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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무슨 협찬비입니까 (110/303)

우리 사이에 무슨 협찬비입니까

아무리 봐도 하늘이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 같다.

저 사이즈가 맞을 리가 없지.

하의는 그렇다 쳐도, 상의는 S85 사이즈가 딱 맞을 거 같았는데 굳이 자기는 S95까지도 입는다며 S90을 갖다 달라고 하는 거였다.

S85를 따로 안 챙겨 왔으면 어쩔 뻔했나.

90사이즈를 입고 나왔는데, 바스트 부분이 살짝 헐렁한 느낌이었다.

“거봐, 크다고 했잖아. 자, 얼른 이거 가지고 들어가서 갈아입고 나와.”

“뭐래? 이거도 지금 살짝 조이는 기분인데.”

골프장 로커 룸 앞이었다.

누가 봐도 빈약한 가슴 부분을 자기는 조인다고 말을 한다.

이거 지금 제정신인가?

“아니, 하늘아. 이거 신축성 좋아. 85사이즈도 90사이즈하고 어깨 라인하고 허리 홈 들어간 부분 똑같다고 보면 돼. 그냥 바스트 부분만 살짝 줄인 거야. 맞는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내가 따로 챙겨 왔잖아.”

“90이 맞는다고. 이것도 지금 살짝 조이는 기분이라고.”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눈에 빤히 다 보이는데, 억지를 부릴 걸 부려야지.

“하아….”

“뭐지, 지금 그 한숨은?”

스타킹을 무릎 위까지 최대한 끌어 올리며 날 흘겨보는 하늘이었다.

“너, 그거 커 지금.”

“안 크다고.”

“커. 딱 봐도 커.”

“확인해 볼래?”

“뭘 또 확인을 해? 그냥 딱 봐도 큰데.”

“일로 와. 만져 봐. 직접 만져서 확인해 봐.”

이놈 이게 지금 겁도 없이, 다 큰 처녀가 어디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그래, 그냥 맞는다고 해라. 졌다, 졌어. 안 맞는 옷 입고 있음 네가 불편하지, 내가 불편하냐?”

설마 이걸 지금 장난이라고 쳤던 걸까?

내가 졌다고 인정을 해 주자,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킥킥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그렇게 이겨 먹으니까 좋냐?”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진짜 신기해서 웃는 거야.”

“신기하긴 뭐가 신기해?”

“진짜 내가 아는 손정훈은 방금처럼 내가 그랬을 때, 진짜 만지거든.”

“말 같은 소릴 해라.”

“하여튼 신기해. 희한하단 말이야.”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하늘이가 물었다.

“어때? 괜찮은 거 같아?”

“전반적으로 스커트 라인은 디자인이 다 잘 뽑혔어. 나는 괜찮은 거 같은데, 입어 보니까 너는 어때?”

“괜찮네. 편해. 스커트도 길이 초이스를 잘했다. 다른 브랜드는 속바지를 입어도 아슬아슬할 때가 종종 있거든. 근데 이건 밀착감이 좋아서 그런지, 이렇게 허리를 돌려도 뒤가 불안하지가 않아.”

그러면서 처음 돌았을 때보다 좀 더 빠르게 제자리에서 돌아 보는 하늘이었다.

“어때? 스커트 크게 날리는 느낌 없지?”

“너만 안 불편할 거 같으면 스타킹을 한번 벗어 보는 건 어때?”

“스타킹? 왜?”

“이거 원래 스타킹하고 세트가 아니야. 네가 패턴 맞는 스타킹이 있으면 하나 갖다 달라고 해서 챙겨 온 거고. 다리도 볼만한데, 그냥 스타킹 벗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실은 오늘 너 입힌 거 사진 찍어서 디자이너한테 보내 주기로 했거든.”

피식하고 웃으며 하늘이가 말했다.

“볼만해?”

“나쁘지 않은데?”

“어이가 없네. 지금 이 다리가 그냥 볼만한 거야?”

“대책이 없네.”

“나 이거 스타킹 까고 있으면 감당할 수 있겠니?”

피곤하다.

그리고 확실히 적응이 안 된다, 요즘 것들….

“오케이, 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대뜸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로커 룸 쪽으로 몸을 돌리네?

그래서 난 급하게 붙잡았지.

“또 왜?”

“스타킹 벗고 오게.”

“아냐, 됐어. 그냥 그대로 나가자.”

“아니. 생각해 보니까 오늘 날씨가 좀 더워. 그냥 벗고 칠래.”

그리고 잠시 후 스타킹을 벗고 오겠다고 들어간 로커 룸에서 다시 하늘이가 나왔는데….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사람 민망하게….”

진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단 다리가 매끈했다.

나 지금 왜 이렇게 죄책감이 들지?

내가 지금 태산이 손녀딸 다리를 보면서 불편한 기분이 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안 되겠다.”

“뭐가?”

“별로 보기 안 좋네. 들어가서 다시 스타킹 신고 나와. 스타킹 신었을 때가 훨씬 보기 좋았던 거 같다.”

