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싱거운데?”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라운딩 도중 동명 부회장과 맥주를 마셨던 탓에 운전대를 하늘이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국도 쪽으로 차를 올리며 하늘이가 말했다.
“난 꽤 사이즈가 나오는 비즈니스 이야기가 오고 갈 줄 알았거든. 미니멀 숍, 인플루언서들 라운딩 협찬… 설마 그게 끝일 줄은 몰랐어.”
마치 날 떠보는 듯한 말투.
하지만 녀석이 뭐라 장난을 걸어오든 내 눈엔 오늘 하루 하늘이가 기특해 보이기만 했다.
사실 기특하단 생각들은 동명 부회장 내외와 골프를 치는 내내 했었다.
적당히 숙일 줄도 알고, 상황에 따라선 고개를 치켜들 줄도 아는 녀석.
자리의 성격에 맞추어 처신하려는 그 노력이 나뿐 아니라, 동명 부회장 내외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리라.
“고작 이 정도 내용을 가지고 동명물산 부회장한테 재경의 차남이 접대 골프를 쳐 줄 이유가 있어? 얼마든지 해당 부서 담당자들 시켜서 처리할 수 있는 내용이었던 거 같은데?”
난 녀석이 궁금해하는 내용은 잠시 묻어 두고 대화 내용을 바꿔 보았다.
“저녁 먹어야지? 어떻게 할래? 여기에서 먹고 들어갈래, 아님 서울 들어가서 먹을래?”
내가 전혀 다른 주제를 던졌음에도 하늘이는 그에 불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여자가 아닌 파트너로 내게 다가왔다는 증거겠지.
“여기 근처에 마땅한데 아는 데는 있어?”
“있음 내가 묻겠냐?”
“그런데 무슨 고민을 해? 아는 데 없음 당연히 들어가서 먹어야지.”
“뭐 먹을래?”
“오빤 뭐 먹고 싶은데?”
저녁 메뉴는 서울로 들어가는 동안 각자 천천히 생각을 해 보기로 하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을 깨뜨리며, 난 하늘이에게 어째서 태산이의 생일날 홍준이가 뭘 받고 싶은지 물어봤을 때 대답을 하지 않았는지 물어봤다.
태산이의 생일날 그 테이블에선 태산이가 먼저 정태에게 스너프 지분 2퍼센트를 선물로 던졌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가치를 홍준이가 미래금융 쪽으로 줘야 했다.
그럼에도 하늘이는 거절이 아닌 보류를 시켰고.
어쩌면 하늘이에겐 예민한 질문일 수도 있었을 텐데, 크게 망설이지 않고 시원하게 대답을 해 줬다.
“뭐가 내게 필요한 건지 판단이 안 섰어. 아직도 그렇고.”
“그러다 없던 일로 입 싹 닦아 버리면 어쩌려고?”
“설마 그러시기야 하겠어?”
“결혼도 비즈니스로 하려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만한 대답은 아니지 싶은데?”
“급한 거 없잖아. 오빠도 그편이 훨씬 더 낫지 않나?”
이제는 해가 제법 길어져서 오후 라운딩을 끝내고 가는 길인데도 햇살이 강했다.
얼른 머리 위로 올려 뒀던 선글라스를 내려서 끼며 하늘이가 말을 이었다.
“내 입장에서도 내 인생을 걸 만한 결혼일지 정도는 신중하게 따져 봐야 하는 거고. 말만 몇 번 오고 갔다뿐이지,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렇지.”
“재경모직을 업계 1위로 올려놓겠다, 충분하다, 자신 있다… 할아버지 상대로 그렇게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 놓고, 막상 뚜껑을 열어 봤는데 속 빈 강정이면 안 될 거 아냐.”
딴에는 내 승부욕을 자극하기 위해, 혹은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내 눈엔 그런 하늘이 놈의 빤한 계산과 화법이 귀여웠다.
귀엽고 우습기도 했고.
그리고 궁금해지고 있었다.
이 계산만 가득한 놈이 나와의 결혼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따르기만 하며, 속으로 뭘 얻고자 하는 것인지….
“하지만 이건 오빠뿐 아니라 오빠네 가족들이 알아줘야 해.”
