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비교가 되겠어?
식사를 끝낸 후, 태산이의 방에서 내가 사 온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옆으로는 하늘이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무슨 손님이라고, 집에선 좀 편하게 입고 있게 만들지….
입고 있는 정장 치마 때문에 불편해도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아직 대답을 못 들었어. 부경 그룹에 넘어간 계열사들을 어떻게 받아 낼 건지.”
졸로 내가 가진 상을 잡아먹으며 태산이가 말했다.
난 얼른 반대쪽 마를 향해 포를 겹치며 더 큰 걸 얻어 놓고 장을 불렀다.
“장입니다.”
장군 말을 밑으로 살짝 내려놓고 태산이가 다시 물었다.
“아직은 마땅한 답이 없는 걸로 이해를 하면 되겠나?”
“답이 나와 있는 걸 좋아하십니까?”
“답이 있어야 움직일 동력을 만들어 내지.”
“답이 나와 있는 거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한계?”
“딱 그 답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게 답인데.”
이번엔 멀리 숨어 있는 반대쪽 상을 움직여 사졸을 먹었다.
그걸 장군 말로 먹으려고 하는 태산이에게 미리 알려 주었다.
“드시면 외통수 걸립니다.”
“어이고, 차가 또 언제 거기 가서 그렇게 지키고 있었지?”
"안 드셔도 다음 수면 외통수 걸립니다.”
“…그렇네.”
“어떻게 한 판 더 하시겠습니까?”
“판 새로 만들어 놓고 있게. 난 잠시 화장실 갔다 올 테니.”
하늘이와 둘만 남았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하늘이는 태산이가 있을 때완 달리, 둘이 있을 땐 손님 대접을 해 줄 필요 없지 않냐는 말과 함께 다리 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곰이냐?”
“뭐?”
“마늘 좀 사 줄까?”
“뭐래?”
“편하게 앉아 있어, 편하게. 보는 내가 다 불편해서 장기에 집중을 못 하겠더라.”
“왜? 내 속옷 보고 싶어? 입고 있는 옷이 이런 걸 나더러 어쩌라고?”
“그러니까 곰이냐고.”
난 얼른 침대 위로 올려진 작은 담요를 한 장 가져와서 하늘이를 앉힌 다음 다리 부분을 덮어 주었다.
“생각 좀 해라, 생각 좀. 어렵냐, 이게?”
문 쪽을 힐긋거리며 하늘이가 물었다.
“그런데 스너프 그건 무슨 이야기야? 그게 진짜 오빠 기획인 거야?”
“옆에서 다 들어 놓고 또 묻고 있어?”
“부경 그룹 이야기는 또 뭐고?”
“나랑 회장님이 아프리카 언어로 대화했어? 아니면 굳이 널 자리하게 만든 회장님이 너 헷갈리게 만들겠다고 빙빙 돌려 말씀을 하셨겠어?”
“말이 안 되잖아.”
“뭐가 말이 안 돼?”
“부경 그룹은 그렇다 쳐도, 스너프 인수 건은 근래에 재경 그룹이 한 가장 정확한 투자였고, 신의 한 수였다고 우리 투자사 쪽에서 평가하고 있어. 그게 오빠 머리에서 나왔다는 게 말이 돼?”
“숫자로만 돈장사를 하니까 투자사인 거야.”
“뭐!”
살짝 기분이 상한다는 듯 도끼눈을 뜨며 하늘이가 날 노려봤다.
“어디 감히 재경의 사업을 숫자로 평가질이야? 너는 그게 투자로 보여?”
“…….”
“사업이야. 투자가 아니라. 돈이 목적이었으면 그 돈으로 땅을 샀겠지. 돈이 아니라 사람이 목적이기 때문에 땅이 아닌 기업을 산 거야.”
“말장난. 결국은 크게 보면 사람도 투자야.”
“사람은 사람이야.”
“…뭐?”
“상품이 아닌데, 어떻게 사람한테 투자를 하나, 이 사람아. 사람한테 하는 건 투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기대라고 하는 거야. 그 기대엔 투자로 하는 것처럼 조건 같은 건 붙어선 안 되는 것이고.”
만약 태산이가 모직의 지분을 하늘이에게 넘기겠단 말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이런 말까지 해 줄 필요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앞으로 홍준이 다음으로 모직의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게 된 하늘이는 대주주로 봐 줘야 하는 게 아닐까.
그간 미래금융의 지붕 아래에서 돈 세는 모습만 봐 왔을 텐데, 어쩔 수 없이 같이 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참에 이 정도 공부는 시켜 놓고 데리고 가는 게 맞는 거겠지.
