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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탁이고, 당부요 (113/303)

마지막 부탁이고, 당부요

재경모직 본사 쪽으로 그룹 본사의 전화가 들어간 건 이사회 당일 아침이었다.

―대회의실 상태 다시 한번 점검해 주시고 10시 55분부터 회장님 입장하시기 전까지 1번 승강기는 전 직원들의 사용을 일시 중단시켜 놓으라는 지시가 있으셨습니다.

비상이 걸렸다.

손홍준 회장이 직접 이번 모직 이사회에 참석을 하겠다는 전달이었다.

그룹 회장의 모직 본사 방문은 이미 그 자체가 드문 일이었고, 이사회 참석은 더더욱 이례적인 일이라 그룹 본사의 전달을 받은 모직 본사엔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장태산 회장님도 참석하신다고 합니다.

“장 회장님도요? 참석을 안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모직 쪽 사외 이사 일정까지 그룹 본사에서 다 챙길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똑같은 말을 해도 어쩜 저렇게 싸가지가 없을까.

하여간 그룹 본사 놈들이란….

“그건 그렇지만, 당일 아침에, 그것도 이사회까지 1시간을 남겨 놓고 이렇게 급하게 연락을 주시면….”

―죄송한 말이지만, 저희가 회장님이 급하게 새로 잡으시는 일정에 대해서까지 모두 예상을 하고 있긴 힘듭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오전 근무가 예약되는 순간이었다.

김 부장을 시작으로 박 차장, HRM의 정현수 과장 모두가 이사회까지 한 시간 남짓 남은 시간 동안 발에 붙이 붙은 듯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손정훈은 내심 그들의 다급함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그들의 다급함을 흉내 내 보기 위해 함께 분주한 척을 해야만 했다.

이번 이사회에 손홍준 회장과 미래금융 장태산 회장이 함께 참석한다는 소식.

그 소식을 타고 이미 대회의장 안으로는 평소 늦장을 부리던 이사진들까지 최소 30분 이상씩 먼저 도착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편 모직 본사 로비에선 사장 남필우, 전무 조동희를 비롯해 비서실 직원들이 두 줄로 서서 그룹 회장 손홍준을 맞이하고 있었다.

“장 회장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장태산 회장의 도착 여부부터 묻는 손 회장이었다.

“아직 도착 안 하셨습니다.”

남 사장의 대답에 손 회장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먼저 도착해서 다행이라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로비 안으로 안내하는 비서실장을 멈춰 세웠다.

“기다려.”

“네?”

“오시면 같이 올라가게.”

자리에 모인 모두가 색다른 긴장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룹 회장이 직접 모직 본사 건물 입구에서 장 회장님을 기다리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 본사 건물 입구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모든 모습을 정훈이는 2층 실내 난간에 기대어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 * *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 느낌이 새삼 궁금해지고 있다.

워낙 정신없는 세월을 살아온 나였기에, 그 중요한 건강까지 갈아 가며 오로지 회사를 위해 달려온 삶이었기에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난 감이 없다.

미련하게 살아도 그렇게 미련하게 살 수가 없었지.

이제 막 회사 앞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온 검은색 카니발 리무진 한 대.

그 안에서 하늘이의 부축을 받으며 내리고 있는 태산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네가 나보다는 훨씬 더 근사하고 옳은 삶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난 근사하고 옳은 삶보다는 내가 원하는 삶을 다시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걸 다시금 인정하게 되었고.

사람 참 쉽게 안 변하지.

죽음을 경험하고, 그 죽음의 문턱 앞에서 건강 따윈 안중에도 없었던 지난 삶을 그렇게나 후회를 해 놓고, 그 후회를 언제 했냐는 듯 또 똑같은 삶을 그대로 살고 있는 나란 사람 자체가 얼마나 코미디인가.

건물 2층 난간에 살짝 기대어 홍준이와 남 사장, 그리고 그 옆으로 하늘이의 부축을 받으며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태산이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회사 건물을 둘러보던 하늘이와 눈이 잠시 마주쳤는데, 우린 서로를 향해 약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눈빛을 교환하는 정도로 인사를 끝냈다.

곧 한 번에 다 같이 올라가지도 못할 많은 인원이 1번 승강기 앞으로 모였고, 홍준이가 조 전무를 시켜 엘리베이터를 잡게 만드는 동안 그 안으로 태산이가 먼저 하늘이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갔다.

다른 보좌 인원들은 미리 잡아 놓은 다른 승강기 앞에서 대기를 하거나, 1번 승강기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비상 계단 쪽으로 빠른 걸음을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늘은 하늘이의 사외 이사 선임안이 있는 날.

태산이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재경을 완전히 떠나게 됐고….

그리고 공교롭게도 난 같은 시간에 패턴 원단 업체 측 사장들과 미팅이 잡혀 있었다.

그래서 잠시 구경을 나왔을 뿐.

