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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꼭 지켜 주세요 (75/303)

약속 꼭 지켜 주세요

원수경이 승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그리고 난 장혜란과 2층 테라스에서 잠시 시간을 가졌다.

바깥바람이 차가워, 담요로 몸을 덮고 야외 전기난로를 켠 상태로 마주 앉아 잠시나마 살가운 아들이 되어 주었다.

무뚝뚝한 정태에 비해 장혜란이 유독 정훈이 놈을 가깝게 두고 챙겼다는 건, 그간의 카톡 대화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똑 부러지고 욕심이 많은 정태에 비해 서른 가까운 나이가 될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정훈이 놈이 항상 걱정이었겠지.

그리고 공교롭게도 장혜란을 홍준이의 짝으로 지어 준 건 바로 나였다.

똑똑하고 눈치가 있으며, 타고난 우아함에 욕심을 숨길 줄 아는 그 모습을 난 항상 좋게 보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 역시 장혜란과의 이런 자리가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현재의 재경 그룹 자식들이 고작 부경 따위에게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걸 난 참을 수도, 이해를 할 수도 없었다.

“엄마.”

장혜란은 뜨거운 자스민차가 담겨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손을 데우며 대답했다.

“응? 왜?”

“그날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있었던 일, 그 이야기 듣고 기분이 어땠어요?”

“좋을 수가 있겠니?”

“그런데 왜 외삼촌이 회장님께 불편한 내색을 해 가며 전화를 걸어서 따졌던 것처럼 엄마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만 있었어요?”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우리 재경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고 해도, 자식들이 다 컸다고 해도 그때 그 일은 장혜란이 참을 이유가 없는 내용 아닌가.

“엄마가 먼저 전화를 걸어서 따질 수도 있는 일 아니었어요?”

“너희가 애니? 그만한 일로 부모가 나서게.”

“그럼 우리가 애였을 때는요? 그땐 어땠는데요?”

“너는 그게 섭섭하니?”

“섭섭한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뭐가 궁금해?”

궁금한 거야 많지.

“큰외삼촌은 화학과 물산, 화재를 물려받았어요. 물산과 화재는 원래 우리 재경의 계열사였죠. 작은외삼촌은 통신과 건설을 물려받아요. 건설은 우리 계열사였고. 막내 외삼촌은 쇼핑과 택배를 물려받았는데 쇼핑은 우리 거였어요. 이모도 원래 우리 거였던 호텔을 물려받았어요. 그런데 엄마는요?”

말이 안 되지 않나.

장혜란은 똑똑한 사람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돈도 자식 중 장혜란을 가장 신임하고 있었단 걸 내가 모르지는 않고.

출가외인이라 알짜를 물려줄 수는 없었을지언정, 다른 딸에겐 호텔 사업을 물려줬는데 부경 그룹 쪽으로 재경의 여러 사업권이 돌아가게끔 중간 다리 역할을 했을 장혜란에겐 아무것도 떨어진 게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설혹 정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상속이 있었다고 하면, 장혜란은 그때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내가 장민수의 옷에 와인을 쏟았을 때 더 참을 이유가 없는 거지.

내가 그딴 부경가 상속 콩고물에 욕심이 나서 이 내용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틀림없이 장혜란이라면 최소 호텔 사업보다는 더 큰 걸 하나 정도는 받아 냈을 텐데, 겉으로 드러나는 게 없어서 원수경이를 친정으로 보내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던 거다.

나도 현재 우리 재경이 가진 패를 정확히 알아야 할 거 아닌가.

그래야 천천히, 야금야금 전진할지, 아니면 전력을 다해 돌진할지를 결정하지.

장혜란은 날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상관없다.

입을 열게 할 방법은 머리카락 수만큼 많으니까.

“이해가 안 돼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는 거예요.”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야? 다른 외삼촌들, 이모는 다 뭔가를 받았는데, 엄마만 네 외할아버지한테 아무것도 못 물려받은 게 못마땅해?”

“못마땅한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이건 못마땅한 거랑은 별개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왜 외가 쪽 사촌들이 나랑 정태 형한테 그러는지.”

“…….”

“엄마, 잘 생각해 봐요. 아니, 나나 정태 형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라고. 나랑 정태 형이 외가 쪽 사촌들한테 먼저 시비를 걸 이유가 있어요?”

장혜란은 그저 머그잔만 입술에 붙일 뿐 그 모습으로 자신의 반응을 숨겼다.

“이유도 없고, 우린 그런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날도 이야기 들어서 알겠지만, 그쪽에서 먼저 우리한테 시비를 걸어요. 원래라면 시비를 걸 이유가 없어야 하는 거잖아요. 자기들은 뭐라도 상속을 받았어. 반면에 우린 외할아버지한테 아무것도 받은 게 없어. 그렇다면 나나 정태 형도 자기들 기준에선 같은 사촌 형제인데 최소한 날은 안 세워야 맞는 거죠. 제 말이 틀려요?”

