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는 마땅히 없네 (77/303)

너 말고는 마땅히 없네

“물러. 한 수만 물러.”

“안 됩니다.”

“그럼 다시 둬. 한 판만 다시 둬.”

방을 나서는 나와 태산이의 모습을 거실에 모인 모든 사람이 의아해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끝나셨어요?”

“들어가신 지 10분 정도밖에 안 된 거 같은데?”

수가 뻔한 태산이를 데리고 장기 한판 두는 데 10분이면 충분하지.

“이놈이 장기를 어디서 이상하게 배워 와서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잖아.”

내가?

어이가 없네.

이 친구가 나이 먹고 억지가 늘었나, 아님 회장님 소리 몇 년 들었다고 사람이 바뀌었나?

내가 아는 태산이하고는 다르게 생떼를 부리네?

“원래 전술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누가 상대한테 나 이런 식으로 공격한다? 하고 다 말해 주면서 수를 짭니까?”

“그러니까 한판 다시 둬 보자고. 내가 실수를 한 건지, 아님 자네 실력이 날 눈뜬장님으로 만들 정도로 뛰어난 건지 제대로 확인을 해 보자고.”

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남 사장이 기분 좋게 웃으며 어르신이 저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는데, 한 판만 다시 둬 드리라고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판이 문제겠습니까? 그만두자 하실 때까지 계속 상대해 드릴 수는 있는데, 그럼 다음이 없잖아요.”

장태산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뜯어보기 시작했다.

“다음?”

“자주 뵙고 싶습니다.”

“…….”

“자주 불러 주십시오. 다음에 올 땐 제가 근사한 장기판 새로 하나 맞춰서 오겠습니다. 바둑은 자신이 없지만, 장기가 물리신다 하시면 그땐 바둑돌도 들어 보겠습니다.”

“자주 보고 싶다?”

“네.”

“뒷방 늙은이 자주 만나 뭐 얻을 게 있다고?”

“그러는 회장님은 저 같은 애송이한테 뭐 얻을 게 있다고 오라고 하셨습니까?”

“뭐?”

“얻을 게 없어도 나눌 수 있는 건 많을 겁니다.”

내가 싱긋이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태산이도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한마디를 안 지네, 한마디를 안 져.”

“저랑 같이 있음 심심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대신 혈압이 오르겠네.”

영석이가 자리를 만들었다.

“보니까 정훈이가 일부러 장기를 빨리 끝을 낸 거 같네요. 얼른 세배 받으시라고.”

“일부러? 하!”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태산이.

나와 남 사장, 그리고 여정이는 그런 태산이가 소파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나란히 서서 절을 올렸다.

세배를 하는 것도 재미가 있었고, 태산이에게 세뱃돈을 받는 것도 이상하게 재미가 있었다.

결국 이런 소소한 재미를 마음 편하게 누리는 게 우리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일 것이고 가치일 것인데, 어째서 난 그런 걸 이미 다 알면서 여전히 눈을 감기 전과 전혀 달라진 것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다른 삶을 살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아니, 이미 그런 기회는 나의 선택일 뿐,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난 싸우고, 쟁취하고, 그래서 내 울타리를 더 크게 확장을 시켜서 그 안에 더 많은 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걸 지켜보는 거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일 뿐.

난 나를 변화시키고 싶지가 않을 뿐이다.

한 번뿐인 인생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원 없이 나의 영역을 확장시켜 보고 싶었다.

거기엔 돈이라는 물질적 가치는 크게 작용을 하지 못했던 거 같다.

물론 기업을 처음 일으킬 때 가장 큰 가치는 돈이었지.

하지만 그 돈도 기업이 그룹으로 성장을 하고, 더 많은 재경맨들이 나의 울타리 안으로 모여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 순간 더 이상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돈보다 내 울타리 안에 모여든 사람들이 더 발전을 할 수 있게끔 내가 먼저 나의 한계를 깨부숴 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걸 삶의 가치로 삼아야 했다.

그랬기에 어쩌면 실패가 두렵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마치 내가 요즘 가끔씩 하고 있는 모바일 게임처럼, 죽으면 언제든 새로 시작하면 되는 게 내게는 사업이라는 것이고, 도전이라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시시한 상대보다는 조금이라도 날 긴장하게 만드는 상대와 상황이 반가웠던 것이고, 그런 상대와 상황을 내 편에 서게 만들 때 얻게 되는 성취감과 희열은 종이에 적힌 숫자에 불과한 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였던 것이다.

그런 걸 자식 놈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너무 이른 나이에 눈을 감았다.

어쩌면 그게 다시 얻은 삶의 기회 앞에서 여전히 눈을 감기 전 나와 똑같이 살고 있는 이유일 것이고.

