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업을 보는 눈과 사람을 보는 눈 (94/303)

사업을 보는 눈과 사람을 보는 눈

토요일 아침.

안사람이 잠들어 있는 산소를 찾았다.

살아생전 그렇게나 좋아했던 수국 생화 한 다발과 곶감 한 접시를 올려놓고 속으로 쑥스러운 고백을 했다.

젊은 손자 몸에 들어와서 주책이란 주책은 다 부리고 앉아 있다 비웃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내가 정훈이 몸에서 이런 경험을 하고 있다 보니, 어쩌면 자네도 지금의 날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 찾아와 본 거라고.

참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르는 남편 만나 30년 넘게 큰소리도 못 내고 속앓이만 했던 그 삶을 어찌 내가 모르겠냐고.

“사람 욕심이 참 끝이 없네. 처음엔 육개장에 소주 한잔 얼큰하게 취해 보고 얼른 이 몸, 정훈이한테 돌려줘야겠단 생각을 했는데··· 이젠 그러고 싶지가 않아졌어. 어떻게 주는지도 모르겠고, 안다 해도 그러고 싶지가 않아.”

손질은 잘되어 있었지만, 괜히 머쓱한 마음에 풀이라도 뽑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 시늉을 해 봤다.

“자네는 내가 말 안 해도 다 알지?”

설마 내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이 꼴을 못 봤다면 모르겠지만, 엉망진창인 회사 꼴을 다 봤는데, 그걸 보고도 어떻게 못 본 척을 하겠어? 혼자 다 짊어지고 있는 홍준이 놈 어깨도 너무 무거워 보이는데, 이걸 어떻게 못 본 척 가만히 있겠냐고.”

무슨 놈의 3월 아침 바람이 이렇게까지 따뜻하단 말인가···.

“다행히 태산이가 만든 회사가 앞으로 우리 재경에 좋은 배경이 되어 줄 수 있을 거 같아. 역시 태산이야. 잘 키워 냈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그래서 그런 거니까, 주책이라고 너무 비웃지는 마. 내가 언제는 자네 앞에서 염치가 있는 사람이었나? 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지 않았냔 말이야."

해 보고 싶은 것도 많이 생겼고, 그러는 만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들도 너무 명확해졌다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보는 시간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중이고, 자네라면 또 언제나 그랬듯 내 선택을 말없이 뒤에서 믿어 줄 거라 믿네. 부경가 사돈총각들이 내가 없다고 우리 아이들한테 너무 과한 짓을 한 것 같네. 그걸 지켜만 봐야 했던 자네 심정이 어땠을까 싶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내가 어떻게 해 줬는데. 그래서 내가 지금부터 혼꾸멍을 내 줄라니까, 지켜봐.”

이번에도 자네에게 염치가 없을 준비를 하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자네가 마음에 쓰인다 솔직히 고백하고, 그저 멍하니 안사람이 누워있는 자리 옆을 지키고 앉았다.

항상 그랬다.

가겠다 결정을 한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고야 말았다.

중간에 잘못된 길로 든 것 같아 확신이 줄어든 상태에서도 그 끝이 궁금해서 꼭 끝까지 가 보고야 말았다.

그럴 때마다 난 항상 우리 안사람을 옆에 앉혀 놓고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이상하게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것보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내 말이 맞는다고 말해 주는 안사람을 옆에 앉혀 놓고 생각을 정리하면, 그 정리가 한결 쉽게 되었다.

지금도 그랬다.

지금이 그랬다.

과연 지금 내가 가겠다 결정을 한 길이 맞는 길인 건지, 그 확신이 필요했다.

그러다 폰을 꺼내 태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장기 두러 오라는 말씀이 없으시네요?”

―내일 볼 건데, 뭘 또 와. 오늘은 자네 시간 보내.

“회장님이 바쁘신 건 아니고요?”

―내가 바쁠 게 뭐가 있나.

“그럼 가도 됩니까?”

―오는 거야 상관이 없는데, 주말 이틀을 다 이 늙은 사람한테 쓰기엔 아깝지 않나?

“그럴 리가요. 지금 출발하면 1시간 정도 걸릴 거 같은데, 최대한 빨리 도착해 보겠습니다."

―어딘데?

"저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잠시 왔습니다.”

―거긴 왜?

“그냥요.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조금 나서요.”

―혼자?

“얼추 점심때쯤 도착해질 거 같은데, 혹시 오늘도 가면 점심 얻어먹을 수 있습니까? 하하하."

―몇 명이 사는 집인데, 밥솥에 한 공기 따로 풀 밥이 없을까. 와.

가는 도중 하늘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내일 다 같이 만날 건데 왜 오냐는 전화였다.

오늘은 자기도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그래서 그냥 편하게 있으라고 했다.

결국 짜증 섞인 투정을 한 다발 토해 놓고 전화를 끊은 하늘이.

