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웠습니다
손정태 스너프 사장이 그룹 본사 회장실을 찾았다.
며칠 전 손 회장의 스케줄을 확인한 뒤 잡은 약속이었다.
들고 온 서류 가방에서 노트북과 간단한 잭을 꺼낸 정태.
그는 챙겨 온 것들을 회장실 한쪽 벽에 설치되어 있는 평면 TV에 연결을 시켜 스너프 자체적으로 최종 통과된 기획을 손 회장에게 확인받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에서 트래픽 비즈니스 업계 1, 2위를 다투고 있는 ‘테레사’와 ‘네모다’의 사업 구조를 간단하게 비교를 해 봤습니다. 우선 테레사의 경우 태생적으로 쇼핑인 커머스에 집중이 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압도적인 국내 물류를 바탕으로 쇼핑 관련해서는 네모다를 포함해 업계 2, 3, 4, 5위를 모두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트래픽을 만들어고 있습니다.”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가 되어 있는 자료 앞에 손 회장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반면에 커머스에선 다소 약세를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테레사를 바짝 뒤쫓고 있는 네모다의 경우는 서치 플랫폼부터 시작해서, 금융 핀테크, 콘텐츠 사업까지 다양한 방면의 노출을 적극적으로 유도해 내고 있죠.”
“스너프는 테레사보다는 네모다와 사업 유형이 비슷하잖아.”
“네. 그도 그럴 것이 스너프 창립 멤버가 다 네모다 운영진 출신이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인수 전에도 충분히 고려했던 내용입니다.”
“그렇지. 같은 뿌리에서 났지만, 트래픽을 일으키는 데 실패를 한 전형적인 모델이 스너프였으니까.”
손 회장의 지적에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정태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맞습니다. 초기 트래픽을 유도해 내는 데 실패를 했고, 어렵게 확보해 낸 투자의 실적을 만들어 내는 데 급급하다 보니, 본래 네모다 운영진이 가지고 있던 색깔은 퇴색이 되고 매출 성장 위주의 커머스 쪽으로 집중을 했던 게 가장 큰 실패 요인이었다 손꼽히고 있죠.”
정태의 모습엔 거침이 없었다.
“금융 핀테크 쪽은 현재 접촉 중인 미래금융을 통해 뱅크 시스템만 적용을 시키면 바로 구성이 되는 거니까, 해당 내용은 네모다를 빠르게 따라갈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커머스 쪽은 빠르면 올 상반기 안, 늦어도 하반기 안에는 네모다를 추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고요.”
“그렇게 빨리?”
“항공이라는 무기가 크게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로 해외여행을 못 했던 사람들이 항공편 예약을 시도하고 있고, 동시에 여행사 시장도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하면서 스너프 쪽으로 항공권 대량 발주를 넣고 있는 중입니다.”
“흠… 지난 몇 년간 항공 때문에 명치에 뭐가 꽉 막힌 기분이었는데, 듣던 중 아주 반가운 소리네.”
“현재 추이로는 호황까지는 기대하기가 힘들겠지만, 지속적인 성장 그래프는 그려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 듣기 좋다.”
“그런데 여기에서 스너프가 테레사, 네모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만들기 위해 반드시 선택해야 할 종목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종목?”
“테레사는 서치 플랫폼이 없습니다. 반면에 압도적인 커머스 시장이 강력한 물류와 붙어 있기 때문에 네모다와는 같은 트래픽 비즈니스이지만 다른 결로 흐르고 있죠.”
정태의 예리한 분석에 손 회장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치 플랫폼은 스너프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린 테레사가 아니죠. 항공이라는 강력한 무기는 있지만, 물류가 받쳐 주지 못하고 있기에, 테레사가 버티고 있는 한 여기에서 폭발적인 성장은 객관적으로 어렵다고 보입니다. 이것만으로는 업계 2위인 네모다를 따라잡기도 애매합니다.”
“들고 있는 무기가 어중간하다는 말이네.”
“이제 시작 단계이니까요. 어중간하다고 하기보다는 앞으로 우리가 시도해 볼 사업이 많다고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콘테츠 사업으로 잡아 볼까 합니다.”