과연 홍준이 놈이 태산이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그걸 멀리서나마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태산이.

그동안 어떻게든 내 자식 놈들 곁에 맴돌아 준다고 정말 수고가 많았네.

내 자네한테 받은 의리, 그리고 고마움은 반드시 갚아 보겠네.

최선을 다해 보겠어.

본사 로비를 쥐 죽은 듯 조용하게 만들었던 그 무리들이 모두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을 통해 대회의실로 올라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난 천천히 인사부 사무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 * *

―회장님 입장하십니다.

대회의장 안으로 짧은 공지 방송이 들어갔다.

그 방송에 재경모직의 임원진, 이사회 일원들이 일제히 하던 것들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바깥에서부터 열린 대회의장 문 안으로 가장 먼저 들어선 건 손홍준 회장이 아니라 20대 중후반의 젊은 여성, 그리고 그 여성의 부축을 받으며 느린 걸음을 옮기는 미래금융의 장태산 회장이었다.

장 회장님을 옆에서 부축하고 있는 저 젊은 아가씨가 바로 이번 이사회 안건, 사외 이사 선임안의 주인공인 장하늘일 것이다.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외모로 짐작할 수 있는 나이에 비해 단단하고 묵직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하늘이의 모습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옹골지다.

외모의 미적 수준을 떠나, 장 회장을 부축하면서도 대회의장 안으로 모인 재경모직의 임원진, 이사회 일원들을 확인하는 그 눈빛은 옹골차기 그지없었고, 그 옹골찬 눈빛 안엔 묘한 여유까지 함께 섞여 있었다.

그 옆에서 조 전무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는 손홍준 회장.

조동희 전무는 곧장 이사회 진행 준비를 하고 있는 박종근 인사부 차장을 시켜 꽃바구니가 올려진 자리의 의자를 빼내 회장석 옆으로 그 의자를 나란히 놓게 했다.

그리고 꽃바구니는 옮겨진 의자 바로 앞 테이블 위로 새로이 올려졌다.

근본이 없는 좌석 배치.

하지만 재경모직의 모태이자, 재경 그룹의 산증인인 장태산 회장을 보내는 자리임을 모르는 사림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 근본 없는 좌석 배치에 어느 누구 하나 고개를 갸웃거린다거나 의아함을 품는 사람은 없었다.

장태산 회장은 오른쪽 손홍준 회장과 왼쪽 남필우 사장 사이에 끼어 사실상 그룹 회장까지 참석한 이번 이사회 자리에서 최고 상석을 배려받았다.

그리고 손홍준 회장은 그 배려의 마지막을 장 회장이 자리에 앉을 때 뒤에서 직접 의자를 안쪽으로 밀어 드리는 것으로 장식했다.

자리에 서서 그 모든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던 이사회 참석 인원들은 손홍준 회장이 자리에 앉은 뒤에야 하나둘씩 자신의 자리에 착석을 했다.

“나중에 다 같이 밥이나 한 끼 하면 되는 거지, 낯간지럽게 뭘 이런 걸 다 준비하고 그랬어요?”

옆에 앉아 있던 남 사장이 얼른 장 회장이 치우고자 하는 꽃바구니를 바닥으로 대신 내려놓았다.

“내 그간 우리 재경모직 쪽으로는 큰 도움도 안 되는 사람이었고, 내 집안 사업 챙기기 바빠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했는데 이런 인사까지 받아도 되는 건지 많이 민망합니다.”

아흔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장 회장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장 회장이라는 인물을 실제로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이사회 일원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들의 눈에도 장 회장은 지금의 재경을 대표할 만한 거인이었다.

“마침 우리 손 회장님이 같이 자리에 참석해 주겠다 하셔서, 그냥 조용히 물러날까 하다가 못 이긴 척 따라 나와 봤어요.”

그간 만만했던 이사회 자리와는 확연히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느 누구 하나 회의 테이블 아래로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회의 테이블 위로 편하게 팔꿈치를 올리고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스마트하고 경쾌한 인물인 줄로만 알았던 사장 남필우 역시 재경의 두 거인, 손홍준 회장, 장태산 회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상석 줄에 함께 앉아 있기 때문일까 무척 무게감이 실려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상석 줄의 세 인물이 주는 무게감은 실로 엄청나서 평소 이곳 재경모직의 이사회를 만만하고 편하게 시간이나 때우고 인맥 관리 정도의 소모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사외 이사들까지도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곧 떠날 사람이 이렇게 바쁜 사람들 모아 놓고 혼자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도 괜찮은가?”

사뭇 그 부분이 걱정이 된다는 듯 손홍준 회장을 쳐다보며 장 회장이 물었지만, 손 회장은 다른 이사회 일원들의 반응은 일체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손을 뻗어 얼마든지 하시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으시면 편하게 하시라 부탁했다.

“하고 싶은 말 다 할 거면, 그게 어디 하루 이틀 안에 끝이 날까. 다 말고 내 이 자리에 모이신 바쁜 분들한테 딱 이거 하나만 당부를 하고 싶소.”

