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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마, 오지 마! (102/303)

오지 마, 오지 마!

파리 출장을 다녀오고 시작된 한 주.

월요일 점심시간. 강인성 과장이 날 찾았다.

“재경항공으로는 우회 투자로도 프랑스에 물려 있는 투자 같은 건 일절 없었습니다.”

강 과장의 보고에 난 안심을 했다.

투자가 담겨 있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안 된다.

그 부분은 홍준이 놈이 사업 확장이 아닌 경영권 확보에 사활을 걸다시피 회사를 운영해 왔기에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기분 문제다.

만약 재경 그룹 쪽으로도 프랑스에 물려 있는 투자사 쪽(내가 의심하고 있는 정엽이의 투자사) 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지분은 곧 홍준이를 향한, 혹은 작은집을 향한 정엽이의 복수심이라고 봐야 하는 거니까.

정엽이가 홍준이와 작은집 형제들을 상대로 그런 복수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나름의 쓸모는 있겠다 생각 중이었다.

물론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니 안심이기도 하고.

정엽이는 현재 프랑스인으로 숨어 지내며 뭔가 작전을 걸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작전은 태산이의 미래금융이 없이는 시도를 해 볼 수 없는 성격이었을 것이고.

나는 그간 정엽이에게 들어간 태산이의 지원이 꽤 컸을 거라는 확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정엽이를 실제로 만나 보기 전까지는 사실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이번에 파리에 가서 직접 만나 보니까, 그 반신반의가 확신으로 바뀌어 버렸다.

내 손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봐도 단단하기가 짱돌보다 묵직하고 빈틈이 없어 보이던데, 그런 정엽이를 사람 보는 눈이 귀신보다 더 정확한 태산이가 놓쳤을 리가 있겠냔 말이지.

“부경 쪽으로는요?”

“부경호텔이 현재 프랑스 계열의 투자사 쪽으로 물려 있는 게 꽤 있습니다.”

맞네.

정엽이가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투자사가 틀림없다.

그렇지.

백화점 유통이나, 호텔 쪽이 그나마 정엽이 입장에선 건드려 볼 엄두가 나는 곳이었을 거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고작 돈 몇 푼, 그 돈 몇 푼 굴릴 수 있는 파이프 하나 가지고 이리저리 눈치나 살피며 기회 봐서 찔러보는 게 투자사들이 가진 전술의 전부가 아닌가.

그런 코딱지만 한 투자사 하나를 가지고 겁 없이 부경가 장남의 화학을 건드리겠나, 아님 차남의 통신을 건드리겠나?

가당치도 않지.

만약 정엽이가 프랑스에 숨어 있으면서 혼자 이빨과 손톱을 갈고 있었다면, 그 이빨과 손톱을 드러낼 상대는 무조건 부경가여야 맞는 거다.

정엽이가 이빨과 손톱을 갈아 볼 수 있도록 계기와 자극을 태산이가 끊임없이 해 줬다는 전제하에.

그렇다고 태산이의 배짱으로 미래금융 전체가 덤벼도 답이 안 나오는 화학의 부경가 장남이나 통신의 부경가 차남을 먹잇감으로 삼지는 못했을 것이고….

결국은 삼남의 백화점 유통 쪽 아니면 사돈 양반이 시집간 딸에게 넘겨준 호텔 쪽을 노리고 있을 거라, 나 역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물려 있다는 건 자금 수혈을 받았다는 거겠죠?”

“네, 적지가 않습니다.”

“얼마나 있습니다.”

“11퍼센트가 프랑스 ‘드모어’라는 투자사 앞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드모어.

호기심이 폭발을 하고 있었다.

“회사 정보는 확인해 봤습니까?”

“네, 확인은 했는데… 별 특이 사항 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깨끗해요.”

“투자사가 깨끗하다는 거 자체가 특이 사항입니다. 특이 사항이 없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고요.”

입술을 오물거리며 잠시 내 눈치를 살피다가 강 과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2004년도에 설립이 된 회사고요, 2008년도에 ‘드 누락’이라는 호텔 체인을 인수했습니다.”

“드 누락이요?”

“프랑스 로컬 브랜드입니다. 큰 호텔은 아니고, 프랑스 전역에 5군데, 알자스 쪽에 한 군데, 이렇게 총 6개 4성급 호텔을 별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대충 타산이 나온다.

2008년도면 딱 정엽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였겠구나.

태산이 입장에서도 정엽이를 상대로 뭔가를 시도해 볼 시기이긴 했겠다.

2004년도면 4년 먼저 준비를 시킨 거라고 봐야 되나?

그렇지.

그 정도 기간은 두고 회사를 만들어야 충분한 자금 송금이 가능해지지.

