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안 되면 고통이잖아요
인사부 직원들 특유의 흐물거림이라는 게 있다.
특히 지금처럼 동료 간의 갈등 문제로 인사부를 찾아온 직원을 대할 땐 그 흐물거림이 극에 달한다.
생수 두 통을 직접 들고 상담실 안으로 들어온 김 부장은 특유의 가벼운 재치로 내겐 그냥, 임기성 주임에겐 직접 뚜껑까지 돌려 따서 전달했다.
그런 다음 임 주임이 앉아 있는 뒤로 서서 잠시간 뭉쳐 있는 그의 어깨를 주물러 준 다음, “천천히 이야기 나눠요.”라고 말했다.
김 부장이 나간 뒤 임 주임에게 말했다.
“일단 물부터 좀 마셔요.”
어느새 흥분이 가라앉은 임 주임은 타는 가슴을 생수 반병으로 말끔히 식혀 놓고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바로 방금 개발부장님한테 전화를 받았어요. 많이 당황하신 거 같더라고요.”
감정적이었던 자신의 행동에 잠시 후회를 하는 듯, 하지만 그 후회하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더 강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임 주임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임원들, 사장단의 파워 게임을 보고받고 누가 이기나 지켜보는 게 아닌, 이런 일선 직원들의 갈등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는 게.
심각할 당사자를 앞에 앉혀 놓고 이런 재미를 느끼는 게 미안하긴 해도, 내심 재경을 처음 키울 당시 말만 사장이었지 직접 날을 새어 가며 물건을 납품하고 직원들과 지지고 볶았던 그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게, 나는 퍽 재미가 있었다.
자기가 자기 발로 직접 찾아와 놓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자기도 입을 열지 않겠다는 듯, 임 주임은 골이 난 얼굴로 연거푸 물병만 기울이고 있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거친 숨을 내쉬며 임 주임이 물었다.
“뭘요?”
“부장님한테 전화 받으셨다면서요?”
“네.”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제가 하는 말을 듣겠다고 온 게 아니라, 인사부에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오신 거 아닙니까?”
최대한 다독여 준다는 느낌으로, 임 주임이 더는 자기 본심과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하며 대답을 해 줬다.
“대충 신기한 팀장하고의 갈등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챙겨 온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그 갈등 전엔 어떤 잠재 갈등이 있어 왔는지를 기록하겠다는 뜻을 전달하며 펜을 다이어리 위로 붙였다.
“임 주임 이야기부터 좀 들어 보겠습니다.”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보통 이렇게 깨어 있는 사람인 척하는 사람들이 실제론 더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를 더 조심하는 법이지.
“그냥 이거.”
상담 탁상 위로 흰 봉투 하나를 올려놓는 임 주임이었다.
“이거 전달하러 왔습니다.”
“사직서네요?”
“네. 보통 재경 같은 대기업은 3주 정도의 책임 기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제 책임은 다하겠습니다.”
“아예 여지를 안 주시네요.”
일단은 사직서를 받아 줬다.
그걸 다이어리에 끼우고 있는데, 임 주임이 말했다.
“여지가 필요하겠습니까? 저는 도저히 신 팀장님 밑에선 일할 자신이 없습니다. 절이 싫음 중이 떠나야죠.”
“그렇군요. 임 주임한테는 재경모직이 아니라 신 팀장이 절이었군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희 같은 일반 사원들한테는 바로 위 상사, 같이 일하는 선배가 곧 회사인 거죠.”
“주임님하고 신 팀장 사이에 대리도 있을 것이고, 과장도 있을 텐데, 신 팀장이 바로 위 상사는 아니죠?”
“······.”
“개발부뿐 아니라, 영업, ATM 이렇게 세 부서가 동명물산에서 넘어온 시니어즈 기존 팀이 가장 많이 섞인 부서죠. 특히 영업 쪽은 기존 영업부의 곤조가 있어서 동명물산에서 넘어온 시니어즈 기존 팀원들이 텃세를 견뎌 내느라 고생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어요.”
“······.”
“지금 주임님 말 들어 보니까, 역시나 개발부 VMD 쪽은 팀장 자체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라 그런지, 그런 텃세 같은 건 전혀 없었던 거 같네요. 과장, 대리를 통해서 주임을 찍어 누르지도 않았던 거 같고.”
“······.”
“하긴, 뭐. 신 팀장이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확실한 자기 사람이 아직은 한 명도 없을 텐데. 오히려 시니어즈 기존 팀의 눈치를 봐야 하지 않았을까요? 어쨌거나 시니어즈 기존 팀은 우리 재경모직으로 넘어오는 선택을 함께했다는 이유로 그 관계가 더없이 끈끈한 상태일 테니.”
“그, 그런 건 아닙니다.”
“신 팀장 입장에선 그렇게 오해하고 계실 수도 있겠다··· 하는 말을 하는 겁니다.”
“후우···.”
“아닙니다, 아니에요. 신 팀장 커버를 치겠다고 하는 말 절대 아니고, 임 주임이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선을 그어 버리니까 제가 짐작이라도 해 봐야 할 거 아닙니까.”
