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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회가 열릴 걸세 (78/303)

이사회가 열릴 걸세

설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주일.

정태를 데리고 해외 지사 순방을 다녀온 홍준이는 스너프 뱅크 시스템에 관한 투자 내용을 미래금융 쪽과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나갔고, 모직 쪽에선 신기한 VMD팀 팀장이 정식 출근을 시작해 단 일주일 만에 개발팀 전체를 묘한 긴장감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연휴에 여독이 남아 있는 한 주가 총알처럼 지나가고 다시 주말이 찾아왔다.

“이런 건 하나에 얼마나 합니까?”

기원 근처에 있는 바둑용품점에 들렀다.

“직접 쓰시게?”

“아뇨, 선물하려고요.”

“선물 받으실 분 나이는 어떻게 되나요?”

진열된 물건들은 마음에 드는데, 사장이 마음에 안 드네.

그냥 가격만 말해 주면 되는 거지….

“많습니다. 올해 아흔.”

“어후, 그럼 신비자 그건 별로예요. 무거워.”

“그래서 얼만데요?”

“바닥에 가격표 붙어 있어요.”

가격은 적당한 거 같은데, 사장 말처럼 직접 들어 보니 무겁긴 하네.

“혹시 여기에서 장기판도 직접 떠 줍니까?”

“장기판 찾는 거예요?”

“네. 떠 놓은 거 있어요?”

“주문만 하시면 판 뜨는 거야 금방 뜨죠. 그리고 장기판은 저쪽 안쪽으로 들어가 보세요.”

안쪽으로도 매장 공간이 엄청나구나.

마침 적당한 물건이 하나 있어서 그걸 구입해 차 트렁크에 실은 후 태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저 방금 회장님 드리려고 장기판 하나 샀습니다.”

―오라고 전화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러고 있어? 얼른 와. 다시 한번 제대로 둬 보게.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식사는?

“아직 전이시면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같이하시죠.”

―일부러 밥 얻어먹겠다고 이 시간에 전화 건 거 아냐?

아무리 봐도 태산이 이 친구가 날 놀리는 게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

재미가 있다면 얼마든지 놀리시게.

난 얼마든지 당해 주는 척 연기할 자신이 있으니, 그리고 나는 나대로 자네와의 이런 관계가 퍽 즐거우니 말일세.

“하… 회장님이 오라고 하셨잖아요. 쉬는 날 꼭두새벽부터 전화로 보자고 하셔서 저 눈 뜨자마자 그 길로 장기판 구하러 돌아다녔다고요.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냥 오면 되지, 그걸 왜 사?

“제가 일전에 약속을 했잖아요.”

―얼른 와. 와서 같이 먹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맛은 예전만 못하지만, 태산이와 같이 태화장에서 육개장에 낮 소주 한잔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다.

“회장님. 그러지 말고, 그럼 오늘은 저랑 같이 밖에서 드셔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바깥 밥 안 먹은 지 오래됐어.

“태화장 육개장. 혹시 생각 있으십니까?”

―그 식당 이름도 회장님 일기장에 들어 있던가?

“사업 이야기 다음으로 많이 들어 있는 내용이 회장님과 함께 태화장에서 술잔 기울이며 사업 이야기를 나눈 내용이었습니다.”

―맛이 예전만 못해. 그 집 발길 끊은 지 꽤 됐네.

“그렇긴 해도….”

우리가 언제는 태화장 그 집을 맛보고 찾아다녔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분위기가 맛이고, 또 기분이 반찬인 곳이었는데.

확인을 해 보고 싶었다.

혼자 몇 번을 가 봐도, 예전만 못한 기분이 드는 게 어쩌면 기분 탓은 아닐는지.

항상 같이 다녔던 태산이가 없이 나 혼자 쓸쓸하게 찾아가 먹었기 때문은 아니었을는지.

그런데 그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냥 집으로 와. 하늘이도 약속 있어 밖에 나가겠다는 거, 자네 오니까 점심 먹고 나가라고 해 둔 참이야.

“왜….”

―얼른 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이거 괜히 태산이 이 친구 때문에 하늘이한테 점수 깎이겠는데?