“콘텐츠 사업?”
화면을 넘기며 정태가 말했다.
“네. 미래금융 쪽에서 주력하고 있는 사업부 중 하나가 바로 영상 제작 지원입니다. 국내 넷플릭스 초기 진출 당시 국내 웹툰, 웹소설의 원소스 판권을 대량 확보하고 있다가 넷플릭스의 직접적인 투자를 대량 유도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죠.”
“그쪽은 일전에 장 부회장 만나서 이야기할 때 하늘이가 거기에서 일 배우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미래기획.”
“네, 현재 하늘이가 미래기획의 영상 제작 투자 지원팀 팀장으로 있다고 했었죠.”
정태가 그려 온 큰 그림 앞에 잠시 생각을 돌려 보던 손 회장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뱅크 시스템을 미래금융과 함께 만들면 핀테크 쪽으로 미래금융의 지원이 올라올 거니까, 그 부분을 같이 묶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네.”
“테레사와 네모다가 가진 약점들을 어떻게 절충해서 스너프에 녹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테레사와 네모다의 주력 무기를 골고루 스너프에 접목시킬 수 있겠단 확신이 섰습니다.”
“테레사는 콘텐츠 쪽을 건드리기가 어렵나?”
“건드릴 수 있다 해도 이미 늦었다는 걸 본인들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린 늦지 않았고?”
“우린 미래금융이라는 든든한 파트너가 확보된 상태이지 않습니까. 분명 많은 투자가 필요로 한 사업입니다. 그리고 웹툰, 웹소설 기반의 콘텐츠 플랫폼 비즈니스는 시장이 어느새 고착된 상태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여기에 영상을 접목시켜서 새로운 방향으로 접근을 시킨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사업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봐.”
“이미 많은 웹소설, 웹툰을 원작으로 한 2차 영상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너무 많은 종편 채널이 시장에 등장하고 있죠. 국내 영상 사업은 더 이상 시장을 국내로만 한정 짓지 않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시장으로 보고 많은 상품을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이러하다 보니 많은 영화, 드라마 제작사들은 더 이상 국내 안에서만 승부를 보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다 넷플릭스니, 디즈니니 하는 그런 OTT 채널들 때문 아냐.”
“네, 맞습니다.”
다시 화면을 넘겨 놓고 정태가 말했다.
“그러니 스너프에겐 반드시 잡아야 할 기회인 거죠. 국내 유통을 넘어 자체 콘텐츠를 수출하는 플랫폼 수출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현재 국내 업계를 양분하고 있는 초대형 콘텐츠 플랫폼이 두 곳 있습니다.”
“알고 있어.”
“그 두 플랫폼이 국내 시장만 양분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전 세계 웹툰, 웹소설 시장을 양분하고 있습니다. 엄청나죠. 거기에 미래금융과 함께 만들 핀테크를 기반으로 보다 쉬운 콘텐츠 결제 시스템을 갖춰 놓고, 미래금융의 영상 제작 투자사인 미래기획과 사업을 확장시켜 나가면… 스너프는 스너프 자체만으로도 커머스와 핀테크, 콘텐츠라는 세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는 계열 그룹으로의 성장이 가능해집니다.”
* * *
정태가 그룹 본사 상무였을 시절, 자주는 아니었지만, 종종 회장님을 모시고 함께 갔던 설렁탕집이 있다.
그곳에서 손 회장과 함께 회장 대 사장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식사를 하며 정태가 물었다.
“아버지.”
“왜?”
“조금 전 제가 올린 기획, 마음에 드십니까?”
“준비 잘했던데? 어쨌거나 미래금융 쪽은 네가 더 많이 접촉을 해야 할 거다. 그쪽에서도 가급적이면 투자를 많이 넣고 싶어 할 거고. 장 회장님과의 관계도 있고 하니까,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 수준에서 가급적이면 그쪽 투자는 다 받아 주는 걸로 하고, 아까 말한 영상 관련해서도 디테일을 잡아 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물 만난 물고기 같구나.”