“뭘?”
“할아버지가 정태 오빠 앞으로 스너프 지분 2퍼센트를 돌린 건 우리 결혼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 결혼이 오빠네 집안의 형제간 갈등으로 변질되는 걸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는 걸.”
그 부분에 대해선 아마 홍준이도 지금쯤 태산이에게 아주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평생을 가지고 있었던 재경모직 지분이다.
그 지분을 아들 영석이가 아닌 손녀딸 하늘이에게 넘겼고.
최소한 모직만큼은 내가 가져가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지.
더 정확하게 말해선 하늘이가 그 그늘 안에서 평생을 안전하게 살길 원하는 것일 테고.
나와 하늘이의 결혼이 정태를 궁지로 몰지 않도록, 스너프 지분 2퍼센트를 주며 달래었다고 봐야 맞는 거다.
“우리 집에 잘하란 말은 내가 안 할 거야. 하지만 만약 우리가 결혼하게 된다면, 살아 계시는 동안이라도… 오빠는 우리 할아버지한테 진짜 잘해야 해.”
“네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그렇게 할 거다.”
“하긴, 가재는 게 편이니까.”
“거기에서 가재는 게 편이라는 소리는 너무 뜬금없는 비유 아니냐?”
“몽상가에 이상주의, 낭만에 취해서 살아가는 거 보면 오빠도 우리 할아버지랑 비슷해.”
“낭만?”
“부경 쪽으로 넘어간 원래 재경의 계열들을 다 가져오겠다고? 할아버지니까 오빠의 그런 객기, 현실성 없는 목표를 기특하게 여기고 좋게 봐 주시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 들었으면 욕해. 아니, 욕도 안 하겠다. 욕을 왜 해? 아예 말 같지도 않은 소린데.”
내 것을 다시 가져오겠다는 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스너프 포함해서 재경의 전 계열을 다 합쳐도 부경의 통신 하나 못 잡아. 부경의 화학한테는 비빌 수도 없다고.”
이게 현실이고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한데, 내가 일궜던 현 재경의 전체가 고작 부경의 주요 계열사 한 군데보다도 못하다는 소릴 들으니, 심사가 크게 뒤틀리고 있었다.
하늘이는 마치 부경 쪽으로 넘어간 우리 계열사들을 가져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할 거란 말투로 내게 말했다.
그리고 난 그런 하늘이를 쳐다보며 웃었다.
웃어야지 어쩌겠나?
화를 낼 순 없는 거 아니겠나.
자신을 쳐다보며 웃는 내 모습이 느껴졌을까, 하늘이는 운전 중 잠시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더니 내가 웃는 걸 확인하고는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웃어? 사람 기분 나쁘게.”
“낭만. 참 구식인데, 단어 자체가 참 따뜻하고 묘하게 사람을 설레게 해. 안 그래?”
“그건 그래.”
시원하게 인정을 하며 하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요즘 시대는 할아버지들 세대 때와는 시대 자체가 달라. 그런 낭만 같은 건 사라진 척박한 세상이라고.”
“원래 낭만이라는 건 척박한 세상에 피는 거야.”
“이러니 내가 오빠를 몽상가라고 하는 거야.”
“네 말대로 그러니 낭만인 거고. 근데 너는 누가 만들어 놓은 낭만의 단물만 맛봤지, 직접 그 낭만을 만들어 볼 생각은 아직 못 하나 보다.”
“…….”
“그래서 내가 너한테 꼭 가르쳐 주고 싶어졌어.”
“뭘?”
“네 할아버지가 얼마나 낭만이 부족한 양반인지를. 그 양반한테는 낭만 같은 거 없어. 네 할아버진데 나보다 어떻게 더 네 할아버지를 모르냐?”
“…….”
* * *
그때까지도 하늘이는 모르고 있었다.
정훈이는 불가능한 것들을 기적적으로 해 보이겠다는 객기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정훈이의 말 같지도 않은 낭만을 응원하고 있다는 걸.
넌 그걸 절대 해내지 못할 거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알려 줘 놓고도, 정훈이가 그걸 해내길 몰래 응원하는 이율배반적인 마음.
