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편할 대로 하시게 (73/303)

편할 대로 하시게

명일만 부장이 윤현정 팀장을 따로 불렀다.

개발부 자체 소형 회의실 안이었다.

원단 샘플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테이블 위를 윤 팀장이 대충 정리했고, 두 사람은 아무런 마실 것도 없이 마주 보고 앉았다.

“처음 윤 팀장이 우리 개발부로 스카우트 되어서 신상품 개발팀을 맡아 나갈 거란 소릴 들었을 때, 다른 부서장 모두 우려했지만 난 감사하기만 했어요.”

“…….”

“왜 그랬는지 알아요?”

“아뇨, 모르겠습니다.”

명일만 부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좀 더 앞으로 당겨 앉았다.

“그게 벌써 2년 전이죠?”

“네.”

“그때 우리 재경모직 안에선 더 이상 개발부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거든요. 자체 브랜드가 없었잖아요. 몇 년 동안 준비를 해 오며 개발비만 써 왔지, 그렇다 할 결과물을 만들어 내질 못했어요, 내가. 그 부분에 대해선 잘 알고 있죠?”

“…네.”

“회사의 지원 여부와는 별개로 수년간 시간적 기회를 제공받았는데, 새 브랜드 론칭이라는 게 내 능력 안에선 해낼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이더란 말이죠.”

“…….”

“나도 이제 나이가 있잖아요. 임원급 연봉을 제안받고 스카우트를 받아서 KS 인터내셔널에서 사람이 넘어온다? 그것도 상당히 어린 사람이? 거의 모든 부서장이 사장님의 그런 결정에 납득을 못 했어요. 하지만 난 달랐지. 난 납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게 이유였어요. 사장님이 날 따로 불러서 윤 팀장 이야기를 직접 꺼내시며, 같이 일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최선을 다해 보겠단 대답을 드렸던 이유.”

명일만 부장은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솟아오른 무릎 위로 깍지 낀 두 손을 다소곳이 올려놓고 싱긋이 웃었다.

“윤 팀장이 보장받은 계약 기간 2년 동안만이라도 개발부가 더 유지가 되면 어쨌거나 난 그만큼 더 집에서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윤 팀장한테 고맙단 인사를 꼭 하고 싶어요.”

“아닙니다, 부장님.”

“그리고 사과도 하고 싶습니다.”

“사과요? 부장님이 저한테 무슨 사과를….”

“내가 모를 수가 없잖아요. 지난 2년간 그 높은 연봉을 보장받고 넘어와서 아무런 결과물도 못 만들어 내고 있었던 윤 팀장 향해 뒤에서 어떠한 말들이 나오고 있었는지.”

“…….”

“명색이 부서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듣고 윤 팀장을 커버를 쳐 주기는커녕 때론 그런 뒷담화를 함께한 적도… 솔직히 몇 번 있었어요. 내겐 그게 사회생활이었거든. 내가 이 회사에 들어와서 배웠고, 그래서 할 수 있는 사회생활이라는 건 그런 비겁함이었더라고.”

윤 팀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명 부장이 얕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랬던 내가 남의 사회성을 평가질하려 했다는 거 자체가… 좀 쪽팔리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부장님. 우린 다 알고 있잖아요.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거기에 누구의 최선만이 정답이고, 누구의 최선은 오답일 순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정답과 오답을 구분하자는 게 아니라, 자신의 떳떳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맞아요. 윤 팀장 말대로 우린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우린 각자의 역량 안에서 최선이라는 걸 다하고 있고. 하지만 살다 보면 그 최선을 엉뚱한 방향에서 하게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고, 잘못된 방향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순간 그간의 시간이 아까워 되돌아갈 용기를 못 내고 그 방향이 맞는다고 고집을 부리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거 같아요.”

“…….”

“내가 그랬어요. 비겁하게도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1년만 더, 2년만 더… 딸아이 대학 들어갈 때까지만…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시시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지 뭡니까.”

“부장님은 절대 시시한 분이 아니에요.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테이블 위로 신기한의 이력서를 내려놓으며 명 부장이 말했다.

“나 같은 비겁한 사람들이 신기한 씨를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만든 거였어요.”

“…….”

“나 같은 비겁한 사람들이 신기한 씨처럼 솔직하고, 실력 있는 사람들을 조직에 적응을 못 하도록 만든 거더라고. 내가 바뀔 자신이 없으니까, 상대가 나에게 맞게 바뀌어 주길 기대하고 그게 안 되는 사람은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 난데, 내가 과연 이런 사람을 데리고 같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어요.”

“부장님….”

“난 힘들 거 같아요. 자신이 없어.”

“하….”

윤 팀장은 답답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부족한 점까지 모두 고백을 하며 양해를 구하고 있는 명 부장을 상대로 자신이 뭘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을 때였다.

“난 힘들 거 같으니까, 윤 팀장이 관리를 해요.”

“…네?”

“신기한 씨 말이에요. 윤 팀장이 책임지고 신기한 씨가 VMD팀을 세팅할 수 있게 도와주라고.”

“부, 부장님….”

“앞으로 VMD팀에 관한 모든 보고는 내가 윤 팀장 통해서만 들을 거예요. 현재 시니어즈에서 함께 넘어온 VMD도 다 신기한 씨한테 맡으라고 하고, 시니어즈부터 시작해서 준비 중인 골프 웨어까지 모두 다 윤 팀장이 총괄을 하는 걸로.”

“하지만 시니어즈는 우리 쪽으로 흡수되기 전 자체 디자인팀이 있었고, 그 팀이 다….”

“자신 없어요?”

“…….”