“…….”

“나 같으면 미안할 것도 같고. 그런데 안 그러잖아요. 오히려 날을 세우잖아. 왜 우리한테 날을 세우는 걸까를 생각해 보니까, 이건 미안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불편해서일 것 같은 거예요. 나나 정태 형이 불편하기 때문에 날을 세우는 걸 텐데, 그럼 도대체 서로 연관된 사업이 크게 없는 우리 재경가가 무엇으로 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걸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난 이유가 하나밖에 없을 거 같은 거예요.”

“무슨… 이유?”

“우리 재경에서 부경으로 넘어간 계열사들, 현재 그 계열사 쪽으로 지분 가지고 계시죠?”

“……!”

“엄마는 다른 외삼촌들, 이모하고 달리 재경에서 부경으로 넘어간 계열사들의 지분을 상속으로 받았죠? 그거 말곤 이유가 없어. 그 계열사들에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지분을 엄마가 들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람들이 우리 재경가를 불편해하는 거 아니에요?”

이 정도의 침묵이라면 긍정으로 이해해도 되는 거겠지.

“몇 퍼센트씩 받으셨어요? 틀림없이 회장님도 그 부분에 동의하면서 계열사들을 부경 쪽으로 매각하셨을 거고… 10퍼센트? 10퍼센트씩은 너무 적나? 그래도 명색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해 주고 받은 커미션 개념에 상속 개념도 포함이 되는 걸 텐데, 12퍼센트씩?”

“…….”

“나랑 약속 하나만 해요.”

“무슨… 약속?”

“우리 사이에 거리를 만들지 말자는 약속.”

“우리 사이에 무슨 거리가 있어?”

“없어야 정상인데, 난 지금 엄마한테서 거리가 느껴져요.”

이건 내가 장혜란을 상대로 질 수가 없는 게임이지.

부모가 무슨 수로 자식을 이기겠나.

미안한 말이지만, 혜란아.

나는 네가 가진 어미로서의 모정을 좀 이용해 먹어야겠구나.

“엄마는 우리 재경가 사람이에요, 아니면 여전히 부경가 사람이에요?”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에 있어?”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엄마가 지금 하게 만들잖아요.”

“…….”

“분명 우리 엄마고, 나랑 형은 재경가 자식들인데 왜 이상하게 엄마는 외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신 마당에 여전히 재경가와 부경가에 끼어 있는 사람 같은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끼어 있는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그 사람들이 우릴 겉으론 가족인 것처럼 대하지만 속으론 불편해하고,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공개적인 망신을 주겠다고 그 시답잖은 짓을 했다는 걸 다 알면서도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게 당연한 거라고?”

가볍게 비웃으며 장혜란에게 물었다.

“그럼 나도 그냥 앞으로 엄마처럼 중간에 끼어 버릴까? 어차피 재경은 형한테 갈 거 아니에요?”

“아버지 아직 젊다. 쌩쌩하셔. 네가 벌써 그런 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

“아니지. 형한테 다 가야지. 나눠 준다고 해도 내가 거절을 해야지. 우리가 뭐 나눠 먹을 게 많은 것도 아니고, 계열사 몇 개 가지고 나랑 형이 지지고 볶으며 회장님 눈에 들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거. 엄마 그런 거 원해요?”

“…….”

“난 안 그러고 싶어요. 안 그럴 거예요. 왜 그래요? 밖엔 먹을 게 훨씬 더 많은데, 내가 왜 형이랑 감정 상하게 그런 거로 경쟁을 해요.”

“진심이니?”

“나는 아까부터 쭉 진심이었는데, 엄마가 계속 우리 사이에 거리를 만드네. 이러니 내가 약속을 해 달라는 거예요. 거리 만들지 말자는 약속.”

결국, 장혜란은 담요를 목까지 올려 덮어 놓고 머그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약속해. 엄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훈이 너한테 거리를 둔 적이 없어.”

“부경에 넘어가 있는 원래 우리 재경의 계열사들 지분… 몇 퍼센트씩 가지고 있어요?”

“조금씩 다 달라.”

“최소 12퍼센트씩은 들고 있죠?”

“떨어진 곳도 있고, 더 오른 곳도 있지.”

역시.

웃음이 나왔다.

“그거 내가 달라고 하면 나한테 줄 수 있어요?”

“…….”

“나는 형이랑 항공, 식품, 모직, 스너프… 이걸로 경쟁 같은 거 하고 싶지가 않거든요. 그냥 형 다 가져가라고 하고, 부경 쪽 지분, 그거 나 주면 안 돼요? 지금 당장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달라고 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못 줄 게 뭐가 있을까. 근데 그 지분은 예민한 지분이야.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다고 해도 해선 안 되는 지분.”

