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늘 좀 예민했다
패턴 원단 업체 사장들과 미팅을 끝내고 인사부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2시가 조금 넘은 상태.
이미 밥때는 지났지만, 방돔 지사장과 따로 나눌 이야기가 많아서 사무실만 잠깐 들렀다가 함께 밖으로 나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인사부 사무실 앞으로 그룹 본사 비서실장이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홍준이 놈이 아직 돌아가지 않고 모직 본사에 있다는 말이었고, 날 데리고 가기 위해 비서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느낌상 방돔 지사장의 점심은 내가 직접 챙겨 줄 수 없을 거 같았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서실장의 표정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가 않았다.
잠깐만….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지사장 밥은 먹여야 되는데….
서둘러 섬유팀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갑작스러운 회장님 호출이 있어서 그러니 지사장과 함께 식사하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사장실로 올라갔다.
사장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비서실장에게 태산이와 하늘이는 돌아갔냐고 물어봤다.
“네, 회장님과 점심 식사까지만 같이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실장님 얼굴이 좀… 무거운 거 같아요?”
그룹 본사 비서실장.
많이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두세 번 정도는 본 기억이 있는데 오늘따라 얼굴에 그늘이 많아 보였다.
“아닙니다.”
“오늘 이사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제가 참석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어서,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회장님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신가?”
그거 말고는 명색이 그룹 본사 비서실장씩이나 되는 친구가 내 앞에서 표정 관리를 이렇게까지 형편없이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나.
* * *
사장실 안의 공기는 차가웠다.
홍준이 놈과 남 사장이 소파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남 사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홍준이는 남 사장을 외면하듯 몸을 옆으로 틀어서 앉아 있었다.
왔냐는 말도 없고, 와서 앉으라는 말도 없다.
비서실장이 조심히 문을 닫아 주고 밖으로 나간 뒤에야 난 남 사장 맞은편 소파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 찾으셨다면서요?”
남 사장이 무슨 실수를 했나?
분위기가 꼭 남 사장이 홍준이에게 실수를 했고, 그에 홍준이가 무척 화가 나 있는 거 같았다.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해 놓고 홍준이가 물었다.
“네가 시킨 거냐?”
대뜸 이상한 소릴 하길래, 적당한 맞장구도 못 쳐 주고 홍준이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남 사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니, 고개를 못 들고 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 거 같다.
그건 그렇고 홍준이 이놈은 뭐에 이렇게 화가 났을까?
“네가 시킨 거냐고.”
또 이런 재미가 있구나.
내가 홍준이 놈이 화를 내는 걸 직접 다 보네.
그것도 나한테 말이다.
오냐.
뭔지는 몰라도, 이 애비가 다 받아 주마.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늘이 말이다.”
하늘이?
여기에서 하늘이 이름이 왜 나오지?
바로 그때 남 사장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회장님, 그 부분은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자네는 가만히 있어.”
오호.
뭔지는 몰라도 정말 화가 단단히 났는데?
제법 밑에 사람 숨을 막히게 만들 줄을 알아.
홍준이는 정색하며 남 사장의 입을 막아 버리더니 마치 이번엔 네 차례라는 듯 싸늘한 눈초리로 날 쳐다봤다.
“하늘이가 왜 오늘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오늘 이사회에 장 회장님 참석하신 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일까?
원래 와야 하는 거 아니었나?
“오늘 사외 이사 자리 사임하러 오신 거 아닙니까?”
“모른다?”
아니, 뭐 말을 정확하게 해 줘야 듣는 사람이 알아듣지, 다짜고짜 그렇게 물어보면 내가 무슨 수로 알아듣겠나.
내가 머뭇거리며 남 사장의 눈치를 살피자 결국 홍준이가 상황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어제저녁에 전화가 오셨다. 원래 오늘 이사회엔 하늘이만 보내고 회장님은 참석을 안 하시겠다고 남 사장한테 미리 말을 전해 놓으셨어.”
“몰랐어요.”
진짜 몰랐다.
요 며칠 내가 바빴다.
방돔 지사장도 한국에 들어온다고 하고, 패턴 원단 업체 사장들과의 미팅도 직접 준비를 하느라.
“근데 어제 갑자기 오늘 회사 근처에서 같이 점심이나 하자고, 시간이 될 거 같냐고 물으시는 거야.”
그 말인즉 오늘 이사회에 같이 참석을 해 달라는 소리였겠지.
