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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진짜 안녕 (89/303)

이번엔 진짜 안녕

성공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내 주위로 많은 사람이 다가오기 시작한 이유부터 자연스럽게 터득된 게 있다.

사람의 눈.

날 대하는 사람의 눈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다.

내게 뭔가를 바라는 게 있는 것인지, 날 통해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님 나란 사람에 대해 알아보고 파악을 해 보고 싶어 하는 것인지.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가진 힘이 아닌 나란 사람 자체에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겐 공통점 같은 게 있었다.

나 역시 그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만든다는 공통점.

내가 가진 힘이 필요한 자들은 그 힘을 빌려주기만 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내 사람이 되어 준다.

그게 목적인 사람들도 많았다.

오로지 그게 목적인 사람들.

하지만 내가 가진 힘보다 나란 사람 자체에 더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들이 뭘 원하는지를 내가 알아내야만 한다.

그래야 내 사람이 되어 주니까.

지금 하늘이의 눈빛이 딱 그랬다.

내게 뭔가를 바라고 있는 게 아니다.

당연한 거겠지.

태산이의 미래금융은 현재 스너프 건으로 재경 그룹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명확해진 상태 아닌가.

소파에 등을 깊게 기댔다.

그리고 반쯤 남아 있던 아이스커피를 얼음만 남겨 놓고 모두 빨아 먹은 후 하늘이에게 말했다.

“고맙네.”

“고마워? 뭐가?”

“생각거리를 하나 줄여 줘서.”

난 짧게 대답을 한 후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어제 네가 안 된다고 해서 적당한 영상 투자사를 서치하고 있던 중이었어. 나는 방법을 모르니까 직접 투자를 할 순 없고, 할 수 있다고 해도 요즘 사람들이 어디 보통 똑똑해? 괜히 역효과가 날 거 같았거든.”

“투자사를 서치하고 있었다고?”

“대충 계산기 두들겨 보니까 답이 나오는 투자던데, 뭐. 답이 나와 있는데 못 할 이유 뭐가 있어? 편당 제작비 5억 잡고, 12부작이면 60억. 현재 살고 있는 집 팔고, 장난감처럼 집에 전시돼 있는 차 다 팔아 버리면, 그것만 가지고도 내 명의로 들어와 있는 주식, 채권, 여타 부동산까지는 건드릴 필요 없이 뒤에서 여유 있게 투자를 해 줄 수 있겠다 싶었어.”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 이유가 뭐야?”

“너는 이유, 명분… 그런 게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지?”

“뭐?”

“이유와 명분을 가지고 뭔가를 시작하면, 그 끝은 잘돼 봤자 그 이유와 명분을 충족시키는 거 밖에 안 돼. 반대로 시작을 해 놓고 거기에서 이유와 명분을 갖다 붙이기 시작하면, 그 일엔 한계가 없어지는 거야.”

뭐가 저렇게 분할까?

도대체 뭐가 분해서 저런 눈빛을 만들어 내는 걸까?

날 쳐다보는 하늘이의 두 눈에 담긴 분함.

그 분함이 나로 하여금 하늘이를 궁금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빠 말은 투자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작품? 아니? 난 그걸 뭐라고 해? 시나리오? 대본? 그런 것도 못 봤어.”

“그런데?”

“그 60억으로 내가 채서린이에게 계속 느끼고 있어야 할 미안함을 털어 낼 수 있는 거라면, 내 기준에선 이미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투자 가치가 있는 거야.”

“…….”

“정말 앞으로 더는 채서린이랑 직접적으로 안 엮이고 싶었는데, 네가 그 친구를 만나서 그 친구 통해 내가 기억을 잃었단 이야기를 듣고 왔다니, 어쩔 수 없이 또 통화를 한 번 해야겠네. 그런데도 고맙다. 그 통화 한 번이면 앞으로는 진짜 채서린이에 대한 모든 부담감을 다 털어 낼 수 있게 생겼어.”

“미안함 한 번 털어 내는 데 60억을 태운다고? 그것도 앞으로 더는 안 엮이고 싶다는 상대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 너는 손을 참 많이 타는 아이겠구나.

