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 볼 일은 없을 게다
하늘이는 흥분된 감정을 정훈이 앞에서 숨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태였다.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재경모직의 지분.
그게 아버지를 거치지도 않고 곧바로 자신의 몫이 되게 생겼다.
부담이나, 설렘과는 조금 다른 성질의 흥분이 하늘이를 감싸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있어 재경이란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미래금융의 위기 때에도 많은 간부들이 그 지분을 매각해 현금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을 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던 할아버지였다.
그런 할아버지가 젊음을 모두 바쳤던 재경이란 이름의 마지막 당신의 소유물을 자신에게 넘기겠다 하셨다.
여러 복잡한 감정이 뒤섞이고 있는 하늘이에게, 지금 자신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게 다름 아닌 손정훈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실소라도 흘릴 수 있는 여유이지 않았을까.
“어때? 이 정도면 오빠 기준에선 힙한 건가?”
하늘이 역시 자주 와 봤던 곳은 아니다.
이 시간대는 처음이었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회사 일에 뛰어들었고, 언제나 그랬듯 경영 수업에서도 최고 평가를 받아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평가를 주는 사람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라는 것만 달라졌을 뿐.
어디에서든 최고가 되기 위해, 딸이지만 장남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점에선 크게 달라질 게 없는, 오히려 이젠 실전이었기에 더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던 지난 몇 년이었다.
그런 하늘이에게 정훈이가 주문한 ‘힙’이라는 표현은 그저 잠시 머물다 스쳐 지나갈 트렌드, 유행일 뿐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관통시킬 만한 무게는 없는 것이었다.
저 멀리 남산 뷰가 예술인 이태원의 작은 루프톱 와인 바였다.
저녁엔 완전한 와인 바가 되지만, 점심땐 가벼운 디저트와 커피도 판매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나마 집에서 적당히 가깝고, 또 적당히 멀기도 한 이곳을 추천했다.
하지만 역시나 정훈이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자신의 취향에 실망이라는 듯, 다리를 꼬아 앉아, 보라는 남산 뷰는 안 보고 가게 안만 유심히 뜯어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요즘 말하는 힙이라는 거야?”
“내 기준에선 충분히 힙한 곳이야.”
정훈이가 자신의 취향을 비웃어도 상관없었다.
‘왜 내가 저 인간한테 내 취향을 평가받아야 돼?’ 하는 게 이곳으로 가자고 했던 하늘이의 본심이었다.
그저 여기에서 가볍게 와인 한잔하고 싶었다.
같이 와인 잔을 기울여 줄 상대가 정훈이라는 게 못내 아쉽긴 했지만, 할아버지의 온 젊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재경모직의 지분을 양도받게 된 지금, 그딴 것 따윈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흥분된 감정을 와인 한 모금으로 살짝 눌러 주고 싶었을 뿐.
그런데….
“우리가 시간대를 좀 잘못 맞춰서 온 거 같네.”
대충 가게 안은 다 둘러봤다는 듯, 이내 남산 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정훈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뭐?”
“여자들이 좋아하겠어. 인테리어도 아기자기하고, 뷰도 괜찮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내 취향은 아닌데, 네 말대로 힙의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도 있는 거니까. 네 또래 여자들은 이런 곳을 선호할 수도 있겠다 싶긴 하네. 나는 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에너지 넘치는 곳을 소개해 달라는 뜻이었거든.”
“이 시간에 클럽에 가잔 소린 아니었을 거 아냐.”
“너 클럽 다녀?”
“다닐 거 같아?”
“전혀 안 어울리는데, 네 입에서 클럽 이야기가 나오니까 물어보는 거 아냐.”
“왜 전혀 안 어울려? 내가 뭐 어때서?”
“다녀? 다니면 언제 나랑 클럽 한번 같이 가 주라. 클럽도 궁금해.”
“웃으라고 한 소리였다 생각할게.”
종업원이 얇은 메뉴 북을 들고 주문을 받으러 왔다.
라임 반 조각이 든 유리 물잔을 내려놓고 있는 종업원에게 하늘이가 물었다.
“이 메뉴 북은 이쪽한테만 주고, 저는 와인 리스트 좀 갖다주세요.”
종업원이 와인 리스트를 가지러 다시 안으로 들어갔고, 정훈이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하늘이에게 물었다.
“와인 하게?”
“그러겠다고 여기 온 거야. 가볍게 한잔. 오빠는 커피 마셔. 운전해야 하잖아.”
