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 이놈들. 진짜 바보들이구나! (114/303)

아, 이놈들. 진짜 바보들이구나!

패턴 원단 업체들과 접촉을 하고 있는 섬유팀으로부터 미팅 결과물을 받을 때마다, 정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

국내 패션업계 1, 2위라고 하는 KS 인터내셔널. 그리고 한일 어패럴.

아, 이놈들. 진짜 바보들이구나!

그리고 그런 바보들에게 밀려 업계 3위 자리에만 계속 머물러 있는 우리 재경모직은 더 바보구나.

이제 이쯤 되면 내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지난 30년 세월에 대해선 딱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봐야 했다.

무슨 공부가 더 필요할까.

이런 바보들을 앞에 두고, 이런 바보들을 데리고 뭘 더 어떻게 조심해야 할까.

그냥 그 시절 내가 재경을 이끌던 것처럼, 재경의 덩치를 키우던 것처럼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겠구나.

깡패였던 정치는 이제 양아치가 되어 있고, 그런 양아치들이 만들어 놓은 이 시대엔 희망이라는 게 모두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정훈이 몸에 들어온 내가 뛰어다니기엔 조건상 훨씬 더 좋은 게 아닐까.

아무도 뛰려고 하질 않으니, 이 얼마나 내 입장에선 고맙고 수월한 상황이냔 말이다.

재경모직 본사 외부 인사 접견실.

섬유팀장의 지휘 아래, 지난 두 달간 섬유팀 직원들이 국내의 어느 정도 규모가 나오는 패턴 원단 업체들과 꾸준히 접촉을 해 왔다.

그리고 그 접촉의 결과로 7개 업체 사장들이 재경모직 본사를 방문했다.

이번 미팅을 위해 파리에서 방돔 지사장도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

내가 불렀다.

따로 할 이야기도 있고 해서.

국내 패턴 원단 시장을 하나로 묶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유통권을 파리 방돔 지사가 가져갈 수만 있다면 더 많은 브랜드의 국내 유통 라이선스를 재경모직이 가져올 수 있을 거란 확신 정도는 이미 내가 이번 기획을 던졌을 때부터 지사장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쎄리에, 랑글로, 만토비우스, 그리고 스페인의 비올, 프랑스 데미, 터키에서 출발한 칸토까지. 이렇게 총 6개의 원단, 섬유 총판 업체가 전 유럽 패션 브랜드 쪽으로 특수 섬유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패턴 원단, 특수 섬유 유통 점유율이 유럽 안에선 거진 80퍼센트에 육박한다고 하니, 사장님들과 같은 해외 제조 업체들은 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유통이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죠.”

패턴 원단 업체 사장들을 상대로 방돔 지사장이 풀어낸 내용처럼, 실제 그들은 그들의 시장 점유율을 경쟁업체 쪽으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 세계로 퍼져 있는 많은 제조 영세 업체를 상대로 독점 계약이라는 걸 걸어 놓고 물량을 확보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경쟁을 하기보다는 하나의 커넥션을 만들어 자신들이 시장을 끌고 가는 게 훨씬 더 유리하고 덜 피곤하며, 손에 떨어지는 재미도 크다는 걸 그들이 알아 버렸다는 거다.

유통에서 담합이 이뤄지면 결국 그 피해는 제조와 소비자가 그대로 떠안아야 한다.

영세 제조업체 입장에선 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단가가 높은 패턴 원단의 유통 판로를 뚫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그네들과 독점 계약을 하고 그들의 제시하는 마진 비율대로, 생산 물량까지 원단을 맞춰야만 한다.

소비자들 입장에서도 시장 가격을 그들이 결정을 해 버리니, 그들이 부르는 값을 주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니 패턴 원단 업체들 쪽에선 얼마나 속이 뒤집히겠나.

패턴 원단이라는 게 원단 자체만으로도 단가가 높기 때문에 그 원단을 구매하는 쪽은 고가의 명품 브랜드일 수밖에 없고, 그 좋은 기술력을 가지고도 지금처럼 중간 원단 총판 업체들에게 끌려가야만 하는 모순의 시장이 되어 버린 거다.

이러한 시장이 형성되게끔 판을 만든 쪽은 다름 아닌 베트남 원단 시장.

이놈들이 제일 바보들이지.

다른 일반 원단을 팔아먹기 위해 패턴 원단을 총판 쪽으로 독점 계약을 해 주며, 유럽 시장에서 총판들의 영향력을 깡패처럼 키워 준 꼴이 되었다.

그 결과 자기들 스스로 노예가 되어 버린 거지.

“자리해 주신 사장님들 역시 그 여섯 업체 중 한 곳과 독점 계약을 맺고 원단을 납품 중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방돔 지사장의 말에 자리에 모인 일곱 군데 패턴 원단 업체 사장들은 차마 한숨을 내쉬지도 못하고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43퍼센트. 총판 업체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패턴 원단을 유통 대행해 주며 총판 업체에서 가져가는 수수료가 평균 43퍼센트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방돔 지사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업체 사장 한 명이 불만을 표출했다.

