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남을 포트폴리오가 될 겁니다
이런 걸 그들만의 리그라고 하는 거겠지?
하늘이의 말처럼 다음 날 나와 하늘이가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이 실린 기사가 터졌다.
기사에선 이니셜 처리가 되었지만, 재경가의 차남과 미래금융의 장녀를 암시하는 내용들이 가득했고, 덩달아 해당 기사는 각종 포털의 메인 화면에 올라오고 있었다.
홍준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크게 신경을 쓸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이 결과물이 어떻게 나오든 하늘이의 최선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이건 내가 여전히 재경가의 주인으로 있었다고 해도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믿고 기다려 주라고 지시를 했을 것이다.
수습이야 얼마든지 해 주면 된다.
평생을 직원들 격려하고, 욕심을 가지게 만들고, 내가 한 격려에 욕심이 실수를 만들어 내면 그걸 수습하며 재경을 키워 왔다.
내게 그 정도 일은 일도 아니다.
그 수습이 번거롭고 두려워 올라오는 싹을 억누르는 건 하책 중에서도 하책.
어떤 싹이 올라올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건 싹이 스스로 올라오고자 의지를 보인다는 것이고, 내겐 그 싹에 뿌려 줄 물이 있다는 거다.
“다음 주요?”
해당 내용에 대해선 눈과 귀를 억지로 막아 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신기한 팀장을 따로 불러, 다음 주에 남 사장과 함께 갈 생뚜앙 지사 출장길에 같이 가 주길 제안했다.
“네, 아마도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정은 그렇게 될 거 같아요. 공사 스케줄 뺄 수 있겠어요?”
“지금 진행 중인 공사는 수원에 있는 매장 하나밖에 없습니다. 퍼스펙티브도 콘셉트는 다 잡혀 있는 상태라 주문한 디스플레이 머테리얼이 도착하기까지는 여유가 있고요.”
“그럼 수요일부터 저랑 같이 좀 움직여 주시겠습니까?”
“같이 가는 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마침 저도 유럽 냄새 안 맡아 본 지 꽤 오래돼서 기회만 된다면 당연히 따라가고 싶죠. 근데 제가 그 감사 방문에 같이 갈 이유가 있습니까?”
“말이 감사 방문이지, 저랑 팀장님은 감사 관련된 내용이랑은 상관없는 걸 좀 같이해야 할 거 같아요.”
“어, 어떤… 거요?”
다행히 주말이 하루 끼어 있는데도 신 팀장은 자신의 역할만 있다면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 전에 팀장님.”
“네.”
“예전에 이탈리아 회사에서 일할 때나 아님 KS 인터내셔널에서 일하실 때 맡았던 매장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매장은 면적이 얼마나 됐었습니까?”
“단층 면적이요?”
신 팀장은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부터 설명을 해 줬다.
“한국은 이제 로드 숍이 없잖아요. 거의 99퍼센트가 백화점 아니면 아웃렛 매장 아닙니까.”
“그렇죠.”
“다 단층 매장이죠. 반면에 유럽 쪽은 70퍼센트 이상이 로드 숍입니다. 건물 내부 형태도 다 제각각이고 층간 높이 역시 평균을 놓고 이야기를 해도 나라마다 차이가 큽니다. 복층 구조 매장, 심한 경우 부티크 형식 매장은 한 건물을 통째로 쓰는 경우도 많아요.”
“그렇죠.”
“그래서 비교가 힘듭니다. 단층 면적으로 제일 컸던 공사는 460제곱미터 정도가 되는 거 같고, 복층 구조는 1, 2층 합쳐서 540까지 해 봤던 거 같아요.”
“그 460짜리 공사 들어가서 마무리 짓는 데까지 대충 기간은 얼마 정도 걸렸습니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그래도 한 달 넘게 걸렸던 기억은 납니다.”
“그 정도면 빨리 끝난 겁니까, 아님 오래 걸린 겁니까?”
