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건데!
“채서린?”
채서린의 이름을 불러 놓고,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한 하늘이.
이내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며 묘한 표정으로 날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런 하늘이에게 물었다.
“원래 그 드라마 너희 미래기획에서 투자를 하기로 했다며?”
“그 스캔들 터진 게 투자 확정되기 바로 이틀 전이었지, 아마? 주연 배우에 관한 이슈는 투자가 담긴 뒤에도 얼마든지 회수할 명분이 되긴 해. 그런데도 우리 입장에선 어쨌거나 다행이었지. 귀찮은 상황은 안 벌어졌으니까.”
“그 투자, 다시 한번 검토해 볼 순 없어?”
싱긋이 웃으며 하늘이가 말했다.
“역시 손정훈. 무슨 뻘짓을 하든, 항상 내 예상을 지금처럼 크게 뛰어넘어 준단 말이야?”
뻘짓?
“그게 지금 날 여기까지 불러서 할 부탁이야?”
“그래서 육개장 먹으러 가자고 했잖아. 와인보다는 소주가 더 나을 것 같았거든.”
“나도 오빠를 우습게 생각하니까, 날 우습게 생각하는 건 상관이 없는데…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까지 우습게 생각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내가 언제?”
“할아버지가 나랑 오빠 짝지어 주고 싶어 하는 거 눈치챘어, 못 챘어?”
“네가 질색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런 사람이 나한테 섬싱이 진하게 있었던 여자 뒤를 봐주라고? 이걸 내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지? 이건 나도 나지만, 우리 할아버지, 아니 우리 집안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하늘이가 그렇게 오해를 할 수도 있겠다 싶다.
“내가 쉽게 생각한다고 해서 너희 집이 쉬운 집안이야?”
“뭐?”
“쉽게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다고. 그리고 나랑 채서린… 그런 관계 아니야.”
“푸흡… 아, 올해 들어 들은 이야기 중에 제일 재밌는 소리였다. 좋아. 기분은 좀 더러운데, 그래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고, 오히려 최근 들어 내가 그간 오빠를 오해하고 있었나… 하는 자기 의심에 빠져 있던 참이었는데, 다시 정신 바짝 차릴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기도 해. 그래서 잘 나왔다 싶기도 하고. 그런데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어.”
“난 아무리 찾아봐도 이 번지수가 맞는 거 같은데?”
“으으음… 잘못 찾았어. 그냥 나한테 돈을 빌려 달라고 해. 그럼 얼마든 안 받을 생각 하고 빌려줄 수도 있을 테니까. 그건 내 돈이니까. 하지만 회사 일에 관해선 내 기분대로 할 수가 없잖아.”
“…….”
“모든 사람이 다 손절을 치고 있는 채서린이를 주연으로 하는 드라마에 투자를 해라? 그걸 어떻게 해? CF 광고도 다 내려갔고, 채서린이는 개인 SNS 활동까지 접었어. 거기에 투자를 하는 건 미친 짓 아니겠어?”
“정말 투자의 기본도 모르고 있구나.”
“그렇다고 치자. 내가 요 근래 할아버지를 상대하는 오빠를 몇 번 봤잖아. 내가 말로는 오빠를 못 이길 거 같아. 그래서 말 길게 끌고 가면 괜히 말릴 수도 있을 거 같으니까, 그 내용은 내가 확실하게 선을 그어 줄게. 안돼.”
“안 돼?”
“응. 안 돼. 이미 철회가 된 투자고, 그 드라마 투자 접으면서 킵해 둔 드라마가 두 개나 더 있어.”
“보통 그런 스캔들이 터져서 해당 드라마가 엎어질 위기에 처하면 작가나 연출, 아님 제작사 측에서 어떻게든 엎어진 걸 다시 세워 볼 거라고 주연 배우를 바꾸는 방향으로 가지 않나?”
“그게 정상이지. 완전히 빠그라지기 전에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알아보는 게 정상인 건 맞아.”
“그런데 그 드라마는 제작사는 둘째 치더라도 작가랑 연출이 끝까지 채서린을 고집하고 있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이유야 많겠지. 채서린. 인간적으로도 매력적인 사람이야. 나도 몇 번 만나 본 적 있고. 주위 사람 잘 챙기고, 자기 좀 잘나간다고 촬영 스태프들한테 갑질 같은 거 일절 하지 않고, 오히려 촬영장에서는 막내 스태프들까지 잘 챙기기로 아주 유명해.”
나한테 한 것만 봐도 충분히 그럴 거 같다.
다소 억센 구석은 있지만, 마음이 여리고, 보기와는 다르게 순진한 구석도 있는 친구가 분명했다.
“그런데 사람이 좋다고 그 사람이 실력까지 좋은 건 아니잖아.”
“채서린이 실력이 없어?”
“이번에 스캔들 터지고 나서 스스로 증명을 했지?”