뭐 하러 약속이 있다는데, 못 나가게 잡고 있어?

아니나 다를까, 외출 준비를 끝내 놓고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불만인 듯 눈에 칼을 담고 있는 하늘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낑낑대며 들고 온 장기판 덕분에 그 눈빛을 외면할 수 있었지만,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맞이해야만 했다.

“쫙 빼입었네? 이야… 오늘도 누구 결혼식 가는 거야?”

“보통은 이렇게 쫙 빼입고 있음 데이트 가냐고 물어야 정상인 거야.”

“데이트 가?”

“아니, 결혼식.”

이 자식이 지금….

“가려고 했지. 그런데 귀하신 누구 때문에 가겠다고 약속까지 다 했는데 못 가고 있어, 내가 지금.”

“에이, 가겠다 약속을 했음 가야지.”

“그거보다 오늘 이 점심 자리가 훨씬 더 중요할 거라고 하시네, 누. 구. 때. 문. 에.”

이건 진짜 피할 구멍이 안 보이는데?

“그 누구라는 게 설마 난가?”

“대충 눈치 긁었음 그냥 그 입 좀 다물고 조용히 있어 주면 안 될까?”

“이건 네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하늘아.”

“다물라고 했어.”

“나도 아침부터 회장님 연락받고 눈 뜬 사람이야. 엄밀히 말하면 내가 더 피해자지. 나는 지금 아침부터 장기판 사러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다 돌다시피 한 사람인데.”

“그냥 그때 한 판 더 둬 줬음 됐잖아.”

“얘 참 이상하네. 야, 너네 할아버지 성격이 저런 걸 왜 나한테 덮어씌우냐?”

바로 그때.

“뭐? 내 성격이 뭐가 어떻다고?”

깜짝이야.

언제 소리 소문 없이 나왔대?

“나보고 이상하대요. 정상이 아니래. 아주 못 쓰겠다는데요?

애 왜 이래?

마치 고자질을 하듯 자기 할아버지한테 이상한 소릴 해 대는 하늘이었다.

“내가 언제 또 그런 말까지 했냐?”

“붕어니? 금방 그랬어, 금방.”

“…….”

“할아버지 성격이 저런 걸 왜 자기한테 덮어씌우냐고도 했고.”

“와, 이건 진짜 좀 아니다.”

그런데 태산이가 거들어 버린다.

기가 막혀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는 게 이런 거 아니겠나.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말은 나도 들었는데.”

”우, 우와….”

“언제는 자주 불러 달라더니, 불러 줘도 불만이냐?”

“아니이이… 내 말, 아니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억울하게 돌아가고 있잖아요. 저는 회장님이 오라고 하셔서 온 건데, 하늘이 얘가 지금 자기 밖에 못 나가고 있는 걸 저 때문이라고 덮어씌우니까 답답한 마음에….”

근데 하늘이 이놈이 사람 혼을 쏙 빼놓네?

“내가?”

“네가.”

“내가 언제?”

진짜 억울하다는 식으로 날 빤히 쳐다보며 그렇게 날 몰아가는 거였다.

“야.”

“할아버지. 이 오빠 진짜 좀 이상해요.”

“아니, 네가 분명히….”

거기엔 그 어떤 변명의 기회도 없어 보였다.

“그래, 나 혼자 이상한 놈이라고 치자. 근데 하늘이는 보내세요. 아는 사람 결혼식이 있다는데, 왜 안 보내고 붙잡고 계세요?”

“진짜 중요한 사람 결혼식이었음 영석이가 데리고 갔겠지.”

어쩜 저렇게 꽉 막혔을까.

나보다 이 좋은 세월을 더 오래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그 시절 거기에 머물러 있는 태산이었다.

장태산이 답다 싶기도 하면서, 요즘 젊은 사람답지 않게 하늘이가 은근히 착한 구석이 있구나 싶기도 했다.

툴툴대면서도 할아버지 말이라면 안 듣는 말이 없다.

“여기저기 부른다고 다 쫓아다닐 거면, 몸이 하나로 되겠나. 의욕만 앞서지 사람 부릴 줄을 몰라. 헛똑똑이가 따로 없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태산이가 먼저 주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하늘이에게 물었다.