“상당히 오래 걸린 거죠. 공간이 나누어진 주거 인테리어가 아니라, 매장은 통인테리어 아닙니까.”
“그렇죠.”
“통인테리어는 사실 콘셉트 잡아 놓고 바닥만 깔아 놓으면 절반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다음 천장 공사, 벽 마감을 들어가야 하는데, 보통 매장 인테리어는 1, 2년 주기로 보기 때문에 바닥을 제외한 천장이나 벽 마감은 주조된 걸 갖다 붙이는 식이거든요. 그건 공간 너비하고 상관없이 아무리 넓은 매장이라도 2, 3일이면 끝이 납니다.”
“그런데 한 달 넘게 걸렸던 이유는 뭡니까?”
“기존 공간을 우리가 직접 철거를 해야 하는 공사는 공사 기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죠. 특히 유럽 쪽은 철거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건물들이 다 오래된 건물들이고, 특히 이탈리아 쪽은 심심하면 다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는 건물들이라 건물주가 공사를 의뢰했어도 전기나 상하수도 관련된 내용으로 소방 허가를 일일이 받아 가며 진행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시간이 많이 걸리죠.”
확실히 전문가네.
일리가 있다.
“그럼 철거할 내용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660제곱짜기 매장이면 공사 들어가서 마무리 짓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거 같습니까?”
“660이면… 한국식으로 하면 200평짜리 매장이란 말인데, 그게 단일 매장입니까?”
“네.”
“안 쪼개시고요?”
“아뇨, 그냥 단독으로.”
“어후, 그럼 시간이 좀 걸리죠. 어떤 브랜드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일반적인 브랜드라고 놓고 보고, 그 넓은 공간을 단독으로 알차게 꾸미려면 소품도 많이 필요하고, 신경 써야 할 게 많습니다.”
“유럽 쪽에 팀장님 개인적으로 디스플레이 머테리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업체가 좀 있습니까?”
“그런 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곳이 없다고 해도 예전에 제가 일했던 회사 통하면 얼마든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요. 그 회사도 이탈리아 안에서는 자체 VMD팀이 자재 공장을 함께 돌리면서 운영을 했는데, 다른 나라에 깔린 자체 매장은 다 각 나라 안에서 계약된 업체들을 통해 자재를 공급받고 VMD팀만 넘어가서 공사를 지휘했거든요.”
신 팀장에게 생뚜앙 지사 고 부장이 매입 총괄을 한 건물 도면을 노트북 화면을 통해 보여 주었다.
“이런 구조입니다.”
그 도면을 보자마자 신 팀장이 말했다.
“이렇게는 백날을 봐도 모릅니다. 실물을 봐야 합니다. 실물을 바로 보기가 어려우면 최소한 바깥에서 건물 전체 이미지를 잡은 사진이라도 있어야 돼요.”
“그것도 있습니다. 여기요.”
해당 건물의 외관을 보여 주니, 신 팀장의 두 눈에 엄청난 몰입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다 좋은데, 매장으로 쓰기엔 윈도우가 조금 아쉽네요. 원래는 여기 1층에 카페 같은 게 들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레스토랑이요.”
“딱 그 정도가 적합해 보이네요. 직접 가서 주위에 어떤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지 확인을 해야겠지만, 딱 이 건물만 봐서는 매장용은 아닌 게 확실해요. 어딥니까?”
“방돔 광장 바로 맞은편이요.”
“오우!”
깜짝 놀라며 해당 건물 이미지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한 신 팀장이었다.
“그럼 상권은 쇼핑 상권이 맞네요. 그럼 윈도우는 큰 문제가 없을 거 같아요.”
“왜요?”
“방돔 광장 안 쪽으로 미키모토부터 시작해서 쇼메, 그 옆에 뭐였지? 아무튼 럭셔리 브랜드들이 스퀘어 안에 꽉 차 있잖아요.”
“그래요?”