저 멀리 원래 장태산 회장의 자리로 잡혀 있던 곳에 홀로 떨어져 앉아 있는 하늘이의 눈에 빛이 나고 있었다.

“사업이라는 게 그래요. 안 된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한테는 안 되는 이유, 할 수 없는 핑계가 필요해요.”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되는 장 회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비록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된 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엔 묘한 힘이 실려 있어서 다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목소리에 집중하게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안 되는 이유, 할 수 없는 핑계를 찾는 시간에 되는 방법, 할 수 있는 방안들을 찾지요. 그게 큰 차이거든요. 내 구십 인생 살아오며, 그중 칠십 인생 가까이를 원단 만지고 이젠 돈장사하며 기업을 운영해 보니, 그 단순한 생각의 차이가 조직의 수준을 크게 바꿔 놓습디다.”

옆에선 손홍준 회장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수차례 끄덕이며 짤막하게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왜 다 같이 방법을 찾아봐 줄 생각들은 안 하고, 반대를 위한 이유와 핑계들만 찾고들 있소.”

이내 자리에 모인 모든 재경모직 임직원들, 사외 이사들은 장태산 회장이 패턴 원단 사업을 반대하는 자신들을 꾸짖고 있는 중이라는 걸 눈치챘다.

“여기 우리 남 사장이 관심 있게 보고 있는 패턴 원단 사업. 그거 꽤 설득력 있는 좋은 사업 아니요?”

이전에 남 사장을 주축으로 이뤄졌던 회의 때와는 달리, 누구 하나 먼저 손을 들고 반대를 하는 이유와 입장을 꺼내 놓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지난 20년, 30년 세월 동안 과연 얼마나 많은 역사가 우리 재경모직에 쌓였소? 마땅히 우리 재경모직만의 역사라고 할 만한 게 교복 사업 말고 뭐가 있기는 한가? 죄다 남의 브랜드 받아다가 대신 매장에 깔아 주고 중간 마진 떼기나 하면서 회사 덩치만 키워 왔지, 재경모직 하면 사람들이 딱 하고 떠올릴 수 있을 만한 게 교복 사업 말고 뭐가 더 있냐는 말이오.”

장 회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 모인 모든 시선은 손홍준 회장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손 회장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장 회장의 지적에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사장 남필우였다.

“내가 봤을 때, 재경모직이 패턴 원단에 손을 대면 이건 우리의 역사가 될 수도 있는 일이오. 이 얼마나 근사한 일이요? 이 근사할 수 있는 일에 나는 무슨 이유와 핑계가 필요할까 싶소. 내 이번에 남 사장 통해 이 사업에 이사진들이 많은 우려를 하고 있다는 소릴 듣고 현 재경모직이 방향만 있고 목적은 없는 게 딱 우리 미래금융 같단 생각이 들었소.”

“…….”

“투자 회사야 목적이 필요가 없지요. 우린 돈 흐르는 방향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재경모직 같은 이런 제조, 유통 기반의 기업은 그러면 안 되지요. 방향은 언제든 수정할 수 있지만, 뚜렷한 목표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오? 어째서, 왜 제조, 유통 기반의 재경모직이 우리 미래금융처럼 돈줄 따라 움직이고 있어? 돈줄은 정확한 목표까지 가기 위해 얼마든지 잡을 수도, 만들 수도 있는 건데. 우리 미래금융이 그 돈줄이 되어 주겠소.”

한순간 이사회 자리에 웅성거림이 번져 가고 있었다.

“그런 돈줄이 되어주는 게 우리 같은 투자 회사 아니오. 근데 아깝지 않겠소? 얼마든지 재경 자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수준일 거 같은데, 거기에 다른 돈줄을 끌어와 나눠 먹길 하려면. 패턴 원단. 쉽게 할 수 있는 사업은 분명 아니지만, 방법만 확실히 알고 있다면 큰돈 드는 사업은 더더욱 아니오. 그 맥을 그 기획을 처음 만들어 낸 사람이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고. 내 감히 장담하건대 이유와 핑계를 찾았던 사람 중 방법을 찾아볼 궁리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 있었다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잘 알 거요. 그리고 아직 방법을 못 찾았거나 찾는 방법을 모르겠다면, 다시 한번 남 사장 통해서 해당 기획에 대해 자세히 한번 들어 봐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패턴 원단 사업은 재경모직 쪽으로 돈보다 더 비싼 역사를 가져다줄 거요.”

“…….”

“이 늙고 나이 든 사람이 온 젊음을 바쳤던 재경이오. 그 재경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앞으로 10년, 20년, 100년… 꾸준히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며 유지가 될 수 있는 기업으로 여러분들이 다 같이 한번 만들어 봐요. 그게 이젠 재경을 완전히 떠나는 이 늙은이 마지막 부탁이고, 당부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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