“회장님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될까요?”

“그렇지. 엄마도 당연히 재경 사람이니까.”

“회장님은 지금까지 그 지분을 왜 안 던지고 계속 들고 있었던 거예요?”

“왜 던지니? 들고만 있으면 네 외삼촌들, 이모가 알아서 키워 줄 텐데.”

바로 그때 남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한 뒤 장혜란의 표정을 잠시 살펴 놓고 벨 소리를 꺼 버렸다.

“안 받아도 되는 전화야?”

“나중에요. 내가 전화 걸면 돼요. 엄마.”

“…왜?”

“회장님한테도 일전에 한번 말했어요. 그걸 엄마한테 회장님이 말을 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

“나는 부경 쪽으로 넘어간 우리 재경 계열사들을 다시 좀 가져와야겠어요.”

“…….”

“넘긴 모양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겠죠. 그간 흐른 세월이 있는데. 그 세월만큼의 이자는 얹어서 받아 와야 하지 않겠어요?”

“그 욕심 그동안 어떻게 숨기며 살았니?”

“숨기며 산 게 아니라 이제야 엄마 앞에서 솔직해지는 거죠.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다들 그 욕심 앞에 솔직해질 자신이 부족한 거뿐이지.”

“정말 요즘 너 낯설다. 좋아. 엄마도 우리 사이에 거리를 만들지 말자는 네 약속을 같이했으니까, 너도 약속 하나 해라.”

“뭐든지요.”

장혜란이를 홍준이의 짝으로 맺어 준 나의 안목이 스스로 만족스러워지고 있었다.

“그 지분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네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다. 엄마는 그저 교통정리 정도만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최소한 그 지분에 대해서만큼은 장혜란이가 뒤에서 홍준이를 움직일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지?

“너희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엄마가 그 부분에 대한 교통정리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야.”

“…그래요?”

“그런데 엄마가 잠시 맡고 있는 부경 쪽 지분이 네가 달라고 한다고 생각 없이 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수준이 아니야.”

그렇겠지.

“엄마한테 보여 줘.”

“뭘 보여 주면 될까요?”

“엄마가 그 지분이 너한테 갈 수 있도록 네 아버지를 설득할 명분. 엄마한테도 그런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

“어떻게 보여 드릴까요?”

“요즘 모직에서 고모부 도와 열심히 하고 있다고 들었어. 당장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모직을 업계 1위로 한번 만들어 봐.”

이미 그러고 있는 중인데?

“왜? 자신 없어?”

“…….”

“너 이제 서른이야. 급할 게 뭐가 있어? 아버지도 아직 정정하시고, 형도 옆에 있는데. 아버지는 그 지분들을 내게 맡겨 두고 20년 넘게 참고 계신다. 아버지도 그러고 계시는데 네가 뭐가 급해?”

“…….”

“네 아버지 생각이시지만, 엄마 생각도 그래. 우선은 현재 재경이 가지고 있는 것들부터 너랑 정태가 차근차근 단단하게 다져 놓으면 지금 엄마가 들고 있는 지분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앞으로 무궁무진해질 거야. 네가 정말 재경에 아무런 욕심이 없다면 그때 가서 재경은 네 형이, 엄마가 가진 부경의 지분은 네가 사이좋게 나눠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교통정리를 엄마가 해 줄게.”

“…….”

“왜 말이 없어? 설마 그 정도 자신도 없으면서 엄마한테 그 지분을 달라고 한 거야?”

“진짜 그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뭐?”

“어쨌거나 외할아버지한테 받은 상속이고, 또 그 계열사들을 부경이 가져갈 수 있게 다리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그간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많은 오해를 샀을 텐데, 정말 그 정도만 제가 해내면 그 지분 저한테 주실 수 있어요?”

“그, 그 정도만이라니?”

잠시 당황을 하다 이내 피식하고 웃으며 장혜란이 말했다.

“얘야, 정훈아. 너는 사업이 쉬운 거 같아?”

얘야, 혜란아.

나에게 사업은 쉽고, 어렵고의 개념이 아니란다.

내게 사업은 지난 인생,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고, 목적이었으며, 나의 삶 자체였단다.

그런 내게 사업의 쉽고, 어려움이 어디에 있겠느냐.

쉽다고 설렁설렁할 것 같으냐, 어렵다고 포기를 할 것 같으냐.

그냥 살아 있으니까, 내가 가장 자신이 있고, 날 설레게 하는 게 사업이니 지금도 네 아들 몸으로 계속 하고 있는 것이지.

다시 한번 남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약속 꼭 지켜 주세요.”

장혜란을 향해 싱긋이 미소를 지어 준 뒤, 남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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