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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좀 쉬어라 (85/303)

숨 좀 쉬어라

강인성 과장이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강 과장을 가깝게 곁에 둔 이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내 눈치를 살피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거 같습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장님이 직접 물어보기 곤란한 상황이니까 절 통해 확인을 하시려는 것도 알겠고요.”

“그런데요?”

“하지만 이런 내용은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앞에 깔아 놓은 전제가 너무 튼튼했다.

내가 직접 물어보기 곤란한 상황이라는 걸 눈치로 긁고 있다는 소리.

그럼에도 직접 물어보길 권한다?

“연락 안 한 지 꽤 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으로 다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서 그 친구한테 좋을 게 없을 거 같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그 친구는 그 친구 나름대로 우리 사이의 계산이 다 끝났다고 생각을 하는 거 같아요. 그런데 난 그런 게 아니거든요. 나란 사람 때문에 한 사람이 십수 년에 걸쳐 힘들게 쌓아 올린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거 같아서….”

이런 감정을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하는 걸까?

“그걸 보는 게 괜히 좀 불편하네요. 꼭 누군가가 그게 전부인 아이 손에서 사탕을 빼앗아 가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그 아이는 제가 길을 잃었을 때, 저한테 길을 알려 준 아이였어요.”

“길이요?”

“길을 알려 주기 위해 잠시 멈춰 섰고, 그사이에 누군가가 그 아이의 손에서 사탕을 빼앗아 간… 그런 상황이에요. 남이 만든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빼앗고… 그런 걸 안 해 본 건 아닌데, 누구보다 잘하는 사람인데, 내가… 나에게 끝까지 자기 의리를 보여 준 사람을 상대로 그랬던 적은 아직 한 번도 없거든요.”

“…….”

“딱 그 정도가 우리 사이에 있었던 관계예요. 괜한 오해는 하지 마시라고. 그리고 난 지금 강 과장님께 강 과장님에 대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고 있는 중이고.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겠어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강 과장은 업무 처리 능력이 꽤 쓸 만하다고 느낀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하루 만에 채서린과 그녀의 소속사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날 찾아왔다.

“해당 스캔들이 터지고 곧바로 CF 광고 모델로 있던 업체 측 여덟 군데에 발이 묶였다고 합니다.”

“발이 묶였다는 게 정확하게 어떤 개념이에요?”

“총 40억 상당의 손해 배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슈가 두 달 정도에 걸쳐 있었고, 이야기 중이었거나, 확정됐던 영화, 드라마들도 하나같이 엎어지거나 캐스팅이 바뀌었습니다.”

“재기가 힘들 정도로 많이 심각한 거예요?”

잠시 뜸을 들이다 강 과장이 대답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말해 보세요.”

“처음 해당 스캔들이 터졌을 때, 채서린 측의 대응이 미흡했던 걸로 보입니다.”

“어떻게요?”

“스캔들 자체에 팬들이 배신감을 크게 느끼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채서린도 이젠 나이가 있잖아요. 아이돌 걸 그룹 활동을 하던 시기도 아니고. 거기에 몇 년 전 있었던 부모 빚투 이슈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한때 등을 돌렸던 팬들은 채서린에게 연예인이라는 환상보다는 인간적인 부분에 더 큰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란 말이에요?”

“빚투 이슈가 터졌을 때처럼 빠르게 해당 스캔들을 인정하거나, 아님 변명을 해 주길 팬들은 기대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돌연 잠적을 했죠. 그런 태도를 팬들은 무책임하다고 느꼈던 거 같습니다. 뒷수습은 소속사 대표에게 일임을 하고. 그렇게 아무런 해명도 없이 시간을 끌다 보니 스캔들 상대가 재벌 3세라는 내용과 합쳐져 이미지를 상당히 갉아먹은 거 같습니다.”

한숨이 나왔다.

“소속사 측 상황은요?”