“진짜 안 가 봐도 되는 결혼식이야?”

“이미 늦었어. 지금 출발해도 결혼식 끝나기 전엔 못 도착해.”

“미련한 거야, 아님 맹물인 거야?”

“나 지금 스트레스 여기까지 차올랐다. 건드리지 마라. 터지는 수가 있다.”

“진짜 나 온다고 미리 가겠다고 약속까지 한 결혼식을 안 갔다고?”

“집에 손님이 왔는데, 엄마 아빠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할아버지 혼자 있게 만들어?”

“회장님이 애야? 집에 일 도와주시는 분들도 계시잖아.”

“그분들이 계셔도 집에 손님이 와 버렸잖아.”

“그게 말이야?”

“우린 그래. 아무리 오빠라도 할아버지 손님은 미래금융 회장님의 손님이야. 집에 회장님 손님이 왔는데, 어떻게 일 봐 주시는 아주머니들만 계시게 하고 가족들이 하나도 안 남고 집을 비워? 미래금융 콩가루 집안이다 자랑할 일 있어?”

할 말 없네.

“그럼 옷이라도 좀 편한 걸로 갈아입고 있지 그랬어?”

“나라고 안 그러고 싶었겠어?”

“뭐?”

“할아버지가 예쁘게 꽃단장한 걸 왜 갈아입느냐고 그대로 입고 있으란다. 됐어?”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아저씨, 아주머니는 어디 가셨는데?”

“부부 동반 골프 모임. 계열사 사장단 골프 회동이라 한 달 전부터 잡혀 있던 약속이었어. 내가 봤을 땐 할아버지가 일부러 날을 잡으신 거 같아.”

“날? 무슨 날?”

“눈치가 있으면 오빠가 직접 캐치해. 그리고 피차 서로 피곤한 일 안 생기도록 처신 잘하자.”

* * *

의자가 6개인 식탁이다.

그중 절반 자리에만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가장 상석으로 한 자리, 그 상석을 기준으로 오른쪽, 왼쪽 각각 한 자리씩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태산이는 하늘이를 시켜 상석에 준비되어 있는 자리를 오른쪽 자리 옆으로 붙이게 만들었다.

어떻게 자리를 만들지 내심 궁금해지고 있었다.

하늘이와 나란히 앉겠다는 건지, 아님 나와 하늘이를 나란히 앉혀 마주 보겠다는 건지 태산이의 의중이 궁금해지던 참이었다.

“앉아. 밥 먹자.”

역시 나와 하늘이를 나란히 앉혀 놓고 마주 보고 앉았다.

태산이 이 친구….

하늘이는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았고,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하늘이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죽처럼 끈적끈적한 마즙이 먼저 올라왔다.

그걸 작은 숟가락으로 천천히 떠먹고 있자니 밥과 국이 올라왔고, 태산이는 음식을 준비한 사람들에게 물 한 잔만 떠 주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다들 밖으로 나가 있으라고 했다.

세월은 못 속인다고, 한 끼 식사 때마다 고봉밥을 두 그릇은 비워야 하던 친구가 작은 밥그릇에 절반 정도 보슬보슬 담겨 있는 그 양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하늘이 역시 딱 그 정도 양을 적당히 태산이의 속도에 맞춰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꽤나 이런 자리가 익숙한 듯 보였다.

“자주 뵙고 싶다고 했던 건 장기 상대를 해 드리고 싶단 뜻이였는데, 제가 찾아뵐 때마다 이렇게 신경을 쓰시면 부담스러울 거 같습니다.”

“자주 부를지, 아닐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나. 좀 더 지켜보겠다고 부른 건데 부담스러워야지.”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거군요.”

태산이 이 친구한테도 어느새 무게가 많이 실려 있구만.

하긴.

자연스러운 거지.

항상 내 옆에서 조력자 역할만 해 주던 태산이를 기억하면 안 되는 것이겠지.

어쨌거나 자기 힘으로 한 일가를 이루었는데, 혼자 쌓아 올린 이 금자탑 안에 얼마나 많은 부침이 있었을까.