그러다 정훈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자신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고 깨닫기 시작한 순간, 하늘이는 자신의 마음이 먼저, 그것도 꽤 많이 정훈이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내가 옆에 함께 있어 줘야겠다.
내가 도와줘야겠다….
아니, 옆에 있어 보고 싶다.
이상하게 그의 옆이… 안전하게 느껴진다.
할아버지의 재경모직 이사회 사임안을 제안하기 위해 사장 남필우가 집을 찾아온 날이었다.
평소와 달리 눈빛은 무겁고, 표정은 상당히 밝은 남 사장이었다.
이미 당신이 가진 모직의 모든 지분을 손녀딸 하늘이에게 양도했기에 장 회장의 사외 이사 자격은 모두 소멸이 되어야 마땅한 일.
하지만 장태산 회장이 재경에게 어떤 의미이고, 또 장 회장에게 모직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 자격 회수를 서두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임안?”
마치 지난 세월의 주마등을 혼자 펼쳐 보고 있듯, 장 회장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네.”
그 사임안을 제안하는 남 사장 역시 여러 감정을 함께 느껴야만 했다.
“뭘 그렇게 번거롭게 해? 양도 절차 다 끝났음 자동 퇴임이 되는 거지.”
서재 안엔 장태산 회장과 장영석 부회장, 그리고 남필우 사장 이렇게 셋이 전부였다.
그 자리에서 장 회장이 하늘이를 들어오게 만들었다.
“하늘이 애비야.”
“네, 아버지.”
“하늘이 들어오라고 해 봐.”
“네.”
하늘이까지 서재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장 회장은 자신의 입장을 남 사장에게 밝혔다.
“내가 직접 안건을 올려야 되는 거면, 내 사임안이 아니라 하늘이 이 녀석의 사외 이사 선임안을 올렸음 싶은데, 그게 더 보기가 좋지 않겠나?”
남 사장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절차의 간소화를 원하시는 거면 그게 더 효과적이긴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정리하는 걸로 하지.”
하늘이를 쳐다보며 장 회장이 말을 이었다.
“할애비가 남 사장 통해서 네 사외 이사 선임안을 올려놓을 테니까, 그날은 일이 있어도 직접 참석해서 얼굴 내비쳐라.”
“네, 할아버지.”
남 사장이 물었다.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자리가 되는 건데, 회장님께선 직접 참석 안 하시고요?”
“내가 거기 가서 뭐 하겠어? 자리만 번거로워지고, 그래서 젊은 사람들 피곤하게만 만들지. 하늘이야 앞으로 왕왕 마주쳐야 할 사람들 얼굴도 익히게 할 겸 보내더라도, 나는 됐네.”
“네, 회장님. 그럼 제가 그 건은 그렇게 정리를 하고 이사회 일정 잡히는 대로 하늘이한테 따로 일정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장영석 부회장이 남 사장에게 물었다.
“정훈이는 요즘 좀 어때?”
“정훈이요?”
“자네가 잘 좀 챙겨.”
남 사장은 근질거리는 입을 꾹 참고만 있었다.
“우리야 젊어 봤지만, 정훈이도 그렇고 하늘이 이놈도 늙어 보지는 못했잖아. 백날 몸 관리 잘해야 한단 말을 해 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옆에서 듣기 싫어하는 잔소리라도 계속 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
지금 정훈이에겐 그런 부분보다 더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이 자리에서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긴.
이젠 양가 상견례만 정식으로 안 했다뿐이지, 재경의 모든 임직원이 정훈이와 하늘이의 관계, 재경과 미래금융의 관계를 다 알고 있는데, 숨기는 것보다는 미리 알려 주는 게 맞는 거겠지.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거 같고, 다만 제가 요즘 정훈이를 보면서 살짝 걱정이 되는 건….”
“걱정?”
장 회장의 반응에 남 사장은 흠칫하고 놀랐다.
당신의 인생이 담겨 있는 재경모직에서의 사외 이사 사임안을 제안했을 때에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던 장 회장이 정훈이에 대한 걱정이라는 짧은 표현 앞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남 사장은 얼른 그런 장 회장은 안심시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원래 이사회라는 형식의 성격이 그렇지 않습니까. 속은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고 숫자만 가지고 안심을 했다가 걱정을 했다가….”
