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한테 이런 부탁을 하네요 (87/303)

저한테 이런 부탁을 하네요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채서린은 그런 심정으로 소속사 대표실을 찾았다.

“왔어?”

“네.”

소속사 대표는 보고 있던 자료들을 미련 없이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파 자리로 직접 채서린을 안내한 뒤 자리에 앉았다.

“점심이나 같이하자니까.”

“식단 조절 중. 간만에 찾아온 비수기라고 그동안 너무 퍼져 있었어요.”

“채서린이한테 비수기가 어딨어?”

“왜 없어요? 누가 봐도 지금이 비수기인데.”

“커피는 괜찮잖아? 뭐 마실래?”

“조금 이따가요. 장 팀장님 오면 그때 같이 마셔요. 커피도 많이 마시면 살쪄요.”

미래기획 쪽에서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 대표는 채서린에게 당부하고 싶은 내용이 있었다.

“장 팀장은 서린이 너도 잘 알지?”

“개인적으로는 모르죠. 미래금융 사주 장손녀라는 거 정도? 그게 끝이에요.”

“그럼 다 아는 거지. 그쪽으로 와 달라는 게 아니라, 직접 오겠다고 했어. 오피셜한 내용은 아닐 거란 말이지.”

“이 바닥에서 계약서 도장 찍기 전까지 오피셜한 게 어디에 있어?”

채서린의 말이라면 무조건 수긍부터 하고 보는 대표였지만, 이번 사안 앞에선 어느 정도 단호한 입장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가 만나 달라고 사정을 한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온 거야. 제작사 측이랑도 접촉이 있었던 게 아니래.”

그 부분이 채서린에게 일말의 희망을 안겨 주고 있는 거였다.

현재 미래기획 쪽과 이야기를 나눌 만한 내용은 편성 직전까지 갔다가 엎어진 드라마 <악녀검사>에 관한 것밖에 없다.

미래기획이 중간에 끼어 있는 CF도 몇 건 있긴 했지만, 그것들은 이미 진작에 다 해결이 난 상태이고.

“이거 우리 오늘 무조건 잡아야 한다, 서린아.”

“잡긴 뭘 잡아요. 이미 엎어진 건데.”

“왜 그러냐. 다 알고 와 놓고 왜 또 삐딱선을 타?”

삐딱선을 타는 게 아니라, 그만큼 채서린이 조심스러운 상태라는 걸 대표는 모르고 있었다.

채서린이라고 왜 모를까.

누구보다 잘 알지.

조금의 틈만 상대가 보인다면 바짓가랑이,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게 대수겠나.

하지만 지난 몇 달간 해당 스캔들 이슈로 소속사 쪽으로 너무 많은 피해를 부담시켰다.

그 부분에 있어 이젠 가족이나 다름없는 대표와 편하게 마주 앉아 식사 한 끼 하는 게 미안해서 부담스러울 정도이고.

괜히 여기에서 자기까지 덩달아 대표의 기대를 부채질해 버리면, 그랬다가 별 성과 없는 미팅이 되어 버리면 거기에서 받게 될 대표의 상실감과 실망스러움이 배가 될 것이라는 걸 알기에 애써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는 척해야만 했다.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며 채서린이 건조하게 물었다.

“그런데 악녀검사 투자 건은 보통 투자 건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걸 팀장 선이 결정을 할 수 있는 건가?”

채서린은 불안한 마음을 에둘러서 대표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달래고 있었다.

“그 팀장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거지. 배우라고 다 똑같은 배우고, 연출이라고 다 같은 연출이야? 작가라고 다 같은 작가냐고. 그리고 우리가 그런 거까지 알아서 뭐 하냐? 포인트는 우리도 엎어진 거라 생각하고 잊고 있었던 건으로 미래기획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는 거고, 그 연락이 장 팀장 연락이라는 거야.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고.”

“흠….”

“너 장 팀장하고 서로 어색하고 그런 사이 아니잖아?”