“운전이야 대리 기사 불러도 되는 거고. 그럼 나도 같이 와인이나 한잔해야겠다.”
“그러시든지.”
정훈이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시간에 맞춰 적당하게 글라스 와인 한 잔 정도만 할 생각이었는데, 정훈이까지 와인을 하겠다고 하니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오빠도 같이 마실 거면 그냥 바틀로 시킬까? 부담스러우면 그냥 글라스로 시키고. 난 많이 마셔도 두 잔이야. 그 이상은 안 마실 거야. 오빠는 어때?”
“바틀로 시켜.”
“오빠 뭐 좋아해?”
“너 마시고 싶은 걸로 시켜.”
“그래. 내가 살 거니까, 내가 마시고 싶은 걸로 시킬게.”
“오… 하긴. 모직 지분 다 받았는데, 오늘 같은 날은 한턱 쏴도 된다.”
“그런 거랑은 상관없는 거거든? 그냥 오빠한테 뭘 얻어먹고 싶지가 않은 거야. 오빠한테 뭐 얻어먹으면 이상하게 뒤끝이 안 좋더라고. 요란다 일도 그렇고….”
“크흠….”
하늘이는 와인 리스트를 쭉 훑어보다 결국 종업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실은 제가 와인을 잘 몰라요. 몇 개 눈에 익은 이름은 있는데, 막상 리스트를 보니까 뭘 시켜야 될지를 모르겠네요. 괜찮은 와인 있음 추천 좀 해 주세요.”
“시간이 좀 이른데 라이트한 걸로 추천을 드려도 될까요?”
“저는 달콤한 게 좋아요. 사실 와인 맛도 잘 몰라요. 가볍고 달콤한 게 좋을 거 같아요.”
옆에서 정훈이가 끼어들었다.
“안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거 보니까, 도메인 뒤폰쉬가 있는 거 같던데 가지고 있는 뒤폰쉬 중에 어느 빈티지가 제일 괜찮아요?”
“뒤폰쉬… 요?”
“저거 뒤폰쉬 아니에요?”
“잠시만요. 제가 안에 들어가서 매니저님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왜요?”
“제가 여기서 일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되거든요.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아….”
“고가 와인을 직접 서비스해 본 적이 아직은 없어서요. 매니저님 불러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뭐든 처음은 있는 거예요.”
종업원이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네?”
“그 처음을 계속 뒤로 미루면, 그만큼 자기 손해 아닌가? 이 일 배우고 있는 중이라면서요?”
“…네.”
“언제 해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나 같으면 직접 한번 서비스해 보겠다. 와인은 나도 좀 알아요. 매니저까지 불러올 필요는 없고, 들고 있는 뒤폰쉬 중에 제일 괜찮은 빈티지 있으면 한 병 가지고 와요.”
그렇게 말한 다음 하늘이에게 물었다.
“뭐랑 같이 마실래? 같이 마시기에 치즈가 제일 만만하긴 해.”
“뭐, 그럼 그러든지.”
와인 리스트를 닫아 그걸 종업원에게 건네며 정훈이가 말했다.
“매니저한테 물어보고 뒤폰쉬하고 어울릴 만한 치즈 있으면 그거랑 같이 갖다줘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가격은….”
종업원의 걱정에 정훈이는 피식하고 웃으며 농담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신경 안 써도 돼요. 이 시간에 와인 마셔야겠다는 사람이 오늘 로또를 맞았거든. 뒤폰쉬 정도는 아무리 비싼 빈티지라도 웃으면서 계산할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갖다줘요.”
3,680,000원.
종업원이 와인 한 병과 함께 가져온 계산서.
거기에 찍힌 와인 한 병의 가격을 확인한 하늘이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와인의 라벨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초보 와인 서버의 손 역시 떨리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숍 매니저는 가게 안에서 테라스 밖의 상황을 긴장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하늘이는 정훈이를 노려봤다.
하지만 정훈이는 피식하고 웃기만 할 뿐이었다.
“오픈해도 되겠습니까?”
하늘이는 마지못해 억지 미소를 얼굴에 띄워 놓고 종업원에게 오픈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와인 오프너를 움직이는 종업원의 손에 부담이 집중되고 있었다.
병 입구 플라스틱 커버를 벗겨 내는 데에도 몇 차례 실수가 일어나고 있었다.
와인병을 오픈시킨 종업원이 물었다.
“테이스팅은 누가 하시겠습니까?”
