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아하는 게 많이 생기셨거든
하늘이는 할아버지 앞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퇴근이 이렇게 일러?”
“좀 일찍 왔어요. 할아버지한테 확인받을 내용이 있어서.”
“회사 일이냐?”
“네.”
“그걸 왜 나한테 확인을 받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책상다리로 고쳐 앉으며 장 회장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하늘이가 이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어제 정훈이 오빠를 만났어요. 지금도 만나고 오는 길이고.”
장 회장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어제는 정훈이 오빠가 만나자고 했고, 오늘은 제가 회사 앞까지 찾아갔어요.”
“내가 준 모직 지분에 관한 내용으로?”
“아니요. 제가 하고 있는 일 쪽 영상 투자 관련된 내용으로요.”
“그 내용으로 지금 정훈이하고 네가 무슨 나눌 이야기가 있어?”
하늘이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일전에 한 번 말씀드렸잖아요. 정훈이 오빠하고 스캔들 났던 배우가 한 명 있었다고.”
“나도 아는 내용이라고 했잖아.”
“제가 잡고 있던 투자 내용에 그 배우를 주연으로 하는 드라마가 하나 있었어요. 철회는 됐지만.”
실수를 만들어 내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는 녀석이다.
장 회장은 하늘이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평소 가지고 있던 조심스러움보다, 스스로의 확신을 확인받고자 하는 강한 열망 같은 게 들어 있는 손녀의 모습에 묘한 이질감 같은 걸 느끼기 시작했다.
“어제 정훈이 오빠가 절 보자고 해서 나갔는데, 저한테 그 드라마에 투자를 다시 해 주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흠….”
“비즈니스적으로는 절대 담으면 안 되는 투자인 거 같은데,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어요.”
“그래서?”
“안 된다고 해 놓고 오늘 그 배우 소속사를 찾아갔어요. 문제는 여기에서 나와요.”
“무슨 문제?”
“여전히 리스크가 큰데, 저도 모르게 투자를 재검토해 보겠다 약속을 해 버렸어요.”
“왜?”
“그걸 저도 지금 모르겠어요.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혼날 각오 하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상황만 보면 투자를 하면 안 되는 게 맞는데, 사람만 보면 해도 되는 거 같아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요?”
천천히 목근육을 풀다가,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며 장 회장이 말했다.
“혼날 각오를 하고 있다는 건 핑계고, 그런 즉흥적인 결정을 한 거에 대해 한 번만 눈감아 달란 소리로 들리네.”
“더 정확하게는 제가 왜 그런 즉흥적인 결정을 하게 된 건지, 그 이유를 할아버지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요.”
“감이겠지.”
“감이요?”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건질 게 있을 거 같다는 감. 그런 게 너도 이젠 생기는 모양이다.”
“위험한 거죠, 그거?”
“투자라는 건 원래 위험한 거다. 그 위험을 극복하는 게 투자사가 해야 하는 일인 거고.”
“…….”
“뭐든 건질 게 잃을 거보다 크다 싶으면 해 보는 게 투자지. 바꿔 말해서 건질 수 있는 게 잃을 거보다 크단 확신이 서지 않을 땐 해선 안 되는 게 투자이기도 하고.”
“확신….”
“그런 게 섰냐?”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그렇다고 하늘이가 대답했다.
“어떤?”
“그걸 모르겠어요. 확신은 섰는데, 그 확신의 근거를 잘 모르겠어요.”
“혹시 정훈이 때문이냐?”
“정훈이 오빠요?”
“사람이 확신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걸까요?”
하늘이는 속으로 그렇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해 주겠냐?”
“그런 거 같아요. 정훈이 오빠가….”
잠시 말을 끊어 놓고 하늘이는 생각을 정리했다.
“왜 그런 확신이 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정훈이 오빠가 저한테 손해가 갈 만한 일을 부탁하지는 않았을 거란 확신 비슷한 게 생겨 버렸어요.”
말을 해 놓고 보니까 스스로 더 명확해지는 하늘이었다.
“그렇잖아요. 그 정도 투자는 자기가 직접 할 수도 있는 걸 텐데, 그걸 저한테 부탁을 한다는 거 자체가 미래기획이 손해를 볼 투자는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그놈이 수가 많아. 그놈이라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계산이 있을 거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생각을 하세요?”
“그렇게 생각을 해.”
“왜요?”
“우린 이제 그런 걸 신뢰, 믿음이라고 하지.”
“그런 게 벌써 생길 수가 없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조금만 더 명쾌해지고 싶어진 하늘이었다.