“제가요?”
“그래, 확실히 그동안 내 그늘에 가려져 네가 가진 실력이 티가 안 났어.”
“지금은 정훈이 그늘에 가려지고 있죠?”
국을 뜨다 말고 손 회장이 뜨끔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국에 밥을 말며 정태가 말했다.
정태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베여 있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
“저 다 알고 있습니다. 스너프 인수 초기 기획. 그거 정훈이가 만든 거라는 거.”
“그걸… 알고 있었어?”
손 회장은 내심 마음이 흔들거렸지만, 그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기에 무거운 목소리로 애써 무게를 실어 내야 했다.
“어떻게 몰라요? 남 사장, 조 전무, 심지어 미래금융 장 부회장님도 다 알고 계시던데.”
“…….”
“실은 아버지. 저 오늘 기획안 준비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잠을 못 잤어요.”
“…….”
“재경에 입사하고 3년 차였죠, 아마? 본부장 달고 처음으로 아버지까지 참관한 임원 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요. 그 발표 전날 잠을 못 잤거든요. 부담은 딱 하나였어요. 다른 임원들, 사장단 앞에서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발표는 하지 말자… 그 부담밖에 없었어요.”
“기억난다. 너무 잘했지.”
“그리고 어제 잠을 못 잤어요. 스너프 인수, 뱅크 시스템 도입… 다 정훈이가 만든 기획이지, 지금의 스너프 안에 제 기획은 아직 하나도 없는 거잖아요.”
“정태야….”
“서운했습니다.”
정태는 뚝배기 속으로 숟가락을 넣어 둔 채 몸을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환한 미소로 손 회장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저한테 스너프는 정훈이 기획이었다고 아버지께서 직접 말씀을 해 주셨음, 전 정훈이를 기특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
“지금도 기특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나 아버지가 미처 보지 못한 걸 봐 줬잖아요. 얼마나 기특해요? 정훈이 기획인 걸 알았어도 스너프, 제가 기꺼이 맡았을 겁니다. 오히려 정훈이에게 기획 의도를 좀 더 정확하게 물어 훨씬 더 발전적으로 맡을 수 있었을 거예요.”
“흠….”
“외로웠습니다, 처음 스너프가 정훈이 기획이었단 소릴 아버지도 아니고, 정훈이도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을 때요.”
“…….”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의 생각과 회장님의 판단을 이해하고 믿어 보려 하는 중입니다. 제게 언질을 못 주셨을 만한 이유가 있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제가 정훈이를 불편하게 느껴야 하는 상황은… 부디 부탁드리는데, 만들지 말아 주세요. 저 아버지 아들이고요, 정훈이 형입니다. 최소한 아버지한테는 아픈 손가락이 되고 싶지 않고요, 정훈이한테는 듬직한 형이 되고 싶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흠….”
“오랜만에 이 집 설렁탕을 이렇게 아버지랑 같이 먹어서 그런지, 마지막으로 왔을 때보다 더 맛있는 거 같은데요? 하하하. 식사하시죠, 아버지.”
“외롭게 만들었다니, 내가 마음이 무거워지네.”
“에이, 투정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이 정도 투정은 부려도 되잖아요.”
“그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겁다고. 어릴 때도 한 번을 안 했던 투정 아니냐.”
“…….”
“미안하구나. 내 생각이 짧았다.”
“짧으셨던 게 아니라, 너무 기셨던 거 같습니다. 그걸 알기에 서운하고 잠시 외로웠던 걸로 그칠 수 있었고요. 스너프 맡아 나가면서 사장이라는 걸 해 보니까 알겠어요. 역시나 제일 어려운 건 사람이고, 내 마음과는 달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똑같이 나눠 줄 수 없는 자리가 바로 이 자리라는 걸요. 사장 자리에 앉아서도 벌써 이런데, 아버지는 오죽하시겠습니까?”
그 순간 손 회장은 정훈이에게서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정태만의 큰 그림자를 보게 됐다.
어느새 정태가 어른을 거쳐, 큰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게 손 회장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