하늘이가 정훈이에게 테이스팅을 양보했지만, 정훈이는 코르크 마개를 집어 향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하늘이 앞에 놓여 있는 잔을 손짓했다.
“땄는데, 맛이 별로라고 취소를 할 순 없잖아요. 향 좋네.”
하늘이가 가볍게 와인을 맛을 본 후 괜찮은 거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종업원이 정훈이의 잔을 채울 때였다.
탁!
처음 서비스를 해 보는 고가의 와인이라서 그랬던 걸까.
떨리던 손이 결국은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와인을 다 따라 놓고 병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그만 다 채운 와인 잔을 병 끝으로 건드렸고, 곧장 그 잔이 손님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에헤이!”
자기 앞으로 쓰러진 와인 탓에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워 피한 정훈이.
하지만 완전히 다 피하지는 못해서 입고 있던 면바지에 부분적으로 와인이 튀어 얼룩이 생겨 버렸다.
얼른 테라스로 나온 매니저가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보려고 경험을 되살려 봤지만, 실수를 일으킨 종업원은 이미 혼이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 조심 좀 하지… 에이, 옷 다 베렸네!”
“괜찮으십니까?”
매니저가 서둘러 정훈이의 얼룩진 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하늘이는 심장이 조마조마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하늘이는 손정훈이라는 사람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거만하고, 오만하며, 쥐뿔 자기 힘으로 해내는 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사람을 급으로 매기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게 할아버지들끼리의 우정 덕에 재경가와 가족처럼 지냈던 과거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늘이가 정훈이를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아 왔던 이유였다.
정작 하늘이의 눈엔 정훈이가 가진 오만과 허세는 자신의 무능을 숨기는 유일한 능력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정훈이가 이 상황 앞에 얼마나 화를 낼지, 갑질을 선보일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진호 씨, 뭐 해? 얼른 사과드리지 않고. 이거 세탁비는 저희 쪽에서….”
“됐어요, 됐어. 지금 옷이 문제가 아니라 잔 깨지면서 바닥에 유리 파편 다 튀었는데, 이거부터 좀 치워 봐요.”
순간 하늘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불같이 화를 내며 이 세상, 저 세상 오만 진상 짓을 선보여야 할 정훈이가 앞접시 위로 올려져 있던 냅킨으로 바지에 튄 와인을 대충 털어 내며 오히려 당황한 매니저를 진정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얼어붙은 상태로 반쯤 혼이 나간 모습의 종업원이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한 건 알겠는데, 그렇게 얼어서 가만히만 있지 말고 이거 정리를 좀 해 줘야 할 거 같은데?”
“네?”
“테이블을 좀 옮겨 줘야 하지 않겠어요? 저기 저쪽으로. 테이블보도 지금 다 베렸잖아요.”
매니저가 기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마침 01년산 뒤폰쉬가 한 병 더 남아 있습니다. 얼른 새 걸로 다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세탁비는….”
“됐다니까. 그리고 라스트 바틀이면 더 비싸게 팔아야 할 거 아니에요.”
“네?”
“어차피 둘이서 한 병 다 마시지도 못해요. 괜히 새 거 뜯지 말고 조금밖에 안 쏟았는데, 그냥 테이블만 저쪽으로 옮겨 줘요.”
“그, 그래도….”
“저쪽으로 세팅 새로 해 주면서 글라스는 네 개로 가져다주시고.”
하늘이는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저건 연기일 수가 없다.
그리고 할아버지 앞에서만 해도 충분할 연기를 왜 망나니의 과거, 본모습을 다 알고 있는 자신의 앞에서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겠나.
정훈이가 보여 주고 있는 반응에 마치 뭐에 홀린 듯 하늘이는 테이블을 옮겼다.
바짝 주눅이 들어 있는 종업원에게 다시 서비스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며 정훈이가 말했다.
“잔 네 개에 다 따라요.”
“…다요?”
“네, 다.”
다행히도 이번엔 종업원이 실수를 만들지 않고 글라스 네 개에 와인을 비슷한 높이로 따라 냈다.
“이 잔 두 개는 안에 가지고 들어가세요.”
“네?”
“고가 와인 서비스가 처음이라고 하길래, 병의 삼분의 일 정도는 남겨 두고 갈 생각이었어요. 테이스팅해 보라고.”
“……!”
