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잘해
조동희 전무의 등장은 자리에 모인 모두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긴장은 재경모직의 기존 부서장들 위주로 흐르던 일방적인 분위기를 한순간에 환기시켜 버렸다.
동명물산에서 넘어온 시니어즈 팀 인원들도 기존 부서장 이하, 팀장, 차장, 과장들이 바싹 긴장하는 모습에 조 전무의 등장이 미리 짜인 각본은 아니었다는 걸 눈치채고 있는 거 같았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전무님.”
노정규 부장이 얼른 자기 자리를 양보하며, 홍보팀 과장에게 자리 세팅을 지시했다.
“아냐, 아냐. 번거롭게 그러지 말고, 그냥 거기 젓가락이나 하나 꺼내 줘. 잔은 여기 있네.”
“그래도….”
“엉덩이 깔고 오래 앉아 있을 생각 없어. 그냥 거기 젓가락이나 한 모 가져와.”
하지만 노 부장은 얼른 빈 앞접시를 챙겨 조 전무 앞으로 깔아 놓고 직접 술잔을 채웠다.
“그런데 자리는 왜 이렇게 앉은 건가? 한쪽은 박힌 돌, 한쪽은 굴러온 돌… 일부러 이렇게 대치되게 앉은 거야?”
“아닙니다. 어떻게 앉다 보니까, 이렇게 됐네요.”
이 자리를 마련한 건 어디까지나 인사부의 역할이었기에 김 부장이 송구하다는 듯 굽신거리며 대답을 했다.
그러자 조 전무는 영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혀를 차 놓고 더는 그 부분에 입을 대지 않았다.
“한솥밥 먹기 시작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이렇게 서로를 불편해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닙니다, 전무님.”
노 부장이 얼른 교통정리를 시작했다.
“불편하긴요. 꾸준히 소통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소통이 필요하다는 거 자체가 아직은 한 몸이 안 됐다는 거야.”
“…….”
조 전무가 술잔을 들었다.
그러자 노 부장이 상석에 앉아서 자리를 이끌 때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잔을 들었다.
“고기는 벌써 반이나 없어졌는데, 빈 병은 저거밖에 없어? 비싼 고깃집에 와서 소고기 앞에 놓고 다들 제사 지내고 있었어?”
“…….”
“비워.”
“넵!”
소주잔을 단번에 비워 버린 조 전무.
“크흐….”
안주는 집어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술맛에 약하게 인상을 찡그린 후 주위를 둘러봤다.
옆방에서 흘러들어 오는 소리만이 전부일 뿐, 우리 룸 안으로는 조 전무가 만들어 내는 묵직한 기운 탓에 정적이 짙게 흐르고 있었다.
그 정적을 최고조의 긴장으로 이끌어 올려놓고 조 전무는 그제야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안으로 넣었다.
“류 본부장. 이름이 류성환이죠?”
“네, 전무님.”
“그래도 내 기억력이 아직은 쓸 만해. 류 본부장은 동명물산에 있을 때 상무였더구먼.”
“네, 본부장으로 시니어즈 총괄을 하면서 작년에 상무로 승진을 했습니다.”
“그래, 맞아. 시니어즈 인수하는 과정에서 보니까 유일하게 류 본부장만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동명물산 임원이었더라고. 계속 그쪽이랑 같이 가지, 왜 넘어왔어요?”
제법 분위기를 얼렸다 녹일 줄 아는 놈이네.
그래, 전무 자리에 앉아서 그 정도 밥값도 못 하면 안 되지.
“처음부터 임원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동명물산은 더 이상 의류 쪽 사업엔 생각이 없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죠.”
“으음… 의류 쪽엔 얼마나 있었어요? 시니어즈 전에도 딴 데에 있었을 거 아니에요.”
“16년, 17년… 2005년부터 업계 생활 시작했으니까 대충 그 정도 되는 거 같습니다.”
“어이고, 젊어 보이는데 연차가 꽤 되네요.”
“아닙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전무님.”
“그래도 될까?”
“그럼요. 편하게 하십시오.”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조 전무가 직접 술병을 들었고, 류 본부장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조 전무 곁으로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술을 받은 류 본부장은 그 자리에서 바로 고개를 돌려 잔을 비웠고, 이번엔 술병을 건네받아 조 전무의 잔을 채웠다.
조 전무 역시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잔을 비워 냈다.
“시니어즈에 애정이 대단하겠네?”
“제가 단독으로 총괄을 한 첫 브랜드였고, 운 좋게 그게 잘되어서 지금까지 쭉 총괄을 하고 있다 보니 제겐 다른 의미로 자식 같은 존재이죠.”
몇 차례나 고개를 끄덕여 가며 조 전무가 말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나도 모직에서는 몇 년 안 되지만, 그래도 식품 쪽에서 꽤 오래 있었고 거기에서 우리 자체 브랜드를 몇 개 총괄해 본 경험이 있어서 류 본부장 자네한테 시니어즈가 어떤 느낌일 거라는 걸 대충은 알겠어.”
“…….”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그 느낌을 아는 사람이 나 말고는 없다는 게 문제야. 노 부장.”