“그건 오빠 생각이고. 더워. 그냥 이렇게 나갈래.”

“거참 말 더럽게 안 듣는다, 진짜. 가서 얼른 스타킹 다시 신고 와.”

“약 먹었니? 그나저나 만나기로 한 사람들 언제 와?”

내가 실수를 했구나.

스타킹을 벗어 보란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응? 사람들 언제 오냐고.”

“벌써 와 있어. 출발 그늘집 안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럼 가. 뭐 해, 여기서. 가자.”

* * *

오늘 하늘이는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이 자리에 따라 나왔다.

그간 할아버지의 장기 상대가 되어 주며 사업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만 봐 왔지, 실제 정훈이가 재경가의 차남으로 어떻게 사업적 파트너들을 상대하는지 실제로 볼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 모습을 오늘 실제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으니, 더없이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팡!

“나이스 샷!”

할아버지를 상대로 장기를 둘 때만 그런 게 아니라, 스무 살 이상 연배가 높은 사업적 파트너와 함께 치는 골프에서도 정훈이는 결코 설렁설렁 봐주는 법이 없었다.

“우리 손 과장님이 골프를 꽤 오래 치셨나 보네.”

“네, 뭐 좀… 구력이 나이에 비해 꽤 되기는 합니다.”

“얼마나 치셨어요?”

“중학교 때부터 쳤던 거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안 나네요.”

그런 다음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정훈이의 모습에 하늘이는 최대한 신경을 써서 자세를 잡았다.

정훈이가 접대 골프를 쳐야 하는 자리가 아닌 건 확실해졌다.

만약 그런 자리였더라도 정훈이라면 절대 일부러 져 주는 골프를 칠 성격은 아니고.

하늘이는 진심을 다해서 샷을 휘둘렀다.

“오, 나이스 샷!”

잘 맞았다.

그립에 전해지는 타격감이 간만에 꽤 묵직했다.

“이거 오늘 우리 부부가 젊은 커플 실력도 몰라보고 같이 치자고 했다가 제대로 물리게 생겼는데요? 하하하….”

아닌 게 아니라 하늘이는 프로까지 준비를 했던 전력이 있었다.

승마와 골프.

그중에서도 정적인 골프가 적성에 맞았고, 아마 집안에서 장녀이지만, 장남의 역할을 해야 하는 책임만 없었더라면 프로까지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야, 좀 친다?”

카트로 이동 중 정훈이가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하늘이는 그런 정훈이에게 “오빠가 의외네. 밥 먹고 공만 쳤어? 뭔데 이렇게 잘 쳐?”라며 칭찬을 해 줬다.

하늘이는 궁금했다.

과연 그날 자기가 봤던 정훈이의 모습이 착각이 아니었는지.

그날 부경가의 결혼식 날.

부경가 형제들이 주축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에서 고의로 와인 잔을 쏟아 소란을 만들었던 정훈이의 모습이 하늘이에겐 꽤 충격적이었다.

하늘이는 정훈이가 고의로 와인 잔을 쏟는 모습을 처음부터 다 지켜보고 있었다.

설마 저걸 건드릴까 싶었는데, 노골적으로 잔을 건드렸다.

그리고 일어난 상대방의 반응에 무척이나 여유롭게 대응을 하고 있었다.

부경가 3세들이 다 있는 자리, 그 자리에서 재경가 형제라고 해 봤자 고작 정태와 정훈이 유일했는데, 결코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재벌 3세들 중 잘났기로 국내 재계 안에선 유명한 정태까지 억지로 참고 있었던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감정에 못 이겨 불나방처럼 불 속으로 뛰어든 게 아니라, 자신이 거대한 불이 되어, 상대들을 불나방으로 만들어 버린 그 모습을 그날 그 자리에서 하늘이는 자신이 뭘 잘못 본 거라고 치부해 버리고 말았다.

어지간히 간이 크지 않는 이상, 어지간히 자신감이 넘치지 않는 이상 절대 할 수 없는 도발이었으니까.

과거사는 무시하더라도, 어쨌거나 현 부경 그룹은 국내 재계 8위까지 올라가 있는 메이저 그룹.

그 그룹의 3세들이 모두 모였고, 또 결국은 그 부경가의 행사인데, 거기에서 그런 도발을 할 정신 나간 사람은 있을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이내 인코스 첫 그늘집에서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며 동명물산 부회장을 상대로 사업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정훈이의 모습에, 하늘이는 그날 자신이 봤던 게 착각이나 거리가 멀어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되었다.

“동명물산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골프장에 이곳처럼 미니멀 숍(골프장 안에 들어 있는 골프용품점)이 들어가 있습니까?”

“그렇죠. 이건 매출이 아니라, 골프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넣어야 하는 부대시설입니다.”

“아까 부회장님 만나러 오는 길에 잠깐 봤는데, 생각보다 공간이 넓더라고요.”

