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나?
지금 장하늘 팀장이 자신을 향해 내밀고 있는 건 칼날도 아니고 손도 아니었다.
하지만 채서린은 언제든 그것이 칼날이 될 수도 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해 놓고 채서린이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서로 연락 주고받는 사이 아니라고요.”
“난 서린 씨를 믿는데, 그리고 정말 이렇게까지는 안 하고 싶고, 하면 주제 넘는 짓이라는 것도 아는데… 정말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서린 씨 폰을 잠시 볼 수 있을까요?”
“폰은 왜요?”
그간 잘 관리하고 있던 표정에 불쾌한 감정을 띄우며 채서린이 말했다.
하늘이를 쳐다보는 눈빛마저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저 역시 악녀검사에 거는 기대가 컸어요.”
“…….”
“작가님이 작품 설정을 하실 때부터 서린 씨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쓰셨다고 하셔서 처음부터 아예 서린 씨만 상상하며 대본을 확인했고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투자 철회할 때도 제가 끝까지 철회가 아닌 보류를 하자고 미련을 못 버렸던 작품이기도 해요. 그런데요, 서린 씨. 제가 바보가 될 수는 없잖아요. 손정훈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 그런 확신이 서지 않으면, 이건 별개의 내용이긴 해도 저는 악녀검사에 투자를 진행하기가 힘들어요.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제 입장이 이해가 잘 안 되시나요?”
채서린은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 봤다.
손정훈과 나눴던 카톡 대화 내용.
어떤 내용이 기록에 남아 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장 팀장 앞에서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럼 저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해 둘게요.”
“네.”
“저는 정훈이 오빠를 만날 당시 장 팀장님과 정훈이 오빠가 그런 관계라는 걸 전혀 몰랐어요. 스릴은 즐기는 편인데, 제가 책임을 질 수 있는 스릴만 즐기지, 그 스릴을 다른 사람한테 피해까지 줘 가며 즐기는 취향은 아니거든요. 이건 확실하게 해 두고 싶어요.”
미묘한 뉘앙스로 하늘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만약 스캔들이 터진 이후로 정말 손정훈과 연락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 전까지는 할아버지가 저랑 손정훈의 관계를 그런 방향에서 기대하시지 않았거든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고요.”
당당한 척했지만, 채서린은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악녀검사.
다시 진행을 시킬 수만 있으면 어떻게든 진행을 시켜 보고 싶은 드라마다.
그리고 장 팀장의 요구가 그녀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강압적이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았고.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요구라는 생각을 채서린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채서린은 정훈이가 기억을 잃었다는 비밀을 지켜 주겠다 약속을 했다.
그게 마음에 걸렸던 것뿐이지, 자신의 폰으로 손정훈과의 대화 기록을 보여 주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
결국 채서린은 지푸라기를 잡기 위해 손정훈에 대한 의리, 그와 한 약속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정훈이 오빠 현재 상태에 대해서 본인한테 직접 들은 내용이 뭐라도 있으세요?”
“현재 상태요? 무슨 상태요?”
그와 한 약속을 포기하는 순간, 채서린은 정훈이와 장 팀장의 관계가 자신으로 인해 복잡해지는 것만을 막아 주는 게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역할은 오스카상을 준다고 거절을 할 텐데, 현실이라 피할 수도 없고 지금 제 입장이 상당히 난처하네요.”
“저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에요. 그저 성격이 그래요. 두 사람의 정확한 관계를 알아야, 제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겠다 싶어서요.”
“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이게….”
“……?”
“하… 팀장님.”
“네.”
“저 전자 담배인데, 담배 좀 빨아도 될까요?”
“편하게 하세요.”
채서린은 가방에서 전자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너스레를 떨었다.
“어후, 다시 공황 오는 줄. 실은요, 팀장님. 그 스캔들. 저 진짜 억울한 스캔들이거든요. 물론 꼬리가 길어져서 밟혔던 스캔들은 맞아요. 데이트 몇 번 했어요. 그런데 그 스캔들은 서로 빠빠이를 한 다음에, 한 달? 아니지, 거의 두 달 뒤에 터진 스캔들이에요.”
