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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로 만들고 싶지가 않더라고 (106/303)

배신자로 만들고 싶지가 않더라고

설마 출근을 지금 한 걸까?

분명 난 9시 반에 우남규 과장과 통화를 하고 임 주임을 인사부로 보내 달라고 했는데···.

전날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얼굴 피부에 술살이 퍼석하게 붙어 있었다.

입에서도 치약 냄새가 역하게 뒤섞인 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고.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네.”

술이 덜 깬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좋을 때다.

고만한 일로 세상 모든 근심을 다 짊어지고 있다는 착각에, 다음 날 걱정도 없이 그렇게 퍼마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시절이란 말인가.

임 주임을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겠냐고 물어봤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어제 신 팀장님하고도 제가 따로 면담을 했습니다.”

어제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흥분이 담겨 있었던 자리에 후회가 들어차고 있는 모양이다.

“저도 궁금한 게 몇 개 있었거든요. 전국에 있는 시니어즈 매장 인테리어 리뉴얼. 비단 VMD팀뿐 아니라 회사 전체적으로도 부담스러운 프로젝트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어제의 그 패기는 다 어디로 가고, 이젠 묻는 말에 대답도 잘 못 하고 있었다.

“매장에 따라 견적이 다 다르게 올라온다고 해도 매장당 최소 4천에서 많게는 억 단위까지 비용이 발생하는 프로젝트인데, 당연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죠. 처음 신 팀장이 그걸 진행하겠다고 했을 때, 회사 입장에서도 그걸 꼭 지금 해야 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때 신 팀장님 대답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하셨습니까?”

“KS 인터내셔널은 VMD팀 총원이 8명에서 10명 사이라고 합니다. 우리하고 비슷하죠. 그런데 그 인원이 KS 인터내셔널 자체 브랜드 8개의 매장 인테리어, 디스플레이를 모두 책임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

“그렇게 업무가 빡센데도 불구하고 많은 VMD가 KS 인터내셔널에서 근무하길 희망하는 이유도 함께 설명을 해 주더군요.”

“······.”

“그만큼 자기 포트폴리오를 많이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내가 어제는 일부러 이 말을 안 했었다.

상대가 흥분이 올라온 상태였는데, 거기에서 내가 계속 신 팀장의 입장을 변호하는 말만 하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거 같아서.

“VMD만큼 이직률이 높은 직종이 없다네요? 자본만 있으면 얼마든지 독립도 가능하기 때문이라던데, 그래요?”

“네. 맞는 말입니다.”

“신 팀장 본인은 이미 충분한 자기 포트폴리오가 만들어진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동명물산에서 넘어온 VMD들은 시니어즈 말고는 포트폴리오에 넣을 수 있을 만한 게 없다고 합니다. 그간 재경에 없었던 VMD팀을 새로 만들면서 받은 신입들은 당연한 거고.”

“······.”

“기존에 재경에는 없었던 VMD팀인 만큼, 그 팀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잡게 만들기 위해선 VMD들에게 동기 부여가 될 만한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시니어즈 매장 리뉴얼이 진행된 거고요.”

“···네.”

“또 시니어즈 리뉴얼 같은 큰 프로젝트를 한 번 경험해 봐야 신입들도 실력이 금방 늘 거라고 하는데, 그 부분에선 저도 신 팀장의 계산에 납득이 가더군요. 할 때는 죽을 만큼 힘이 들어도, 막상 그 힘든 일을 끝내 놓고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력이 부쩍 올라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네.”

“사람이 몸이 피곤하고 힘이 들면, 없던 불만도 생겨나고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불만을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 엄한 사람을 원망하고 싶어지기도 하고요. 신 팀장. 그런 원망의 대상이 되기에 딱 좋은 사람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그런 적 없습니다.”

지금 누구 앞에서···.

“원래 사람은요, 임 주임. 자기는 아닌 척을 해도 자신이 궁지에 몰리는 순간 자기 대신 죽어 줄 상대를 귀신같이 냄새로 찾아내는 법입니다.”

“······.”

“특히 신 팀장처럼 공공의 돌아이로 인식이 박힌 사람이 곁에 있는 경우, 그렇지 않아도 모두의 욕받이 역할을 하고 있으니, 거기에 내가 한 숟갈 거든다고 해서 크게 죄책감 같은 걸 느낄 필요도 없는 거죠. 우리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나만 고상한 척하면서.”

