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공짜가 어딨니?
하늘이.
결코 모자란 녀석이 아니다.
경험이 부족하고, 가진 역량에 비해 원하는 바가 커서 그렇지, 객관적으로 봐도 잘 배운 녀석이다.
지켜야 할 자존심이 뭔지도 잘 아는 녀석이고,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법 역시 제 할아버지나 부모를 통해 적당히 잘 배웠다.
그런 하늘이가 내 앞에서 성급해지고 있었다.
시계 브랜드 론진 매장.
“이걸 봤다고?”
고작 백만 원 조금 넘어가는 시계를 내게 계산을 하라고 한다.
그 브랜드 안에서도 가격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하는 시계였다.
이 시계를 자기 할아버지 아흔 살 생일 선물로 주라고?
“엄밀히 말해서 내가 본 건 아니야.”
“그럼 누가 봤다는 건데?”
“이거 헤리티지 컬렉션이야. 리마인드. 이 모델 나온 지 50년은 넘었을걸?”
그러고 보니 눈에 익었다.
“우리 할아버지 원래 시계 같은 거 거슬린다고 잘 안 차셔. 선물로 들어온 비싼 시계들도 몇 개 가지고 계시고.”
“이 모델 혹시···.”
“오빠네 할아버지가 50년 전쯤에 회사 임원들한테 하나씩 선물로 돌린 시계래. 오빠네 할아버지도 이거 차셨을걸?”
“······.”
이제 보니 그랬던 기억이 있네.
완전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억이 스물거리며 올라올 정도로 그 느낌을 잘 간직하고 있는 모델이다.
“나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어렸을 때 할아버지 방에서 놀다가 고장 난 할아버지 시계를 발견하고 별생각 없이 막 가지고 놀았어. 그러다 내가 뭘 부러뜨렸을 거야. 여기 이 용두 부분을 부러뜨렸는지, 아님 가죽 줄을 끊어 먹었는지 거기까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 그만큼 어렸을 때야.”
“······.”
“그런데도 그 당시 상황이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 건, 할아버지한테 처음으로 엄청 혼이 났다는 거야. 이게 무슨 시계인지 아느냐고, 나 때문에 우리 엄마도 크게 혼이 났어. 다신 할아버지 방에 나 못 들어가게 만들라고까지 하셨지.”
뭘 또 이런 시계 하나 가지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녀딸한테 그렇게까지 했을까.
“뭐 해? 얼른 계산해. 틀림없이 이 시계 선물 오빠한테 받으면 무척 좋아하실 거야.”
시간이 어중간했다.
6시가 조금 넘어 만나, 30분도 안 되어 시계를 구입하고 바로 나왔으니까.
“저녁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내가 물었다.
“오빠가 저녁 생각 있음 먹고. 같이 있어 줄게."
“밥을 무슨 생각으로 먹어? 때 되면 먹는 거지.”
그렇게 말한 다음 시간을 확인했다.
거진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선물은 핑계였을 거 같고, 할 말이 있어서 만나자고 한 거 같은데··· 육개장 괜찮겠어?”
“또 그놈의 태화장?”
“괜찮으면 같이 소주도 한잔하고. 너 소주는 마실 줄 아냐?”
“넣고 삼키면 마시는 거지, 마시는 데 방법이 따로 있을까. 좋아. 가.”
참 별것 아닌데, 희한하게 설레고 있었다.
그간 이 시대의 태화장을 혼자 몇 번 와 본 적이 있다.
아무리 그때 그 맛이 안나도, 여전히 내 입에 육개장은 역시나 태화장이었다.
그런데도 혼자 가서 술꾼인 양 청승맞게 수육을 시키는 건 부담스러웠고.
하늘이를 데리고 가서 탕 두 개에 수육 중짜 하나를 시켜 먼저 나온 소주를 돌려 따고 있는데, 벌써부터 군침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술맛이 다르다.
역시 태화장 이곳은 음식 자체가 아닌, 분위기로 먹는 집이다.
생으로 먹으라고 가져다주는 대파.
그게 밑반찬으로 먼저 나왔는데, 소주 반 잔을 꺾어 입안으로 넣고 생대파를 쌈장에 찍어 한입 베어 무니 벌써부터 그 시절의 향수에 취하는 느낌이 들었다.
“크흐··· 좋네.”
“진짜 보면 볼수록, 취향 적응 안 되네. 와인이야, 소주야? 뭔데 이렇게 극과 극을 달려?”
"나는 종목 상관없이 잘하는 집은 다 좋아해. 너도 먹어 봐. 왜 안주를 안 먹어?”
“진짜 여자 앞에 앉혀 놓고 그러고 싶니? 먹을 안주가 있어, 여기에?”
“여기 있네, 파. 이거 쌈장에 찍어서 먹어 봐.”
“그렇게 좋으면 혼자 많이 드세요, 난 됐으니까.”
그렇게 나 혼자서만 내 시대의 향수에 마음 편히 취해 보려 하고 있을 때였다.