“기억이 잘 안 나요. 프레지아 꽃향기 종방 파티 때랑 초특급 연애 기사 크랭크 인 할 때였나, 시사회 때였나? 아무튼, 두세 번 정도 봤던 거 같긴 한데,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길게 나눠 본 적은 없었던 거 같아.”

“그럼 된 거지. 불편한 자리로 만난 적은 없었단 소리잖아.”

“불편하게 만날 일이 어디에 있어요. 지금 이 자리가 제일 불편하겠네.”

“그럼 됐어. 오늘은 콘셉트를 좀 말랑말랑하게 잡아 보자, 서린아.”

“언제는 내가 딱딱했어?”

“지금 이런 설정 안 좋아. 상당히 안 좋아. 표정 좀 풀고.”

“어후, 됐어. 내가 바보예요? 오면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만나기도 전에 아군 힘 뺄 일 있어? 내가 지금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요.”

“걸리는 거? 뭐? 뭐가 걸리는데?”

“있어, 그런 게. 배우가 눈뜨면 하는 게 표정 관리인데, 뭘 그런 걸 걱정해?”

그리고 얼마 뒤, 바깥에서 대표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채서린은 눈만 살짝 돌려 대표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상대가 온 모양이다.

대표 역시 입고 있던 재킷을 다시 한번 정돈한 뒤, 연출된 음성으로 대답을 했다.

“들어와요.”

대표실 안으로 실장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로 장하늘 미래기획 팀장이 따라 들어왔다.

채서린과 대표는 짐짓 벌써 도착을 했느냐는 식으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장하늘 팀장을 반갑게 맞이했다.

대표의 호들갑은 극에 달했다.

“아이고오오오… 장 팀장님!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으로. 이게 진짜 얼마 만입니까? 프레지아 꽃향기 종방 파티 때 이후로 처음이죠?”

“그 파티에 대표님도 계셨던가요?”

“이거 섭섭합니다? 2차 가는 중간에 제가 편의점에서 스크류바 사서 나눠 드리고 했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

“아, 맞네. 그랬네요.”

박수까지 쳐 가며 하늘이가 당시의 상황을 기억해 냈다.

“1차 때도 중간에 오셔서 2차 때도 소리 소문 없이 먼저 가셨죠. 계산만 하시고.”

“사실 그런 자리에 배우 소속사 대표가 얼굴 들이밀고 하면 타 소속사 배우들이 불편해하잖아요. 그때도 연은영 작가가 계속 오라고 연락을 해서 어쩔 수 없이 갔던 거지, 아니었음 안 갔어요. 아무튼 이쪽으로 앉으세요.”

장하늘 팀장을 안으로 안내한 실장이 마실 것을 물었고, 그걸 준비해서 다시 대표실을 찾는 동안 세 사람은 최대한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 대표실 안으로 커피가 들어온 뒤에야 장하늘 팀장이 조심스럽게 대표에게 양해를 구했다.

“실은 대표님.”

“네, 팀장님.”

“제가 서린 씨한테 개인적으로 물어서 확인을 하고 싶은 내용이 좀 있어요.”

“혹시 제가 자리를 비켜 드려야 하는 그런 그림인가요?”

하늘이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눈치가 밥줄인 대표였기에 곧장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으세요?”

“꺼내 보기 전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어떻게 하지? 시간이 좀 어중간하긴 한데, 그래도 두 분이 이야기 나누시고 나중에 저까지 해서 가볍게 생맥주나 한잔하러 나갈까요?”

하늘이는 천하의 채서린이를 데리고 있는 소속사의 대표가 이렇게까지 극진한 친절을 보이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더는 감정 노동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악녀검사 건은 제가 서린 씨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눠 본 후에 최대한 긍정적인 투자 검토가 다시 이뤄질 수 있도록 보고서를 만들어 볼 생각이에요.”

“오우… 그거 너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재추진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선 우선은 제가 먼저 확신을 가져야 할 거 같아서요.”

“그럼요, 그럼요. 당연하죠. 그러면 저는 잠시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고요, 서린아. 알지? 궁금해하시는 내용 있으면 편하게 말씀드려.”