“장기 몇 판 두고 명절에 식사하면서 술 한잔 같이했다고 그런 게 생길 순 없는 거 아니에요?”
“작년에 안산 공장에서 노조 터졌다고 했을 때, 이번엔 로스가 꽤 크게 나겠다 생각을 했어. 남 사장이 고생깨나 하겠다 싶었지.”
“…….”
“근데 그걸 정훈이 놈이 해결을 하는 중이라고 하더구나. 정신이 나갔냐고 물었어. 그런데 남 사장이 지금 네게 필요한 확신이라는 걸 가지고 내게 조금만 지켜보자고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 사장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런 무책임한 입장을 내게 보일 친구는 아니잖아.”
“그렇죠.”
“해결을 하더구나. 그것도 아주 쉽게. 그런데 이번엔 20년 넘게 거리를 두고 있던 손 회장한테서 연락이 와. 집으로 찾아와서 그동안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어 죄송하다고 나한테 고개를 숙이고 큰절을 해.”
“…….”
“너도 알다시피 스너프는 정훈이 놈 기획이야. 그 스너프로 이 할애비와 손 회장을 다시 붙여 놨어. 아예 재경과 우리 미래금융을 단단하게 붙여 놨지. 그런 놈한테 계산이 없을 수가 있겠어? 이런 게 신뢰인 거지, 믿음인 거고.”
하늘이의 머릿속으로는 정리되지 않은 손정훈에 관한 키워드들이 두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숫자를 보는 놈이 아니야, 그놈이.”
“그럼요?”
“사람을 보고 상황을 볼 줄 아는 놈이야.”
“그걸 할아버지가 어떻게 아세요?”
“숫자만 보고 돈만 셀 줄 아는 놈이었음 명절이라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해외 지사 직원들 챙기겠다고 직접 파리까지 날아갔겠냐?”
“하지만 그건….”
“사람이 있어야 상황이 생기고, 상황이 생겨야 돈이 만들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놈이란 소리지.”
“…….”
“넌 아직 그게 무슨 뜻인지 머리로만 이해를 하고 가슴으론 느끼지를 못하지?”
“…….”
“그런데 그게 그놈한테는 당연한 거야.”
“어째서요?”
“회장님의 손자니까.”
하늘이는 말문이 막혔다.
그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할아버지의 입에서 이런 허무맹랑한 대답이 나올 수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을 못 해 봤던 하늘이었다.
“손중길의 손자야. 생긴 건 외탁을 했지만, 눈빛과 기질은 제 할아버지를 빼다 박아 놨어.”
“…그래요?”
“내가 어디 장기가 두고 싶어 그놈을 매주 집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거겠어?”
하늘이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봐도 봐도 신기한 거야. 어쩜 저렇게 제 놈은 실제로 만나지도 못했던 제 할아버지를 말투까지 그대로 빼다 닮을 수 있는 건지. 식성까지도 똑같아. 장기 둘 때 하는 사소한 버릇, 손짓까지도.”
장 회장은 자기 앞에서 여전히 정훈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손녀를 지긋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말할 때 보면 말을 툭툭 내뱉는 거 같잖아? 그거 회장님이 그러셨어. 그 자리에선 바로 이해가 잘 안 가던 내용들이 집에 와서 곰곰이 되씹어 보면 이해가 될 때가 많았지. 그 녀석이 날 상대로 그런 말투를 써. 재밌지 않아?”
“그분은 도대체 실제로 어떤 분이셨어요?”
“말이 안 되는 분이셨지. 거짓말 같은 분이셨어. 괜히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경영인이라고 손꼽히는 정주형 회장님이 자신의 자서전에 우리 손 회장님이 10년만 더 사셨음 대한민국의 경제가 30년은 앞서 달리고 있었을 거라고 쓰셨던 게 아니야.”
“…….”
“정 회장님이 실없는 소리를 하시는 분이 아니거든. 이 할애비 역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고. 사업을 놀이처럼 하시는 분이셨다.”
“놀이요?”
“즐기셨다는 거야. 몇 날 며칠 날을 새우건, 전날 무슨 과음을 얼마나 했건 그런 거 상관없이 항상 눈이 반짝반짝해서 출근을 하셨지.”
“그야 자기 사업 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은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런 눈이 아니라, 회사에 출근을 하면 항상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믿는 분이셨다.”
“…….”
“사업을 힘들게 하지 않으셨다는 거야. 마이너스가 나면 왜 마이너스가 나는지, 그걸 알아보고 확인하는 거 자체를 너무 재미있어하셨어.”
“그게… 말이 돼요?”