“드모어 거긴 대표자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마뉴엘 엠흐’라고 되어 있던데요?”

“마뉴엘 엠흐요?”

“네.”

잠깐만.

대표자가 여전히 다른 이름으로 되어 있다?

왜?

정엽이는 이미 데미안으로 이름만 바꾼 게 아니라 프랑스로 귀화까지 하면서 철저하게 프랑스인이 되어 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앞으로 나오지 않고 뒤로 숨어만 있지?

“혹시 그 회사 임원 중에 데미안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지금 당장으로썬 거기까지는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과장님. 계약서가 오고 가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명분 없이 업체 디테일을 요청할 순 없는 내용이니까요. 거기다 국내 기업도 아니고, 아무리 투자사라지만 해외 기업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거겠나.

하긴, 그 짧은 며칠 동안 이 정도 정보를 찾아와 준 것만 해도 대단하다 칭찬을 해 줄 일이긴 하다.

그리고 강 과장 말처럼 그 정도 내용은 뭔가 직접적인 사업 교류가 있어야 요청이 가능한 내용이고.

흠….

별것도 아닌 게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고 있네.

아무리 봐도 드모어가 현재 파리에 숨어 있는 정엽이의 실체가 맞는 거 같긴 한데, 이걸 지금 당장 확인해 볼 방법이…!

방법이 있네.

그 순간 번뜩 정엽이의 처 안나가 떠올랐다.

“네, 일단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다른 건 더 필요하신 내용 없으십니까?”

“필요하면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릴게요. 고마워요.

강 과장을 올려 보내고, 곧바로 하늘이에게 전화를 걸어 봤다.

“통화 가능해?”

―보통은 아무리 이해타산이 걸린 결혼이라도 결혼 이야기까지 오고 간 사이라면 출장을 다녀와서 바로 갔다 왔다고 연락을 해 주는 게 기본 아닌가?

뭔데 시작부터 이렇게 골이 나 있지?

“너 혹시 내 전화 기다렸던 거야?”

―설마 내가 오빠 목소리 듣겠다고 기다렸겠어? 아, 사람이 진짜 왜 그러니? 정엽이 오빠 만났다면서.

“만났지.”

―그럼 만나서 어땠다는 거 정도는 전화로 말을 해 줘야 할 거 아냐. 그래야 사람이 걱정을 안 하지.

지가 왜 걱정을 해?

그리고 이걸 내가 하늘이한테 이야기를 해 줬어야 하는 건가?

“그렇게 궁금했음 네가 전화를 하지, 인마. 나는 괜히 너 쉬는 데 방해될까 봐 일부러 전화를 안 했지.”

―우와, 설마 지금 배려심 있는 척한 거? 이쯤 되면 정말 노답인데?

“노답이 아니라….”

아니지, 아니지.

내가 지금 하늘이를 데리고 이딴 말꼬리 물기 말장난이나 하자고 전화를 건 건 아니지.

“아… 인정. 맞네. 노답이 맞네. 내가 생각이 짧았다.”

―또 약 치고 있다.

“약 치는 게 아니라 내가 정신이 없었어.”

―그래서 왜 전화한 건데?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어.”

―궁금한 거 또 뭐?

그래, 하늘이가 다른 건 몰라도 뒤끝은 별로 없다.

특히 몇 번 정도 부딪쳐 보니까, 상대가 실수를 인정만 하면 잘 넘어가 주는 편이다.

속이 넓다.

이런 거 보면 태산이 같은 샌님한테서 어떻게 영석이처럼 잘 노는 놈이 나왔고, 또 영석이 처럼 무조건 좋은 게 좋은 거인 놈 밑에서 어떻게 하늘이 같은 녀석이 나올 수 있는 건지 신기할 뿐이다.

“안나 있잖아.”

―안나?

“어. 안나. 안나가 성이 어떻게 되지?”

―안나 패밀리 네임은 갑자기 왜?

“들었는데, 까먹었어. 왜 그럴 때 있잖아.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답답할 때. 내가 지금 딱 그래. 안나 패밀리 네임이 뭐야?”

―지금 이 시간에 그게 궁금해서 나한테 전화한 거 이거 실화야?

“오죽 답답했음 전화를 했겠냐?”

―나 근데 갑자기 오빠가 답답하단 소릴 하니까, 왜 괴롭히고 싶어지지?

뭔 소리야?

“뭐가?”

―그 기분 나도 잘 알지. 어제 하루 내가 딱 오빠 때문에 그런 기분이었거든.

뭐라는 거야?

“뭐가?”

―딱 한 글자만 생각나면 바로 알 거 같은데, 그 한 글자가 이상하게 생각이 안 나지?

“그러니까.”

―응. 계속 그 기분 그대로 가지고 있어.

“뭐?”