“그냥 사표 수리해 주시면 됩니다.”
어쭈?
그래, 이거까지 들고 인사부를 찾아온 마당에 더는 무서울 게 없다 이거지?
그렇지.
회사에서 월급 받을 때나 아쉬운 게 있는 거지, 이런 걸 들고 인사부까지 찾아올 결심을 한 이상 무서울 게 뭐가 있겠나.
“네, 알겠습니다. 수리 진행하겠습니다.”
이럴 땐 말이 겉돌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임 주임이 이성적인 상황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사직서 수리와 갈등의 원인을 확인하는 건 별개의 내용이라는 걸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3주간이라는 시간은 책임 기간이 아니라, 유예 조정 기간입니다. 이건 법적으로 정해진 내용도 아니고, 회사에서 강제를 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에요. 만약 임 주임이 최대한 퇴사 처리가 빨리 되길 희망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내용입니다.”
겁을 주기 위함이 절대 아니었다.
당황을 시키기 위함도 아니었고.
정확한 선을 그어 주기 위함이었다.
“반면에 퇴사 사유에 대한 고지 책임은 사규에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팀장과의 갈등이라는 드러난 이유가 있는 이상, 인사부에선 이 부분을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씀은 제가 이직을 하게 될 경우, 그 이직에 불이익을 당할 평판을 남길 수도 있단 뜻입니까?”
“현재 감정이 많이 올라와 있다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너무 그런 식으로 과격한 입장을 보여 주시는 건 임 주임한테 좋을 게 없어요.”
“방금 과장님 하신 말씀이 저는 그런 뜻으로밖에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남아 있는 다른 직원들을 위해서라도 갈등이 불거진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겁니다.”
“······.”
“인사부에서 어떻게 전 부서를 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수 있겠습니까? 신 팀장에 대한 악감정을 듣겠다는 게 아니라, 갈등의 이유를 알려 달라는 겁니다.”
결국 임 주임의 입에서 그간 VMD팀에 있었던 지극히 임 주임 주관적인 문제점, 고질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집단주의의 무서움.
그리고 그 집단주의가 조직 생활의 근간이라 믿는 자들이 펼치는 주장의 어설픔.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는 자신이 집단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이러니.
그 모든 것들이 임 주임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니어즈 매장의 리뉴얼이요? 그거 시니어즈가 재경으로 인수되기 얼마 전에 끝난 겁니다. 1년도 안 된 거라고요.”
“네, 그 부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보통 매장 리뉴얼은 2년에 한 번씩 합니다. 그것도 정말 자주 하는 경우가 그런 거고요, 한 번 콘셉트를 박아 놓고 10년씩 매장 인테리어에 변화를 안 주는 브랜드들도 태반입니다.”
“네, 그렇다고 하더군요.”
“저희요. 재경으로 넘어오기 전에 말입니다. 시니어즈 매장 리뉴얼 작업만 6개월에 걸쳐서 했습니다. 그 6개월 동안 정말 주말도 없이, 하루 15시간, 16시간을 공사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고요.”
“흠··· 네. 현재 리뉴얼하고 있는 거 몇 번 현장에 방문해서 봤는데, 보통 일이 아니긴 하더군요.”
“그걸 왜 꼭 지금 해야 하느냐는 거죠. 그거 말고도 지금 할 거 많지 않습니까. 퍼스펙티브 콘셉트도 거의 최종 단계이고, 론칭이 되는 순간 전국에 있는 유통판에 다 깔리게 될 건데, 그럼 그때 저희는 이 생활을 다시 해야 합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불만이었다.
“처음 신 팀장님이 시니어즈 리뉴얼에 관한 계획을 꺼냈을 때, 시니어즈 기존 팀은 다 보류를 해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저희 VMD들뿐만 아니라, ATM 쪽에서도 준비 중인 홍보 내용을 바꿔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 급하게 진행을 하다 보면 실수가 나올 수 있다고까지 이야기를 했고요.”
“그런데도 신 팀장이 강행을 한 거네요?”
“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현장에 보낼 VMD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더러 한 주에 현장 캐스팅 두 개를 맡으라고 합니다.”
“보통 현장 캐스팅을 한 번 나가면 쉬는 시간 없이 계속 붙어 있어야 한다고 봐야죠?”
“당연하죠. 법정 근로 기준 시간이요? 우린 그런 거 없습니다, 과장님. 물론 리뉴얼 계획이나, 공사가 없는 시즌엔 많이 한가하죠. 그래서 많은 패션 기업들은 VMD팀을 따로 두지 않고 외주 업체를 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오버타임도 없고, 인센티브도 없이 한 주 캐스팅을 두 개씩 몇 달 동안 계속 쳐 내야 하는 건 저희 VMD들 입장에선 최악의 근무 환경인 겁니다.”
난 임 주임의 불만에 깊게 공감을 한다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수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이어리에 해당 내용을 적은 후 입을 열었다.
“그런 내용을 미리 다 신 팀장한테 이야기했는데도, 강행을 해서 현재 팀원들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생을 시키고 있다. 그거네요?”
“···네.”
“신 팀장. 소통이 참 힘든 사람이긴 해요, 그죠?”