남 사장은 재빨리 세 사람을 차례대로 쳐다보며 정말 별일은 아니라는 걸 다시금 확인시켰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작년 사사분기, 그리고 올 일사분기 영업 순이익이 수치상 크게 감소를 해 버리니까, 몇몇 사외 이사들이 그 책임을 정훈이에게 물어야 하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이야기가 잠시 나왔습니다.”
하늘이는 숨을 참으며 할아버지와 남 사장의 표정에 집중했다.
“그 책임을 왜 정훈이한테 물어?”
“시니어즈 인수 건부터 시작해서, 방돔 광장 건물 매입, 거기에 퍼스펙티브 론칭에 들어간 모든 투자가 결국은 정훈이 한 사람의 기획으로 진행이 된 게 아니냐는 거죠.”
“쓸데없는 데 돈을 갖다 버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곳에 투자하고 사업을 확장시키고 있는 건데, 아무것도 안 하고 뒤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것들이 어디 감히 그런 소릴 해?”
장 회장의 얼굴에 노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남 사장 역시 장 회장과 같은 입장이었지만, 주주로서 회사에 많은 사적 지분을 담고 있는 사외 이사들의 걱정은 또 그 나름대로의 명분이라는 게 있는 것이고, 앞으로 하늘이가 이사회로 들어오게 된다면 그들의 입장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니어즈는 다행스럽게도 조금씩 반응이 올라오고 있지만, 아직 주주들이 기대를 하고 있는 수준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방돔 광장 건물 역시 투자만 계속 들어가고 있지 실질적으로 그 투자가 영업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근거가 부족한 상태죠. 퍼스펙티브도 아직 론칭이 안 된 상태인데 여기에서….”
잠시 말을 끊고 눈치를 살피는 남 사장의 모습에 장 회장은 인상을 찡그리며 왜 말을 하다가 마느냐고 핀잔을 줬다.
“패턴 원단 사업에 손을 뻗어 보자는 기획을 다시 올렸습니다.”
“뭐? 패턴 원단 사업?”
도대체 그게 뭐길래, 할아버지의 두 눈에 빛이 감도는 것일까.
어째서 날카로워진 눈매와는 달리 할아버지의 입꼬리는 저렇게까지 올라가 있는 것일까.
하늘이는 그 패턴 원단 사업이라는 게 정확하게 어떤 성질의 사업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 사업의 이름만으로 할아버지의 표정 변화를 저렇게까지 크게 끌어올린 그 사업에 호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간 인사부 일만 해 온 놈이 패턴 원단이 뭔지나 알고?”
“시니어즈를 매입하자, 새로운 자체 브랜드를 론칭하자, 해외 지사 파견 근무자들의 근무 환경 개선에 투자를 하자… 다 기특한 생각이고, 모직 경력 2년 차 인사부 과장이 올리기엔 다소 놀라운 제안들이었죠. 하지만 패턴 원단 사업에까지 관심을 가진다는 건, 설혹 누가 옆에서 패턴 원단 사업의 장점을 알려 줬다고 해도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이죠.”
“당연하지. 패턴 원단 그게 어디 보통 까다로운 분야야?”
“네. 섬유팀에서도 최소 대리 이상급은 되어야 패턴 원단을 직접 만지는데, 저한테 그 기획안을 가지고 올라와서 이야기하는 걸 들어 보니까 패턴 원단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시장에 대한 이해까지 다 하고 있습니다.”
“말 같은 소릴 해.”
하늘이는 할아버지의 반응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재경 그룹의 시작은 나와 회장님이 함께 했던 합당포 포목점이었어. 그걸 바탕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세한모직을 인수해서 지금의 재경모직을 만든 거야. 20년 넘게 원단을 만져 왔던 나나 회장님도 처음 한국에 패턴 원단이라는 게 들어왔을 때 그걸 분석하고 이건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럼요. 잘 알죠.”
“그런데 그걸 섬유 쪽만 파고 있었던 놈도 아니고, 인사부 과장 일만 해 왔던 정훈이가 원단, 그리고 시장에 대한 이해를 다 하고 있다고?”