“근데 한 잔을 쏟아 버려서 남기고 가기가 애매해졌어요. 그냥 우린 있는 것만 우리가 알아서 따라 마시고 갈 거니까, 더는 서비스 안 해 줘도 되고, 이거 가지고 들어가서 한 잔은 지금 테이스팅해 보고 다른 한 잔은 1시간 뒤에 어느 정도 산화가 일어났을 때 테이스팅해 봐요. 느낌이 크게 다를 거예요. 최고급 와인은 아니지만, 괜찮은 와인이에요. 공부하기에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
“나 다음에 또 오면 그땐 이번처럼 실수하지 말고, 좀 프로답게 서비스해 주세요, 진호 씨.”
종업원 가슴에 달린 명찰로 이름까지 불러 주며 말을 끝낸 정훈이의 모습에 하늘이는 다시금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 * *
거실엔 할아버지 혼자 장기판을 놓고 앉아 양쪽 말을 번갈아 움직이고 계셨다.
집으로 돌아온 하늘이는 아직 부모님이 골프 모임에서 돌아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 할아버지 앞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벌써 왔어? 저녁은 먹여서 보낼 줄 알았더니.”
실눈을 뜨며 할아버지를 노려보다 평소처럼 장난을 걸어 주지 않는 모습에 하늘이는 이내 포기를 하고 말았다.
“네가 벌써 오겠다고 한 거냐, 아님 그놈이 벌써 보낸 거냐? 큼큼. 너 술 마셨냐?”
“와인 한 잔.”
“젊은 놈이 낮술은….”
“할아버지, 근데 지금 이거 진심이에요?”
“뭐가?”
“오늘 정훈이 오빠 일부러 부른 거잖아. 엄마, 아빠 밖에 나가서. 아니에요?”
“내가 네 엄마, 아빠 눈치를 봐야 되는 사람이냐?”
“…….”
순간 하늘이는 움찔했다.
평소 할아버지답지 않게 무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기에, 지금부터는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가 다시 물었다.
“혹시 나랑 정훈이 오빠… 짝지어 주고 싶은 거예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들끼리 했다는 옛날 약속, 충분히 존중해요. 충분히 존중하고, 또 그 시대의 로망을 인정해요.”
장 회장은 말없이 하늘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훈이 오빠는 아니에요. 할아버지 혹시 예전에 A 그룹 재벌 3세랑 연예인 채서린이라는 여자 사이에 터진 스캔들 아세요?”
“그게 정훈이었냐?”
“네.”
“지금도 만난다더냐?”
“그게 중요해요?”
“너는 그게 중요하냐?”
“할아버지.”
언제 그런 무서운 눈을 했었냐는 듯, 평소의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장 회장이 손녀딸에게 물었다.
“네가 이 할애비 시대의 로망을 인정하고, 또 회장님과 이 할애비가 벗으로 나눴던 약속을 존중해 준다니 나 역시 네 시대의 생각을 존중하고 인정한다.”
“…….”
“너는 내 하나밖에 없는 손녀야. 하물며 내 아무리 회장님과의 정이 깊다 한들, 하나뿐인 손녀 인생을 구식 약속 때문에 억지로 지키려 들겠어? 그럴 생각 없다.”
하늘이는 무릎을 꿇고 앉은 상태로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재경과 다시 관계를 회복해 나가는 과정에 손녀딸을 팔아먹을 만큼 이 할애비가 못 미더운 거냐?”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시는 거 같아 물어보는 거 아니에요.”
“넌 어떤 인생을 살겠다는 거냐?”
“네?”
“여자로서의 인생을 살겠다는 거냐, 아님 지금까지 이 할애비한테 계속해서 증명을 받아 온 것처럼 실력 있는 경영인으로서 살겠다는 거냐?”
“…….”
“나와 네 부모는 네가 어떤 인생을 선택하든, 세상 그 무엇보다 너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너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원을 해 줄 거다. 다만….”
“다만….”
“이 할애비가 너보다는 살아온 경험이 깊다 보니 사람 보는 눈이 조금은 더 깨어 있을 것이고, 네가 살고자 하는 인생이 내 기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기에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보기를 먼저 준 거뿐이야.”
“현명한 선택이요? 설마 정훈이 오빠가 할아버지가 생각하신 현명한 선택이란 뜻이에요?”
장기 알들이 어지럽게 자리해 있는 장기판을 내려다보며 장 회장이 말했다.
“수가 안 읽히더구나. 빤한 길인데 알고도 막지를 못하게 만들어. 그런데 명쾌해. 속이지를 않아.”
“…장기 알.”
“한번 어떤 인물인지 알아는 봐라. 꼭 네가 부담스러워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더라도, 내 편으로 둬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