나는 그냥 타고나길 이렇게 사는 게 재미가 있는 사람일 뿐, 앞으로도 나의 인생관을 바꿀 마음도, 변화를 줘 볼 생각도 전혀 없다.

“거기서 혼자 뭐 해?”

잠시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외투를 여미며 하늘이가 다가왔다.

“식사 준비 거의 다 끝났으니까, 들어와서 밥 먹어.”

“하늘아.”

“뭐?”

근데 이 녀석 이건 일부러 이러는 건가?

정훈이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사과까지 했는데 너무 안 풀리네.

“잠시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이야기?”

“뭐 좀 물어볼 게 있어.”

“물어봐.”

“그러지 말고 이리로 좀 와 봐. 같이 좀 걷자.”

“걷긴 뭘 걸어?”

“그럼 여기 좀 와서 앉든가.”

“뭐? 무슨 이야기?”

여민 외투 위로, 춥다는 걸 표현하기 위함인지 팔짱을 끼며 하늘이가 철제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함께 마주 보고 앉으며 심술이 가득한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렇게 웃지 말지?”

내게 심술을 부리건 말건, 태산이 놈 손녀딸인데 내 눈에 안 예뻐 보일 수가 있으랴.

“깡패야? 왜 남 웃는 거까지 못 하게 해?”

“그럼 앉으란 말을 하지를 말든가. 앞에 앉혀 놓고 그렇게 세상만사 다 통달한 사람처럼 영감 미소 짓고 있는데, 보기 좋을 리가 있어?”

“야, 그래도 오늘은 내가 명색이 회장님 손님으로 왔는데, 너무 툴툴거리는 거 아니냐? 그때 그 일은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

”손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리고 요란다 그 일은 나도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거든?”

“근데 왜 자꾸 그래?”

“뭐가?”

“에휴… 그래, 다 내 업보다.”

“어후, 말하는 거 완전 재수 없어. 그렇게 말하면 쿨해 보이는 줄 알아? 추워. 할 말 없음 그냥 들어가.”

무슨 사탕을 줘야 이놈이 그만 칭얼댈까?

“하늘아, 내가 너한테 부탁할 게 좀 있는데, 부탁해도 안 들어줄 거지?”

“어.”

뭐야?

뭔데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막 나와?

“보통 이렇게 말을 꺼내면 무슨 부탁인지 정도는 물어봐 줘야 정상 아냐?”

“정상이 아닌가 보지.”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 사이에 무슨 부탁을 하고 들어줘?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자. 진짜 춥다.”

“너 정엽이 형 연락처 알고 있지?”

“…뭐?”

“정엽이 형 연락처.”

“여기에서 정엽이 오빠 이야기가 왜 나와? 그건 지난 추석 연휴 때 할아버지랑 이야기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아니? 회장님이 말씀을 안 해 주신 거뿐이지, 난 포기 안 했는데?”

“솔직히 나도 좀 궁금했어.”

자세를 바로잡고 앉으며 하늘이가 물었다.

“오빠가 정엽이 오빠 소식은 왜 궁금해해?”

“사촌이 사촌 소식을 궁금해하는 게 비정상이라는 뜻이야, 아님 내가 정엽이 형 소식을 궁금해하는 게 비정상이라는 뜻이야?”

“당연히 후자지. 오빠 그런 사람 아니잖아. 내가 오빠를 몰라? 아마 오늘 이 집에 모인 사람들 중 손정훈이라는 사람에 대해선 내가 제일 잘 알걸?”

“진짜?”

“뭘 또 그렇게 물어? 당연한 거 아냐? 대학에서만 2년을 같이 지냈어. 여기에 나만큼 오빠의 진짜 모습을 여과 없이 다 본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고.”

“그건 또 그렇네.”

“그러니까 내 앞에서까지 변한 척 연기하지 마. 오빠가 오로지 사촌이라서 정엽이 오빠의 소식을 궁금해한다는 건 분명 코미디가 맞는데, 정말 재미없고, 질 낮은 코미디야.”

“지금 한국에 없지?”

“뭘 알면서 물어?”

“파리에 있는 거야?”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그럴 거라는 건 대충 알고 있어. 거기 집이 있다면서?”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눈을 가늘게 뜨며 날 쳐다보는 게 영판 태산이 표정 그대로다.

“그래도 한 번씩 한국에는 들어오지? 큰아버지 산소를 가 봤는데, 관리가 잘되어 있더라. 꽂혀 있는 조화도 그리 오래 지난 거 같지는 않고.”

“거길 오빠가 왜 갔어?”

“큰아버지 산소니까.”

“……?”

“큰아버지 기일 땐 들어오나? 들어오면 회장님께 인사는 드리고? 드리겠지. 그러니까 내가 정엽이 형 소식을 궁금해하는 걸 네가 불편해하는 거 아니겠냐고. 그래도 참 다행이긴 하다. 감사하고.”

