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됐습니다 (82/303)

됐습니다

조동희 전무를 통해 사람을 한 명 소개받았다.

전략기획팀의 강인성 과장.

내가 맡고 있는 인사부 업무 외적으로 쓸 만한 사람을 한 명 정도 곁에 두고 있고 싶다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강인성 과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조 전무였다.

“본사 전략 기획 본부에서도 탐을 내고 있는 친구예요. 이번에 손정태 사장이 스너프 기획팀 꾸리면서 차출을 받았는데, 팀장 추천을 받아 놓고 본인이 계속 모직에 남고 싶다고 해서 제외가 된 친구이기도 하고요.”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몇 번 술자리에 동석을 시킨 적이 있지요.”

조 전무에 대한 파악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정치력이 무기인 친구.

그 무기의 종류와 화력까지 이젠 내게 스스럼없이 공개하고 있다.

이쯤 되면 믿고 같이 가도 된다는 뜻이겠지.

“스너프… 그 사람 입장에선 분명 좋은 기회였을 거 같은데, 왜 안 가고 모직에 남아 있었던 건지 아십니까?”

“팀장이라고 보내고 싶었겠습니까?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키워 놨는데 좀 더 데리고 있고 싶었겠죠. 자기 팀장의 그런 눈치를 읽었던 것도 같고.”

“저한테 붙여 주시면 앞으로 귀하게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거기 팀장한테 말씀 좀 잘 전해 주세요.”

전략기획팀의 과장이다 보니, 사실상 연차만 놓고 보면 다른 일반 부서의 차장급이라고 봐야 한다.

업무를 보고 있던 중 강인성 과장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모르는 번호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받았는데, 상대는 전략기획팀 팀장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전화를 거는 거라고 했다.

우선 적당히 무게감이 실린 목소리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회사 안에서 오다가다 한 번쯤은 마주쳤을 인물.

직접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인사부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고과 평가서와 그 외 기록을 미리 다 확인해 봤던 난 곧바로 그의 목소리와 얼굴을 매치시킬 수 있었다.

“괜찮으시면 인사부로 잠시 내려와 주시겠습니까?”

―네,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조 전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강인성이라는 친구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난 몇 달 동안 나란 사람에 대해서는 파악을 끝내 놓은 것처럼 보였다.

나름대로 나와 합이 잘 맞을 만한 인물로 추천을 한 것이겠지.

불필요한 질문은 일체 하지 않고, 나의 요청에 바로 내려오겠다고 하는 것만 봐도 강인성이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 대충은 엿볼 수 있었다.

인사부 면담실.

강인한 과장과 마주 보고 앉았다.

나이는 서른여섯.

과장 2년 차.

고려대 국제학과를 졸업하고 스물여덟에 재경모직 전략기획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를 한 재원이었다.

전략기획팀 안에서도 준수한 고과 평가 점수를 챙기고 있었고, 과장 승진도 전략기획팀 안에서는 제법 빠르게 한 편에 속했다.

여기까지는 인사부가 가지고 있는 그의 데이터상의 내용.

그 내용을 미리 다 숙지를 하고 있었기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제가 처음 모직에 입사를 하고 6개월 정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회사 밖에서 사고를 치고 다니는 바람에 많이 피곤하셨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저 때문에 그룹 본사 전략 기획 본부 쪽으로부터 많은 참견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참견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럼요?”

“다만 얼마든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내용까지 그룹 본사 쪽으로 보고를 올려야 했던 게 비효율적이라 아쉬웠을 뿐입니다.”

일을 시키기에 아주 편한 상대일 거 같았다.

난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무님께 제 사람을 한 명 붙여 달라고 요청을 드렸습니다. 과장님을 추천해 주시더군요.”

“저도 팀장님께 비슷한 뉘앙스로 과장님을 한번 만나 보란 지시를 받았습니다.”

“지금 계신 곳에서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는 지금까지 전략기획팀에서 해 오셨던 기획 관련 업무보다 더 사소하고 성취감이 떨어지는 업무를 맡으실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절반의 기대와 절반의 궁금증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마음에 드는 솔직함이었다.

“작년 하반기 공채 건과 안산 생산 라인 노조 사태, 그리고 시니어즈 인수 건까지… 짧은 몇 달 사이에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 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계신 건지 궁금합니다.”

“관계를 거창하게 시작하지는 맙시다. 과장님도 저에 대해 옆에서 지켜볼 시간이 필요할 거고, 저 역시 과장님을 알아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저 인사부 HRO 과장이라는 포지션이 현재 제 활동 범위를 너무 제한하고 있는 거 같아 약간의 꼼수를 생각해낸 거뿐이니까요.”

“이해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굳이 현재 우리 모직뿐 아니라 항공, 식품의 사장단 그리고 이번에 스너프 사장으로 옮겨 간 정태까지 모두가 다 전략 기획 파트와 비서실 출신이라는 내용은 굳이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 내용으로 희망 고문을 던질 이유도 내겐 없었고, 강 과장 역시 그 정도 내용으로 바람이 들 인물 같지는 않았다.

“재경모직에 대한 파악은 대충 다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항공과 식품에 대한 세부 내용을 좀 구할 수 있음 좋겠는데요.”

“재무제표를 뽑아 드릴까요?”

“그런 건 다 나와 있는 거고요.”

“어느 정도의 세부 내용을 말씀하시는 건지 짐작이 잘 안 됩니다.”

“우리 전략기획팀에서 받을 수 있는 내용에서 한 발만 더 앞서 생각해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제가 직접 알아내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내용이겠지만….”

“이해했습니다.”

