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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하이? (103/303)

하늘이 하이?

장기를 두는 도중 태산이가 먼저 정엽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남 사장한테 들은 내용인지 하늘이한테 들은 내용인지, 그것도 아님 정엽이한테 직접 들은 내용인지는 몰라도, 내가 파리 출장 동안 정엽이를 만났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아 참, 회장님. 저 안 그래도 그걸로 회장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무엇을?”

“정엽이 형은 회장님을 태산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던데요?”

“그게 왜?”

“앞으로는 저도 편하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됩니까?”

난 왜 이렇게 이런 식으로 태산이를 골려 먹는 게 재미가 있을까?

태산이는 내가 나인지도 모를 것이고, 이런 부탁이 내가 자신을 놀리는 걸지도 모를 텐데, 그래서 난 이런 게 더 재미가 있다.

그래도 태산이 사회적 지위가 있고, 또 아직 그 정도로 내게 마음을 열어 준 게 아니라 차마 ‘영감’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물어볼 순 없었다.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라고 부르겠다는데, 그걸 못 하게 할 이유가 어디에 있어? 그렇게 불러.”

“오, 감사합니다.”

자기 차례에서 장기 알을 이동시킨 후 태산이가 물었다.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더니, 이번에 직접 만나니까 어떻더나?”

내 표정을 읽으려는 기색 따위는 숨길 생각을 않고 묻는 거였다.

난 조금 전 태산이가 움직인 장기 알을 멀리 떨어져 있던 포로 잡아먹으며 대답했다.

“좋았어요. 반갑고, 또 안나, 데이빗… 새로운 가족들도 만날 수 있어 뜻깊었습니다.”

“그게 끝이야? 장이야.”

도대체 태산이 이 친구는 장기를 발로 두는 거야, 뭐야?

거기에서 왜 장을 불러?

그럼 마한테 이렇게 먹힐 수밖에 없는데.

“멍입니다.”

“그게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

“한참 됐어요. 처음에 차 뺄 때 한 번 움직이고 그 뒤로는 손도 안 댔구만….”

“아이야… 내가 그걸 못 봤네, 허허. 이 판도 또 지게 생겼구만… 그게 끝이야?”

“끝이라니요?”

“좋았다, 반가웠다… 그게 끝이냐고.”

성급한 장군 한 번으로 장기의 판세가 완전히 기울어져 버리자 어느새 흥미가 잃은 눈으로 태산이가 다시 물었다.

“조금 실망스럽긴 했는데, 그런 부분은 또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요.”

길어 봤자, 앞으로 두세 수 안에 끝이 날 판이다.

그럼에도 태산이는 끝까지 두겠다는 듯 의미 없는 방어를 시도했다.

“뭐가 실망스러웠다는 거야?”

“속이려면 좀 제대로 속이든지, 아님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편하게 자리에 나와 줬으면 반갑기만 했을 거예요.”

“속여? 정엽이가?”

“그게 어디 뭐 꼭 정엽이 형 혼자 속이고 있는 거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장군을 불렀다.

그 장군 앞에 태산이는 더 이상 장기판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드모어.”

결국 태산이의 두 눈에 지진이 크게 일어났다.

그 반응 한 번에 모든 게 명확해졌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광대 부근 근육이 살짝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거 정엽이 형이 운영하는 회사 아니에요?”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에이, 빤하죠. 아닌 척하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너무 그렇게 의식적으로 숨기려고 하는데 그게 더 어색해 보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통 속에 들어 있던 장기 알을 모두 장기 판 위로 쏟으며, 오늘 장기는 이쯤에서 접겠다는 뜻을 밝히는 태산이었다.

“따라와.”

뭘 또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나.

짐짓 무거운 표정을 만들어 보이는 태산이었지만, 내 눈엔 당황한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거실 소파에서 뉴스를 보고 있던 영석이는 장기를 두러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평소보다 너무 일찍 나와 버린 나와 태산이의 모습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갈 때완 다르게 무겁게 변해 버린 아버지의 얼굴 표정에, 멀리 내게만 눈빛으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깨를 살짝 들었다 내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늘이 애비도 같이 와.”

“어디….”

“서재로 와.”

내가 이 집에 그간 꽤 자주 찾아왔는데, 태산이의 집무실 겸 서재로 쓰는 방은 처음 들어와 봤다.

그냥 한눈에 봐도, 매일 출퇴근이 힘든 태산이를 위해 회사 임원들이 업무차 이 집을 방문할 때, 업무실로 쓰는 공간이었다.

열 명은 족히 끼어 앉을 수 있는 넓은 직사각형 회의 탁상.

그 상석으로 태산이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나와 영석이는 서로를 마주 보며 상석과 가장 가까운 의자를 빼어서 앉았다.

“너 그거 어떻게 알았냐?”

영석이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 들어왔다가 밑도 끝도 없이 내게 정엽이와 드모어의 관계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태산이의 물음에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알아봤죠.”

“그러니까 어떻게?”