손녀의 어이없어하는 모습에 장 회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 보통 분이 아니신 거지. 사업에서 아무리 마이너스가 나도, 내 직원들 고용에만 문제가 안 생기면 아무 문제가 없는 분이셨다.”
“아….”
“내 직원만 안 다치면 되는 분이셨다고.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떤… 일화요?”
“돌아가시기 1년 전이었어. 그땐 췌장암이 발견되기도 전이었고, 건강상 문제가 있다는 게 겉으로 드러나기도 전이셨는데, 하루는 그룹 임원들을 다 불러 모으셨어.”
“…….”
“그 자리에서 임원들, 사장단한테 숙제를 내주셨지.”
“무슨 숙제요?”
“어떤 숙제였을 거 같냐?”
하늘이는 대답을 하기 전 그 당시의 상황이 궁금했다.
“회사 경영에 문제가 있는 상황이었나요?”
“그 큰 그룹이 움직이는 데 경영에 문제가 없는 날이 있을 수 있겠어?”
“그럼, 다른 큰 이슈 같은 거라도 있었나요?”
“그렇지도 않았어.”
“그럼 모르겠어요. 어떤 숙제를 내주셨는데요?”
“재경의 전 직원이 과장만 달면 그 위치가 어디에 있든 자기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을 수 있게 해 주고 싶은데, 그 방법을 찾아오라는 거였어.”
“헐….”
“그 말씀이 무슨 뜻이었겠어?”
“그만큼 월급을 올려 주란 뜻 아니었어요.”
“그때 이미 재경은 대한민국 대기업 중에선 직원 월급이 가장 높은 기업이었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때가 있었으니, 지금이 있는 거지. 그리고 재경이 있었기에, 현재 대한민국 대기업 평균 연봉이 이 정도 선까지 올라온 거고.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임원들, 사장단에게 그 숙제를 내주시고 1년도 안 지나 돌아가셨어. 숙제만 내주시고, 검사는 안 해 주신 거지.”
“…….”
“그러니 그 검사를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던 회장님이 10년만 더 사셨다면, 재경 그룹이 지금쯤 어디까지 올라가 있었겠어? 그런 분이셨다, 그분이. 그리고 난 요즘 정훈이 그놈과 장기를 두다 보면, 나도 모르게 회장님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기분이 들어. 달라.”
“달라요? 뭐가요?”
“똑똑하다고 평가받고 있는 놈들, 특별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놈들… 그런 놈들을 그간 많이 봐 왔고, 많이 데리고 일을 해 봤지만, 그런 놈들이 가지고 있는 기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걸 정훈이 그놈이 가지고 있어. 자기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겠지.”
하늘이가 물었다.
“그분도 혹시 뭐… 여자관계가 복잡하셨다거나 그랬어요?”
“회장님이?”
“…네.”
“왜? 정훈이 놈이 여자 관계가 복잡한 모양이지?”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회장님도 여자를 싫어하고 그런 분은 아니셨어.”
얼굴빛이 어두워지는 손녀 모습을 바라보며 장 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여자 좋아하는 게 어디 문제인가. 가정을 꾸리고도 그런다면 문제가 있는 거겠지만, 회장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다.”
“…그래요?”
“더 좋아하는 게 많이 생기셨거든.”
“더 좋아하는 거요?”
“결혼과 동시에 사업이 불어났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사업이셨어. 재미난 게 널려 있는데, 다른 데 눈을 돌릴 여유가 있으셨겠냐?”
“…….”
“정훈이 놈도 그럴 거다.”
“피… 그걸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아요?”
“매주 이 집에 찾아오는 거 보면 알 수 있지. 지금 그놈한테는 여기가 재미가 있는 거야. 그나마 사업적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까.”
“…….”
“그래서 나도 요즘 그놈 때문에 즐겁다.”
크게 숨을 몰아쉰 뒤 하늘이가 부탁했다.
“할아버지.”
“왜?”
“일요일은 저도 쉬어야 돼요.”
“……?”
“앞으로는 정훈이 오빠 일요일 말고 토요일에 부르시면 안 돼요?”
“허허허….”
“같이 따로 나가서 밥을 먹든, 술을 먹든… 저도 좀 옆에서 지켜볼 시간이 만들어져야 지금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그 확신이라는 게 생길 거 아니에요.”
수줍게 몸을 움츠리는 손녀의 모습에 장 회장은 장난기가 동했다.
“그놈 참… 왜? 정훈이 놈은 생각이 있다더냐?”
그 말에 하늘이는 두 눈을 크게 끔뻑거리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건 제가 먼저 확신을 가진 후에 제가 알아서 할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