잠시 후 화장실을 다녀온 태산이가 자리에 앉으며 하늘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오미자차 한 잔 가져와.”
“낮잠 주무시게요?”
“벌써 12시 반이야. 이거 한 판만 더 두고 눈 좀 붙여야지.”
“네.”
하늘이가 심부름을 하기 위해 나가고 장기는 시작되었고, 다시 한번 태산이가 내게 물었다.
“이젠 편하게 말해 봐. 무슨 생각으로 그때 부경에 있는 우리 계열사들을 받아 오겠다고 했던 건지.”
“금방 우리라고 하셨습니까?”
“…….”
“듣기 좋네요. 그렇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회장님은 그런 표현을 쓰셔야죠.”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날 평가하나? 주저리주저리 혓바닥만 움직이지 말고 대답을 해.”
그게 뭐 좋은 거라고, 회장 시절 평소 내가 자주 쓰던 말투를 그대로 따라 쓰고 있는 태산이었다.
“부경의 이름 아래에 있는 계열사 중 가장 약한 곳을 먼저 때릴 겁니다.”
“가장 약한 곳? 그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나?”
“아직 거기까지는 정확하게 파악을 못 했습니다.”
“쯧쯧쯧… 어디긴 어디야? 화재지. 그런 거 하나 제대로 파악도 못 하면서 나한테 그런 소릴 했던 거야?”
“아니죠, 회장님. 부경화재가 왜 약합니까? 거긴 안 약합니다.”
“이렇게 천지 분간을 못 해서야….”
“어쨌거나 부경화재는 현재 제 큰외삼촌이 잡고 있는 겁니다. 화학과 물산이 뒤에서 버텨 주고 있는데, 화재가 약하다니요.”
내가 평가하고 있는 강함의 기준을 이제야 알아듣겠다는 식으로 태산이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막내 외삼촌네의 쇼핑이나 이모 쪽의 호텔. 그 둘 중 하나가 구멍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밑밥을 깐 다음 가장 오른쪽 졸을 옆으로 한 칸 움직이며 새로운 장기를 시작했다.
“그걸 어떻게 때리겠다는 건가?”
“회장님은 다 알고 계시죠? 저희 집에 부경가로 넘어간 계열사들 지분이 있다는 거.”
“…….”
“아마도 그걸 제가 얻게 될 거 같습니다.”
“확실한 내용이야?”
“그렇다고 제 아버지한테 여쭤보시지는 말고요. 저랑 어머니 사이에 나눈 비밀스러운 약속입니다.”
“약속?”
“저한테 모직을 업계 1위로 만들어 보라고 하시네요. 그럼 인정해 주겠다, 그 지분을 믿고 주겠다… 그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정태가 가만히 있겠나?”
“저는 지금의 재경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뭐라?”
“이미 잘 굴러가고 있고, 어디에서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경영권 방어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거기에 정태 형이 저렇게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데 제가 왜 재경에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
“저는 그 지분이면 충분하다고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식의 분배라면, 그 분배를 제가 원하는 거라면 한숨 돌리실 것 같고요.”
“흠… 내가 자네를 자신감이 지나치다고 봐야 되나? 아님, 실패를 해도 어느 정도는 물려받을 게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봐야 되나?”
“부경에 넘어간 우리 계열사들을 다시 받아 오는 건 당연한 거니까, 자신감이라고 봐 주실 필요는 없을 거 같고요, 실패를 할 생각도 없기 때문에 안일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때에 맞춰 작은 나무 쟁반에 붉은 오미자차가 담긴 유리잔을 올려서 하늘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입고 있는 치마 탓에 불편하게 자세를 구부려 쟁반을 먼저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쓸어 치마 뒷단을 정리한 뒤 무릎을 꿇고 앉은 하늘이.
녀석은 내가 건네줬던 담요로 무릎 부분을 가려 놓고 태산이에게 오미자차를 건넸다.
그 차를 건네받으며 태산이가 말했다.
“둘은 나중에 따로 나가서 커피를 마시든 해.”
나도 모르게 하늘이의 반응을 살폈고, 하늘이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 * *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 내 또 연락하지.”
“네.”
설마했는데, 하늘이가 정말 나랑 같이 나설 생각인 모양이다.
가방을 챙겨 들고 내려와서는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기 시작했다.
태산이 앞이라 별말 안 하고 지켜만 보고 있다가, 현관을 나서서 물었다.
“어디 가?”
“어디든 가야 하지 않겠어?”
“설마 나랑 같이 가는 건 아니지?”
“그럼 이 어중간한 시간에 누구한테 나오라고 하겠어?”