“윤 팀장 연봉 1억 8천이라며. 처음 사장님께서 그 연봉을 제안하셨을 땐, 새 브랜드 론칭뿐 아니라, 신상품 개발에 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을 함께 가져가란 의미 아니었어요?”

“그렇긴 한데….”

“우린 우리가 가진 능력을 연봉과 인센티브로 평가받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의미에선 우리도 직장인 이전에 프로죠. 프로는 실력으로 말하는 거고, 그 실력은 남이 뭐라 하든 월급 통장에 찍히는 월급 액수가 바로미터 아닌가요? 누가 뭐래도 우리 개발부의 최고 에이스는 윤 팀장이에요. 나는 바람막이 감독 정도로 합시다.”

“…….”

“시니어즈 팀에서 야기될 저항은 내가 다 커버를 칠 테니까, 지금부터는 윤 팀장이 새 브랜드 론칭 준비와 동시에 시니어즈 디자인까지 총괄을 해요. 그리고 우리가 시니어즈를 인수하게 된 배경에 윤 팀장의 제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안 그래요?”

“그럼 신 팀장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같이 일하는 거 맞는 거죠?”

“지금쯤 인사부장이 손 과장님 통해서 연락을 주게 만들었을 거예요.”

윤 팀장은 박수를 짝! 하고 크게 친 뒤, 그 손을 가슴 앞으로 깍지를 끼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아마 설 연휴 끝나고 첫 출근을 하게 만들 거예요. 그 부분은 인사부에서 정리할 내용이라 나도 자세하게는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해야 할 일은 아닌 거 같아요. 내가 면접 평가를 제일 박하게 줬거든. 근데도 상무님, 인사부장 평가가 너무 높게 나와 버렸어요. 그리고 나까지 셋 다 만장일치를 했고.”

“부장님도 같이 일해 보시면 금방 알게 되시겠지만, 신 팀장은 정말 그 분야에선 독보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후회 안 하실 겁니다.”

“내가 왜 후회를 해요? 난 어쨌거나 윤 팀장이 새 브랜드 론칭만 제대로 해 주고, 다른 프로젝트를 계속 만들어 내서 개발부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인데. 좀 묻어갑시다. 윤 팀장한테. 대신 내가 앞으로는 든든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선 윤 팀장의 바람막이 역할에 최선을 다해 볼 테니까.”

* * *

설날 연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룹 내 해외 지사 순방을 계획하고 있던 손홍준 회장.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벌써 한 시간 가까이 폰을 손에 든 채 망설이고만 있었다.

망설이고 있었다고 하기보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와는 형제처럼 지낸 분이시고, 그래서 자신에게도 한때는 작은아버지 같은 존재이셨던 미래금융의 장태산 회장에게 전화를 걸 용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흠….”

육십여 해 이상 인생을 살아오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감정.

이젠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가기보다는 주위도 둘러보고, 가끔은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며 천천히 걸어도 될 나이가 되었음에도 손 회장에겐 여전히 어려운 것투성이였다.

특히 20년 넘게 묵혀 있는 장 회장과의 갈등과 오해.

그간 재경을 이끌어 오며 수많은 경험과 부침을 경험해 본 손 회장이었지만, 그런 손 회장에게도 장 회장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건 큰 용기가 필요했다.

결국 눈을 질끈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는 그 몇 초의 시간 동안, 손 회장은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두렵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으며, 지난 세월의 아쉬움들이 복잡한 감정으로 머릿속에서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러다 장태산 회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져 갔다.

―여보세요?

“회장님.”

―…….

수화기 너머로는 한참 동안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저 홍준입니다.”

어색하기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전화를 걸기 위해 용기를 만들어 내야 했던 시간에 비해선 오히려 편한 기분이 들었다.

“회장님.”

―그래, 얼마 만에 들어 보는 목소리인지 모르겠네.

감정의 골이 생기기 전, 자신을 친자식처럼 여겨 주셨던 큰 어른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 음성과 겹쳐져, 형이 죽고 난 뒤 장 회장과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며 서로에게 모진 말들을 주고받았던 당시의 날 선 음성이 기억 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제가 연락을 너무 늦게 드렸습니다.”

다시 또 수화기 너머로는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손 회장은 그 침묵이 불편하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했다.

―내가 먼저 해도 되는 거였는데, 그간 나도 그걸 못 했네.

“남 사장 통해 간간이 소식만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랬어. 나도 틈틈이 남 사장 통해 소식 전해 듣고 있었어.

“아직 늦은 게 아니라면, 제가 직접 찾아뵙고 쌓여 있는 감정에 먼지를 좀 털어 보고 싶습니다.”

―털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겠나. 이렇게 연락이 닿은 것만 해도 충분한 거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일까.

그래서 호르몬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

손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오래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 설 연휴 동안,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이번엔 제가 직접 해외 지사를 돌아다니며 파견 직원들을 챙겨 볼 생각입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그 전에 회장님을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자네들처럼 바쁜 사람인가, 아님 자네가 내 집 위치를 모르나. 언제든 찾아오면 되는 거지,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나?

“하….”

억울한 감정, 거기에 서럽고 외로웠던 지난 세월 동안의 모든 감정이 한데 뒤섞이며 손 회장은 코끝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언제 오든 식사 시간 전에 오게.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자고.

“네, 회장님. 점심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게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겠네. 처랑 같이 올 건가?

“아닙니다. 저 혼자 가도록 하겠습니다.”

―편할 대로 하시게. 영석이는 아마 회사 일이 바빠서 내일 시간을 못 낼 걸세. 지금도 출장길이야.

“제가 따로 통화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 자네라고 하면 친형처럼 따르던 사람 아닌가.

“…네.”

―그래, 알았네. 내일 점심 정도로 알고 있겠네.

“네, 내일 뵙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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