“무슨 말이야?”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어디에 있어? 우리가 왜 투자를 철회했는데? 채서린 정도면 자기한테 딸려 있는 식구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 그 소속사도 결국은 채서린이 다 먹여 살린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그 스캔들 터지고 어떠한 해명도 내놓지 않고 잠적을 했지? 그건 이미지로 먹고사는 연예인이 프로로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니거든. 더군다나 채서린 정도 되는 톱급 연예인이.”
“…….”
“우리가 그 드라마에 투자를 철회하기로 결정한 건 스캔들 때문이 아니야. 요즘 시대에 그 정도 스캔들이 대수야? 채서린이 음주 운전을 했어? 마약을 했어? 해외 원정 도박을 했어? 그런 이슈도 시간만 조금 지나면 금세 덮이는 게 그쪽 바닥이야. 하물며 연예계 생활 10년 넘게 한 채서린한테 도킹 스캔들? 요즘 팬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다 이해해. 처음 스캔들 터졌을 때도 스캔들 자체를 까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걔도 사람이야.”
“…뭐?”
“네 말대로 프로로서 아쉬운 행동을 한 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걔도 사람이야.”
“누가 사람 아니래?”
“너는 미래금융 장녀 장하늘이 아닌, 오로지 너로서의 시간이 필요했던 적 없어?”
“아니? 난 그런 적 없는데?”
아쉽다.
채서린이 건을 하늘이를 통해 해결하지 못하게 된 게 아쉬운 게 아니라, 하늘이가 이렇게까지 방어적인 성격이라는 게 많이 아쉬웠다.
정훈이의 몸으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하늘이는 뭔가 자기만의 철벽에 확실한 녀석인 거 같다.
그 철벽 뒤에 숨어, 자기가 판단했을 때 중요하지 않은 내용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 녀석.
조금만 깨어 있는 놈이라면, 조금만 나에게 마음을 열어 준다면 더 많은 걸 함께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아무리 태산이 놈 손녀라도 사업적인 취향이나 성격이 맞지 않는 이놈과 앞으로 내가 뭘 더 해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겨나고 있었다.
“오케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 네가 그렇게까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게 맞는 거겠지.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와인이나 마시자.”
“……?”
“너 근데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저녁 같이 먹자는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뭐 좀 더 시키자. 아까 옆 테이블에서 먹는 거 보니까, 스테이크도 괜찮게 하는 거 같은데, 스테이크 좀 시킬까?”
종업원을 불러 메뉴 북을 새로 받았고, 거기에서 적당한 포션의 스테이크를 주문하겠다고 하늘이에게 메뉴 북을 넘기려고 할 때였다.
“그냥 치즈 플레이트만 하나 더 시켜. 치즈 맛있네. 빈속이었다면 모르겠는데, 치즈가 먼저 들어가서 그런지 식사는 별로 생각이 없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치즈 플레이트만 새로 하나 더 시켜 놓고, 저 멀리 남산 타워를 바라보며 와인 맛에 집중을 했다.
그런 내게 하늘이가 먼저 채서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하나만 물어보자.”
“두 개 물어봐도 괜찮아.”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다시 하늘이가 태산이의 손녀로 보였다.
그래, 그간 멀리에서나마 태산이가 정엽이를 그렇게까지 따로 챙겨 왔는데, 나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할 정도로 채서린과 관계가 깊었던 거야?”
“뭐?”
“다른 뜻이 있어서 물어보는 건 아니고, 내가 오빠 어장 관리 능력을 잘 알잖아, 요란다 때문에.”
“그 이름은 이제 좀 그만 나오면 안 되냐? 나 진짜 이제 요란다라는 이름에 노이로제 걸리겠다.”
“어쩌겠어? 나한테 손정훈이라는 이름과 요란다라는 이름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름인데. 그 이름을 더 안 들으려면 날 안 만나야 해.”
“너 하는 거 보니까 내가 그 부분도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겠다, 야.”
“암튼, 혹시 아직 만나는… 관계야?”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는데도 계속 물어보는 걸 보면, 넌 내가 그냥 그렇다고 대답을 하길 바라는 거 같다?”
“틀렸어.”
고개를 저으며 하늘이가 말했다.
“확인하는 거였어. 그리고 오빠가 아니라고 하니까 말하는 거야.”
“뭘?”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재벌 걱정, 연예인 걱정이야.”
“뭐?”
“채서린 강남에 320억짜리 자기 건물 가지고 있어.”
“…….”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어떻고? 채서린한테 부탁을 받은 게 아니라면, 오빠가 걱정할 상대가 아니란 말이야. 아이돌 연습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 자기 힘으로 이뤄 낸 거야. 그런 채서린이 연예인 생활 그만둔다고 굶기야 하겠어?”
태산이가 하늘이 이 녀석을 보면서 생각이 참 많았겠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왜 이 녀석 옆에 날 붙이려고 매주 자기 집으로 날 부르는지도 이젠 확실히 알 거 같았고.
“왜?”
“뭐가?”
“왜 그런 눈으로 봐?”
“내가 어떻게 봤는데?”