―어제 내가 딱 그랬거든.

“아, 그러니까 뭐가? 뭐가 아까부터 나 때문에 어제 네가 딱 이랬다는 건데?”

하늘이의 섭섭한 표현이 시작했다.

―나도 내가 하는 거지만, 한 번씩 나 하는 거 보면 미친 애 같아. 속이 없는 애 같다고. 오빠 출장 간다고 정엽이 오빠한테 전해 주고, 만남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내가 그러면 안 됐던 거네, 그지?

지가 신경을 쓰긴 뭘 신경을 써!

내가 남 사장 꼬셔서 만났던 건데!

하지만 오케이.

답답한 놈이 우물 판다고, 지금은 일단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를 건 거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왜 그랬지? 다 네 덕분에 만난 건데, 고맙다는 말도 안 하고. 아오, 내가 생각해 봐도 내가 참 염치가 없다. 염치없는 거, 이것도 병이야, 그지?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덕분에 잘 만났어.”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한마디만 해 주면 다 끝날걸, 왜 내 입에서 이런 아쉬운 소리가 나오게 만들어?

“너도 알잖아, 내가 기억이 왔다 갔다 한다는 거. 했나, 안 했나 가끔씩 깜빡깜빡하고 그래.”

―내가 얼마나 궁금했게? 할아버지 몰래 정엽이 오빠한테 연락했던 거야. 정엽이 오빠는 잘 만났다고 하는데, 그 오빠야 원래 항상 다 좋다, 괜찮다, 아무 문제 없다…라고만 하는 사람이니 믿을 수가 없고. 이럴 때 오빠라도 전화해서 잘 만났다, 덕분이다… 그렇게 짧게라도 말을 해 주면 중간에 다리 놓은 사람 입장에서 안심도 되고 얼마나 좋냐고. 어쩜 인간이 기억을 잃어도 지밖에 모르는 건 그대로야?

적당히 하자…라는 말이 목울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맞아. 내가 생각이 짧았다. 그래서 안나 성이 뭐야?”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할까?

“혹시 엠흐야?”

―…….

“엠흐 맞아?”

―에이 씨….

“그지? 엠흐지? 엠흐 맞지? 안나 엠흐?”

―간만에 골탕 좀 먹이나 했네.

웃음이 나왔다.

하늘이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봤다.

“엠흐 맞지?”

―맞아. 근데 엠흐가 아니고 그냥 엠므. 누가 그걸 발음 나는 대로 엠흐, 그렇게 읽어?

내가 읽었나? 나도 강 과장한테 듣고 그런가 보다 했던 거지.

“아… 흐가 아니고 므야? 그럼 너 혹시 마뉴엘 엠므는 누군지 알아?”

―마뉴엘 엠므? 마뉴엘이면 남자 이름인데… 안나한테는 남자 형제가 없고. 혹시 안나 아버지 성함이야?

“아. 안나한테는 남자 형제가 없어?”

하늘이도 태산이가 정엽이를 뒤에서 지원하고 있다는 내용은 모르고 있었다고 봐야 되는 걸까?

하긴.

이제 막 회사 일을 배우기 시작하는 하늘이에게 그런 내용까지 모두 다 알려 줄 이유는 없었겠지.

―응. 없어, 남자 형제.

“너 안나랑 친해?”

―친하다기보다는… 꽤 오래 봐 왔지. 정엽이 오빠 프랑스에 처음 이민 갔을 때, 이민 수속부터 시작해서 거기 부동산 관련된 내용을 모두 안나네 아버지가 처리를 해 준 걸로 알고 있거든. 대학 들어가서 두 사람 사귄다는 이야기 처음 듣고 깜짝 놀랐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웃겨.

“아, 그래?”

―안나 언니 아버지 성함이 마뉴엘인지 내가 확인해 봐 줘?

“아니, 아냐. 괜찮아.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거 같다.”

―근데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았어?

내가 모르는 게 어디에 있겠나.

궁금한 게 생기면 그게 뭐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알아내고야 마는 게 바로 나 손중길인데….

“그건 그렇고 내가 파리에서 마카롱을 좀 사 왔어.”

―마카롱? 나 단 거 안 먹는데?

“너는 말을 꼭 그렇게 해야 되냐?”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앞으로는 알고 있으라고. 나 단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그 정도 말은 할 수 있는 거 아냐? 받으면서 그런 말 하는 게 더 별로일 거 아냐.

“내가 너 줄려고 샀단 말은 안 했어.”

―…뭐?

“마카롱을 좀 사 왔다고. 회장님 맛이나 좀 보시라고.”

―씨이….

“그거 들고 저녁에 인사드리러 갈 테니까, 저녁에 집에서 보자.”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우리 집에!

역시 하늘이를 놀리는 게…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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