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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전속결 (76/303)

속전속결

“네?”

전화로 남 사장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자기와 함께 오후에 장태산이의 집에 가서 명절 인사를 드리고 저녁을 먹고 오자는 거다.

여정이도 함께 간다고 하면서.

내심 반가운 소리이긴 했는데, 재경가 사람인 남 사장이 그런 소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내게 한다는 게 쉬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내용을 가지고 장혜란이 앞에서 계속 통화를 해도 될까 싶어 잠시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장 회장님 댁이요?”

―금방 통화를 했는데, 너도 시간 괜찮을 거 같음 같이 오라고 하시네.

“근데 사장님이 장 회장님 댁엔 왜… 가시는 건데요?”

―매년 명절마다 네 고모하고 항상 인사를 가는 걸 이제 와 왜 가느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해야 돼?

매년 명절 때마다 태산이에게 인사를 드리러 직접 갔다?

그것도 여정이와 함께?

그리고 그걸 정훈이도 다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 말인즉 홍준이도 해당 내용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다는 게 되는 거 아닌가….

이걸 내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걸까?

―이번엔 회장님이 손 사장 데리고 해외 지사 순방을 나가 계시고, 또 처수님이 따로 인사를 올 필요가 없다고 하셔서 바로 장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야.

장혜란이도 알고 있다고?

“아… 네, 그렇군요.”

이 집안에서 장태산이의 존재는 어쩌면 금기어가 아닐까란 나만의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양쪽 회장님끼리의 관계가 어색해서 그렇지, 나한테는 장인어른과 같은 존재야.

네 장인이 바로 나다, 이놈아!

―나하고 네 고모 결혼식 날도, 집안에 직계 큰 어른이 없어 네 고모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주신 분이 장 회장님이기도 하고.

아….

―어른들 일이야. 네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야, 이 부분은. 그리고 회장님께서 이미 해외 순방 나가시기 전에 장 회장님을 직접 만나셨다.

“회장님이요?”

―그래. 아마 회장님께서 불편해하실 자리는 아닐 거다. 오히려 장 회장님 말씀만 들어 봐선 회장님께서 장 회장님께 널 따로 한번 만나 봐 주시길 부탁드린 것 같은 느낌도 살짝 들고.

“……?”

―양쪽 회장님들께서 만나 이야기 나누신 끝에, 장 회장님이 너한테 따로 궁금한 내용이 있으신 거 같으니까, 별 약속 없으면 같이 가지.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하실 건데요?”

―그 집도 차례 지내고 가족들끼리 조금 쉬어야 하지 않겠어? 3시나 4시 사이에 가서 이야기 좀 나누다 저녁 얻어먹고 그렇게 나오면 될 거 같은데?

“그럼 출발하실 때 전화 주세요. 맞춰서 도착할 수 있도록 할게요.”

―그래, 알았다. 조금 이따 다시 연락하자.

“네, 알겠습니다.”

장혜란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갈 때 가져가라며 선물을 직접 챙겼다.

명절이라고 본가로 들어온 선물 중 고급 양주 두 병과 와인 한 박스, 그리고 실한 놈들로만 골라져 있는 동충하초 한 통을 상품 유과 박스 위로 올려 고급 보자기에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기사에게 전달해서 내 차에 싣게 만들었다.

“가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지루한 티 내지 말고. 엄마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엄마 대신 안부 인사 잘 전하고.”

이럴 땐 또 영락없는 엄마네.

* * *

본가를 나섰다.

차창을 살짝 열어 놓고 운전을 했다.

제법 차가운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지고 있었다.

홍준이가 태산이를 벌써 만났다?

틀림없이 스너프의 뱅크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겠지.

해외 지사 순방을 다녀와서 만날 줄 알았더니, 제법 마음이 급해졌나 보네.

그래, 방법을 모를 때야 어쩔 수 없었겠지만 내가 직접 방법을 다 알려 줬는데 미룰 이유는 없었겠지.

이 상황에서 태산이가 날 찾는다는 건… 스너프 인수 건이 내 기획이었다는 걸 홍준이가 말을 했다는 게 되는 건가?

홍준이 놈….

스너프 인수 건을 정태에게 맡겨 놓고 실력을 테스트하더니, 이젠 날 상대로까지 테스트를 하려 드네.

의심이 많은 건 여전하구나.

그래, 의심이 많아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더딜지언정, 큰 실수는 만들지 않았던 게 바로 홍준이지.

태산이를 상대로 스너프의 뱅크 시스템 구축에 대한 미끼질만 해 놓고, 마무리는 내게 직접 지어내도록 만들겠다 이 말이지?

