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이야기 좀 하자꾸나
손홍준 회장에게 장태산이라는 존재는 애증에 미련과 원망, 불편함이라는 감정이 모두 뒤섞여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한때엔 혈육보다 더 가까운 삼촌 같은 존재였고, 든든한 지원군이었으며, 아버지의 불호령 앞에 유일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안전한 보호막 같은 존재였다.
그랬기에 손홍명 회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후, 재경의 새로운 그룹 총수로 올라선 손홍준 회장에게 장태산 전 재경 그룹 본사 전무는 가장 믿을 수 있고, 유일하게 의지를 할 수 있는 그룹 내 최고의 실력자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손 회장의 기대와는 달리, 장태산은 손홍준 회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집안일에 개입하며 형수와 정엽이의 처우 부분까지 손홍준 회장의 책임으로 돌리려 했다.
두 사람 사이의 본격적인 갈등은 거기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러다 손홍준 회장이 처가인 부경 그룹 쪽으로 계열사 몇 곳을 매각하며 현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좁힐 수 없을 정도로 골이 깊어졌고, 급기야 장태산 그룹본사 전무는 그룹 내에 깔려 있는 자신의 지분을 회수하기에 이르렀다.
재경 그룹의 지주사, 모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재경모직의 본인 지분만 유지한 채, 항공과 식품의 본인 지분을 모두 뺀 뒤, 그 길로 독립을 선언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업이 구 미래투자증권, 현 미래금융이었다.
미래금융은 현재 서울은행과 미래투자를 계열사로 두고 있는 지주사이고, 다양한 콘텐츠 IP 관련 플랫폼과 연예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지난 20여 년간 꾸준히 공격적인 투자를 성공시켜 금융권에선 손에 꼽히는 기업으로 성장해 왔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손 회장은 미래금융의 성장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망하길 바랐다.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고, 오히려 부경 그룹 쪽으로 매각된 계열사 사장단을 모두 불러들여 새로운 기업을 세운 장태산을 손홍준 회장 역시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모든 걸 잃고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주길 바랐다.
그럼 그땐 지난 일을 모두 덮어 두고 다시 작은아버지처럼 모시며, 그의 실수와 욕심을 없었던 일로 해 주려 했다.
하지만 투자 감각이 탁월했던 장태산의 미래금융은 해가 다르게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 나갔고, 미래금융의 성장은 급기야 장태산에 대한 손 회장의 그리운 감정까지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운 감정이 사라진 자리엔 오로지 그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원망과 배신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장태산에 대한 손 회장의 거리 두기는 더욱더 심화되었다.
그게 지난 세월 동안 어떻게든 재경모직에 남아 있는 장태산의 지분을 모두 회수시키려고 했던 손홍준 회장의 이유였다.
장태산 회장의 본가 거실.
손 회장과 함께 온 기사와 그룹 본사 전략 기획 본부장이 챙겨 온 명절 선물을 거실로 부지런히 다 옮겨 놓고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에선 미래금융의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장영석 부회장의 처 홍금실이 시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는 가사 도우미들을 주방 안으로 잠시 모여 있게 만들 뿐이었다.
“자네들은 나가서 기다리고 있지. 끝나면 전화할 테니까.”
“네, 회장님.”
손 회장을 의전한 남자 둘이 거실을 나서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홍금실은 식사 전 간단하게 마실 거라도 준비를 해 줄 요량으로 시아버지와 손 회장이 마주 보고 서 있는 곳으로 조심히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홍금실은 걸음을 멈춰 세워야만 했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지.”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에 농담을 해 봤는데, 영 어색하네. 앉지.”
“절부터 받으시지요.”
“절은 무슨. 됐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아닙니다. 받으시죠.”
곧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장태산 회장.
그의 앞에 선 손홍준 회장은 어느새 자신이 평생을 모셨던 손중길 회장보다 더 나이가 들어 있었다.
결국 주방 앞에서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며느리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란 손짓을 한 다음 마지못해 받는다는 식으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산이 두 번은 더 변하고 남았을 오랜 세월 동안 서로의 고집과 아집, 거기에 자존심까지 들어가면서 더는 좁힐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 사이에 낀 감정들은 놀랍게도 손 회장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몸을 납작 엎드리는 절 한 번으로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1초가 2초가 되고, 5초가 다시 10초가 되는 동안에도 한 번 엎드린 손 회장의 절은 끝이 날 줄 몰랐다.