대표가 나가고 난 후, 그 대표실 안으로는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누구에게나 처음이라는 건 참 소중한 거 같아요.”

하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처음이 그리 나쁘지 않은 기억이라고 하면 말이에요.”

“처음이요?”

“프레지아 꽃향기. 대학 졸업하고 미래기획에 입사해서 제가 맡았던 첫 드라마 투자 기획이었어요.”

빨대로 커피를 조금 빨아 마신 후 채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테스트를 받은 거였죠, 제 입장에선. 투자 제의가 들어와 있는 드라마 대본이랑 영화 시나리오를 이만큼 받았어요.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보래요. 제목이 좀 촌스럽긴 했지만, 이상하게 그 많은 대본, 시나리오 중에 프레지아 꽃향기가 가장 먼저 제 눈에 들어왔어요. 아니나 다를까 막상 읽어 봤는데, 제가 좋아하는 로코 장르 드라마인 거예요. 주인공 지아에게 감정 이입을 해서 대본을 넘기면 넘길수록 지아 역을 맡을 수 있는 배우는 한 명뿐이란 생각밖에 안 들었죠. 배우 채서린 씨가 지아 역을 입으면 참 그림이 예쁘게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기억이 나네요. 처음 대본을 받고 일정이 안 맞아서 거절했는데, 준비 중인 작품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라는 대답을 받았죠. 다른 작가님도 아니고 연은영 작가님이라 한 번 거절을 한 상태에서 다시 또 거절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그걸 알고 제가 연은영 작가님을 많이 푸시했었죠.”

“그러셨어요? 이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듣는 내용인데요?”

“연은영 작가님이라고 그런 내용을 배우들한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으셨겠어요? 작가님 커리어가 있는데.”

“하긴. 그건 그렇네요.”

“서린 씨가 그 역을 맡겠다 했을 때 저 정말 기뻤어요. 그리고 그때 처음 알았죠. 아, 이런 게 쾌감이라는 거구나. 이런 쾌감 때문에 사람들이 일이라는 걸 하는 거구나… 하는걸요.”

하늘이는 그 쾌감의 입구까지 채서린을 서서히 몰아 놓고 본론을 꺼냈다.

“악녀검사 투자 철회됐을 때, 많이 힘드셨죠?”

“그동안 하겠다 결정을 했던 작품 중 중간에 엎어졌던 작품들이 많아요. 반대로 프레지아 꽃향기처럼 이건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했던 작품이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던 적도 많고요.”

이번엔 하늘이가 채서린의 말을 들으며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다.

“모든 작품을 선택하고 준비를 할 때 최선을 다해요. 장르, 페이 상관없이 어느 작품 하나 설렁설렁 선택해서 들어가 본 적이 저는 아직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결과물은 다 다르게 나오죠. 노력과 결과가 항상 비례할 순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이쪽 바닥 일이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악녀검사가 엎어졌을 땐… 솔직히 많이 힘들더라고요.”

“그러셨을 거 같아요.”

“흔한 일이라고 치부하고 넘기기엔 제 상황이 그리 녹록지 못했고, 다를 때처럼 이번엔 저로 인해 함께 캐스팅이 될 소속사 배우들을 다른 작품으로 데리고 갈 자신이 솔직히 없었어요.”

“많이 서운하셨겠어요, 저희한테.”

진심이라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채서린이 말했다.

“그런 감정을 가져 볼 여유조차 없었죠. 우선은 대본, 연출이 다 준비가 된 상태에서 제작사가 미래기획의 투자를 선택받은 거였잖아요. 그게 엎어진 거니까 우선은 제작사 측에게 너무 미안했죠. 작가님도 고집이 보통이 아니신 분이잖아요. 뭐 예쁜 게 있다고 저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시는 건지… 막막했지, 서운해하고 자시고 할 겨를 같은 건 없었어요.”

“지금 저한테 하셨던 이야기들, 힐링광장에 단독 게스트로 나가서 똑같이 해 주실 수 있겠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채서린이 물었다.

“힐링광장이요? 예능 프로?”

