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웃음이 끊이질 않아요
장태산의 집 거실.
방문 진료를 끝낸 의사가 의료 집기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오후 1시.
회사에 있어야 할 장영석도 아내 홍금실과 함께 아버지의 주치의 소견을 직접 듣기 위해 자리해 있었다.
“그간 좋은 일 많으셨던 거 같습니다.”
의사가 기분 좋게 소견을 말하고 있었다.
“혈압도 저번 검진 때보다 많이 안정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다 양호합니다. 호흡 곤란은 꾸준히 있어 왔던 부분이니까, 따로 처방을 해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물 자주 드시고, 산책 자주 해 주세요. 가벼운 맨몸 운동도 틈날 때마다 계속해 주시고요.”
양호하다는 말에 그제야 영석의 얼굴에 안도감이 올라오고 있었다.
“2주 뒤에 직접 병원으로 오셔서 정밀 검사 다시 한번 받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장태산 회장은 혈압 측정 압박 튜브로 인해 뻐근해진 팔뚝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집을 나선 뒤, 장 회장이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회사 일도 바쁠 텐데, 뭣 하러 이 시간에 집엘 다 왔어?”
“그냥 겸사겸사 점심도 먹을 겸 그렇게 온 거죠.”
“참 쓸데없는 짓 한다. 일없어, 이 사람. 이 나이 먹고 몸에 그만한 고장 안 나는 게 더 이상한 거야.”
며칠 전부터 자다가 가슴 통증이 수차례 일어나, 그 부분을 아들 내외에게 말을 했던 장 회장이었다.
그런데 그 가슴 통증이 깜짝깜짝 놀랄 정도의 수준은 아니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적당히 뻐근한 수준이라 구태여 병원까지 갈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을 했고.
역시 방문 진료를 온 주치의는 심리적 요인에 기인한 호흡 장애일 뿐, 크게 걱정을 할 증상은 아니라고 말했다.
90년 인생을 살아오며 호흡 장애는 고질병처럼 달고 살아온 장태산이었다.
재경에서 큰 사업을 도울 때부터 있어 왔던 심리적 압박감, 사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가끔씩 질식감을 만들어 내며, 곧 가슴 통증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이번도 그럴 거라 예상을 하고 있었다.
“그간 쭉 괜찮으시다가, 갑자기 또 숨이 차신다고 하니 걱정이 안 됩니까?”
“이 나이 먹고 몸이 내 맘대로 움직여 주길 바란다면 그것만큼 염치없는 욕심이 어디에 있나? 오락가락하는 거지.”
“아버지, 요즘 뭐 스트레스 받는 거 있으세요?”
“그거 없이 사람이 살아지나. 그걸 감당할 체력이 이젠 다한 거뿐이지.”
“꼭 말씀을 하셔도….”
“일없다고. 그냥 혈압 한 번 재고, 피 한 번 뽑으면 끝날 일 가지고 이 시간에 집까지 찾아와 호들갑을 떠니 내가 하는 말 아니야.”
홍금실이 곧 점심 준비를 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극성을 부릴 거면, 나 말고 하늘이 혼사 문제나 신경 써.”
“…….”
“왜 대답이 없어?”
영석은 우선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조심히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알겠습니다. 근데, 아버지.”
“여기에서 근데가 왜 나와?”
“하늘이 아직 어려요. 그렇게 급하게 서두를 일은 아니에요.”
“스물여덟이 어리나?”
“…….”
“왜? 아직도 정훈이가 탐탁지 않은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닌 딸의 혼사다.
아무리 효자로 소문이 난 영석이었지만, 하늘이의 인생이 걸린 일인 만큼, 아버지의 생각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선 안 될 일이었다.
“정훈이가 탐탁지 않았던 적은 없어요.”
“그런데 뭐가 문제야?”
“하늘이의 생각을 아직 제대로 듣지 못해서 그러죠.”
“하늘이 그놈이 어디 싫은 일 억지로 하는 놈이더냐?”
“좋아서 해도 뜻대로 잘 안 되는 게 결혼입니다. 그런 결혼을 싫지는 않아서 한다는 건… 부모 입장에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죠.”
뻐근해졌던 팔뚝을 마지막으로 풀어 놓고 장 회장이 말했다.
“너는 어떻게 아버지라는 사람이 자식 마음을 그렇게 모르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영석이의 모습에 장 회장은 이게 영석이가 자신에게 보이는 최선의 고집이라는 걸 눈치챘다.
“쯧쯧… 그래, 나는 하늘이 애비, 너처럼 딸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하늘이 애비 니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또 마음이 안 좋을지 짐작만 하지, 정확한 가늠은 안 돼. 그런데 나는 하늘이 마음은 알겠다.”
“하늘이 마음이요?”
“계산기 두드리는 거 하나만큼은 너보다 더 확실한 놈이야, 그놈이. 지금껏 허투루 남자를 만난 적이 있어? 다 고만고만하게 집에서 다리를 놓아 주는 상대들하고만 만나 본 거 아냐.”
“그야….”