“그나마도 환율이 좋을 때 말이지, 요즘처럼 환율이 불안할 때엔 라인을 돌리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일 때도 있어요. 그 43퍼센트라는 게 어떻게 나온 건지 압니까?”

“위탁 판매 수수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맞아요. 그놈들이 우리 물건을 사 주는 게 아니에요. 그냥 물건부터 받아다 팔아 주는 거예요. 정산은 한 달 뒤에 해 주는 거고. 그러다 해가 바뀌고 우리 쪽에서 보내 놓은 원단이 재고로 돌아가면 이걸 자기네들 창고 부족하다고 우리한테 가져가라고 한단 말이죠.”

옆에서 다른 사장 한 명이 덩달아 흥분하며 말했다.

“그걸 가져와서 어디다가 쓸 거예요? 재고 관리 제대로 해서 빨리 보내 주면 말이라도 안 해. 받는 데만 세 달이 걸려요. 그거 다 쓰레기 되는 거지. 그러니 우린 그쪽으로 대신 처리 부탁하고 새 원단을 그만큼 다시 보내 주는 거예요.”

업체 사장들에게 내가 물어봤다.

“결국은 말이 독점 계약이지, 계약에 기간 같은 건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런 게 있을 수가 없죠. 그리고 이런 시장 구조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고요. 독점이라고 하면 사실상 어느 정도 물량을 찍어 내라, 그럼 우리가 그 물량을 다 사 주겠다. 이렇게 되어야 맞는 거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독점이라는 부분을 대부분이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죠.”

“그런데 이놈들은 그런 게 없어요. 재고의 위험을 자기들이 떠안지 않겠다는 거죠. 그러면서 그 6개 놈들이 자기들끼리 담합을 해서 특수 원단들의 시장 가격을 결정해 버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여기한테 계속 물건을 주다가 아닌 거 같아서 다른 총판 쪽으로 갈아타고 싶어도, 이미 자기들만의 커넥션이 워낙 단단하니까 다른 쪽에선 아예 받아 주질 않는 거예요. 그놈들이 만들어 공유하는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거지.”

“독과점인 거죠, 한마디로.”

그네들의 시장 지배 형태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고 자리에 모인 패턴 원단 업체 사장들에게 말했다.

“저희 재경모직이 고착화된 그 시장의 구조를 완전히 뜯어고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국내 패턴 원단 시장이 사라지는 건 어떻게든 막아 보고 싶습니다.”

이런 내용을 이 친구들이 알아야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전 세계 섬유 강국이었습니다. 당시의 한국 섬유 수출은 지금의 반도체, 자동차와도 견줄 정도였죠. 물론 그 시절과 비교해 지금은 한국의 위상이 많이 올라가 있고, 더불어 주요 산업에 변화가 있는 건 당연한 거겠지만, 패턴 원단과 같은 고부가 가치 산업은 지킬 수 있으면 지켜야죠.”

“지키고 싶다고 해서 그게 어디 저희 마음대로 지켜지는 거겠습니까?”

“저희 쪽에서 각 업체당 3억씩 물량 보증금을 걸어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자리에 모인 업체 사장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보증금이요?”

“네. 저희 역시 사장님들 업체를 통해 물량을 구매해서 브랜드들 쪽으로 영업을 시도하기엔 다소 리스크가 있습니다. 첫째. 아직은 저희가 원단 해외 유통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다. 둘째. 그 여섯 군데 총판 업체의 담합이 워낙 단단합니다. 셋째. 금방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처럼 재고 처리에 대한 부담이 있습니다.”

자리에 모인 사장들은 내가 밝힌 이유 모두를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사장님들의 협조만 더해진다면 패턴 원단에 한해서만큼은 충분히 그쪽 시장에 변화를 줄 수 있겠다는 확신도 있습니다. 첫째. 저희는 수수료를 43퍼센트까지 높게 가져갈 생각이 없습니다. 33퍼센트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23퍼센트가 적정 수수료임을 감안했을 때, 남은 10퍼센트로 패턴 원단에 한해 시장 가격을 낮추는 데 사용할 생각입니다. 일종의 저희 쪽 영업비라고 이해해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두 번째 이유를 밝히기도 전에 이미 자리에 모인 업체 사장들의 엉덩이는 들썩거리고 있었다.

“둘째. 재경모직은 이미 총 24개의 유럽발 브랜드 국내 유통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과는 이미 해당 내용으로 접촉이 끝난 상태이고, 타 브랜드들과도 계속 접촉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격 면에서 그 정도 메리트를 저희가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저희를 통해 패턴 원단을 받을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대답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

사실상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

“셋째. 제조 기술력을 가진 사장님들이 저희 편입니다.”

“…….”