“꼭… 왜 그렇게 생각이 짧냐는 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잖아.”
“내가?”
“표정 바꿔. 기분 별로야.”
“너는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의 기준이 돈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
와인 잔을 내려놓고 하늘이에게 말했다.
“채서린이 강남에 320억짜리 자기 건물이 있어? 우와, 부자네. 지금의 나보다 훨씬 부자네. 나보다 훨씬 돈이 많으니까, 나는 채서린을 걱정해 줄 자격이 안 되는 거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거든?”
“그런 눈으로 무슨 투자를 한다는 거냐, 너는?”
“…….”
“네 말대로 채서린은 아이돌 연습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자기 힘만으로 여기까지 왔어. 그 힘든 일 그만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었을까. 마음 편히 사람도 못 만나, 연애도 못 해. 연애를 하고 싶어도 세상에 자기를 알아보는 눈이 너무 많아 호텔 룸 아니면 데이트를 하지도 못해. 보통의 사람들은 그런 감옥 같은 생활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는 한 달도 못 버텨. 그런데 그걸 채서린은 10년 넘게 버티면서 하고 있어. 왜? 자기가 하는 일이 좋으니까.”
“……!”
“그 힘든 걸 다 참을 수 있을 만큼, 다른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연예계 생활이 좋으니까. 물론 힘든 날도 많겠지. 그런데도 그걸 10년 넘게 참을 수 있었을 만큼 좋아하니까, 버틸 수 있었던 거 아니겠어? 그래서 지금도 버티고 있는 중이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버틸 수 있다고 스스로 채찍질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냐고.”
“…….”
“너무 혼자 일어서는 게 당연한 사람이고, 거기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지금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도 어떻게 도와 달란 손을 내미는지, 누구한테 손을 내밀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거 같아 보였어.”
“…….”
“그래서 그 스캔들의 지분 90퍼센트 이상은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못 본 척할 수가 없어서 너한테 이런 부탁까지 한 거고. 네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돼서 더는 부탁을 안 할 거야. 그런데 하늘아.”
“…….”
“남 이야기 그렇게 쉽게 하는 거 아냐. 그거 너한테 좋을 거 하나 없어. 너는 죽어라 놀지도 않고 어떻게든 미래금융을 잘 이끌어 보겠다고 노력을 하는데, 밖에서 널 잘 모르는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지금 저 위치에 있는 건 다 부모 잘 만난 덕이라고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노력을 싸잡아 평가를 해 버리면… 넌 좋겠냐?”
“오빠 이제 봤더니 꼰대기까지 있네?”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요즘 사람들이 꼰대라고 한다면 난 꼰대가 맞아. 난 차라리 꼰대 소리 듣는 게 낫지, 그 소리 듣기 싫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것도 없는 자리에서 내 멋대로 평가하는 사람에게 그건 잘못된 거라는 말도 못 하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아.”
“…….”
“와인 마시자. 치즈 새로 나오네. 채서린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 더는 하지 말자. 하면 또 너한테 꼰대 소리 들을 거 같으니까.”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하늘이는 분했다.
너무 분한데, 그 분함을 한 번 보고 끝일 대리 기사 앞에서조차 마음 편히 표출을 할 수 없는 하늘이었다.
하늘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항상 교양이 있고, 누굴 상대하든 예의를 지켜야 했으며, 약자들을 상대로 동정이란 감정을 느낄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
그런 강박 속에서 지금껏 살아왔다.
그런 강박으로부터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상대는 정훈이었고.
하늘이에게 있어 절제 없고 무분별한 정훈이의 대학 생활은 그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희열이었다.
저런 인간이 있어 주기에 나란 사람이 더 빛날 수 있단 생각에.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천하의 개망나니 소리나 듣던 손정훈이 저런 단단한 소신과 깊이 있는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
도대체 뭔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건데!
놀 거 다 놀고, 자기 하고 싶은 건 그게 뭐든 다 해야만 하는 인간 아니었나?
그게 윤리적,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짓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정훈이에 비해 하늘이는 정말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하늘이를 배신하고 있었다.
처음엔 정훈이라는 인간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람 보는 눈을 잠시 의심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젠 알 것 같다.
할아버지의 사람 보는 눈을 잠시라도 의심해 볼 정도의 역량마저 하늘이 자신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걸.
다음 날 하늘이는 출근과 동시에 채서린의 기획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래기획의 장하늘 팀장입니다.”
―네, 팀장님!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일전에 진행이 되다 엎어졌던 악녀검사에 관한 내용으로 전화 드렸어요.”
―네? 아, 악녀검사요?
“네. 그 건으로 채서린 씨와 잠시 미팅을 가졌음 싶은데, 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요?”
―호, 혹시 지금 악녀검사라고 하신 거 맞죠?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아뇨. 악녀검사 건으로 채서린 씨와 잠시 미팅을 가져 보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당연히 되죠.
“아직 제작사 측과는 따로 나눈 이야기가 없어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