거기까지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대충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게 왜?
“하늘이가 그랬단다. 첫 이사회 자리이고, 거기에 자기 선임안이 진행되는 자리라 부담스러워서 그러니 오늘만 같이 가 달라고 했다고.”
순간 속으로 하늘이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첫 이사회 자리가 부담스러운 건 핑계였을 것이고, 자기 할아버지의 모든 젊음이 다 들어간 재경에서의 마지막 공식 자리를 지켜보고 싶지 않았겠나.
그런데….
“오늘 이사회 자리에서 장 회장님이 패턴 원단 사업 이야기를 꺼내셨어.”
아….
이제야 왜 남 사장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건지 대충 이해가 가네.
“정훈이.”
“네.”
“너 벌써 하늘이하고 그런 이야기까지 나누는 사이냐?”
나는 하늘이한테 패턴 원단에 관해선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
그 내용에 관해 하늘이 그놈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겠나.
그런데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가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하면 남 사장이 다 뒤집어쓰게 생겼는데?
이건 눈치로 긁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남 사장이 패턴 원단 사업에 관해 태산이에게 이야기한 게 있겠지.
그런데 홍준이 놈 입장에선 그 부분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고.
하긴, 이건 내가 남 사장 편을 들어 줄 수가 없네.
예우상 태산이의 사외 이사 자리를 유지해 주고 있었던 거지, 사실상 태산이는 모직 지분을 하늘이에게 양도한 이후부터 사외 이사 자리에서 물러선 거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하늘이는 아직 이사회의 정식 의결을 통해 사외 이사 자리에 앉지 못한 상황이고.
그런 상황에서 패턴 원단 기획에 관한 내용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재경모직의 사장 자리에 앉아 있는 남 사장이 밖으로 흘렸다는 건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상대가 태산이라서 조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했던 걸까?
남 사장답지 못한 실수네.
“왜 대답이 없어?”
남 사장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눈알만 살짝 굴려 날 쳐다봤고, 머뭇거리는 내 대답 때문인지 홍준이의 이마엔 실핏줄이 서기 시작했다.
남 사장아.
내가 한 번 살려 준다.
“네. 서로 할 이야기가 그런 거밖에 없으니까요.”
“뭐?”
“아직은 그런 내용 말고는 만나서 딱히 서로 할 이야기가 없어요. 어차피 결혼 관련된 내용이야 저희가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의견을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
“죄송합니다. 저는 그 내용이 그렇게까지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내용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거든요. 저나 하늘이가 원래부터 서로한테 애틋한 감정이 있었던 사이도 아니고. 사업 관련된 이야기, 서로 현재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핑계 삼아 가끔씩 만나서 같이 시간 보내는 거 말고는… 당장은 만나서 서로 가까워질 기회가 없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내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던지 아랫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회사 꼴 자알 돌아간다. 지분 양도한 지 한 달이 넘는 양반을 아직까지 사외 이사 자리에 앉혀 놓지를 않나, 그 자리 앉아 이사회 참석도 안 하는 양반 집까지 찾아가 대외비 기획안을 주고 오지를 않나. 이쯤 되면 모직 사업. 그냥 막 가자는 거 아냐?”
남 사장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죄송합니다.”라며 자신의 실수를 크게 인정하고 있었다.
홍준이의 화살은 곧바로 내게 날아왔다.
“정훈이 네가 시킨 게 아니라면, 하늘이가 자발적으로 널 돕겠다고 자기 할아버지를 이용했다고 봐야 하는 거네?”
“오늘 이사회 자리에서 뭐라고 하시던데요?”
“패턴 원단 사업 진행해 볼 수 있게 도와주라고.”
그리고 다시금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지 손바닥으로 탁상을 강하게 내리치며 홍준이가 말했다.
“내가!”
“…….”
“내가 그딴 소릴, 다른 자리도 아니고 이사회 사람들 다 있는 자리에서 꼭 그 양반한테 들었어야 했나?”
“…….”
“내가 직접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한테 해야 할 소릴 왜 그 양반이 하게 만드느냔 말이야!”
이걸 또 이렇게 해석해 버리면 남 사장 입장에선 정말 빠져나갈 구멍이 없겠는데?
“자네들은 도대체 누구 편이야? 아군이야, 적군이야? 남 서방.”
“네, 회장님.”