결국, 장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킨 후에야 오래전 친자식처럼 살폈던 손 회장의 절이 끝이 났다.
너무 복잡한 감정들이 두 사람 사이에서 뒤엉키고 있었다.
그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지난 세월에 대한 원망과 사과, 서툴렀던 감정 표현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부족했던 이해심으로 상대의 진심을 외면해야 했던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또 이해를 하는 중이었다.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기에.
그 세월 동안 서로에게 쌓인 경험의 밀도와 삶의 가치 역시 크게 달라져 있었기에.
무엇보다 감정에 함몰되어 어렵게 다시 찾아온 이 관계의 기회를 놓쳐 버리기엔 각자가 앉아 있는 자리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기에….
한편 주방 입구에서 거실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홍금실은 조용히 주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 가사 도우미에게 식기를 하나 빼라고 지시했다.
“여기 이건 그냥 빼는 게 좋겠어.”
“식사 안 하고 그냥 가신대요?”
“아니, 내가 나중에 먹으려고. 두 분이서만 식사하실 수 있게끔 자리를 다시 맞춰 봐. 술도 한잔하실 거 같으니까 준비 좀 해 주고.”
“네, 사모님.”
기본 찬이 모두 깔릴 때까지 신경을 쓴 후 거실로 나온 홍금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버님? 식사 준비는 대충 다 끝났는데 차부터 준비를 해 드릴까요, 아님 식사부터 하시겠어요?”
그 말에 장 회장이 손 회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술 한잔해도 괜찮겠어?”
“해야죠. 회장님만 생각 있으시다면, 전 좋습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며느리에게 눈짓을 보내자, 이내 홍금실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시작하며 손 회장이 물었다.
“지난 추석 끝나고 정훈이가 이 집에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장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종종 찾아올 것처럼 하더니, 그 후로는 따로 연락이 없네. 누구 통해 들었나? 남 사장이 그러던가?”
“남 사장 통해 먼저 듣고, 모르는 척을 하고 있는데 얼마 전 정훈이가 자기 입으로 그런 적이 있었다고 말을 꺼내더군요.”
“남 사장이 나하고 자네 중간에서 끼어서 마음이 많이 불편할 거야. 딴에는 애를 쓴다고 그러는 거니까, 종종 날 찾아오는 부분에 대해 자네가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음 좋겠네.”
“오히려 남 사장 통해 회장님 소식 전해 듣는 걸 불편해하실까 저는 그게 더 걱정이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천천히 하시죠.”
다시 잔을 드는 장 회장의 모습에 손 회장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잔을 들며 술잔 속도를 늦춰 드리려 했다.
자신에게야 아무 문제 될 게 없는 속도였지만, 내일모레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의 장 회장에겐 다소 빠른 속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적당히 마시려고 빨리 마시는 거야. 세월아 네월아 하며 마시다 보면 취하기 전에 물배부터 차지 않나.”
“남 사장 통해서 이번에 재경이 인수한 스너프가 원래라면 정훈이의 기획이었단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모직에서 인수한 시니어즈도 정훈이 기획이었다고 하더군.”
“네, 맞습니다.”
“남 사장 통해서 안 좋은 소식만 들었을 땐 내심 걱정을 했는데, 정신을 차린 모양이야.”
장 회장과 함께 술잔을 비운 손 회장은 곁에 두고 있던 술병을 들어 절반이 조금 넘을 정도로만 술잔을 채워 드린 후 자신의 잔을 마저 채웠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아니면 그간 정신 나간 척 연기를 했던 건지 제 아들이지만 헷갈리고 있습니다.”
장 회장은 그런 느낌 역시 남 사장을 통해 전해 들었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 스너프 인수 관련 기획안 정리해 놓은 걸 가져오면서 그러더군요. 부경이 과거 우리 재경이 만든 사업들을 원래부터 자기들 것인 양하는 꼴이 눈에 상당히 거슬린다고요.”
“자네 처가 그 이야기를 들었음 속이 많이 상하겠어.”
“그보다 더 속이 상할 일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부경화학 아들내미 결혼식 날 있었던 일? 아, 이건 남 사장이 아니라 하늘이한테 들은 이야기야.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모양이지.”
“그랬었군요. 자식들이 사촌 형제들한테 그런 대접을 그간 받아 왔다는 걸 듣고 기분 좋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때 또 정훈이 이놈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합니다.”
“무슨 말?”
“도대체 우리 재경에게는 우리 편이라는 게 있긴 하느냐고요.”