“······!”

“모두가 다 신 팀장을 두고 사회성이 부족하다, 개념이 없다, 조직 문화를 모른다, 소통이 안 된다··· 그런 말을 하니, 거기에 내가 가진 스트레스를 모두 털어 넣고 책임을 밀어 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보입니다.”

“그런 거 아니라고요!”

“어제 제가 신 팀장한테 그랬습니다. 선 넘는 부하 직원을 계속 데리고 가는 건, 좋은 직원 열 명을 잃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두 눈에 힘을 준 뒤 엄하게 말했다.

그러자 임 주임은 멈칫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랬더니 신 팀장이 저한테 하는 대답이 예술이었습니다. 제가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리네요? 신 팀장은 아직 임 주임을 부하 직원이라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답니다. 그게 말이 되냐, 어쨌거나 당신은 팀장이고, 임 주임은 당신 팀 주임인데, 어떻게 임 주임을 부하 직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냐··· 그러니까, 자기는 아직 임 주임한테 팀장으로서의 역량을 보여 준 적이 없다고 하네요.”

“······!”

“아직은 부하 직원이 아닌 팀 동료로만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어제 팀 회의 자리에서 전 팀원들이 다 있는 앞에서 임 주임이 임 주임의 생각을 강하게 어필하고, 화를 낸 부분도 자신이 수긍을 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한다네요.”

난 나와 임 주임이 만들고 있는 거리의 딱 중간 정도 위치에 어제 받은 사직서를 올려놓았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걸 그냥 절차대로 수리해 버리고 싶습니다. 그게 또 맞는 거고. 팀원 한둘 빠진다고 팀 전체가 흔들릴 거 같음, 그런 팀은 없느니만 못한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신 팀장이 임 주임 없다고 VMD팀을 흔들리게 가만히 내버려둘 사람 같지도 않고. 그런데도 신 팀장은 임 주임이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회성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 어제 임 주임이 한 행동을 두고 사람이 직장 생활을 힘들게 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서 한 번쯤 그렇게 폭발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니냐며, 같이 한번 잘 꼬드겨 보자네요.”

“···팀장님이요?”

“이거 어떻게 합니까? 절차대로 수리합니까, 아님 가져가실래요?”

“······.”

“절차대로 수리하면 되겠습니까?”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뜨거운 콧김을 술기운과 함께 내뿜은 후 임 주임이 말했다.

“아닙니다. 저 주십시오.”

사직서를 챙기려는 그의 손보다 한발 먼저 그 사직서 위로 손을 올리며 내가 말했다.

“사과하세요.”

“네?”

“사과하시라고요. 신 팀장한테. 부장님한테는 사과하실 생각이셨잖아요. 지금 현재 개발부장님 얼굴을 어떻게 볼까 두렵지 않으세요?”

당연히 그렇겠지.

어제 부장이 그렇게 잡았는데, 그걸 뿌리치고 사직서를 챙겨 인사부로 내려와 버렸으니, 흥분이 가라앉은 지금 그 얼굴이 얼마나 크게 보일까.

“부장님은 무서운 사람이니까. 힘이 있는 사람이니까. 자기 편이 많은 사람이니까. 앞으로도 계속 재경모직에서 일을 하려면 어제의 실수를 만회를 해야 하는 상대이니까.”

움찔하고 놀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괘씸해지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상처 중 가장 큰 상처는, 바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부하 직원한테 까였을 땝니다.”

이걸 말로 해서 뭐 할까.

“상사한텐 까일 수도 있죠. 그런데 부하 직원한테 까이고, 그런 순간에조차 아무도 자신을 대신해 그 부하 직원을 말리거나 혼내 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 조직에서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우린 그런 걸 회사 내 왕따라고 하죠. 저는 신 팀장을 아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대했다는 소릴 들으니, 제가 지금 기분이 몹시 안 좋습니다.”

“사과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이 사직서를 다시 돌려드리는 이유는 딱 하나. 바로 신 팀장 때문입니다. 그만큼 제가 신 팀장을 귀하게 생각하고, 그분의 모든 의견을 존중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거 잊지 마세요.”

“···네.”

* * *

그길로 임기성 주임은 신 팀장이 나가 있는 현장으로 향했다.

영업 중인 다른 매장 쪽으로 최대한 피해를 덜 주기 위해 설치된 가벽.