도착하기까지 1시간 정도 시간이 걸렸는데, 그사이 자기 딴에는 단장을 하고 있었다.

영석이와, 그의 처도 내가 오늘까지 왜 찾아온 건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으며 날 맞이했다.

괜히 편하게 집에 있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미안함도 잠시, 며칠 전 하늘이가 계산을 하라고 해서 미리 사 둔 시계를 태산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뭐야?”

하늘이도 이 선물을 왜 내일 안 주고 벌써 주는 거냐는 식으로 날 쳐다봤다.

영석이도 같이 있는 자리였다.

“수요일에 하늘이가 잠시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날 보며 인상을 찡그리는 하늘이를 무시하고, 태산이와 영석이에게 말했다.

“회장님 선물을 따로 봐 놓은 게 있는데, 와서 저더러 계산을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뭔가 봤더니, 이 시계였습니다.”

태산이는 그 자리에서 상자를 열어 시계를 확인했다.

“제가 드리는 게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던 거 같습니다.”

태산이가 기분 좋게 웃으며 그 시계를 꺼내 자신의 손목에 채웠다.

“회장님께 어떤 의미의 시계인지,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그 시계가 이 시계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뭔지 아나?”

“네, 이 시계에 관한 내용도 할아버지 일기장에서 봤습니다. 1974년. 재경 그룹이 처음으로 고용 인원 2천 명을 넘기고, 그룹 본사 사옥을 완공했을 때, 전 임원들에게 시계를 하나씩 나눠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할아버지도 똑같은 걸 차셨고요.”

손목에 찬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태산이가 말했다.

“그땐 롤렉스니, 오메가니··· 그런 게 아직 한국에 안 들어왔을 때야. 아는 사람들은 일본 같은 데 가서 사 가지고 들어와 차고 다니기도 했지만, 그 시절 한국에선 론진 이게 최고급 시계 브랜드였지. 그땐 이 시계 하나가 중형 세단 한 대 가격이었어. 그걸 임원들한테 하나씩 차고 다니라고 선물을 하셨던 거야.”

“그런 의미가 있는 시계였던 거 같아서, 내일 사람들 많고 정신없는 자리에서 드리는 거보다는 이렇게 조용할 때 드리는 게 더 좋겠다 싶었습니다.”

“이 선물에 의미를 담아 달란 소린가?”

“네, 저는 저하고 하늘이가 같이 의미를 담아 준비를 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영석이가 하늘이를 쳐다봤다.

그런 자기 아버지의 눈길을 하늘이는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 내고 있었다.

과연 하늘이 이 녀석은 정말로 두렵지 않은 것일까?

용감하다고 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나와 재경 그룹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얻고자 하는 것,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 섰다고 봐야 하는 걸까?

너무 담담해서, 혹은 대담해서 옆에서 걱정 어린 눈으로 딸아이를 쳐다보는 영석이의 눈빛이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난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함께 의미를 담아서 준비한 게 중요한 거지, 이걸 꼭 내일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드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고요.”

태산이가 말했다.

“그럼 내가 내일 마땅한 기회를 봐서 손 회장한테 넌지시 이야기를 한번 꺼내 봐야 하나?”

그런 다음 영석이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응? 애비 생각은 어때?”

영석이는 신중했다.

“아버지. 그건 일단 식사부터 하시고, 나중에 우리 가족들만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하시죠. 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니잖아요. 급한 것도 없고."

애써 내 기분까지 신경을 써 주려는 영석이의 그 마음이 고맙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자 하는 영석이었고.

"이제 하늘이 스물여덟이에요. 회사 일 배우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서두를 내용은 아닌 거 같아요.”

“당사자들이 마음을 맞춰서 이런 걸 준비했는데, 억지로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만 일부러 미룰 이유는 더더욱 없는 거야."

“하지만···.”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뿐이야.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하늘이는 안에 들어가서 식사 준비 대충 다 끝났는지 보고 와.”

“···네.”

* * *

점심을 얻어먹고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언제나처럼 하늘이가 나와 같이 집을 나서겠다고 함께 현관으로 내려오려고 했는데, 거실 입구에서 영석이가 그런 하늘이를 붙잡았다.

“······?”

나도 살짝 당황을 했다.

“오늘은 집에 있어.”

하늘이를 현관으로 못 내려가게 붙잡은 다음, 영석이가 대신 현관으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정훈이는 나하고 같이 내려가.”

태산이하고는 방에서 장기를 한판 두고 인사를 나눴기에 그 자리에 태산이는 없었다.

영석이와 함께 현관을 나서서 반 층 아래로 만들어져 있는 차고로 내려갔다.

입고 나온 옷이 함께 어딜 가자는 건 아닌 거 같고, 그저 차고 안에서 짧게 나랑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거 같았다.

차 앞에서 문만 열어 놓고 기다렸다.

“그럼 저는 가 볼게요, 아저씨.”