그런 걸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해 줘야지.

그래도 어쨌거나 지금은 홍준이 놈이 우리 재경가의 주인인데.

중간에 남 사장, 여정이와 먼저 만나 장태산이의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오빠가 여긴 어쩐 일이야?”

집 안으로 들어선 날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하늘이는, 어느샌가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회장님께서 보자고 하셨다는데?”

“오빠를?”

“왜?”

“왜는 내가 물어야 되는 거고. 할아버지가 오빠는 왜?”

들고 온 선물 가방을 하늘이에게 건네 놓고 말했다.

“검사야?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봐?”

“낯설어서 그렇지. 지난 추석 때도 연휴 끝나고 왔었잖아.”

“앞으로도 계속 올 거니까 낯선 건 딱 오늘까지만 하자.”

“앞으로도 계속 온다고? 왜? 오빠가 왜?”

나 언제까지 애를 상대해 줘야 되는 거지?

사람들 소리에 장태산이가 방에서 나온 뒤에야 하늘이는 내가 건넨 선물 가방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나를 대할 때의 모습과 여정이, 남 사장 내외를 대하는 모습에서 그 온도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홍준이와는 담을 쌓고 있었지만, 고맙게도 눈을 감기 전 내가 부탁한 대로 여정이에겐 친부모처럼 살갑게 대해 주고 있는 태산이었다.

“왔으면 다들 앉지.”

“그전에 세배 받으셔야죠. 앉으세요, 회장님.”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남 사장이 태산이를 소파 정가운데 자리에 앉히고 자리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태산이는 그런 남 사장을 잠시 말리며 세배는 조금만 이따가 받자고 했다.

“자네들한테야 매년 주는 세뱃돈, 주던 대로 챙겨 놨네만 정훈이 이놈한테는 세배를 받아야 되는 건지, 받으면 얼마를 챙겨 줘야 되는 건지 감이 안 서네."

그러면서 마치 장난을 걸듯 내게 물었다.

“자네도 나한테 세배를 할 텐가?”

우하하하하… 미치겠네.

재밌다.

세배?

암, 해야지.

당연히 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친구 태산이한테 하는 건데 못 할 게 뭐가 있을까.

다만 아쉬울 뿐이다.

이렇게 정훈이의 모습이 아닌 내 원래 모습으로 해 줘야 진짜 재미가 있는 건데, 말이지….

“당연히 해야지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회장님.”

“아니, 그 전에 내가 세뱃돈으로 얼마를 챙겨 줘야 할지 확인부터 좀 해 봐야겠어. 세배는 그거 확인부터 하고 받는 걸로 하지. 남 사장하고 여정이도 조금만 기다려.”

“네.”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바둑은 좀 두나?”

“두는 법은 알지만, 이기는 경우가 적어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실력이 없으면 꾸준히 연습을 해서 이길 수 있게 실력을 쌓아야지.”

“세상에 바둑 말고도 재미있는 놀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놀이라는 건 즐겁자고 하는 거잖아요. 저는 그게 비록 놀이일지라도 해서 제가 이길 수 있는 놀이를 좋아합니다.”

“그럼 내가 자네한테 세뱃돈으로 얼마를 챙겨 줘야 할지 감을 잡기가 참 어려워지는데?”

웃음을 참으며 태산이에게 말했다.

“제 할아버지와 장기를 자주 두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본가에서 찾았다는 회장님 일기장에 그런 내용도 적혀 있던가?”

“네. 바둑으로는 아무리 해도 회장님을 이길 수가 없어, 장기만 죽어라 연습을 하셨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셨지. 그런 분이셨지. 안 되는 건 깔끔하게 포기를 하실 줄도 아셨고, 상대가 누구든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어 결국엔 이기고야 마는 분이셨지.”

태산이의 말에 남 사장과 여정이는 전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난 그런 모습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나중에 가서 장기는 내가 자네 할아버지한테 안 됐어.”

“저도 어디 가서 지는 장기를 두는 편은 아닙니다. 바둑은 자신이 없고, 장기도 괜찮으실 거 같으면 마주 앉아 보고 싶습니다.”

“하늘이 애비야.”

“네, 아버지.”

“내 방에 가서 장기판 좀 가지고 와 봐. 아니다.”

“……?”

“그냥 내 방에 들어가서 두지. 다들 밖에서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있어. 나는 정훈이 이놈이랑 내 방에 같이 가서 장기 한판 두고 나올 테니까.”