“그놈이 언제 지금처럼 자기 의사를 미적지근하게 밝힌 적이 있냐고. 괜찮으면 괜찮다, 아니면 아닌 거 같다. 그렇게 확실하게 자기 생각을 말해 왔어. 그런데 이번엔 아니잖아. 왜 그런 거 같냐?”
“하늘이도 스스로 확신이 안 서니까 그런 거겠죠. 그래서 저도 좀 더 지켜봐 주고 싶은 거고요.”
“확신이 안 서서가 아니라 이 사람아, 그동안 만나 봤던 놈들하고는 다르게 이번엔 하늘이 놈이 끌려다니고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장영석 역시 그런 느낌을 수차례 받아 왔기에 조심스러웠던 거다.
다시 한번 혀를 차며 장 회장이 말했다.
“이렇게 감이 없어서 우짜누? 상대가 만만해야 지가 평가를 하지. 계산기를 두드렸을 때, 근삿값이라도 나오겠다 싶은 상대여야 계산기를 두드릴 거고.”
결국 장영석은 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정훈이를 높게 평가하는지를 물었다.
“내 새끼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늘이가 어디 가서 기로 눌릴 놈이야? 내 남의 집 잔치에 따라다니며, 네가 다리 놓아 줬다는 놈들 얼굴을 한두 번 봤어? 그간 하늘이를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놈을 내가 본 적이 없어. 그런데 정훈이 그놈은 하늘이를 쩔쩔매게 하는 놈이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해?”
“저는 그래서 더 조심스럽습니다, 아버지.”
“…….”
“제 눈에도 보입니다. 하늘이가 정훈이한테 끌려다니고 있다는 게. 이번에 투자 철회됐던 드라마를 하늘이가 고집을 부려 다시 추진하고 있는 것도 저는 사실 탐탁지 않고요. 제가 어떻게 키웠는데요? 넘어지면 다칠까, 뛰고 있으면 어디에 찍힐까 정말 한시도 눈을 안 떼고 키웠던 녀석이에요. 그렇게 키운 녀석인데, 원래 성격이 그런 것도 아니고 유독 정훈이한테만 저렇게 끌려다니고 있는 거, 저 솔직히 보기가 좋지는 않습니다.”
“답답하네, 이 사람 정말.”
“집안 안 좋아도 상관없어요. 오히려 집안은 좀 빠지더라도 하늘이를 평생 떠받치며 살아 줄 놈이라면 저는 그런 놈이 오히려 더 좋겠어요. 자식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급하게 재경가 쪽으로 엮이는 거, 저 좀 별로입니다, 아버지.”
“너는 지금 내가 하늘이를 가지고 장사를 하는 거처럼 보이냐?”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장사는 내가 아니라 하늘이가 하고 있는 거야, 이 사람아.”
“…네?”
“내 이러니까 하늘이 애비 너한테 재경모직 지분을 못 맡겼던 거야, 그동안. 어쩜 그렇게 마음이 순두부야?”
그사이 주방에서 홍금실이 살짝 나와 식사 준비가 다 끝났다고 말했다.
그런 홍금실에게 영석이 눈빛만 보내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내가 그동안 주말마다 정훈이 놈 불러서 장기를 왜 뒀게? 장기 둘 상대가 없어서 불렀겠나, 아님 매번 지기만 하는 그 장기가 즐거워서 불렀겠나?”
“…….”
“그리고 그 일방적이어서 아무 재미가 없는 장기를 하늘이 그놈은 왜 아무런 군소리 없이 옆에 앉아 다 지켜봤겠어?”
장 회장의 두 눈에 이채가 띠고 있었다.
“지독한 놈이야. 한 판을 져 주는 법이 없어.”
“…….”
“일부러 실수도 해 봤어. 그 실수가 내가 일부러 낸 실수라는 걸 눈치 못 챌 놈이 아니거든. 그 판에서 딴엔 체면 내려놓고 한 수만 물러 달라고 사정도 해 봤지. 안 돼. 안 통해. 상대가 누구든 안 하면 안 했지, 한 번 하기로 한 이상 절대 대충 하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걸 하늘이가 다 지켜봤어.”
“…….”
“너도 이제 곧 60이다. 언제까지고 너 혼자 지금처럼 미래금융 못 이끌어 간다. 하늘이 놈 머릿속에는 지금 태양이 전역까지 다 들어가 있어. 그 고삐 풀린 망아지 놈 전역하고 나오면 인간 만들어 낼 자신 있냐? 그럴 체력은 되고?”
미래금융.
어쩔 수 없이 후계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서둘러라. 아직은 정훈이 놈이 날개 달고 날아다니기 전에. 정훈이 놈이 눈에 띄는 실적들을 하나둘씩 만들어 내기 시작하면, 우리 쪽에선 줘야 하는 게 더 많아진다. 그 전에 정훈이한테 날개를 달아 주는 게 우리 미래금융인 걸로 만들라고. 정훈이 놈한테 우리가 먼저 날개를 달아 주지 않고 스스로 달게 만들어 버리면, 그땐 하늘이가 평생을 정훈이한테 끌려다니게 되는 거야.”
“그런 결혼을 왜 시키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놈이 사람 귀한 걸 알아.”