주문한 음식들이 나와서야 젓가락을 들기 시작한 하늘이.
“이거 수육 있지? 이거 다른 양념 말고 여기 소금에만 살짝 찍어서 먼저 먹어 봐.”
하늘이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 눈앞에서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어후, 그만. 그만해. 원래 그렇게 잔소리가 많았어?”
“잔소리가 아니라 챙기는 거잖아. 챙겨 줘도 난리냐, 너는?”
“상당히 적응 안 되고 부담스럽거든? 그냥 원래 하던 대로··· 아 참, 기억이 안 나지? 암튼 그냥 드세요, 난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고놈 참···.
결국 하늘이의 음식 먹는 취향을 존중해 주며 다시 소주 한 잔을 꺾어 입안으로 털어 넣은 후 물었다.
“뭔데?”
“뭐가?”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내가 네 할아버지 생일 선물을 따로 준비해 드려야 하는 이유.”
“설마 준비 안 하려고 그랬어?”
"속을 안 들키겠다고 이렇게 둘러 가면, 그게 더 속 보이는 거야. 가족들 다 같이 참석할 건데, 왜 나만 따로 준비를 해? 우리 부모님이 어련히 알아서 재경가 수준에 맞춰 잘 준비를 안 하실까.”
그에 하늘이는 내 잔을 넘칠 정도로 따라 놓고 그 병을 내 앞에서 흔들었다.
자기 술잔은 나더러 채워 보란 뜻 같은데··· 이거 일부러 내 잔을 넘치게 따른 거 아냐?
받은 술잔은 내려놓으며 하늘이가 말했다.
“이렇게까지 속을 보여 주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을 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거 상당히 격 떨어져 보인다? 촌스러워 보여. 특히 이런 내용을 앞에 놓고 피곤하게 굴면 말이야.”
“모르는데, 아는 척을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모를 수가 있나. 그간 장기 두러 우리 집에 몇 번이나 와 놓고. 설마 지금 내 앞에서 우리 할아버지, 우리 집안 상대로 간 보는 거야?”
“너는 회사 일 하는 동안, 절대 앞에 나서서 협상 같은 거 하지 마라. 너는 협상이 아니라 분쟁을 하겠다.”
“뭐?”
그럼에도 술맛은 유난히 좋았다.
모처럼 시끄럽지 않은 분위기, 대화 상대를 앞에 두고 편하게 술잔을 비워서일까?
“난 모르는 척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오빠 우리 집 올 때마다 내가 계속 집에 있는 게 우연이겠어?”
“그럴 수 있나.”
“그럼 우리 할아버지 의중은 다 알고 있다는 뜻 아냐?”
“그래서 계속 응하고 있잖아.”
할 말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는 듯 하늘이는 들숨 한 번에 날숨 없이 날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번 회장님 생일 잔칫날에 어른들끼리 뭔가 이야기가 나오시겠지. 그전까지는 회장님 생각을 먼저 전해 들은 입장에서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고. 너도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오빠네 부모님은 알고 계셔?”
“알고 계시지 않을까? 중간에 남 사장도 있고. 내가 주말마다 회장님 만난다는 거 정도는 충분히 알고 계실 거 같은데? 그런데도 따로 불러 별말 안 하는 걸로 봐선 너네 할아버지 통해서 직접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기다리고 계시는 걸 테고.”
“······.”
“보통 기업가끼리의 연 맺는 건 다 그렇게 하지 않나? 우리 재경 쪽에서 먼저 사업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아 준 건 미래금융이야. 여기에서 관계를 더 발전시켜 보자고 손을 내미는 건 너희 쪽에서 해야지, 우리 쪽에서 하면 그림이 이상해지지. 스너프 건으로 너무 매달리는 거 같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이게 중요한 부분이다.
“네 마음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내 마음?”
“부담 주고 싶지도 않고, 네가 강요당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아.”
“오빠는 괜찮고?”
“솔직하게 말해도 돼?”
“지금까지 나만 솔직했던 거야?”
“이게 아니다 싶었음 주말마다 부른다고 계속 그렇게 찾아갔을까. 그렇게 노골적으로 힌트를 주시는데.”
“······.”
“그렇다고 그게 목적이었다는 말은 절대 아니야. 싫었다면 안 갔을 거란 말을 하는 거지. 재경 그룹, 그리고 미래금융. 스너프에 지원 들어간 뱅크 시스템은 물론이고, 앞으로 같이 할 수 있는 비즈니스들이 무궁무진하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야. 세상에 가족보다 더 단단하고 항상 서로 실수를 안 만들어 내기 위해 조심해야 하는 관계의 파트너십이 어디에 있겠어?”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네가 나도 모르는 내 바닥을 다 알고 있다는 게 민망하고 부담스럽긴 해도, 네 마음만 괜찮다고 하면 난 재경 그룹과 미래금융이 예전 할아버지 시대처럼 함께 가 보는 거. 나쁘지 않다고 봐.”
“이야, 정말 기름기 쫙 빠진 입장이네.”