“저희가 소유하고 있는 골프장 중 이 골프장 미니멀 숍이 제일 작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엔 어지간한 백화점 매장 두 개 정도는 합쳐 놓은 거 같던데….”

“그 정도 공간은 나와야죠. 그래야 브랜드들을 다 넣어 줄 수가 있는 거죠. 이것도 일종의 협찬입니다. 실제 미니멀 숍에서 올라오는 매출만 가지고는 저희가 직접 우리 직원 써 가며, 그 숍을 운영할 수가 없는 거죠. 공간을 작게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첫 티가 시작되는 새벽 6시부터 마지막 티 끝날 때까지 최소 직원 한 명은 붙여 놔야 하는데, 그러려면 최소 직원이 다섯 명은 있어야 하거든요.”

“협찬이라면….”

“브랜드 쪽에서 어느 정도 일정 매장 유지비를 제공하는 거죠. 자기네 브랜드를 깔아 준다는 전제 조건으로.”

“아….”

“미니멀 숍 정도 공간이면, 골프장, 골프텔, 골프 리조트 할 거 없이 그 자리에 티 숍이나 북 카페 같은 걸 넣는 게 매출상 훨씬 큰 도움이 되죠. 그런데도 굳이 많은 브랜드를 묶어서 미니멀 숍을 운영하는 이유는 브랜드 쪽에서 가끔씩 우리 골프장 쪽으로 대회를 열어 준다거나, 골프 영업을 와 주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브랜드 노출에 관한 협찬비를 따로 챙겨 주기 때문입니다.”

정훈이가 충분히 해당 시스템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하늘이는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자세를 테이블 쪽으로 살짝 당겨 앉으며 정훈이가 물었다.

“그럼 만약에 저희가 퍼스펙티브를 저 공간에 노출하길 희망한다면, 그 협찬으로 어느 정도 비용을 예상하고 있어야 할까요?”

“저희 쪽으로 넣어 보시게요?”

하늘이는 괜히 자기가 입에 침이 고이는 기분이었다.

정훈이가 어떻게 상대를 요리할지, 할아버지가 아닌 사업 파트너를 상대로도 할아버지 앞에서 보여 주던 그 콧대 높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 내심 궁금했다.

“아 참, 그 전에 시니어즈 이야기부터 좀 해 봐야겠습니다.”

“시니어즈요?”

“이번에 저희가 파리에 작은 건물을 하나 매입했다는 내용 알고 계시지요?”

“네, 들었습니다.”

“층당 600제곱미터. 한국 평수로 대충 200평 정도가 나오는 건물입니다. 그 건물 1층을 현재 시니어즈 단독 이미지 숍으로 꾸미고 있습니다.”

“네. 참 대단하시단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게 말이 쉽지, 매출이 보장된 상태도 아닌데, 그렇게 과감하게 투자를 넣을 수 있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아뇨,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업이라는 게 일단 한번 던져 보고 되겠다 싶은 건 계속 끌고 가는 거고, 방향이 잘못 잡혔다 싶은 건 수정을 해 나가면 되는 거니까요.”

“그게 어디 말처럼 쉽습니까?”

“어려우니까 사업인 거고, 그걸 해야 돈을 버는 거죠.”

“하하하, 그렇죠. 정답입니다.”

“저희 쪽에서 시니어즈를 받아 올 때, 회장님께 5퍼센트 개인 지분을 약속드렸습니다.”

“네.”

“그리고 저희는 지금 시니어즈가 아닌 재경모직의 자금을 쏟아부어서 시니어즈 매출 극대화에 온 힘을 쏟고 있죠.”

“네.”

“그렇다고요.”

“네?”

“좋은 파트너십을 계속, 오래오래 유지하기 위해 저희 쪽에서 그만큼 애를 쓰고 있다는 말씀을 꼭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상대가 그 말의 숨은 뜻을 짐작하기도 전에 정훈이가 말했다.

“미니멀 숍에 퍼스펙티브를 넣어 보려고 하는데, 저희 쪽에선 브랜드 노출 협찬 명목으로 어느 정도를 예상해야 하겠습니까?”

그제야 상대도, 하늘이도 정훈이가 유쾌하게 분위기를 이끌어 가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을 찾기 위해 시니어즈 이야기를 꺼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 무슨 협찬비입니까, 협찬비는. 그냥 물건만 보내 주세요. 보통 저희는 미니멀 숍 운영을 컨사인먼트 계약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건부터 받아서 판 다음, 팔린 금액에서 물건값을 주신다 그 말씀이시죠?”

“네.”

“그 부분은 저희 쪽 영업부 사람들 시켜서 골프장 관계자들하고 조건을 잘 맞춰 보라고 제가 전달해 놓겠습니다.”

“네. 저도 가급적이면 재경모직이 하는 사업이니만큼, 가장 좋은 자리로 퍼스펙티브가 들어갈 수 있도록 매장 브랜드 포지셔닝을 다시 맞춰 보라고 전달해 놓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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