“좋지 않습니다. 다행히 채서린과의 계약 관계는 계속 유지를 할 거란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해당 스캔들로 엎어진 드라마, 영화 쪽에서 채서린 캐스팅에 끼워 넣기로 함께 출연을 확정 지은 서브 배우들 역시 자동 하차를 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 부분이 아무래도 채서린의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요.”

“채서린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고요?”

“현재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해당 영상들에 함께 출연이 확정됐던 소속사 동료 배우들에 대한 미안함, 책임감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암튼 그런 모양입니다.”

해당 스캔들에서 자신의 모습은 모두 노출을 시키면서 기자와 합의하에 나의 얼굴과 차량 번호는 모자이크를 시킨 채서린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충분히 소속사 동료 배우들에 대한 미안함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느끼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생각보다 여리고, 곰 같은 구석이 많은 친구였구나….

“CF로 손해 배상이 일어난 부분에 대해선 큰 대미지가 없었다고 봐도 될까요?”

“물론 있었겠죠. 하지만 그 부분은 스캔들이 터지는 순간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스캔들 때문에 편성까지 다 잡힌 상태에서 엎어진 드라마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대한 책임감을 못 견뎌 하고 있다고 하네요.”

“어떤 드라마인데요?”

“아이돌 활동만 하다가 배우로 첫 이미지 변신을 할 수 있게 도와줬던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작품의 작가와 연출이 애초에 채서린을 주연으로 확정을 해 놓고 작품을 함께 준비했었다고 합니다.”

“그 작품도 엎어졌다는 거네요?”

“투자사 측에선 배우 캐스팅만 다시 해서 편성에 맞게 제작에 들어가자고 했는데, 그게 작가와 연출 입장에선 쉽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 스캔들 하나로 백 명에 가까운 배우, 스태프들의 스케줄이 모두 꼬여 버린 게 되다 보니, 거기에서 감당해야 할 스트레스가 엄청났겠죠.”

“혹시 그 투자사가… 어딥니까?”

“미래기획입니다.”

이상하게 느낌이 그럴 거 같았다.

“제작사 쪽에선 다른 투자사를 알아보거나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겠죠?”

“작가와 연출이 주연으로 채서린을 고집하는 이상 힘들었을 거라고 보입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알아봐 줘서.”

* * *

모처럼 회장 시절이 그립네.

이만한 일로 고민이라는 걸 해야 하니 말이다.

강 과장을 시켜 시니어즈의 광고 모델로 채서린을 추천해 보란 지시를 할까 잠시 생각을 해 보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재경모직 안에 얼마나 많은 직원들이 현재 시니어즈에 진심인가.

그 진심을 잠시 나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겠다고 함부로 이용을 해서야 될 일인가….

거기다 찌라시가 이미 다 돌아서 강 과장까지 채서린의 스캔들 상대가 나라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를 설득하고, 강하게 밀어붙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고, 채서린을 시니어즈의 모델로 발탁을 하면 이젠 한물간 그 이슈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지도 모를 일.

결국은 하늘이에게 부탁을 해 보는 수밖에 없나?

해당 드라마의 작가와 연출도 채서린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지 않나.

요즘은 드라마 한 편 만드는 데, 돈이 얼마나 들려나?

그냥 내가 적당한 투자사에 접촉을 해 간접 투자를 해 줘 버려?

현재 살고 있는 집 팔고, 차 팔고 하면….

귀찮구나.

그렇게까지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할 만한 일은 솔직히 아니지.

그런데도 마음에 걸린다.

나 역시 채서린과의 관계는 이쯤에서 정리를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엄밀히 말하면 정리를 하고 자시고 할 관계도 아니지.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고 마음에 걸린다는 말은 어떻게든 털고 가야 한다는 뜻.

결국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늘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역시 하늘이에겐 일이기에,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어쩐 일이야?

“혹시 그때 갔던 그 루프톱 같은 스타일 말고 추천해 줄 다른 힙한 곳은 없어?”