태산이의 방에서 바둑판 위에 접이식 장기판을 올려놓고 나는 초나라 말을 태산이는 한나라 말을 나눠 가져 마주 보고 앉았다.

“두지.”

“네, 그럼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차가 뛰어다닐 수 있는 문을 열어 주기 위해 가장 오른쪽 졸을 왼쪽으로 한 칸 당기려고 할 때였다.

“스너프 뱅크 시스템을 우리 미래금융을 통해 접목을 시켜 보자고 손 회장에게 제안을 했다지?”

“네.”

“나쁘지 않은 제안 같더군.”

“사업보다는 두 분의 관계 개선에 초점을 맞춘 제안이었습니다.”

“그런 기특함도 엿보였고.”

“혹시 이 장기에 걸려 있는 내기 같은 게 있는 겁니까?”

“나는 걸 게 있겠지만, 자네는 져도 딱히 내게 줄 수 있는 게 없지 않은가.”

“그 말씀은 스너프 프로젝트에 함께하실 결정을 내리신 거라고 제가 이해를 해도 되겠습니까?”

“정태가 총괄을 하고는 있지만, 결국은 자네 기획이고, 또 우리 미래금융까지 끌어들인 게 자네이다 보니 바둑을 뒀음 좋았겠지만, 장기로라도 자네가 어떤 수를 즐기는지 확인을 해 보고 싶었네.”

“그럼 무조건 이기는 장기가 아닌 제 수를 보여 드리는 장기를 둬야겠습니다.”

“뭐든 보여 줘 봐.”

차가 뛰어다닐 수 있는 문은 나중에 열어야겠다.

들었던 졸을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 장군을 지키고 있는 사졸을 위로 한 칸 올렸다.

“수성?”

“장군집이 든든하면 무리한 공격을 할 이유도 없고, 그만큼의 무리수는 피할 수 있게 되는 법이지요.”

태산이는 마를 움직였고, 나는 이번엔 장군을 밑으로 내렸다.

“올해 서른이지?”

“네.”

마를 건너 포를 장군 앞으로 세워 두며 태산이가 물었다.

“만나고 있는 여자는 있고?”

나도 마를 움직여 포의 길을 만들었다.

“아뇨, 없습니다.”

이번엔 태산이가 먼저 차의 길을 열어 주겠다고 졸을 옆으로 붙였다.

“앞으로 큰 사업 할 사람이, 장기판 장군집은 든든하게 만들 줄 알면서 정작 자기 울타리 만드는 걸 소홀하면 어떻게 하나?”

난 곧바로 포를 상대 쪽 차를 겨냥해 옮겨 놓고 허를 찔렀다.

“어허이. 자네 장기 둘 줄 아는 거 맞아? 무슨 장기가 이렇게 근본이 없어?”

얼른 졸을 움직여 포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 내며, 왜 쓸데없는 공격으로 장기 판수를 늘이냐는 식으로 태산이가 물었다.

하지만 난 마를 옆으로 돌려 상대편 차가 나의 포를 먹지 못하게끔 장치를 해 놓고 말했다.

“아무 나뭇가지로 울타리를 만들 순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한 번 만들 때 튼튼한 나뭇가지로 만들어 놔야, 두 번, 세 번 울타리를 다시 고치는 일이 없을 거 같아 신중하게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자네, 이거 장기 두는 거 누구한테 배웠나?”

누구한테 배우긴, 자네한테 배웠지.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장기라는 게 가는 길만 대충 알면 그다음부터는 깨지면서 배우는 거 아니겠습니까? 장입니다, 회장님.”

“잠깐만, 잠깐만… 이게 왜… 이게 왜 지금 여기에 있어? 이거 언제 이리로 왔어?”

“회장님 차 빼실 때 포로 막아 놓고 옮긴 겁니다.”

“잠깐… 이건 한 수 물러야겠네. 이건 아냐, 이건 아냐. 내가 질문하는 데 신경 쓰느라 장기판을 제대로 못 봤네. 이건 이렇게 한 수 무르는 걸로 하지.”

제멋대로 장기짝을 원래 자리대로 옮기려고 하는 태산이의 손을 막아 세우며 내가 말했다.

“그런 게 어디에 있습니까, 회장님.”

“한 수만 물러.”

“안 됩니다.”

“내가 아직 제대로 못 봤다고, 자네 수를!”

“속전속결. 눈 뜨고 코 베이게 만드는 게 제 수인데, 당하셔 놓고 못 봤다고 하시면 안 되죠. 다 보여 드렸는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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