싹이 전혀 안 보인다면 포기라도 하겠는데, 가진 재능에 비해 의지와 욕심이 굉장한 녀석이네.

그래, 그거라도 가지고 있는 게 어딘가.

손은 많이 가게 생겼지만, 그래도 잘만 가꾸면 나름의 꽃은 피울 수 있겠다.

“어떤 드라마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설마하니 지금의 채서린이가 그 작품을 설렁설렁 찍겠어?”

말이 안 되지.

그쪽 업계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지금의 채서린이라면 배수의 진을 치고 작품에 집중하겠지.

채서린 혼자만 그러는 게 아니라, 투자가 막혀 작품을 펼칠 기회를 놓친 작가와 연출, 다른 출연 배우들 모두 다시 찾아온 기회 앞에 형체 없는 초능력까지 다 쥐어 짜낼 거다.

“네 말대로 아무런 배경 없이 혼자 힘으로 320억짜리 자가 건물을 가지고 있는 애야. 근성 하나만 놓고 보면 월급쟁이 투자사 직원들이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종합한 평가로 가늠할 수 있는 애가 아니라는 뜻이야. 그런 애한테 60억 투자해서 원금 회수 못 할까. 못해도 크게 상관은 없고. 한 번도 안 해 본 드라마 투자라는 걸 난 60억만 들여서 경험해 본 거 아냐. 그거면 충분하지. 투자에 대한 이유와 명분은 그렇게 내 맘 편하게 갖다 붙이면 되는 거야.”

“…….”

“아무튼, 고맙다. 그럼 해당 드라마 투자는 네가 진행을 해 주는 거로 알고 있을게.”

“폰을 잠깐 보자고 했어.”

“무슨 폰? 채서린한테?”

“응.”

“왜?”

“어제 오빠가 말했던 그 절실함을 정말 채서린이 가지고 있는지 확인을 해 보고 싶었거든.”

“참 얄궂네. 왜 그랬냐, 격 떨어지게….”

“그 정도 확인도 안 해 보고 한 번 엎어진 투자를 되살리기엔 내가 책임져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잖아.”

“그래서?”

“보여 주더라. 솔직히 안 보여 줄 줄 알았어. 안 보여 주길 바랐어. 불쾌감을 드러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길 바랐어. 채서린이잖아. 그런데 순순히 보여 주더라.”

녀석의 눈빛이 바뀌고 있었다.

“어제 오빠가 한 말이 맞았다는 거지. 채서린은 정말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있더라. 좋아하는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다 내려놓고 포기를 할 수 있을 만큼.”

테스트를 했던 거다?

“오빠 부탁 때문이 아니라, 나도 그 의지를 확인하고 나니까, 투자를 강행해 보고 싶어졌어. 오빠 부탁 때문이 아니라.”

내 부탁 때문이 아니라는 걸 재차 확인시키는 하늘이었다.

쓸데없는 자존심은….

“뭐든.”

“그런데 그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오빠 상태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됐어. 진짜 채서린 말고는 아무도 몰라?”

“너도 알잖아, 이젠.”

“가족들도 몰라?”

“말 안 했어.”

“숨길 이유가 없는 내용일 텐데, 그걸 왜 숨기고 있어?”

“숨겨? 그런 적은 없는데?”

“숨긴 적이 없다?”

“내가 언제 숨겼어? 나는 그냥 말을 안 했을 뿐이야.”

“그게 숨긴 거지.”

“아니지. 다들 너처럼 그래. 나에게 큰 관심이 없어, 사람들이. 내가 치는 사고에나 관심을 가지지, 나란 사람 자체엔… 이상하게 가족들도 큰 관심이 없는 거 같더라. 네 할아버지처럼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 나한테 딱히 그 정도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은 없더라고.”

“…….”

“그리고 내가 왜 날 숨겨? 뭐가 무서워서? 무서워서 숨긴 게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 말을 안 했던 거뿐이야. 그래도 살아지더라고.”

난 다시 한번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가 봐야 할 거 같다. 자리 너무 오래 비우면 또 뒤에서 말 나와. 뭐 아까 확인할 거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 정도면 확인 다 한 건가?”