―심심해? 왜 전화까지 걸어서 안 하던 짓이야?

“마땅히 없으면 거기도 괜찮을 거 같고. 부탁할 게 있어.”

―부탁?

“어?”

―비즈니스 아님, 개인적?

“내가 너한테 비즈니스적으로 부탁할 게 뭐가 있겠어?”

―그럼 다행이고. 됐어. 나 바빠.

“너 뭐 아직도 내가 그날 와인 비싼 거 시켰다고 화나 있냐?”

―그닥? 손정훈이가 손정훈이 한 건데, 내가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이유가 있을까? 잠시 방심한 내가 멍청한 거지.

“네 할아버지는 아시냐? 너 이렇게 인정머리 없는 녀석이란 거.

―그래서 믿어 주시는 거지. 그러니 난 더 쓸데없는 곳엔 인정머리가 없어야 하는 거고.

상대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조차 못 하는 녀석을 퍽이나 태산이가 믿고 있겠다.

야, 이놈아.

재경모직에 있는 네 할아버지 지분을 넘겨받은 이상 넌 앞으로 나한테 잘 보여야 해.

내가 그 지분을 앞으로 얼마까지 만들어 줄 줄 알고….

“그럼 비즈니스적인 부탁이라고 하자.”

―오빠 말대로 오빠가 나한테 비즈니스적으로 부탁할 일이 뭐가 있어?

“왜 없냐? 넘치고 흐르지.”

―글쎄? 난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없을 거 같은데? 오빠야 내가 들고 있는 지분 가지고 부탁할 게 있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난 딱히 오빠가 무슨 부탁을 하든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이유를 못 찾겠는데?

“너 친구 없지?”

―뭐?

“딱 보니까 그래. 뭐가 그렇게 계산적이야? 계산기 하나 사 줘? 암산으로 돌리면 머리 안 아파? 야, 인마. 하늘아. 안 그래도 주말 중 하루는 네 할아버지가 장기 두러 오라고 나 부르실 거 아니냐.”

―그게 뭐 어쨌다고?

“네 할아버지는 어떻게든 날 찾아오게끔 이유를 만드시는데, 넌 계산기만 돌릴 줄 알지, 왜 계산이 필요한지에 대해선 전혀 생각을 못 하는 거 같다?”

―방금 그거 잘난 척이야?

“안 하고 싶은데, 그걸 네가 하게 만드네. 같이 저녁 먹자. 그때 내 옷에 와인 쏟은 친구 일 잘하고 있는지 확인도 할 겸.”

잠시 후 하늘이가 고민을 끝낸 듯 다른 제안을 했다.

―거긴 됐고. 오늘은 오빠가 쏘는 거지?

“누가 쏘든.”

―확실하게 해.

“당연히 내가 사야지. 내가 보자고 하는 건데.”

―그럼 오빠가 아는 힙한 곳에서 보자. 주소 찍어서 보내.

통화를 끊고 주소를 찍어서 보냈더니, 곧바로 하늘이에게서 카톡이 날아왔다.

―장난해???

육개장에 소주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눠 볼까 했는데, 태화장은 영 하늘이 스타일이 아닌 모양이네.

―육개장 별로야?

―됐다. 알느니 죽지.

―알느니가 아니라 앓느니. ‘알’이 아니라 ‘앓’이야.

―오타 난 거거든? 그냥 그때 그 루프톱에서 만나. 7시.

―알았다.

* * *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도착을 했다.

어차피 와인을 마실 건데, 가급적이면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된 맛을 즐기고 싶기도 했고.

그날 내 옷에 와인을 튀게 만들었던 종업원이 잊지 않고 날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오전 근무만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들었던 거 같은데?”

“이번 달부터 시프트를 바꿨습니다.”

“그렇구나….”

“혼자 오셨어요?”