“네, 전무님.”
“재경모직에서 몇 년 됐나?”
“올해로 21년입니다.”
“이 부장.”
“네, 전무님.”
“자네는?”
“19년 됐습니다.”
“이 부장은?”
“저도 19년 됐습니다.”
모든 부장들의 대답을 다 확인한 후 류 본부장을 쳐다보며 조 전무가 말했다.
“다들 이래. 최소 자네 연차, 그 이상씩 재경모직에서만 원맨으로 살아온 이 친구들이 아직까지 자네가 경험해 본 그 총괄이라는 개념을 잘 몰라. 모를 수밖에. 어쨌거나 재경모직은 대기업이고, 대기업에서 브랜드 총괄이라는 건 부장급이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니까. 그런데 여기 이 친구들이 깊이에 있어선 자네보다 더 내공이 있을 수가 있어. 영업이면 영업, 마케팅이면 마케팅, 상품 개발이면 상품 개발….”
“물론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번엔 기존 부서장들 이하, 각 부서 인원들을 향해 조 전무가 말했다.
“동명물산과 시니어즈를 중소기업, 중소 브랜드라고 말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우리 재경모직에 비하면 그 조직의 규모가 작은 건 사실이니까, 편하게 이야기할 테니 다들 알아서 내가 무슨 뜻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잘 가려서 들어.”
“네!”
“시니어즈에서 넘어온 우리 직원들의 경우, 기존의 우리 직원들과 비교해 깊이는 부족할지 몰라도 큰 틀을 보고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은 훨씬 뛰어날 수가 있어.”
“…….”
“그게 대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차이점이라고 나는 생각해. 한쪽 분야에 대한 전문성은 자네들과 비교해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그걸 본인들 스스로 기획하고 시장에 직접 들고 나가 맨땅에 헤딩해 가며 부딪쳐 보는 실행력, 행동력은 여기 앉아 있는 시니어즈 팀이 뛰어날 수밖에.”
“…….”
“나는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자네들 모두가 지금 이게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를 잘 생각해 봐 주길 바라. 자네들은 대한민국 대기업의 과거와 오늘을 동시에 경험해 볼 수 있는 거거든.”
대한민국 대기업의 과거와 오늘을 동시에 경험해 볼 수 있다?
조 전무가 말을 이었다.
“30년도 더 전에 내가 처음 재경 그룹에 입사했을 때 재경모직은 전체 직원 수가 천 명도 안 됐어. 생산 라인 쪽까지 다 합쳐서. 그런데도 국내에선 모직 쪽 최대 기업이었어.”
“…….”
“재밌는 게 뭔지 아나? 그때와 비교해 직원 수가 세 배가 넘게 늘었는데, 자체 브랜드는 이번에 매입한 시니어즈, 그리고 현재 개발 중인 골프 웨어를 제외하곤 없어. 그런데도 직원 수가 3배나 늘었어.”
조 전무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주 6일 근무가 주 5일 근무제로 바뀌고, 유통의 구조가 바뀌면서 영업의 비중이 과중되고, 홍보, 마케팅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바뀌고 있어. 그러는 과정에서 총무부 하나에서 해결을 볼 수 있었던 업무들이 재무와 인사, 리스크팀으로 각자의 영역을 구체화해 세분화되기도 했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결과 부서 간의 영역 나누기, 직원 사이 세대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거야. 전 직원이 천 명도 안 될 땐, 아무리 우리가 대기업이었어도 직원들끼리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시설부에 누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영업부, 자재부, 섬유부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다 같이 몰려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였고, 매주 그렇게 동료들 잔치에 쫓아다니다 보면, 주 6일 근무가 아니라, 요즘 사람들 가치 기준에선 주 7일을 근무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
“가면 당연히 X발 X같은 과장, 부장 얼굴을 봐야 할 거 아닌가. 하루 쉬는 일요일인데도.”
그 말에 모두가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동료들 집안 잔치가 없는 날은? 부장, 이사 따라 등산 가야 할 거 아냐. 아님 공을 차러 가거나.”
결국 한쪽에서 웃음이 터져 버렸고, 그 웃음은 삽시간에 방 안 전체로 전염이 되었다.
하지만 조 전무는 웃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해도 월급 쥐꼬리만큼 갖다주면서 무슨 회사 일은 혼자서 다 하느냐며 집에서 바가지를 긁는 마누라가 없었어, 그 시절엔.”
“…….”
“그 시절엔 남편 혼자 나가서 벌어 와도 네 식구, 다섯 식구는 충분히 먹고살 만했거든. 그런데 요즘은 또 그런 게 아니지? 다들 맞벌이를 해야 하고, 우리 같은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몰래몰래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만 그나마 남들만큼은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으니까.”
조금 전까지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고,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한숨들을 모두 받으며 조 전무가 말했다.
“그러니 부서 간 불통, 직원들 간의 단절, 세대 갈등… 그런 걸 우린 인정을 하면서 기업을 운영할 수밖에 없는 거야.”
“…….”