“네.”

“거길… 제가 왜요?”

“스캔들로 잘못 입혀진 이미지, 드라마 슈팅 들어가기 전에 한 번 제대로 빨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

“예능 호흡도 좋으시잖아요. 제가 지금부터 미래기획이 악녀검사에 재투자를 결정할 수 있도록 유도를 해 볼까 해요.”

“…….”

“그러기 위해선 투자에 근거가 필요하겠죠. 같은 여자로서 정말 드리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해당 도킹 스캔들로 잘못 입혀진 현재 채서린 씨의 이미지로는 저희 미래기획뿐 아니라 그 어떤 영상 투자사로부터도 투자를 받아 내기는 힘들 거예요.”

채서린 입장에선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힐링광장이라면… 나쁘지 않을 거 같네요.”

“대본은 저희 쪽에서 준비를 할 거예요.”

“대본이요?”

“힐링광장 나가셔서 금방 저한테 하셨던 것처럼만 해 주시면 될 거 같아요. 그건 그렇게 정리를 하는 걸로 하면 될 거 같고, 지금부터는 개인적인 질문을 좀 해 볼게요. 손정훈. 아직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예요?”

채서린은 무방비 상태였다.

이렇게 대놓고 허를 찌르며 들어올 줄은 몰랐다.

채서린이 선뜻 입을 못 열고 있자, 하늘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악녀검사에 대한 재투자를 고려해 달라고 저한테 부탁을 한 사람이 바로 손정훈이에요.”

순간 채서린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하늘이는 침착했다.

“저랑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요. 저랑은 대학도 같이 나왔어요. 양가 할아버지가 아주 막역한 사이셨어요. 재경 그룹을 나와 미래금융을 설립하시기 전까지, 제 할아버지는 재경 그룹의 그룹 본사 전무로 반평생을 사신 분이에요.”

“아….”

“재경 그룹 역시 손중길 회장님과 제 할아버지가 동업하면서 출발한 기업이라고 보시면 될 거예요. 제가 드린 질문을 불쾌하게 받으실 거 같아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그 부분은 이쯤 하면 충분할 거 같으니까 각설을 할게요. 지금부터는 서린 씨 대답을 듣고 싶은데….”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면, 그리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악녀검사에 대한 재투자를 그 사람이 팀장님께 부탁을 했다면 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보시지 그러셨어요?”

“자기는 아니래요.”

“그럼 그 말이 맞는 거겠죠.”

“그렇게 관대하고 이해하고 넘어갈 내용이었음 제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가 있었을까요?”

채서린은 생각이 복잡해졌다.

앞에 앉은 상대가 자신에게 내미는 게 칼날인 것인지 아님 손인 것인지조차 구별이 안 가고 있었다.

아무리 현재 상황이 안 좋다고 하더라도, 그 상대가 재벌가 사람이라도 상대가 자신에게 칼날을 들이밀고 있는 거라면 함께 칼날을 맞대고야 마는 채서린이다.

하지만 내밀고 있는 게 칼날이 아닌 손이라면 자세를 숙여야만 한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여쭤보는 건데요, 팀장님.”

“네.”

“악녀검사. 저한테도 절실한 내용이긴 해요. 그런데 팀장님한테 그런 부탁을 한 사람은 따로 있고, 그 사람이 현재 저랑 따로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는 말을 했다면, 상식적으로는 그 사람 말을 믿어 주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집안끼리도 각별한 사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왜 관대한 이해가 필요한 건지,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네요.”

“할아버지들 사이에 오래된 약속 같은 게 있으셨던 모양이에요. 그 약속을 지키고 싶으신 건지, 제 할아버지는 저와 손정훈의 관계가 발전되길 기대하고 계시고요.”

“…….”

“그 내용을 손정훈도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저한테 이런 부탁을 하네요. 서린 씨가 만약 지금 제 입장과 비슷한 배역을 소화해 내야 한다면, 그 감정선을 어떻게 잡으실 거 같으세요?”

“…….”

“충분히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된다… 싶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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