“…….”
“그러면서 회장님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놈이. 장 회장님만큼, 우리 손씨 집안 사람도 아니면서 우리 재경 그룹에 진심인 분이 어디에 있겠냐고 말이죠.”
“정훈이 그놈이 자네한테 그런 말을 하더란 말이지?”
바로 조금 전 천천히 마시자는 걱정을 했던 손 회장이, 이번엔 먼저 술잔을 들었다.
“아들놈에게 혼이 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다 큰 어른이 어째서 이미 지난 일에 얽매여 그러고 있느냐고요.”
“…….”
“이번 설에 저는 정태를 데리고 해외 지사 순방을 계획했습니다.”
“정훈이는?”
“여전히 재경에 진심이시라면, 회장님께서 정훈이를 다시 한번 만나 봐 주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정훈이를?”
“스너프에 뱅크 시스템을 도입시키려 하는데, 거기에 파트너로 정훈이 이놈이 미래금융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러면서 저에게 직접 회장님께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합니다.”
장 회장이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는 지난 세월의 염치 때문에 직접 그 말을 꺼낼 엄두가 아직은 안 납니다. 정훈이 이놈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산을 가지고 그런 제안을 했는지도 아직은 자세하게 못 물어 봤고 말이죠.”
“오늘 나한테 내민 이 손은 결국 미래금융을 정훈이한테 놓아 주는 다리다?”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뭘?”
“정훈이 놈 생각처럼 여전히 회장님께서 저희 재경에 진심이신지를요.”
“진심이 아예 다 사라졌다면 내가 무슨 미련으로 모직 지분을 꼭 쥐고 있겠나.”
* * *
설날 당일.
홍준이 놈이 정태를 데리고 해외 지사 순방을 나간 탓에 혼자 탕국과 물밥을 갈아 가며 차례를 지내야 했다.
아무 의미 없는, 그저 장혜란과 원수경이 보고 있었기에 마지못해 지내는 차례였다.
차례를 끝내고 제사 음식으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면서 장혜란에게 말했다.
“형수는 이거 밥만 먹고 친정에 가 봐도 되지 않나?”
그 말에 원수경은 시어머니의 눈치만 살피며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어떻게 그래요. 아버님이랑 그 사람까지 해외 출장 나가 계시는데, 저라도 어머님 옆에 있어야죠.”
“그건 형수 생각인 거고. 엄마도 혼자만의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겠어요? 사돈분들도 승현이 보고 싶어 하실 거 아니에요. 회장님, 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 찾아올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여기 있어요. 그러지 말고 이번 설은 아침밥만 대충 먹고 승현이 데리고 집에 가세요.”
장혜란 역시 내 생각에 동의를 했다.
“그래, 그렇게 해. 아무렴 집보다 여기가 편할까. 나도 아줌마들 시켜서 집 정리 대충 해 놓고 친구들이나 만나러 나갈까 싶어.”
“진짜… 그렇게 해도 돼요?”
“어머, 얘 말하는 거 좀 봐. 모르는 사람이 들었음 우리가 널 구박하는 줄 알겠다.”
“아뇨, 어머님. 호호호. 무슨 말씀을 또 그렇게 하세요? 죄송해서 그러죠. 아버님도 안 계시는데, 어머님 혼자 계시게 해도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내가 애니? 나도 잠시 보는 건 몰라도 하루 종일 딱히 하는 거 없이 얼굴 뜯어 먹고 있어야 하는 명절이 부담인 건 마찬가지야. 정훈이 말대로 이번 설은 아버지하고, 정태도 없으니까 우리끼리는 편하게 하자. 그리고 우리 집은 최근 들어 신경을 썼지, 예전엔 딱히 명절이라고 가족들 다 같이 만나서 뭔가를 하는 집은 아니었어.”
여전히 눈치를 살피며 원수경이 내게 물었다.
“도련님은요?”
“나는 뭐… 있는 동안은 승준이랑 같이 놀다가, 형수님 가시고 나면 엄마랑 데이트나 잠깐 할까 싶어요.”
“데이트요?”
“데이트?”
데이트란 표현에 동시에 놀라는 장혜란과 원수경.
특히 난 장혜란을 향해 싱긋이 웃어 보이며, 왜 그렇게 놀라느냐고 물었다.
“왜요? 징그러워요?”
내가 너한테 물어볼 게 좀 있다, 며늘아.
원수경이 먼저 보내 놓고 나랑 이야기 좀 하자꾸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