“네. 여기가 방돔 광장 맞은편이라면 주위 콘셉트랑은 잘 어울리는 윈도우예요. 방돔 광장 거기도 원래는 럭셔리 상권이 아니었잖아요.”
사실 난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본사 사무실이 집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의류 매장들까지 합세를 해서 지금의 방돔 광장이 형성된 거지,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았거든요. 그 유명한 럭셔리 브랜드들이 한곳에 다 붙어 있으니까 우아한 거지, 매장 하나하나만 기술적으로 뜯어서 보면 상당히 우스광스러운 전시, 인테리어예요.”
“흠….”
“그런데 이 넓은 공간에 무슨 브랜드를 단독으로 넣으시겠다고요? 설마 여기에 우리… 자체 브랜드를 넣자는 건 아니시죠?”
* * *
일주일 뒤 남 사장을 중심으로 팀을 짠 17명의 재경모직 전사팀이 샤를 드골 공항에 내렸다.
재경모직의 매출 70퍼센트가 아직은 해외 수입 브랜드 유통에서 올라오는 만큼, 방문팀을 전사적 팀으로 꾸릴 수밖에 없었던 실정.
전략기획팀은 물론이고, 감사팀, 법무팀에서까지 핵심 인원이 차출되었고 일전에 내가 한 당부가 있었기에 생뚜앙 지사의 영업력을 직접 파악해 보고자 영업부 연규호 부장이 해외 영업팀 류진환 과장을 데리고 그 팀에 합류를 하였다.
강인성 과장을 통해 자신이 재경모직에 입사한 이후, 생뚜앙 지사 방문에 이렇게 본사의 핵심 인력들이 대거 참석을 한 경우는 처음이란 소릴 들었다.
그만큼 남 사장 역시 이번 방문에 큰 의미를 두고 있고, 내가 올린 기획안에 큰 기대를 걸고 강행한 방문이라고 봐야 했다.
“사장님 나오십니다.”
입국 게이트가 자동으로 열리기가 무섭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던 지사 직원들이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지사장은 물론이고 고 부장, 현지 직원들의 월급과 회계를 담당하는 소속 변호사까지 총 8명이나 되는 인원이 대형 리무진 버스를 준비해 놓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장님.”
지사장이 대표로 앞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많은 공항 이용자들이 진귀한 광경에 한 번쯤을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지사장님.”
“네.”
“이번엔 같이 온 식구가 좀 많아요.”
“네, 저도 처음 명단 받고 작년보다 두 배 가까운 인원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고 잠시 당황했습니다.”
“가면서 이야기하죠.”
“네.”
지사장은 남 사장의 오른쪽 자리를 내게 양보하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었다.
왼쪽으로 붙어서 남 사장의 걸음에 속도를 맞추며 지사장이 물었다.
“우선 호텔 체크인부터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에서 호텔까지 거리가 어떻게 됩니까?”
“40분 정도 걸립니다.”
“저녁 식사가 그쪽으로 준비가 되어 있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동은 다 같이 저 버스 한 대로 하는 거고요?”
“혹시 몰라 독립 차량 한 대를 따로 준비시키긴 했습니다. 사장님은 따로 움직이시겠습니까?”
“아니요, 함께 나온 현지 직원들이 불편해할까 봐 물어본 거예요.”
“아, 네.”
“편하게 움직입시다. 다 같이 움직이는 것도 난 괜찮은데, 괜히 우리 눈치 보지 말고 현지 직원들한테 물어보고 버스 한 대로 같이 움직이는 게 괜히 불편할 거 같으면 편하게 독립 차량으로 움직이라고 해요.”
“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기엔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호텔로 바로 가지 말고 새 지사 사무실로 쓸 건물부터 먼저 좀 확인을 해 봅시다.”
공항을 중심으로 지도상의 위치로 따지면 지사 측에서 예약을 해 둔 호텔과 방돔 광장은 정반대 방향.
하지만 지사장은 아무런 이견도 내지 않고 직원을 시켜 현지 버스 기사에게 바뀐 목적지를 전달하게 만들었다.