장 회장은 그간 정훈이와 만나 오며 나눴던 대화, 직접 장기를 두며 겪어 봤던 정훈이의 기질을 떠올리며 말했다.
“특히 자기 사람. 틀림없이 하늘이를 귀하게 대할 거다. 끌고 다닌다고 해서 다 막 대하는 게 아냐. 그리고 실력이 부족하면 끌려다녀야지. 그렇게 끌고 가고 끌려가며 어느 순간 거리가 좁혀지면 그때부턴 함께 가는 거다. 그런데 방금 내가 말한 이 내용을 정훈이 놈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 하늘이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그래서 지보다 못한 놈을 붙여 놓으면, 평생을 끌고 다니겠다고 할 놈이야, 하늘이는.”
“흠….”
“내 눈이 맞을 게다. 정훈이라면 태양이 놈 사람 만들어 놓는 건 일도 아닐 거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하늘이는 네 자식이지만, 넌 내 자식이야.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 못 되라고 하겠나.”
* * *
―하느으을쓰~
전화를 받은 하늘이는 해괴망측한 리듬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정훈이의 목소리에 대뜸 인상부터 찡그렸다.
“뭔데 이렇게 부담스럽게 밝아?”
―점심 먹었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툴툴거리며 대답을 하고 있지만, 하늘이는 내심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전화를 걸어 그런 사소한 일상을 물어봐 주는 정훈이의 행동에 썩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너 골프 좀 치냐?
“골프?”
―이번 주 토요일에 동명물산 부회장이랑 같이 공을 치기로 했는데, 자기는 와이프하고 같이 나오겠다네?
어이없는 웃음을 흘려 놓고 하늘이가 물었다.
“근데 뭐?”
―나는 마땅히 그 자리에 같이 갈 사람이 없네.
“그래서 뭐?”
―같이 가자고.
“내가 거길 왜 가?”
―사업 이야기도 좀 하고.
“그러니까 모직 쪽 사업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 내가 왜 끼냐고.”
―뭔 소리야? 네가 지금 우리 쪽에 가지고 있는 지분이 얼만데.
“확실하게 해. 난 사외 이사도 아니고, 그냥 지분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꼭 그 사외 이사 자리라도 감투를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겠단 소리로 들린다?
“실력 있음 자리 하나 만들어 주든지.”
―네 실력도 내가 좀 봐야 할 거 아냐. 같이 가자.
이미 마음은 처음부터 같이 가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괜히 튕기고 싶을 뿐이었고.
“그럼 이번 주 토요일은 할아버지랑 장기 두러 집에 안 올 거야?”
―오후 라운딩이야. 아침에 가서 인사드리고 점심 얻어먹은 다음에 너 데리고 출발하면 대충 시간 맞겠다 싶어.
하늘이는 여기에서 더 튕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다.
―야, 그런데 너 사이즈가 어떻게 되냐?
“사이즈? 무슨 사이즈?”
―옷 사이즈.
“갑자기 남의 옷 사이즈는 왜 물어?”
―거참 한마디를 그냥 넘어가 주는 법이 없네. 내가 말싸움하는 거 연습하라고 했다고 설마 진짜 연습하는 중이냐?
“그럴 리가 있냐?”
―옷 좀 가져다주려고 그런다. 이번에 론칭 준비 중인 퍼스펙티브. 그거 입고 같이 라운딩 나가자고.
“그럼 디자인부터 보내 봐. 디자인 초이스하고 사이즈 보내 줄 테니까.”
다시 스마트폰 스피커 부분을 손가락으로 막아 놓고 피식하고 웃는 하늘이었다.
―야, 그런데 하늘아. 너 정도면 SNS상에서 인플루언서라고 할 수 있냐?
“나?”
―어.
“애매…하긴 하지? 원래는 나 SNS 이런 거 거의 안 했는데, 이번에 채서린이 스캔들 덮겠다고 오빠랑 사진 찍어서 올린 거 때문에 갑자기 팔로워가 부담스럽게 늘어나서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 중이긴 해.”
―잘됐네.
“뭐가?”
―네가 1번 모델 해 주면 되겠다.
“하지 마.”
―뭘?
“지금 하고 있는 생각.”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든, 하고 있는 그 생각 그만하라고. 난 절대 그런 거 안 할 거니까.”
―에이, 그러지 말고….
“귀찮게 하면 골프 치러도 안 간다?”
―응, 알았어. 일단 디자인부터 보내 줄게.
정훈이와 통화를 끝낸 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돌렸다.
점심 식사를 함께했던 동료 팀장이 통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좋아 보이네요.”
“네?”
“남자 친구분이랑 통화 내내 얼굴에 웃음이 끊이질 않아요.”
“제가요?”
“그럼 여기 팀장님이랑 저 말고 누가 있을까요?”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도 웃고 있는데?”
“이건 이제 웃는 게 아니라….”
“확실히 팀장님은 웃고 있을 때가 제일 예뻐요. 같은 여자가 봐도 질투가 날 정도로. 계속 그렇게 웃으세요. 진짜 보기 좋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