“많이요.”
“맞아요. 많이 힘들겠습니다. 소통이 안 되면 고통이잖아요.”
더 다른 내용은 없느냐고 물어봤다.
그 후로도 임 주임은 업무 과중과, 팀원들의 입장과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려오는 신 팀장의 업무 추진, 지시에 관한 내용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 불만을 다 털어놓자, 이젠 어느 정도 마음이 후련하고 또 진정된 듯 보였다.
“신 팀장님하고도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사직서 수리는 절차대로 하겠습니다. 이만 올라가 보셔도 될 거 같아요.”
* * *
인사부를 나선 임기성 주임은 VMD팀 사무실로 올라가 곧장 가방을 챙겼다.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을 대놓고 지켜보는 신기한 팀장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가방을 다 싸서 우남규 과장에게 보고를 하듯 말했다.
우남규 과장은 임 주임과 함께 동명물산에서 재경모직으로 넘어온 인물.
그 목소리가 결코 작지 않았기에 신기한 팀장의 귀에도 다 들어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저 방금 인사부에 사직서 냈습니다.”
“야, 기성아···.”
“저 오늘만 좀 일찍 퇴근하겠습니다. 어차피 모레부터 현장 나가야 하잖아요. 현장 준비 실수 없이 할 테니까 오늘, 내일은 이해 좀 해 주세요.”
우 과장은 신 팀장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우 과장을 향해 신 팀장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세 시도 되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퇴근해 버린 임기성 주임.
시원하게 사직서를 집어 던진 게 홀가분하기도 하고, 인사부 쪽으로 신 팀장의 자질 부족에 대해 좀 더 적나라하게 고발하지 못한 게 끝내 아쉽기도 했다.
신 팀장을 난처하게 만들겠다고, 혹은 엿이나 먹어 보라는 심정으로 무턱대고 회사를 나오긴 했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집 근처 피시방에 들러 게임 몇 판을 하고, 구인 사이트에 들어가 유사 업종 VMD 구인 정보를 찾다 보니 이유 없이 울컥하는 기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재경모직은 어쩌자고 그런 사회 부적응자를 팀장으로 앉힐 수가 있는 거지?
아무리 재경 그룹이 대기업이라도 재경모직의 미래가 벌써 눈에 선했다.
얼마나 어렵게 들어간 동명물산이었단 말인가.
거기에서도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고, 재경으로 넘어와선 또 얼마나 조직을 위해 애를 쓰고 최선을 다했단 말인가.
그 최선과 노력들이 신기한 팀장이라는 자기밖에 모르는, 가진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오로지 자기 성과, 자기 인정을 받아 내기 위해 팀원들을 갈아 넣는 인간 하나 때문에 모두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허탈한 심정.
근무 시간에 혼자 회사를 나와 피시방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 모든 게 업계에서 돌아이 중 상돌아이로 유명한 신기한 팀장 때문인 것만 같아 억울하고, 분하고 또 어떻게든 그 팀장이라는 자리에 흠집을 내 버리고 싶어졌다.
―유나 씨. 오늘 마치고 나랑 소주 한잔 같이 안 할래요?
함께 동명물산 출신으로 재경에 옮겨 오기 전부터 가깝게 지냈던 영업부 동기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곧 그 동기로부터 답장이 왔다.
―그렇지 않아도 VMD팀 사람들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사직서 냈다면서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러게요. 나 오늘 완전 술 마려운데, 같이 마셔 주면 안 되나?
―당연히 마셔야죠. 지금 추 대리님도 옆에 같이 있는데,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보시는데요?
―같이 오세요. 오늘은 시끄럽게 마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네.
친한 회사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지며 위로도 받고, 신기한 팀장에 대한 험담도 하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을 했는데, 임 주임의 책상 위로 메모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다음 주 금요일 캐스팅은 제가 직접 갑니다. 아무리 일정을 비워 봐도 재곡점 캐스팅은 임 주임 말고는 맡길 사람이 없어요. 임 주임한테 들어갔던 금요일 캐스팅은 내가 받을 테니까, 재곡점 캐스팅 부탁드립니다.
그 메모를 확인하고 팀장 자리를 쳐다봤는데, 아직 출근을 안 한 건지, 아님 벌써 출근을 해서 외근을 나간 건지 신 팀장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옆에서 우 과장이 말했다.
“금요일부터 들어가는 주말 캐스팅 직접 받으시겠다고,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내일 가도 되는 현장으로 바로 가셨어.”
“······.”
“내가 할 말은 아닌데··· 지금 다 같이 힘든 거잖아.”
임 주임은 할 말이 없었다.
마치 어제 자신이 했던 모든 것들이 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명 술은 모든 사고를 다 친 다음에 마신 건데, 어째서 사고를 친 그 모든 순간이 술김에 한 것처럼 부분적으로 필름이 끊어지는 느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일까.
“나갈 때 나가더라도 이 시간에 출근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죄송합니다.”
“어제 술 많이 마셨어?”
“···네, 조금요.”
“아침부터 손 과장님한테서 연락 왔어. 너 출근하면 인사부로 내려오라 말 좀 전해 달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