“흠… 왜 기억도 못 하는 요란다 일에 나한테 사과를 했어?”

“말했잖아. 귀찮았다고.”

하늘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귀찮은 게 싫었고, 넌 어떻게든 내가 네 앞에서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고. 둘 다를 충족시킬 수 있는 건데, 미안하다 한마디 하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걸 안 해? 너 하는 거 보니까, 뭔지는 몰라도 내가 잘못을 했겠더라고.”

“궁금하지도 않았어?”

“뭐가? 요란다 그 친구 관한 내용?”

“어.”

뭐라고 대답을 해 줘야 될까?

“궁금한데, 알고 싶지는 않아.”

“무슨 그런 대답이 있어?”

“더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한테 실망을 하고 싶지가 않거든.”

“…….”

“충분히 했어. 너한테는 미안한 말인데, 그러니까 더는 내 앞에서 그 이야기 안 하면 안 되냐?”

“이젠 할 이유가 없지.”

“그렇지. 넌 그 이유가 참 중요한 사람이지. 이럴 땐 또 편하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후 나처럼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으며 하늘이가 물었다.

“오빠 원래 이런 성격이었어?”

“나는 원래 이랬을 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 눈엔 그간 어떻게 보였는지까지는 알 방법이 없네.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별 관심도 없고. 나 이제 진짜 올라가 봐야겠다. 더 확인할 거 있음 마치고 보자.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아니, 오늘은 아니야. 그 투자 건은 내가 할아버지한테 직접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아.”

“뭘 또 그만한 투자 가지고 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을 귀찮게 만들어?”

“어쨌든 오빠 부탁 때문에 시작된 일이잖아. 오빠 이름만 팔면 금방 컨펌 떨어지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사무실로 복귀해 중간에 물려 있던 미팅을 정리하고 채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늘이 만났다며?”

―오빠 만나서 확인할 게 있어서 간다던데, 벌써 헤어진 모양이야?

“지금부터 너는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새로 들어갈 드라마 준비만 열심히 해.”

―고마워. 오빠 전화가 올 거 같긴 했어. 전화가 오면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해 봤는데, 고맙다는 말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더라.

“그 정도 인사가 딱 적당해.”

웃는 소리가 들렸다.

크게 웃는 거 같지는 않고 가볍게 웃음을 흘리는 소리.

그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채서린이 말했다.

―나도 몰랐는데, 있잖아. 나 그동안 오빠 좋아했네.

“나도 그랬겠지?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그래서 너한테 고마운 거야. 그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여전히 기억이 안 나지만, 나한테도 솔직한 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옆에 있었다는 사실에 말이야.”

―장 팀장님이 자기네 할아버지랑 오빠네 할아버지 사이에 약속 비슷한 게 있었다면서 아마 두 사람의 관계가 진지하게 발전될 거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 듣는 순간 뭔가 모르게 가슴이 허해지는 기분이었어.

“…….”

―오해는 하지 말고. 그 덕에 그동안 내가 오빠를 아무 감정 없이 만났던 게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다행이란 말을 하는 거니까. 어느 순간 내가 참 불쌍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더라고. 이번 일 겪으면서. 진짜 나란 사람은 이 세상에 없고 난 채서린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채서린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사람.

“채서린이 본명이 아냐?”

―하하하… 아… 웃긴다. 몰랐으면 계속 앞으로도 그냥 날 채서린으로 알고 있어. 이제 진짜 앞으로 우린 어떻게든 마주칠 일 없는 거지?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전화 끊고 이젠 서로 연락처 다 지우자. 톡도 지우고.

“그렇게 하자.”

―오빠를 좋아했어. 지금 이 똑 부러지는 손정훈이 아니라, 허세 가득하고, 자격지심에 똘똘 뭉쳐져 있던 날 닮은 오빠를.

“…….”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의 손정훈이 기억하지 못하는 손정훈 역시 누군가에겐 충분히 필요하고 괜찮은 사람이었어. 혹시라도 오빠 전화가 오면 작별 인사로 이 말은 꼭 해 주고 싶더라.

“고맙다. 힘이 되네.”

―잘 지내.

“너도.”

―그럼 이번엔 진짜 안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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