“서린 씨 솔직한 건 세상 사람들 다 알아요. 근데도 저는 서린 씨 폰으로 아직 두 사람이 연락을 하고 지내는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좀 알고 싶어요.”
“보여 드리는 거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그 전에요. 뭐 때문에 팀장님한테 그런 부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팀장님도 참 대단한 분이신 거 같아요. 앞으로 좋은 관계로 발전을 해 나갈 사람이 그런 부탁을 한다고 이렇게 찾아오신 걸 보면요. 저 같았음 그 자리에서 바로 뺨 때렸을 거예요. 말이야, 방구야? 어디다 대고 그딴 부탁을 해? 안 그래요?”
그렇게 말해 놓고 장 팀장의 표정 변화를 조심히 살피는 채서린이었다.
“저는 반대였어요. 오히려 고맙던데요?”
“고마워요?”
“직접 서린 씨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거잖아요.”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그건 그렇고, 조금 전에 말한 상태라는 건 무슨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담배 연기를 최대한 장 팀장이 앉아 있는 쪽과 반대 방향으로 내뿜으며 채서린이 말했다.
“그 스캔들에 저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아마 손정훈일 거예요.”
“……?”
“난 내가 하기라도 했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관계는 제 의지였다고요.”
“그 말은 손정훈은 본인 의지가 아니었단 말이에요?”
“시작할 땐 본인 의지가 맞았는데, 그런데 그게 본인 의지가 아닌 게 되어 버렸어요.”
“서린 씨. 제가 지금 서린 씨하고 말장난하겠다고 이렇게 찾아온 게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지금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악녀검사라는 지금의 서린 씨에게 꼭 필요한 조건까지 맞춰서 찾아온 건 쿨해서도 아니고.”
채서린 역시 꽤나 단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장난하는 거 아니고요. 그게 사실이에요.”
“…….”
“손정훈. 기억이 없어요.”
하늘이는 두 눈만 수차례 깜빡거렸다.
“뭐가 없어요?”
“저와 있었던 관계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요.”
“왜요?”
“기억을 잃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제가 딱 지금 팀장님 같은 기분이었어요. 처음엔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는지,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이런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건지 짜증이 다 나더라니까요?”
“…….”
“지금 정훈이 오빠, 부분적인 기억 상실증에 걸렸어요. 저를 모르더라고요. 그 스캔들 터진 날. 기사에 나온 사진에는 편집이 되어서 안 나오는데, 제가 방으로 올라간 시간대하고 정훈이 오빠가 지하 주차장에서 차에 타는 시간대를 확인해 보면 길어 봤자 그 차이가 20분이에요. 저한테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보겠다고 절 호텔로 부른 거였어요.”
“…….”
“자기도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모르더라고요. 그런데 기억 상실인 건 확실해요. 사람이 내가 아는 손정훈이 아니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고, 대학까지 함께 다녔다면 저보다 팀장님이 더 잘 아실 거 아니에요. 팀장님이 알고 있는 예전 정훈이 오빠와, 최근의 정훈이 오빠 사이에 차이점 같은 거 못 느끼셨어요?”
하늘이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혼이 뜨는 기분이라고 할까?
“말도 안 돼….”
“자요. 여기, 카톡 내용. 여기 보시면 알겠지만, 그런 내용이 나오죠? 그리고 이건 스캔들 터지고 다음 날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에요. 이게 마지막이잖아요.”
“…….”
“통화 목록도 보여 드려요? 손정훈, 손정훈… 어휴, 한참 내려가야 하네. 그냥 이름으로 찾으면 목록도 나오나? 나오네. 보세요. 통화 기록도 스캔들 터지고 다음 날 한 번 한 게 마지막이잖아요. 이날도 괜히 자기가 그날 호텔에 불러서 이렇게 된 거 같아, 저한테 미안하다고 전화를 건 거예요.”
“부분 기억 상실이라고요?”
“저한테 말씀하신 것만큼 서로 그렇게 가깝게 지내 온 사이는 아니셨던 모양이에요? 보통은 사람이 그 정도로 눈에 띄게 바뀌면, 가까운 사람들은 눈치를 채지 않나?”