“추가할 기름기가 있을 수가 없지. 너한테 나는 더 들킬 것도 없잖아. 나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럼 더 불안할 텐데? 내가 오빠라면 불안해서 같이 못 갈 거 같은데?”
“오히려 지금은 내가 널 기대하고 있는 중이야.”
“기대?”
“채서린 건. 도와주면 고맙겠단 생각 반, 안 도와준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 반이었어. 그걸 네가 도와주더라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너랑 같은 입장에 놓인 다른 여자였으면. 도와주기 쉽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너는 도와주더라고. 날 믿어도 주고. 앞으로 충분히 더 재밌는 것들을 더 많이 같이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거 같단 기대를 하고 있는 중이야.”
“손정훈. 진짜 본바탕 자체가 골 때리는 캐릭터구나? 이 내용에 재미 타령을 하고 있어?”
“그게 제일 중요하지 않겠어? 중간에 서로 실수만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가장 오래 함께 같이 가야 할 파트너가 될 건데, 감정, 이해관계도 중요하겠지만, 그 상대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라면 난 이번엔 같이해서 재미가 있는 사람과 함께 가 보고 싶거든.”
“이번엔?”
아차!
“그동안 여러 가지 선택해 오며 살아왔을 거 아냐. 그중엔 내가 하고 싶은 선택도 있었을 것이고, 강요받은 선택도 있었을 것이고. 이번만큼은 내 선택이라는 말을 하는 거야.”
“나 지금 이거, 오빠가 채서린 건으로 날 테스트했다고 이해하면 되는 거야?”
“그 스캔들 안 터졌음 어쩔 뻔했냐?”
“뭐?”
“아니라고. 나 그렇게까지 돌아이는 아니야. 진짜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었고, 그걸 네가 흔쾌히 도와줘서 나도 놀랐어.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지.”
“무슨 생각?”
“나도 나지만 얘도 정상은 아니구나··· 하는. 다음 날 바로 채서린을 찾아가서 폰까지 확인을 할 줄은 나도 몰랐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피식하고 혼자서만 웃은 후 하늘이가 말했다.
“오빠 혹시 힐링광장 알아?”
“백지훈이 엠시 보는 토크쇼 같은 거 아냐?”
“맞아. 그 프로그램 투자도 우리 미래기획에서 하고 있어.”
“알고 있어. 미래기획 공부하면서 봤어.”
“거기에 다음 주 채서린이 나올 거야.”
“잘했네.”
“그 전에 오빠한테 확인을 받을 게 있어.”
“말해.”
“우리 쪽에서 악녀검사 투자를 하기로 한 이상, 드라마 슈팅 들어가기 전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채서린이 이미지를 좀 빨아 놔야 해.”
“사람한테 이미지를 빤다는 표현은 좀 그런 거 아니야?”
“그런가? 그렇네. 우리 쪽에선 너무나 당연하게 쓰는 표현이라 입에서 그 표현이 너무 막 나갔네.”
“아, 너희 쪽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라면 뭐··· 암튼 그래서?”
먹을 게 이렇게나 푸짐한데, 그중에 물잔을 들어 입을 헹궈 낸 후 하늘이가 말했다.
“악녀검사에 투자를 강행하면서 내가 안아야 할 리스크를 혼자 좀 따져 봤어. 그 스캔들. 증권가 지라시에 오빠 존재까지 다 노출이 된 스캔들이야. 알 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아는 스캔들이라고 봐야겠지?”
“그래, 우리 회사 전략기획팀 과장도 다 알고 있더라.”
“그런데 나는 또 오빠랑 새로운 관계로 발전을 준비 중에 있어. 그런 내가 채서린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악녀검사에 투자를 담당하게 되면, 사람들이 날, 우리 미래금융을 뭐라고 생각할까?”
“글쎄?”
“그냥 내가 그 스캔들의 중심에 있으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대중들이 알게 될 스캔들의 진실은 내가 따로 각색을 조금 했어.”
“···각색?”
“오빠는 채서린과 계산이 다 끝났을지 모르겠지만, 난 이번 투자 건으로 채서린과 계산을 새로 시작해야지.”
“······?”
“세상에 공짜가 어딨니?"
설마 이 녀석이 날 가르치려 드는 건가?
귀엽네.
"오빠도 나한테 빚이 있는 거잖아. 도움은 두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내가 줬어. 그러니 빚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받을 거야. 채서린은 동의를 했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서 해.”
“믿어 줘서 고맙네. 미리 말하지만, 오빠가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야.”
“사람만 안 다친다면 손해 잠깐 보는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
사람만 안 다친다면 뭐든 괜찮다는 내 말에 무슨 트집을 잡을 게 있었을까?
너무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듯한 눈을 하며 날 쳐다보길래, 그 눈빛이 부담스럽다고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하늘이는 내가 그 말을 하기도 전에 알아서 눈빛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다칠 사람 아무도 없어. 실은 다음 주에 채서린 힐링광장에 나올 거란 이 이야기 하려고 보자고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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