그 가벽 나무 문을 조심히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현장 소장과 함께 바닥 작업을 위해 측량기를 확인하고 있던 신 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어? 임 주임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임 주임은 신 팀장에 대한 미안한 마음보다, 죄책감이 더 커져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손 과장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봤다.

그리고 자신에게 솔직해지려고 애를 써 봤다.

그랬더니, 그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

신 팀장을 직책만 팀장이지 조직 안에선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약자라고 생각했다.

그 약자가 하는 지시라서, 그게 못마땅했을 뿐이다.

그 지시가 어쩌면 지시를 내리는 사람에 따라선 군말 없이 처리를 해야 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오히려 당연히 내가 맡아야 한다는 표정을 보이며 받았어야 할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제 그 난리를 피웠다.

심신이 괴로웠고, 그 와중에 자신에게 과중한 업무를 부탁한 상대가 신 팀장이었기에.

스스로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렇게 현장에 나와서, 자신은 언제나 어렵기만 한 현장 소장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는 신 팀장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얼마나 작고, 뭘 모르는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거 이리 주세요.”

신 팀장이 잡고 있는 노즐을 억지로 건네받으며 임 주임이 말했다.

“현장을 왜 감독하러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직접 공사를 하러 나오세요?”

“······.”

“이거 제가 마무리 짓고 퇴근할 테니까, 얼른 사우나 갔다가 사무실 복귀하세요.”

신 팀장은 그런 임 주임을 그저 웃으며 쳐다볼 뿐이었다.

두 사람은 백화점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커피를 함께 주문하며 신 팀장이 물었다.

“손 과장님하고 면담 잘 끝났나 보네.”

임 주임은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온 커피를 들고 테이블에 앉아서야 입을 열었다.

“어제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팀장님.”

“아니에요. 나도 어제 생각이 좀 많았어요. 스케줄을 내가 좀 더 꼼꼼하게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그걸 내가 못 했잖아. 그래서 다 같이 일정이 꼬여 버린 건데, 누구라도 화가 나지.”

“······.”

“나는 어제 임 주임 그렇게 화내는 거 보고 임 주임이 화를 낼 줄도 아는 사람이구나··· 했다니까? 하하하.”

“죄송합니다.”

“노, 노. 나는 회사에서 착한 사람은 별로 안 좋아해. 착한 걸로 다 퉁치려고 하는 경향이 있거든,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어제 임 주임처럼 성깔이 있는 사람을 더 높게 봐요. 원래 일 잘하는 사람들이 싸가지가 없어. 하하하.”

“제가 실은···.”

“임 주임.”

임기성 주임의 말을 끊으며 신 팀장이 깊은 눈으로 쳐다봤다.

“네.”

“내가 한국에 들어와서 이제야 깨달은 게 있어요. 그동안 내가 그걸 못 깨달아서 이 회사, 저 회사 옮겨 다니며 적응을 잘 못 했던 거 같기도 하고.”

“···뭔가요?”

“한국 회사들은 그런 거 같아요. 누가 먼저 자르냐, 먼저 떠나느냐에 따라 잘리면 피해자가 되는 거고, 떠나면 배신자가 되는.”

“······.”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가 피해자였단 생각, 배신자였단 생각을 안 하면서 회사를 다녔는데, 뒤에서는 사람들이 날 어디에서 잘린 피해자, 어디에서 그만둔 배신자··· 그렇게 보는 거 같더라고. 그게 이유였어요, 어제 내가 손 과장님하고 면담하면서 임 주임 잡아 보자고 한 이유.”

“···네?”

“임 주임처럼 열심히 일해 준 사람을 배신자로 만들고 싶지가 않더라고. 한국에선 이직할 때 그런 거 중요하잖아요. 팀장으로서 역할을 아직 내가 제대로 못 하고 있어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고 서로 생각하면서 넘어갑시다, 어제 그 일은.”

“아닙니다. 어제 그 일은···.”

“그렇게 넘어가자고. 다른 거 생각할 게 많아요, 내가 지금. 어제 그 일에 계속 붙잡혀 있을 여유가 없다고.”

“···네.”

“그럼 이 현장은 내가 임 주임한테 넘기고 넘어갑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제가 마무리 짓고 들어가겠습니다.”

“콜. 얼른 마시고 올라갑시다. 이렇게 노가리 깔 시간도 없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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