“사람이 바뀌었다…?”
“저는 너무 크게 바뀐 거 같아서 아예 적응이 안 될 정도였어요. 진짜 못 느끼셨어요?”
* * *
부분 기억 상실?
분명 말이 안 되는데, 한순간 아예 딴사람이 되어 나타난 손정훈을 생각하면 그것 말고는 변한 손정훈의 모습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늘이는 채서린과 헤어진 후 곧바로 차를 몰았다.
재경모직 본사로 차 핸들을 돌리며 정훈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금 바빠?”
―그럭저럭.
“15분 뒤에 도착할 거 같은데, 잠깐이면 되니까 회사 앞으로 좀 나와.”
―지금? 지금 15분 뒤?
“어.”
―야, 인마. 지금 근무 시간이야.
“중요한 내용이야. 15분. 잠시면 돼. 뭐 좀 확인만 하면 끝나는 일이야.”
―무슨 확인? 통화로는 안 되는 거야?
“얼굴을 보고 해야 하는 거야.”
―뭔데 그래? 그러지 말고 그럴 거면 그냥 퇴근 후에 같이 저녁이나 먹든지.
“아니, 지금 해야겠어.”
―자식, 거 더럽게 일방통행이네. 야, 인마.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짜증이 날 수밖에 없어.
“짜증 같은 건 앞으로 내가 다 받아 줄 수도 있어.”
―…뭐?
“그리고 확인만 끝나면… 앞으로는 오빠한테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나가는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잠깐만 나와. 잠깐이면 돼.”
재경모직 본사 앞 커피 전문점.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그 안으로 들어서니, 이미 정훈이가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 빨리 올라가 봐야 돼. 30분만 자리를 비우겠다 말해 놓고 내려온 거야.”
“10분. 아니 5분이면 돼.”
하늘이는 정훈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요란다 있잖아.”
“야아.”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전에는 보여 준 적 없던 단호하고 엄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정훈이.
“넌 회사 일이 장난이야?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똥오줌 구분을 못 해서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하늘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요란다한테 도대체 왜 그랬던 거야?”
“정말 실망스럽다. 이건 아닌 거야. 내가 널 잘못 봤어.”
“요란다랑 그날 호텔방에서 뭐 했어?”
“그만해라. 더 하면 나 진짜 화낸다. 이거 장난 아니야.”
“그것만 대답해.”
“하. 네 할아버지는 너 이런 성격인 거 아시니?”
“요란다랑 그날 호텔방에서 뭐 했어?”
“다 큰 남녀가 호텔방에 같이 들어가서 할 게 뭐가 있겠어?”
“정말 했어?”
“왜? 정말 했으면 실망이야? 그 정도도 모르고 그간 나한테 요란다란 이름에 노이로제가 생기게 만든 거였어?”
“할 수가 없잖아.”
“왜 없어? 그건 내가 몇 번이나 너한테 미안하다고….”
“오빠는 요란다랑 같이 호텔에 간 적이 없으니까.”
“……!”
“오빠는 요란다랑 같이 호텔에 간 적이 없어. 그런데 간 적도 없는 호텔에서 요란다랑 뭘 했다는 거야?”
이젠 채서린에게 들은 말에 확신을 가지며 하늘이가 다시 물었다.
“요란다 어느 나라 애야?”
“뭐 하냐, 지금?”
“요란다 어느 나라 애냐고.”
하늘이의 눈에 침을 삼키느라 정훈이의 목젖이 울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재차 물었다.
“몰라?”
“기억이… 잘 안 나네.”
“그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나? 학교에서 나랑 같이 다닌 유일한 한국 애가 요란다였는데.”
“아 참, 맞아. 그랬지. 갑자기 물어보니까 당황해서….”
“요란다 미국 앤데?”
정훈이가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런 정훈이를 더는 괴롭히지 않겠다는 투로 하늘이가 마무리를 지었다.
“기억이 잘 안 나는 게 아니라, 기억이 아예 없는 거라며?”
어느새 정훈이의 얼굴은 잠잠해졌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늘이의 두 눈을 쳐다보며, 정훈이가 입을 열었다.
“채서린 만났냐?”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채서린이 전부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