“유통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상품이 없는 유통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 단가를 낮춰 브랜드들 쪽으로 풀기 시작하면, 틀림없이 담합하고 있는 그 총판들도 함께 가격 경쟁에 나올 겁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장님들께서 더 많은 국내 패턴 원단 업체 사장님들을 저희 쪽으로 연결해 주고 이 프로젝트에 함께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 주시면, 그쪽에선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전 세계 패턴 원단 시장에서 한국 원단을 빼놓고 이야기가 됩니까? 베트남에서 받는 물량으로 다 커버가 되겠느냐고요. 된다고 해도 품질 면에서는 아직 한국 원단이 압도적이지 않습니까.”

“그럼요. 베트남 제품은 가격 면을 제외하고는 경쟁력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저희는 패턴 원단 자체만으로 마진 장사를 하겠다고 이 시장에 뛰어드는 게 아닙니다. 먼저 이야기는 들으셨겠지만, 저희는 더 많은 해외 브랜드의 국내 유통 라이선스를 확보하기 위해 사장님들이 가지고 계신 패턴 원단을 무기로 선택한 거뿐입니다.”

옆에서 얼른 방돔 지사장이 원단 업체 사장들이 할지도 모를 오해를 걷어 냈다.

“저희 과장님 말씀은 서로가 서로의 무기가 되어 주자는 뜻입니다.”

“무기가 되든, 도구가 되든, 살아남아야 뭐가 되더라도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언제 공장 문을 닫아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고, 저 말고도 이 자리에 모이신 사장님들의 입장 모두가 저와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사장의 솔직한 고백 앞에, 자리에 모인 모든 사장이 더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업체당 3억씩 주겠다는 물량 보증금은… 정확하게 어떤 개념인 겁니까?”

자금적인 부분으로 노골적 절실함을 보일 수밖에 없는 부끄러움.

그런 부끄러움을 감내하며 한 업체 사장이 내게 조심히 물어왔다.

“최소한의 숨 고를 시간은 필요하실 거 같아서요.”

“…네?”

“그간 라인을 돌리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일 때도 많으셨다면서요.”

“…그렇죠. 그건 저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다른 사장님들도 다 똑같으셨을 겁니다.”

“말 그대로 보증금입니다. 미리 드리는 거죠. 저희 쪽에서 판매 금액을 정산해 드릴 때, 정산 금액에서 차감을 시키는 걸로 하겠습니다. 해당 보증금은 저희 쪽에서 발주를 넣을 때마다 일종의 선수금 형식으로 계속 넣어 드릴 거고, 동일한 방법으로 몇 번 정도 거래가 이어지다 보면, 그땐 저희 쪽에서도 어느 정도 시장을 장악하게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패턴 원단 시장을 아사리판으로 만든 장본인은 결국은 베트남 원단 업체들 아닙니까.”

“그렇죠. 그놈들이 총판 놈들과 손잡고 독점 계약을 시장에 일반화시키지만 않았어도 이런 상황은 절대 벌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당연한 거 아니겠냐는 투로 업체 사장들에게 물었다.

“그럼 그런 업체들은 아웃이 되게끔 만들어야 안 되겠습니까?”

“……?”

“베트남 업체들만 없어지면 최소한 패턴 원단에 한해서만큼은 사장님들 업체가 세계 시장의 중심에 서게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보증금 같은 게 필요하겠습니까? 그땐 지금과 달리 저희가 도움을 드리는 게 아니라, 저희가 사장님들의 도움을 받아야 될 텐데요. 하하하. 지사장님.”

“네, 과장님.”

방돔 지사장은 내가 뭘 주문할 거라는 걸 미리 다 짐작하고 있었다.

업체 사장들 앞으로 브랜드 리스트를 전달하며 지사장이 말했다.

“패턴 원단에 한 해, 만약 저희 재경모직이 한국 패턴 원단 업체를 통해 충분한 물량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현 시장 단가에서 10퍼센트 정도의 원가 할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저희를 통해 원단을 주문해 보고 싶다는 뜻을 전달한 브랜드들입니다.”

거기에 내가 내용을 추가시켰다.

“그간 해 오셨던 것처럼 얼마나 나갈지도 모르는 기성 원단을 뽑기보다는, 이렇게 브랜드들 쪽으로 주문을 받고 그들이 원하는 패턴을 그들이 원하는 물량만큼만 뽑게 되면 원단 재고에 대한 리스크는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지사장이 전달한 리스트를 확인하며, 누군가는 손가락 끝으로 브랜드 숫자를 확인해 가며 물었다.

“이 브랜드들이 다 재경모직을 통해 패턴 원단을 주문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단 말인가요?”

“저희가 패턴 원단 유통 사업을 중간에서 하게 된다면요.”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한 업체 사장들.

“만약 저희 재경모직이 패턴 원단을 직접 뽑을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복잡하게 둘러 갈 이유가 없겠지요. 그런데 저희 제품이 아니라 사장님들의 제품을 저희가 대신 유통을 해 드리는 겁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접근을 할 내용이 아닌 거죠.”

“…….”

“브랜드 측과 패턴 원단 업체 측. 양쪽 모두에게 실수하지 않도록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 중입니다. 그런데도 벌써 리스트에 든 그 브랜드들 모두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장님들만 결심이 서시면, 바로 시작 가능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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