“지금 자네들 사이에 끼어 있는 미세한 신경전. 난 그거 당연한 거라고 봐. 여기 이쪽 줄에 앉아 있는 자네들은 처음부터 업계 기업 문화 선두에 있는 재경모직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고, 여기 이쪽 줄에 앉아 있는 자네들은 필요에 따라서는 주 6일, 주 7일까지도 감수해 가며, 명절 연휴에도 빨간 날 다 챙겨 쉬지도 못하고 따로 특근비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출근을 해서 개인 실적이 아닌 팀 실적을 걱정해야 하는 회사에서 이제 이쪽으로 옮겨 온 사람들이야.”
“…….”
“서로 교환하게. 서로가 가진 경험과 서로가 알고 있는 깊이와 넓은 시야를. 그러라고 있는 게 동료 아닌가. 동료와 함께하는 게 사회생활인 것이고.
홍준이 놈.
그래도 영 사람을 잘못 곁에 두진 않았네.
“류 본부장.”
“네, 전무님.”
“자네가 꼭 시니어즈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총괄을 해야 하나?”
“아닙니다.”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겠어?”
“…네.”
“내 앞이라고 억지로 하는 대답 아니고?”
“아닙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이번엔 이 부장에게 조 전무가 물었다.
“이 부장.”
“네, 전무님.”
“이쪽 영업력이 그렇게 못 미더워?”
“아닙니다.”
“노 부장.”
“네, 전무님.”
“같이해, 같이. 개발부 쪽에선 신상품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매장 인테리어까지 소통이 잘되고 있는 거 같던데, 어째 홍보, 마케팅에서 그걸 못 받쳐 주고 있어?”
“네, 신경 쓰겠습니다.”
“당장은 류 본부장이 총괄을 하고, 자네들은 지원을 해 줘. 회사가 동시에 60명이 넘는 동명물산 인원을 우리 본사 인원으로 충원시켰다는 게 무슨 뜻이겠나?”
“…….”
“여유가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필요도 있다는 뜻이고. 경기가 안 좋으면 고용부터 얼어붙어. 근데 우린 브랜드만 가져온 게 아니라 고용까지 함께 안았잖아. 여유와 필요를 동시에 느꼈다는 거야. 오늘 이런 자리 내가 더는 안 만들어도 되겠지?”
“네!”
“확실해?”
“네!”
“좋아. 믿고 나는 이거 딱 한 잔만 더 하고 갈란다. 류 본부장 일어나 보게.”
류 본부장이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든 좋으니 건배사 하나 해 봐. 자네 건배사만 듣고 난 일어날 거야.”
“건배… 사요?”
류성환 본부장은 민망한 듯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로 올려진 자신의 소주잔을 소심하게 챙겨 들었다.
“제가… 건배사 같은 걸 해 본 적이 몇 번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이 분위기와 어울릴 만한 건배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나잘해. 이걸로 제가 건배사를 해 보겠습니다.”
“너나잘해?”
“너와 나의 잘나가는 한 해를 위하여…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재밌네. 너나잘해. 음… 말 된다. 선창해.”
“네. 다들 잔 좀 채워 주세요. 제가 한 음절씩 선창을 하겠습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잔을 채워 자신의 선창을 기다리는 걸 확인한 류 본부장.
“구호는 너와 나의 잘나가는 한해를 위하여, 입니다. 너나잘해! 너!”
“너와!”
“나!”
“나의!”
“잘!”
“잘나가는!”
“해!”
“한 해를 위하여!”
“위하여!”
* * *
겨울이 물러가고 있었다.
SS컬렉션을 성공적으로 시장에 내어놓은 시니어즈.
그렇게 쉽게 섞이기 힘들 것처럼 서로의 눈치를 보며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벌이던 두 집단이 어느새 하나로 흡수가 되며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 가고 있었다.
전략기획팀의 강인성 과장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며 채서린에 관한 내용을 조심히 꺼냈다.
“연예인 채서린 알아요?”
“알죠.”
“그럼 혹시 작년에 터졌던 스캔들 상대가 저라는 것도 알아요?”
“…네.”
“다 아네.”
“다는 아니고, 저는…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강 과장이 안다는 말은 남 사장, 회장님도 알고 있단 뜻이겠죠?”
“아마 그럴 겁니다.”
“차라리 잘됐네.”
“네?”
본론을 꺼냈다.
“스캔들이 터진 지 꽤 됐는데, 아직 티비에서 채서린의 모습이 나오지를 않네요.”
“…….”
“저한테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제가 그 친구한테 빚이 좀 있거든요.”
“빚이요?”
“그 스캔들도 따지고 보면 저 때문에 터진 스캔들이고. 좀 알아봐 주실 수 있겠어요?”
“어떻게 알아봐 드리면 되겠습니까?”
“앞으로 활동 계획은 있는지, 만약 없다면 스캔들 때문에 불러 주는 곳이 없어서 활동을 못 하고 있는 건지… 그런 내용을요.”
“…….”
“제가 빚지고는 못 사는 스타일이라서 그래요. 그래서 그러는 거니까 좀 알아봐 주세요.”
“네.”
“신경이 쓰여서 그래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