방돔 광장 버스 전용 주차장에 내렸을 땐 이미 시간이 다섯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언제 내 옆으로 다가왔는지, 고 부장이 가까이 붙어서 내게 저 멀리를 손짓하며 말했다.
“과장님.”
“네.”
“저 건물입니다.”
남 사장 역시 지사장을 통해 그 자리에서 매입한 건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난 그 자리에서 상상만으로 해당 건물에 내가 기대하고 있는 이미지를 입혀 보았다.
그 앞을 지나다닐 더 많은 가상의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재경모직의 새로운 도전을 상상해 보았다.
언제나 이런 상상은 날 설레게 만들고, 가슴을 뛰게 한다.
“그때 전화로 한번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 회장님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시기도 전에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 부장은 마치 내게 칭찬을 바라듯 굽신거렸다.
“그럴 만하네요. 멋집니다.”
그 말에 고 부장의 광대는 멈춤 없이 한참 동안 위로 치솟았다.
횡단보도가 없는 사 차선 차도를 건너야 했는데, 모두가 다 그 도로를 건너기 시작할 때까지 신기한 팀장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당 건물을 유심히 살폈다.
결국 강인성 과장이 “신 팀장! 얼른 와요!” 하고 소리를 친 후에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도를 건넜다.
신 팀장은 건물 앞에서도 혼자만의 시각으로 건물 외관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남 사장은 내가 신 팀장이 건물 외관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자 한다는 걸 눈치챈 듯, 건물 안으로 안내를 하려는 지사장을 잠시 말렸다.
파리로 넘어오기 전까지, 아니 드골 공항에 도착해서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번 방문팀 안에서 신 팀장의 존재감은 가장 미비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남 사장까지 기다려 줄 정도로 그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고 있었다.
한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신기한 팀장이 내게 말했다.
“이 건물이 그러니까… 우리 회사 건물이라고요?”
“네.”
“후아….”
“왜요?”
“제가 어지간하면 이런 표현을 잘 안 쓰거든요.”
“…….”
“근데 진짜 과장님은 천재인 거 같네요.”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신 팀장이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 로케이션에 있는 건물을 렌트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사 버릴 생각을 하셨습니까?”
“보시기에 1층은 어떤 거 같습니까? 이미지 숍으로 변신 가능하겠습니까?”
나의 질문에 신 팀장은 이 한마디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이 정도 프로젝트라면 한국뿐 아니라, 파리 현지에서 VMD 생활을 하는 사람한테도 평생 남을 포트폴리오가 될 겁니다.”
지사장과 고 부장이 이 건물 1층을 이미지 숍으로 만드는 게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 부장이 내게 물었다.
“이미지 숍이요?”
하지만 난 대답할 타이밍을 남 사장에게 빼앗겼다.
남 사장이 지사장에게 말했다.
“저 간판 저건 언제 저렇게 단 거예요?”
남 사장의 시선이 도착한 곳엔 재경의 영문 로고가 붙은 간판이 건물 2층과 3층 사이에 걸쳐 붙어 있었다.
“간판 작업은 지난주에 끝났습니다.”
“간판이라는 건 사람들 보라고 달아 놓는 거 아니에요?”
“…….”
남 사장 특유의 살짝 까칠하고 차가운 어투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가 대한민국 서울도 아니고 이 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재경이 뭔지 무슨 수로 압니까? 설마 한국 관광객들 보라고 저렇게 달아 놓은 거예요. 저거 당장 떼요.”
“네.”
지사장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얼른 대답했다.
“저 간판 떼고, 저기에 시니어즈 이미지 받아다 간판 똑같은 사이즈로 제작해서 달아 놔요.”
“시, 시니어즈요?”
날 향해 싱긋이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남 사장이 말했다.
“지사 사무실은 위에도 층 많으니까 아무 층이나 써도 되잖아요. 여기 1층은 시니어즈 이미지 숍으로 준비할 겁니다.”
“……!”
“건물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