어쩜 30년을 훌쩍 건너뛰어 글자로만 지난 30년을 훑고 있는 나보다 더 많은 내공이 이 친구한테 붙어 있지 않을까.

원래라면 이런 격차마저 못 견뎌야 하는 게 나 손중길이지만, 그 상대가 태산이라 그런지 괜히 보기가 좋고 든든하며, 또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4.3퍼센트. 재경모직에 있는 자네 지분이지?”

갑자기 재경모직의 지분 이야기를 꺼낸다?

“정태가 6.8퍼센트를 가지고 있고.”

“네.”

“정태는 모직 쪽에선 아무 경험이 없는데, 모직에 있는 자네보다 더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어.”

“네.”

“반면에 자네는 아직 모직 말고는 항공, 식품 쪽에 아무런 지분이 없고. 정태는 다들 조금씩은 들고 있는 걸로 내가 알고 있거든.”

“네.”

“그런데도 자네는 자네 형이 스너프를 인수해서 맡아 나가는 조건으로 손 회장이 아예 통 크게 12퍼센트를 떼어 주게끔 만들어 놨어.”

이 친구 이거….

둘이 있을 때 해도 될 이야기를 하늘이까지 있는 자리에서 굳이 할 필요가 있는 걸까?

아니나 다를까 하늘이가 미간 사이 주름을 만들어 내며, 날 쳐다봤다.

마치 조금 전 자기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슨 뜻인지를 되새김질하는 듯한 눈빛으로.

난 그런 하늘이의 시선을 애써 무시해 놓고 태산이를 쳐다봤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이제 고작 입사 1년 차 모직 인사부 과장밖에 안 되는 놈의 머리에서 나온 기획 하나가 스너프 뱅크 시스템으로 재경과 미래금융을 하나로 묶고 있어.”

이번엔 좀 더 노골적으로 지금 이게 무슨 소리냐는 식의 눈빛을 하늘이가 내게 보냈다.

“이쯤 되면 네가 욕심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고, 그래서 어쩌면 작년 추석 때 날 찾아와서 부경에게 넘어간 재경의 계열들을 다시 찾아와야겠단 말도 그냥 치기에 한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은 거야.”

“치기 정도로 보이셨던 모양입니다.”

“그나마도 높게 봐준 거지. 내 앞에서 흰소리를 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눈빛에 확신이 너무 가득 차 보였거든.”

“지금은요?”

“스너프가 네 기획이었다, 거기에 뱅크 시스템으로 우리 미래금융을 끌어들이는 작전까지 네 머리에서 나온 거다… 라고 하니까, 부경에 넘어간 계열사들을 어떻게 다시 가지고 오겠다는 건지, 그게 궁금해졌어. 방법도 없이 말부터 한 거라면 치기가 맞았던 걸 거고, 그런 게 아니라면 생각을 해 둔 게 있지 않을까 싶은데?”

“설마 여기에서 듣고 싶으신 겁니까?”

“아, 하늘이?”

그러니까.

하늘이를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런 비싼 대외비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공유할 순 없는 거 아니겠나.

내가 하고 있는 걱정을 무마시킬 방법 따윈 넘치고 넘쳤다는 듯 태산이가 나와 하늘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 주 안으로 모직에서 이사회가 열릴 걸세.”

“…….”

“안건은 내가 빠지고, 그 자리에 하늘이가 올라가는 내용이 될 거야.”

“……!”

하늘이 역시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기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모직에 담겨 있는 내 지분 16.7퍼센트는 하늘이 앞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그 자리에서 남 사장을 통해 그 지분만큼의 영향력을 하늘이가 가질 수 있게끔 만들 거야.”

“할아버지….”

들고 있던 젓가락을 허공에 대고 짧게 흔드는 것으로 하늘이의 입을 막아 놓고 태산이가 말했다.

“이만하면 하늘이도 자네 생각을 들을 자격이 충분한 거 아닌가.”

할 말 없네.

“사업 규모를 떠나 어쨌거나 모직은 재경의 지주사야. 모태 기업이지. 그 모직에 손 회장 다음으로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대주주 자격인데, 어쩌면 재경의 미래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을 하늘이가 미리 들어 알고 있는 게 무슨 흠이 되겠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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