화를 낸다고 하기보다는 당황한 마음을 숨기겠다고 감정 절제를 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이 영석이 눈엔 태산이가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던 모습이다.

“왜? 뭔데?”

영석이가 조심히 내게 물었다.

“아, 정엽이 형이요. 제가 알아보니까 프랑스 소재의 드모어라는 투자 회사가 있던데, 그 회사의 실질적 운영자가 정엽이 형인 거 같더라고요. 그걸 말씀드렸더니, 이 방으로 부르시네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영석이도 크게 당황을 하고 있었다.

그 당황하는 모습을 태산이에게 보이며, 절대 자기가 알려 준 내용은 아니라는 걸 확인시키고 있었다.

“할아버지. 분위기가 이렇게 되어 버리면, 제 입장이 많이 난처해져요. 이렇게까지 심각할 내용은 아니지 않나요?”

그제야 태산이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정엽이가 자기 입으로 직접 그렇게 말하더나?”

“아뇨.”

“그럼 어떻게 알았어?”

“알아봤죠.”

“그러니까 어떻게?”

정엽이와 드모어의 관계를 알아내는 데 사용한 방법을 숨길 이유는 없었다.

불법과 편법이 들어간 내용은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그거까지 썼으면, 이렇게 찾아와서 직접 물어볼 필요도 없었겠지.

강인성 과장을 통해 재경의 항공과 식품, 모직, 그리고 부경 그룹의 전 계열 지분 구조 현황을 확인하고 거기에 프랑스에 묶여 있는 투자사 지분이 있는 곳을 가장 먼저 확인해 봤다고 말하자 태산이와 영석이는 서로의 표정을 감시하려는 듯 수시로 쳐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는 대표가 데미안으로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데미안이 아니라 마뉴엘 엠므로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하늘이한테 전화로 물어봤죠. 혹시 안나 성이 뭐냐고. 엠므. 딱 답 나오잖아요. 거기까지는 90퍼센트의 짐작. 그리고 부족했던 10퍼센트의 확신은 방금 할아버지랑 아저씨가 주셨고… 그게 전분데요?”

생각이 깊어진 태산이를 대신해서 영석이가 입을 열었다.

“드모어는 우리가 정엽이한테….”

“말씀 중에 버릇없이 잘라서 죄송한데요, 아저씨.”

난 태산이와 영석이를 쳐다보며 진심으로 말했다.

“저는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런 건 별로 안 궁금해요. 그리고 정엽이 형을 통해 드모어로 뭘 계획하고 계셨는지도 지금 당장은 크게 궁금하지 않아요.”

태산이가 살짝 날이 선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 왜 뒷조사를 했어?”

“뒷조사요? 제가요?”

난 얼른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내저으며 태산이가 하고 있는 오해를 부정했다.

“누가 뒷조사를 저처럼 이렇게 대놓고 합니까? 이건 뒷조사가 아니라 확인을 한 거죠.”

“네가 왜 그런 걸 확인을 하느냐고.”

“할아버지, 왜 갑자기 저한테 화를 내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요. 이건 저한테 왜 확인을 해 봤내고 혼을 내시기 전에, 왜 확인당할 상황을 할아버지가 만드셨는지를 스스로 물으셔야죠.”

“뭐?”

“저는 진짜 정엽이 궁금했어요. 어떻게 지내는지, 잘 지내는지. 제가 몇 번이나 여쭤봤잖아요. 직접 만나 보니까 별것도 없던데, 그냥 있는 그대로 말씀을 해 주셨음 아… 잘 지내는 모양이다, 언제 한국에 들어올 일이 있으면 한번 만나 봐야겠다… 정도로 끝냈겠죠.”

“…….”

“그런데 계속 저한테 뭘 숨기려고 하시고, 저와 저희 집안을 상대로 정엽이 형을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이시니까 도대체 현재 사는 상황이 어떻길래 이렇게까지 하시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요.”

“크흠….”

“진짜 직접 만나 보니까 별거 없던데요? 아니, 오히려 얼굴이 너무 좋아서 안심도 되고,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잖아요.”

“이상해? 뭐가?”

“샹갈렌 상대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은 아니잖아요?”

하늘이를 통해 정엽이가 샹갈렌 상대를 졸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좋은 대학을 나와서 스타트업 회사에 다닌다는 게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더라고요. 물론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식사 자리 내내 저한테 자기는 가족들과의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다, 회사를 선택할 때에도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며 고르는 편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웃기잖아요. 집에 돈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딱 봐도 두 눈에 근성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 그런 실없는 소릴 묻지도 않았는데, 저한테 계속한다는 게.”

“…….”

“보통의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을 상대로 자신이 잘 지내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하지, 그 반대의 모습은 가급적이면 잘 안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

“그런데 이상하게 반대되는 모습만 보여 주려고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그래서 확인을 좀 해 봤던 거뿐이에요.”

모든 걸 인정하듯 태산이가 내게 물었다.

“확인을 해 보니까… 어떻더나?”

“조금 섭섭하던데요?”