자신이 빼입은 옷과 머리를 보라며 하늘이가 말했다.
“아침부터 결혼식장 가겠다고 숍 가서 머리에 메이크업까지 다 받았어. 이런 풀 세팅을 다 해 놓고 누구 때문에 미리 잡은 약속도 펑크를 냈는데, 나더러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라고?”
“집에만 있으라고 한 적 없는데?”
“할아버지 의중, 눈치로 대충 다 긁었잖아. 나도 좋아서 같이 가자는 거 아니니까, 오해는 접어 둬. 일단은 우리끼리라도 말을 좀 맞춰야 할 거 아니냐고.”
그래.
아까 식사를 할 때부터 태산이의 눈치가 꽤 노골적이긴 했다.
그럴 수 있지.
하늘이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태산이 입장에선 충분히 별난 계산을 해 봄 직하다.
“잘됐네.”
“뭐가?”
“마침 나도 좀 힙한 곳을 몇 군데 알아 두고 싶던 참이야.”
“힙한 곳?”
차 앞으로 서서 하늘이에게 말했다.
“너는 알고 있는 곳 꽤 될 거 아냐. 그중에 제일 힙한 곳 한 군데만 소개시켜 줘라.”
“나 지금 뭐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거기에 잘못 들을 내용이 뭐가 있어?”
“아니, 그렇잖아. 천하의 손정훈이 나 같은 범생이한테 힙한 곳을 소개해 달라는 게 말이 돼?”
범생이?
하늘이가?
아무리 봐도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공부만 했던 녀석으로도 보이지는 않는다.
“너 범생이야?”
정색을 하며 하늘이가 반박했다.
“아니거든.”
“방금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내가 그렇다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오빠가 항상 나한테 그렇게 불렀잖아. 범생이라고.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진짜 때린다.”
정훈이 놈이 하늘이를 그렇게 불렀다?
하긴, 정훈이 놈이 그간 해 왔던 행색을 짐작해 보면 정훈이 놈 기준에서 하늘이는 말 잘 듣는 순한 양일 수도 있었겠다 싶다.
“너는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냐?”
“내가 이래서 오빠가 참 별로라는 거야.”
나는 하늘이 네가 아무리 나한테 투덜거려도, 태산이 놈 손주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귀엽고 내 새끼 같아 보인다, 이놈아.
“항상 자기밖에 모르지. 다른 사람 기분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그래 놓고 딴 사람이 뭐라고 하면 금방처럼 뭐 그런 걸 마음에 담아 두느냐는 식이고.”
“너랑은 내가 가급적 말을 안 섞어야겠다. 섞기만 하면 본전도 못 찾네.”
내가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이겼다는 마음에 뿌듯한지 피식하고 웃으며 날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오빠가 소개 좀 시켜 줘라.”
“뭘?”
“힙한 곳. 나보단 오빠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을 거 아냐.”
“몰라.”
“몰라?”
“응. 요즘은 밖을 잘 안 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흘겨보다 이내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하늘이었다.
“하긴. 그간 만나서 논 상대가 채서린이다 보니 힙한 호텔은 알아도, 사람들 많이 모이는 힙한 곳을 자주 다닐 정신은 없었겠네. 그간 회사 일도 꽤 열심히 했다고 하니까 말이야. 공사가 다망하셨을 거 아냐.”
“적당히 하자. 그런 거 아니니까.”
“그래도 힙한 곳 같은 건 나보다는 오빠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을 거 아냐. 나랑 비교가 되겠어?”
“진짜 모른다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좀.”
“아, 그냥 아무 데나 가. 그럴 거면.”
“근데 이거 진짜 오빠 차야?”
내 차를 쳐다보며 하늘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게 진짜 손정훈이 차라고?”
“너 근데 진짜 언제까지 계속 손정훈, 손정훈 하면서 이름 부를 거야?”
“왜 이래? 누구보다 아메리카 스타일을 선호하시던 분이. 안 그래, 테디?”
테디?
정훈이 놈이 썼던 영어 이름인가 보네.
“왜? 넌 비싼 외제 차 타고 다니나 보지?”
“그럴 리가. 내가 오빠야? 오빠가 타는 차치고는 너무 소박한 거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이런 거 오빠 취향 아니잖아.”
“네가 내 취향을 알아?”
“왜 몰라? 무조건 사람들 눈에 띄는 게 바로 오빠 취향 아냐?”
운전석 문을 열며 탈 거면 타고, 아니면 따로 움직이자는 뜻을 담아 말했다.
“나이가 드니까, 하고 있는 거 말고, 앞으로 내가 할 걸로 눈에 띄고 싶어지네. 탈 거야, 말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