하… 그날은… 내가 좀 심했다. 미안해. 미안해, 형. 정훈아. 거기 시가 통 좀 줘 봐.”
내가 건넨 시가 통에서 하나를 새로 꺼내 거기에 커팅을 하고 직접 불을 붙이며 장민수가 말했다.
“그 모임 성격 자체가 좀 그렇잖아. 보는 눈도 많고, 평상시엔 멀쩡한 사람도 그 모임에선 불필요하게 어깨에 힘을 넣고 있어야 하고.”
장민수는 불붙은 시가를 정태에게 먼저 권했다.
그리고 다른 시가를 하나 더 꺼내 똑같이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없는 자리에서 뒷담화하려는 게 아니라, 그날 민석이 형이 가족들 다 있는 자리에서 이상한 소릴 한 게 화근이었어.”
미간을 좁히며 정태가 물었다.
“민석이 형이?”
“그러니까. 피로연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우리 아버지 앞에서 해 버린 거야. 다른 어른들 다 있는데. 우리끼리 있었던 자리고, 또 그날 내가 먼저 정태 형을 도발한 게 사실이잖아. 내가 먼저 불을 달라고 하고, 정훈이 너한테 불을 붙여 보라고 시킨 사실이 있다는 말을 못 하겠는 거야.”
“…….”
“그래서 우리 아버지도 앞뒤 정황을 정확하게 따져 보지도 않고,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들 다 계시니까 흥분을 해서 고모부한테 전화를 걸었던 거고. 아무튼 이게 이렇게까지 커질 일은 아니었는데, 내 입장이 좀 난처하네. 아버지도 입장이라는 게 있다 보니까, 내가 솔직하게 다 말씀을 드렸을 때도 고모부한테 먼저 연락을 못 하시더라.”
내게 불붙인 시가를 건네며 장민수는 다시 한번 나와 정태에게 그날 있었던 유치한 상황에 대해 사과를 했다.
“참 별일도 아닌 건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져 버려서 나도 지금 상당히 당혹스럽고, 후회하고 있어. 그리고 X발 내가 언제 이런 일로 사과를 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미안해. 근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는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