“뭐가 다행이고, 또 감사하다는 거야?”

“오늘 보니까 확실히 알겠네. 우리 아버지한테만 담을 쌓고 계시지, 회장님이 고모나 정엽이 형 쪽으로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써 주시고 있는 거 같아서.”

“진짜 그날 결혼식장에서도 그러더니, 계속 사람 적응 안 되게 만드네….”

“다음에 정엽이 형 한국 들어올 때, 혹시라도 언제쯤 들어오는지 알게 되면 네가 나한테 좀 알려 줄 수 있겠어?”

“만나서 뭐 하려고? 왜 아무것도 아닌 걸로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지? 난 내가 오빠라는 사람한테 궁금한 게 생길 수 있다는 거 자체가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아.”

“보고 싶어.”

하늘이 앞에서 이 이상의 진심을 만들어 보이기가 힘들었다.

“같이 밥도 먹어 보고 싶고, 술을 한다면 술도 한잔 같이 마셔 보고 싶고… 그냥 그래. 그거 다야.”

“그게 다야?”

“어, 그게 다야.”

“진짜 그게 다야?”

“다른 게 뭐가 더 있어야 돼?”

“…….”

“물론 마음먹고 사람들 써서 찾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순 있겠지. 그런데 네가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그걸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만나 본들, 네 말대로 그렇게 만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네. 애는 쓰겠지만, 좀… 가족이니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어. 우리 아버지랑 회장님이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신 것처럼.”

“…….”

“이게 중간에서 누가 도움을 안 주면, 사실 억지로 하는 게 아닌 이상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걸 네가 좀… 도와주면 고맙겠어. 고모도 그냥 지금처럼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지내는 게 맞겠다고 하고, 회장님도 그러시고….”

“…….”

“내가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해 볼 만한 사람이… 주위에 이젠 너 말고는 마땅히 없네.”

* * *

오죽하면 그럴까.

혹시 정말 진심인 건 아닐까….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후 방 안으로 들어간 하늘이는 계속해서 정훈이의 마지막 말이 떠올라 짜증스러웠다.

하늘이는 씻지도 않고 하루 종일 입었던 옷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그리고 정훈이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머릿속에서 씻어 내고자 딴생각을 억지로 해 봤지만, 이내 다시금 정훈이에 대한 생각이 스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진짜 개짜증 나네!”

벌떡 몸을 일으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는 애꿎은 베개를 발로 걷어차며 심술을 부렸다.

“우리가 뭐 평생 자기 집안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며 뒷바라지를 해 줘야 하는 사람들이야 뭐야?”

그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드는 자신이 더 짜증스러웠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는 하루 종일 할아버지 앞에서 실실거리며 철 다 든 척. 개재수 없어.”

어느새 하늘이의 폰은 정엽이의 프랑스 번호를 찾아 놓고 있었다.

“더는 귀찮게 엮이기 싫어서 한 번은 도와준다, 내가. 안 도와주면 또 옛날 버릇 나와서 해 줄 때까지 귀찮게 굴 거 아냐. 정말 싫다, 정말 싫어.”

결국 하늘이는 입맛을 다신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두 번의 신호음 끝에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 조금은 기분이 풀리는 기분이다.

―하늘! 어쩐 일이야?

하늘이에게 정엽이 오빠라는 존재는 언제나 기분 좋은 에너지가 넘쳐 나는 사람이다.

“오늘 한국 설날인 건 알아?”

―거짓말.

“뭐래, 또? 또 깜빡했지? 그럴 거 같더라.”

―진짜야? 왜?

“내가 이런 질문 받는 게 싫어서 저번 추석 때 먼저 전화 안 했던 거였어.”

―오우, 쉣! 그럼 전화 끊어. 나 지금 할아버지한테 전화부터 드리고 다시 전화 걸게.

“할아버지 오늘 많이 취하셨어.”

―또 고모부가 계속 따라 줬구나?

“항상 그렇지 뭐.”

―지난주까지 분명 오늘이 한국 설날인 거 알고 있었는데, 그걸 그새 또 까먹었네. 할아버지한테는 그럼 아침에 전화드려야겠다.

“괜히 전화 시간 맞춘다고 잠 못 자고 기다리지 말고. 그냥 내일 편할 때 전화 한 통 드려.”

―그래, 아저씨, 아주머니는 잘 지내시지? 태양이는? 전역할 때 거의 다 되지 않았나? 아 참,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너 남자 친구 만들었어? 내가 저번에 통화할 때 무조건 만들어서 다음에 나 한국 들어갈 때 데리고 오라고 말한 거 기억하지?

“하나씩 물어, 하나씩. 그렇게 궁금한 거 많은 사람이 어째서 내가 먼저 연락 안 하면 절대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을까?”