“오기는 혼자 왔는데, 자리는 두 자리가 필요해요. 그때 같이 왔던 일행은 한 시간 뒤에 올 거예요. 오늘은 내가 사기로 했거든. 그날 내가 좀 벗겨 먹었더니, 단단히 벼르고 있네. 미리 와서 와인 초이스를 해 버리려고요. 나는 와인 좀 보고 있을 테니까, 그날 앉았던 자리로 세팅 좀 해 주세요.”

“네.”

제법 괜찮은 와인을 많이 가지고 있는 가게다.

지난 30년 세월 동안 새로운 와인이 많이 등장을 한 거 같은데, 내 눈에 익은 와인들은 하나같이 수준이 있는 와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또 다른 인물.

그날 상황을 수습하고자 했던 매니저가 와인 셀러 앞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어떤 와인을 찾으십니까?”

“그날은 내가 아는 걸로 초이스를 했는데, 오늘은 좀 새로운 걸 맛보고 싶네요. 괜찮게 추천해 줄 만한 와인 있어요? 참고로 그날 시켰던 뒤폰쉬는 나랑 같이 왔던 아가씨 취향에 맞춘 거였지, 내 취향은 아니에요. 나는 혀보다 코가 즐거운 게 좋거든.”

“다크한 걸로 추천을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여기 이거, ‘뒤가피’죠?”

“네.”

“약간 이쪽 계열이면 좋겠어요.”

“이탈리아 와인을 즐기시는 모양이네요.”

재경모직 해외 지사를 처음 이탈리아에 열면서 와인을 제대로 배웠고, 많이 마셨으니까.

“그럼 ‘판티니’는 어떻습니까?”

“괜찮긴 한데 지금 크게 당기지는 않네요.”

“‘까르텔포르테’ 이건 어떻습니까?”

“괜찮나요? 이건 내가 아직 경험이 없어요.”

“뒤가피와 판티니를 괜찮게 즐기셨다면, 한 번쯤 경험해 보실 만한 녀석입니다.”

“한 시간 뒤에 일행이 올 거예요. 그 전에 한 잔만 따로 세팅해 주면 고맙겠어요.”

확실히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그날 낮에 왔을 때보다 가게 분위기가 크게 살아나고 있었다.

손님들도 많았고, 어두운 밤하늘에 뜨문뜨문 떠 있는 별들이 나쁘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루프톱에서 와인 한 잔을 담배 두 개피와 함께 천천히 즐기며 동네 골목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는데, 가게 한쪽에 차를 세워 놓고 차에서 내리는 하늘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이는 옥상에서 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가게 안으로 들어왔고, 이내 내가 기다리고 있는 옥상으로 올라왔다.

“뭐야? 언제 왔어?”

내가 와인을 즐기고 있는 모습과 미리 오픈이 되어 있는 와인병을 보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한 시간 전에.”

“설마 일부러 일찍 온 거야?”

“그럼 내가 시간도 못 볼까 봐?”

“왜? 왜 한 시간이나 일찍 온 건데?”

“오늘은 내가 사는 거잖아. 괜찮은 와인, 좀 더 풍미 있게 맛보라고.”

“그래서 먼저 도착해서 오픈을 시켜 놓고 있었다?”

“중간에 시간이 좀 뜨기도 했고.”

“이러면 복수가 힘들어지는데?”

“걱정하지 마. 그날 내가 시켰던 것보다 어쩌다 보니 더 비싼 걸 시키게 됐으니까. 와인이 괜찮아.”

일행이 왔으니 미리 주문했던 음식을 내어 달라고 종업원에게 말한 뒤, 직접 하늘이의 잔을 채워 주었다.

“무슨 부탁을 하겠다고 이렇게 준비가 거창해?”

“숨 좀 쉬어라, 이놈아. 기껏 한 시간이나 먼저 와서 와인 고르고, 준비까지 다 해 놓은 사람 성의가 있는데, 와인 맛도 안 보고 본론부터 꺼내기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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