그래, 이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당장은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고요, 앞으로 개발부에서 진행 중인 새 브랜드 론칭과 시니어즈 브랜드 리뉴얼에 관한 내용을 기획 쪽에서는 강 과장님이 직접 맡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올라가는 대로 팀장님께, 그게 과장님의 생각이라고 전하겠습니다.”

웃음이 나왔다.

“근데 원래 그렇게 딱딱하세요?”

“네?”

“강 과장님이요. 여기가 군대도 아닌데, 대답을 너무 칼같이 각을 잡아서 하시니 살짝 부담스러운데요?”

그제야 표정을 풀며 강 과장이 대답했다.

“제가 과장님 앞이라 저도 모르게 긴장을 했나 봅니다.”

“그러신 거 같아서 한 말이었어요. 그럴 필요 있습니까? 제가 필요해서 실력 있는 사람을 요청한 거고, 거기에 과장님이 내려오신 건데요. 앞으로 많은 도움을 주실 분이 그렇게 긴장을 하고 계시면, 제가 부담스러워서 편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조만간 따로 자리 한번 마련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진작에 사람 한 명을 붙여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전까지는 스스로 모직 안의 구조를 뜯어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태산이도 모직에 있는 자기 지분을 하늘이에게 주겠다 하면서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으니, 지금부터는 나도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나.

* * *

강 과장과 별도의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동명물산에서 넘어온 시니어즈 팀 사람들 사이에서 재경모직의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부분이다.

언제 터져도 터질 일이었고, 오히려 지금쯤 문제점들이 하나둘씩 나올 때가 됐는데, 자기들끼리 신호를 만들어 가며 교통정리를 잘해 나가고 있어서 의외이던 참이었다.

“손 과장님.”

처음엔 김 부장이 무슨 일로 날 찾는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그런데 따로 자리를 마련한 김 부장은 동명물산에서 넘어온 시니어즈 팀 사람들 중 류성환 본부장을 중심으로 몇몇 업무의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이 모였고, 그들을 대표해 류 본부장이 자신을 직접 찾아와 몇 가지 불만을 토로했다고 말했다.

“시니어즈 관련해서는 과장님이 직접 핸들링을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우선적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있다면 어떤 계획인지부터 물어보려고요.”

“어떤 부분에서 문제점들이 나오고 있다고 하던가요?”

“뻔하죠. 어쨌거나 기존의 시니어즈 팀은 그동안 해 왔던 게 있으니까, 변화를 주더라도 기존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 하는 거 같아요.”

“그럴 수 있죠.”

“반면에 우리 쪽 개발부나 영업, ATM(홍보, 마케팅) 쪽에선 재경모직 자체 원천 소스들이 있다 보니, 거기에 시니어즈 팀들이 맞춰 주길 바라고.”

“그러는 과정에서 현재 마찰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아직 직접적인 마찰이 있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런데 류 본부장 생각엔 곪고 있다는 판단이 든 모양이죠. 더 곪기 전에 책임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책임과 권한의 범위를 확실하게 설정해 주길 바라는 거 같아요. 그런 게 아직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다 보니, 혼선이 자주 발생하는 모양이에요.”

이런 내용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던 이유.

“보통 이런 마찰 위험이 큰 내용은 우리 인사부에서 그간 어떻게 조정을 해 왔습니까?”

이 부분 역시 누가 뭐래도 인사의 영역이다.

나의 물음에 김 부장은 무척 난감한 표정으로 혓바닥을 빼어 내 마른 입술을 적실 뿐,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간… 이번 시니어즈 인수 건처럼, 브랜드 인수에 대한 경험이 없다 보니 조정의 모델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 모델을 내가 직접 만들어 주기 위해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거다.

“모델은 없었을지언정, 이 정도 문제점이 나올 거라는 예상 정도는 부장님이라면 어느 정도 하고 계셨을 거 아닙니까.”

코를 한 번 훌쩍인 김 부장.

그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다음 특유의 뻔뻔한 인상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저기, 손 과장님.”

“네.”

“그… 계속 이렇게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 어쨌거나 지금은 제가 부장이고요, 손 과장님은 과장입니다.”

“크흠….”

“너무 이렇게 저를 상대로 막… 부하 직원 교육하듯이 하시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푸흡….”

“아니, 웃을 일이 아니라, 저 진짜 과장님이 한 번씩 이러실 때마다 좀 섭섭합니다.”

“하아, 제가 진짜 부장님 때문에 웃습니다.”

“웃으라고 한 말 아닌데….”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앞으로 좀 더 신경 써서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고 하니, 일단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리고.”

내 말을 잘라먹으며 김 부장이 말했다.

“도대체 HRO는 팀원 충원을 언제 할 겁니다.”

“…….”

“아니, 이렇게 부서장이 지시하는 내용은 하나도 안 새겨들으시면서, 계속 저한테 막 부서장의 역할만 기대하시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요?”

“우와….”

“우와가 아니라.”

“유 윈. 인정. 이 부분은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김 부장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나 주었다.

“HRO 팀원 충원은 제가 이번 주 안으로 보고서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됐죠?”

“둘이 있을 땐 괜찮은데, 다른 직원들 앞에선 ‘됐죠?’ 그런 표현도 가급적이면 좀 삼가 주시는 게….”

“하아… 오케이. 그것도 인정. 암튼, 그건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

“알겠습니다. 류 본부장 건의 건도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됐….”

“…….”

“습니까?”

“됐습니다. 그럼 저는 손 과장님만 믿고 지켜보겠습니다.”

“…….”

뺀질거리네, 이거….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