―너야 인스타로 잘 지내고 있는 거 다 잘 보고 있는데, 뭘 또 전화까지 해?

“퍽이나.”

―새해 복 많이 받아, 우리 하늘이.

“오빠도. 언니랑 데이빗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다음에 한국 들어올 땐 데이빗도 데리고 들어올 거지?”

―상황 봐서. 안나가 시간 뺄 수 있다면 데이빗도 데리고 갈 건데, 힘들다고 하면 나 혼자선 못 데리고 가지. 아빠랑 노는 건 좋아해도 아직 씻고 재우는 건 엄마 손을 타.

“우리 데이빗 못 본 지 벌써 1년이 넘었네.”

―그렇게 보고 싶음 와서 봐. 넌 혼자잖아. 아무래도 셋이 함께 움직이는 거보단 너 하나 움직이는 게 더 수월하지 않겠어?

“알겠어. 계획 한번 세워 보자.”

―굿, 굿!

“아 참, 근데 오빠.”

―응.

하늘이는 망설였다.

지금까지 정엽이에게 정훈이란 존재를 먼저 꺼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하늘이었다.

항상 밝은 에너지를 전달해 주는 정엽이지만, 정훈이라는 존재 앞에서까지 그 에너지를 유지해 줄 수 있을지, 하늘이는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 저기….”

―뭐야? 왜 너답지 않게 뜸을 들여? 무슨 일인데?

“오늘 우리 집에 정훈이 오빠가 왔어.”

―…정훈이?

“어.”

하지만 하늘이의 걱정과는 반대로 정엽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쾌하기만 했다.

―이야, 진짜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다. 정태는? 정태는 같이 안 왔어?

“정훈이 오빠 혼자 왔어.”

―그래? 어디 보자… 정훈이도 이제 나이가 제법 되지 않나? 너랑 한 살 차이야, 두 살 차이야?

“두 살. 올해 서른이야.”

―크흐… 그 찡찡이가 벌써 서른이야? 어휴, 이젠 봐도 어른들 빼놓고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그럼 정태가 올해 서른넷이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빠 나이 백 살인 줄 알겠어. 그 집 오빠들이랑 나이 차이도 몇 살 안 나는 사람이 뭘 그렇게 신기해하면서 말을 해?”

―야, 인마. 너도 외국 생활 나만큼 오래 하면서 잊고 지냈던 사람들 소식 갑자기 들어 봐라. 신기할 수밖에.

결국 하늘이는 용기를 냈다.

용기를 내면서도 자기가 왜 정훈이의 부탁으로 이런 용기를 만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정훈이 오빠가 오빠 안부를 물어.”

―잘 지낸다고 해 주지.

“그런 말도 조심스럽지, 내 입장에선.”

―조심스러울 게 뭐 있어? 그러지 마.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그냥 모든 게 다 행복하기만 해. 정훈이는 어때? 잘 지내고 있대?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고, 오빠를 만나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아.”

―날? 날 왜?

“나도 그걸 모르겠어. 실은 지난 추석 연휴 끝나고도 우리 집에 한 번 찾아왔었거든.”

―정훈이가?

“응. 그때도 할아버지한테 오빠를 만나게 해 줄 수 없겠냐고 부탁을 했었어.”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할아버지가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쓸데없는 짓 할 생각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거든.”

―에이, 왜 그러셨대?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작은집 사람들 피할 이유도 없는데 왜 그렇게 날 약자처럼 감싸시는 거야? 그러지 마시라고 네가 말 좀 전해 드려.

“그럴게.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오빠한테 전해 주는 거야. 나한테 오빠 다음에 한국 들어올 일 있음, 자기한테 미리 말 좀 해 줄 수 없겠냐고 물어보잖아.”

―나도 궁금하네. 그 찡찡이 녀석이 벌써 서른이라고 하니까, 어떻게 컸는지도 보고 싶고.

“진심이야?”

―그럼 진심이지.

“그럼 다음에 오빠 한국 들어올 때 정훈이 오빠한테도 이야기 해 줘도 돼?”

―안 될 게 뭐가 있어? 피할 이유도 없고, 피하고 싶지도 않아. 오히려 이젠 나도 아빠가 되고 보니까, 언제 기회가 된다면 작은아버지한테 꼭 한번 물어보고 싶어. 그때 왜 그렇게까지 하셨던 건지. 하셔야 했던 건지.

“…….”

―에고, 내가 너한테 너무 무거운 소릴 했네. 아무튼 난 괜찮으니까 혼자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마. 정훈이한테 나도 궁금하다고, 그러니까 다음에 나 한국 들어갈 일 있음 시간 맞춰서 한번 보자고 해.

"……."

―아닌가? 이젠 재경가 둘째 도련님인데, 만나더라도 내가 시간을 맞춰야 하는 건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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