그게 그렇게 복잡하고 전문적인 내용인 것일까.
그냥 말 그대로 패턴이 들어간 원단을 가지고 하는 사업 아닌가?
“이해만 하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해당 기획으로 정훈이한테 설득까지 당한 상태입니다.”
“그게 왜 문제가 돼?”
“이사회에서 제동을 걸고 나오는 거죠. 시니어즈부터 시작해서 퍼스펙티브까지 아직 뭐 하나 제대로 된 결과물이 안 나온 상태에서 무슨 일을 계속 크게 벌이느냐. 따지고 보면 정훈이의 기획으로 들어간 투자는 그게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 또 있어?”
“스너프요. 거기에 각 계열이 투자를 넣었지 않습니까.”
“스너프는 지금 빠르게 올라오고 있잖아.”
“하지만 아직 모직 쪽으로 배당이 들어온 게 없으니, 사외 이사들은 정훈이가 회장님 아들이라는 이유로 모직 전체가 마이너스 영업을 각오하고 정훈이의 실적 밀어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겁니다.”
“참 할 짓들 없다. 꼬투리를 잡을 거나, 안 잡을 거나….”
“그간 정훈이의 기획으로 진행되고 있던 투자가 많지만 않았다면 얼마든지 신사업 자금으로 시도를 해 볼 만한 기획인데, 현재로서는 모직 유보금을 건드려야만 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이사회를 통해야만 하고요.”
장 회장은 크게 걱정할 내용도 아닌 거 같은데, 뭘 그렇게 고민을 하느냐며 물었다.
“패턴 원단 사업에 뛰어들어 보자는 게, 직접 하자는 게 아니라 국내 원단 업체들을 묶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보자는 거 아냐?”
남 사장은 순간 소름이 올라왔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입에 담지도 않았는데, 대략의 흐름이나마 그걸 간파하고 있다.
“…네.”
“어떻게 묶어보겠다는 건데?”
“그게….”
“어떻게 묶든, 시간이 걸릴 거 아냐.”
“시간이요?”
“국내 업체들도 만나러 다녀야 하지, 해외에서 국내 패턴 원단을 수입해 가는 브랜드 업체들 쪽과도 접촉을 계속 시도해야지… 준비할 게 한두 개가 아니잖아. 그걸 준비하는 동안 시니어즈도 그렇고, 퍼스펙티브도 어느 정도 성과가 잡힐 거 아냐.”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남 사장이 말했다.
“벌써 섬유팀 사람들 통해서 국내 패턴 원단 제조 업체들 쪽으로 어느 정도 접촉이 진행된 상태라고 합니다.”
“…뭐?”
“해외 브랜드들도 파리 지사 영업부 직원들이 어느 정도 실질적인 이야기를 진행시킨 상태이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정훈이 말로는 시장 조사를 위해 우선 국내 시장과 해외 브랜드 측의 입장, 기대 정도를 체크해 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장 회장의 표정이 괴기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로?”
“기획안 준비 기간이 두 달이었다고 합니다.”
“두 달?”
“네.”
“준비하는 내내 자네한텐 한마디도 없었고?”
“없었습니다.”
“그럼 그걸 공식적인 회사 지원 없이, 그저 직원들 몇 명 데리고 준비를 해 왔단 말이야?”
“네, 저도 그게 가능한 일일까 싶긴 한데, 어쨌든 기획안으로 나온 결과물이 있으니 안 믿을 수도 없고….”
믿기 힘들다는 듯, 장 회장은 두 눈만 수차례 감았다 뜨길 반복했는데, 정작 하늘이는 할아버지가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게 더 믿기가 힘들었다.
“그 기획안 내용은 사업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고?”
“저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장 회장은 더 이상 입을 떼지 않았다.
남필우가 어떤 친구인가.
남 사장이 이렇게까지 질색할 정도라면, 이는 남 사장의 역량 부족이라고 볼 게 아니라 정훈이가 일반적이지 않다고 인정을 해 줘야 할 일.
“정훈이가 올렸다는 기획안, 그거 내가 좀 볼 수 있을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