“정훈아.”

무척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결국 영석이가 날 불렀다.

“네.”

“오늘은 아저씨가 조금 당혹스럽네.”

내 차 보닛 위로 한쪽 손을 올려놓고 영석이가 말했다.

“아저씨가 할아버지 생각도 미리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고, 또 이번에 무슨 드라마 관련해서 하늘이가 철회됐던 투자를 네 부탁으로 다시 진행한다는 내용까지 알고는 있었는데··· 그런데도 오늘은 당혹스러워.”

“그러셨어요?”

“그렇다고 너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다. 매주 널 이 집으로 부른 건 할아버지였고, 그지? 너 올 때마다 하늘이하고 같이 시간 보내러 나간다는 걸 다 알고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

“그런데도 딸 가진 부모 입장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거야, 이게. 혹시 뭐 두 사람··· 벌써 이렇게 뭐 좀··· 그런 게··· 있었나? 그런 건 아니지?”

여정이 놈 때가 생각나네.

여정이 놈 유학 보내 놓고 홍명이, 홍준이 때와는 달리 여정이 옆으로 사람을 넷이나 붙였지.

집안 살림을 살아 줄 도우미 두 명과 번갈아 기사와 경호 일을 맡아 줄 사람 둘.

그렇게 붙여 놓고도 꼭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처럼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방학 때마다 한국으로 불러들였고 또 때 되면 내가 안사람과 함께 여정이가 있는 곳을 직접 가서 사는 모습을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였다.

“아저씨도 참.”

“그지? 아니지?”

“그런 거 절대 아니고요, 사실 저도 할아버지 시계 선물 같이 사러 가자고 연락받았을 때 조금 놀랐어요.”

“······.”

“저도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게 고민 많이 해 보고 찾아온 거예요. 그동안 회장님이 저한테 보여 주시는 마음은 다 알고 있었지만, 하늘이 인생이잖아요. 하늘이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영석이는 날 따라와 자기가 만든 이 자리가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던지, 괜히 내 차 보닛만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 마음을 먼저 보여 주네요.”

“아저씨는 그래. 둘 다 이젠 다 큰 어른들이고, 그래서 할아버지가 만든 상황 속에서 각자가 생각들을 많이 해 봤겠지만 그래도 그 상황에 휘둘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그런 걱정이 있어.”

참 애쓰네.

그래, 영석이 성격이라면 그리고 현재 스너프 건으로 우리 재경과 사업적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미래금융의 실질적 리더라면 충분히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싶을 거다.

“저는 회장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구? 우리 아버지?”

“네, 비록 재경 그룹에선 그룹 전무로만 오래 계셨지만, 결국 제 할아버지가 재경을 일으킬 수 있도록 옆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신 건 바로 회장님이라고요.”

“어째서?”

“사업을 보는 눈과 사람을 보는 눈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두 눈 모두 함께 수준이 올라갈 순 있는 거겠지만, 근본적으로 타고난 두 눈 사이의 역량엔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

“제 할아버지는 분명 사업을 보는 눈이 좋은 분이셨을 거예요. 반면에 회장님은 사업보다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하셨을 거고요.”

“왜 그렇게 생각을 해?”

“그러셨으니, 제 할아버지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셨을 때 제 할아버지한테 당신이 가진 모든 걸 걸어 볼 수 있으셨던 거겠죠.”

“······.”

“그런데 회장님이 이번엔 절 선택해 주셨어요. 조심스럽죠, 저도. 그런데 분명 절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중입니다.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도 않고, 저도 궁금합니다. 제가 과연 회장님의 선택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아저씨.”

“왜?”

“하늘이 있잖아요. 저보다 아저씨가 훨씬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른들 걱정시킬 만한 일을 하는 사람 아니잖아요. 그렇게 안 키우셨잖아요. 귀하게 키우셨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귀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

“하늘이하고 저. 벌써부터 걱정하시는 그런 관계까지는 아니고요, 다만 오늘 이렇게 제가 찾아온 건 그동안 회장님께서 저한테 계속 회장님 마음을 보여 주시는데, 저는 그러지 못했던 거 같더라고요. 그 역시 예의가 아닐 거 같았어요. 그게 전부였어요.”

그제야 보닛에서 손을 떼어 내며 영석이가 내게 한 발 다가왔다.

“내일 가족들하고 다 같이 오나?”

“확인해 볼게요. 근데 아마도 다 같이 움직이는 건 애가 있어서 힘들 거예요.”

“하긴. 정태가 애가 있지?”

“네.”

“그럼 정훈이 너는 아버지한테 말씀드리고, 내일 조금 일찍 와. 한 30분 정도? 행사 시작하면 다들 정신없을 건데, 그 전에 소개해 줄 사람들 있음 내가 소개도 해 주고 하게.”

“네.”

“운전 조심해서 가고.”

“네, 알겠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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