“섭섭해? 누구한테?”

“당연히 할아버지죠.”

“나한테.”

“네.”

“왜?”

태산이보다 더 내가 할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영석이었다.

“부경 그룹이 가져간 우리 재경의 계열사들. 그거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다시 가져올 거라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이 자리가 이렇게까지 무거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은 가볍게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차원에서 영석이를 상대로 농담을 던져 봤다.

“그런데 그간 이렇게 좋은 패를 만들어 두고 계셨으면서, 앞으로 제 장인이 되실 분도 그렇고, 할아버지까지 아직 이런 귀한 패를 숨기고 안 보여 주셨다는 게 조금은 섭섭했어요.”

그 말에 영석이가 태산이 몰래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산이는 그때까지도 엄한 표정을 애써 유지했다.

“저는 제 패를 이미 할아버지께 다 보여 드렸잖아요.”

“네가 가진 패?”

“제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부경 그룹의 전 계열 지분이요. 그걸 제가 재경모직을 국내 업계 1위에만 올려놓으면 받기로 했다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던 거 같은데요?”

그제야 태산이도 피식하고 웃었다.

“아직 받지도 못한 걸 벌써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 놈을 상대로 내가 뭘 믿고 내 패를 보여 주나?”

“안 보여 주셔서 제가 알아서 봤잖아요. 그럼 된 거죠.”

“설마 이게 내가 가진 패의 전부라고 보는 거야?”

“그거 말고 더 있으세요? 오, 역시. 뭔데요?”

“보고 싶냐?”

“당연하죠.”

태산이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리자, 영석이 역시 더는 긴장하지 않고 자신의 아버지와 가깝게 이야기를 나누는 내 모습을 유심히 살피기만 했다.

“그런데 어쩌냐? 아직 네가 모르는 패는 드모어보다 훨씬 더 비싼 패라서 내가 그냥은 못 보여 주겠는데?”

“에이, 그러지 말고 그냥 좀 보여 주세요. 제가 뭐 설마 그걸 달라고 하겠어요? 우리 편이 어떤 패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본격적인 판을 짜더라도 짜 볼 거 아닙니까.”

“판만 짤 줄 아는 놈은 필요 없다.”

다시금 태산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네놈한테 판 짜는 능력이 있다는 건 내가 인정을 해. 그간 남 사장 통해 네가 모직에서 올린 실적들만 들어 봐도 판 짜는 실력이 제법이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조직을 관리하고, 인사를 운영하는 능력이 전부는 아니야.”

“그럼요?”

“돈.”

“돈이요?”

“회사에 돈 없이 무슨 조직이 유지가 되고, 운영해야 할 인사가 있을 수 있겠어? 돈을 버는 능력도 좀 증명을 해 봐라.”

이건 뭐지?

국가 대표 수영 선수한테 물에 뜨는 걸 보여 달란 소리보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잖아!

“사업이라는 건 조직 관리, 인사, 자금 운영. 이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져야 돼. 내가 너 조직 관리, 인사 운영 능력은 남 사장 통해 확인을 했는데, 아직까지는 오로지 네 기획만으로 명확하게 올린 매출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결국은 국내 패션 업계 1위에 재경모직을 올려놓고, 제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부경 그룹의 전 계열 지분을 얻어 낸 다음 이야기를 다시 하자… 그 말씀이신 거죠?”

“말귀 하나는 밝네.”

“그럼 할아버지.”

“말해.”

“이거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아저씨도요.”

난 태산이와 영석이에게 약속을 받았다.

“무슨 약속.”

“제가 그 지분들을 다 확보를 하면요. 그때부터는 지금처럼 저 테스트하는 거 그만해 주세요.”

“…….”

“테스트 받는 게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이거 너무 비효율적인 거 아닙니까? 번거롭고 아무 의미도 없는 거 아닙니까.”

“의미가 없다?”

“당연하죠. 어차피 다 해낼 건데.”

바로 그때였다.

“다녀왔습니다.” 하는 하늘이의 목소리가 거실 밖에서부터 흘러들어 왔다.

태산이의 표정을 읽은 영석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약속해 주세요.”

난 얼른 영석이를 다시 붙잡아 놓고 태산이를 쳐다봤다.

“어려운 걸 부탁드리는 게 아니잖아요.”

결국 태산이가 흔쾌히 약속했다.

“그래, 약속한다. 어디 한번 열심히 해 봐.”

“아저씨는요?”

“회장님 생각이 아저씨 생각이지.”

그래서 난 영석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일부러 두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한 크기로 혼잣말을 했다.

“그럼 얼른 지분들 다 받아 와야겠네.”

“…….”

싱긋이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먼저 서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축 늘어진 어깨로 가방을 바닥에 질질 끌며 거실을 걷고 있는 하늘이의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는 네가 왜 할아버지 서재에서, 그것도 할아버지, 아버지랑 함께 나오는 거냐는 식으로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그리고 난 그런 하늘이를 향해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한쪽 손만 들어서 인사를 건넸다.

“하늘이 하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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