“넌 뭐 하는 사람이야?”
“…….”
“뭘 해야 하는 사람이야?”
“…….”
“내가 뭘 하라고 그 자리에 널 계속 앉혀 놓고 있는 거 같냐고.”
“…….”
“내가 날 무능한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그 자리에 널 앉혀 놓은 거야? 왜 날 무능한 놈으로 만들어? 왜 그만한 기획 하나 우리 자체적으로 속 시원하게 진행을 못 시키는 것처럼, 그렇게 이사회에 비치게 만드느냐고!”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많이 짧았습니다.”
“내가 지금 얼마 만에 모직에 온 거야? 1년 조금 넘었지?”
“…네.”
“그런데 이렇게까지 사람을 쪽팔리게 만들어야겠어? 내가 언제 오랜만에 방문하니까 내가 걷는 길에 주단을 깔아 놓으라고 했어, 꽃길을 만들어 놓으라고 했어? 내가 언. 제. 까. 지! 내 손으로 직접 빗자루를 들었는데, 마당 쓸라고 하는 소릴 들어야 하느냐고!”
내가 얼른 치고 들어갔다.
“앞으로는 제가 더 조심하겠습니다. 하늘이뿐 아니라, 장 회장님과도 회사 사업 관련된 이야기는 가급적 피하도록 할게요.”
홍준이가 화를 내는 이유가 내 기준에선 납득이 갔기 때문에, 그리고 남 사장의 실수가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철저하게 홍준이 놈의 입장에서 기분을 풀어 줄 수밖에 없었다.
홍준이가 실눈을 뜨며 날 쳐다봤다.
“네가 시킨 내용이 아니다?”
“제가 그딴 걸 왜 시킵니까? 회장님이 제 아버지인데요.”
“…….”
“그리고 시킬 거였음 자기 할아버지가 아니라 회장님을 직접 찾아가 보라고 시켰겠죠.”
“뭐?”
“어쨌거나 지분 비율만 놓고 보면 회장님, 손정태 대표 다음으로 하늘이 지분이 가장 많습니다. 그동안은 자격이 없었으니 못 했겠지만, 지금부터는 자기도 모직 사업 관련해서 관심을 가지고 참여를 하고 싶겠죠. 편한 상대가 자기 할아버지였을 테고. 근데도 자기 편해지자고 한 행동이 결국은 회장님을 불편하게 만든 꼴 아닙니까.”
“…….”
“하늘이가 아직은 뭘 잘 몰라서 그랬던 거 같습니다. 패턴 원단 그게 큰돈 드는 사업도 아니고, 아닌 말로 아무리 이사회에서 저항이 있다 해도 사장님이 마음먹고 밀어붙이면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늘이는 그런 내용에 대해 전혀 감이 없었던 모양이네요.”
난 남 사장에게 힘을 실어 주며 대신 확인을 시켜 줬다.
“지금도 사장님이 이사회 저항 신경 쓰지 말고 패턴 업체 사람들과 미팅 진행하라고 하셔서, 그거 끝내고 바로 올라오는 길입니다.”
“…….”
“이미 회장님도 진행시키라고 사인 주신 내용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알고 미팅을 했던 건데요?”
남 사장아.
뭘 그렇게 놀란 눈으로 쳐다보냐.
내가 널 모르겠냐, 아님 지금 네 위치에서의 역할을 모르겠냐.
“저는 지금 기획 자체에 확신이 있는데, 그리고 회장님, 사장님 두 분 모두가 제 아군인데, 제가 뭐가 아쉬워서 하늘이를 시켜 회장님이 불편해하실 일을 만들겠어요? 저 요즘 그렇게 한가하지도 않고, 다른데 신경 쓸 정신도 없어요.”
“그냥 하늘이가 널 돕겠다고 그랬던 거다?”
“그건 제가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절 돕겠다고 그렇게 한 건지, 아님 다른 뜻이 있었던 건지,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홍준이 놈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선 남 사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저하고 하늘이 때문에 괜히 사장님 입장만 난처해지신 거 같네요.”
* * *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남 사장과 함께 홍준이를 로비까지 배웅하는 길.
그 안에서 여전히 냉랭함을 유지하고 있던 홍준이가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한 소리 했다고 또 하늘이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왜 그랬냐고 묻지는 말고.”
걱정도 팔자다.
“네.”
“그건 그렇고 패턴 원단 업체 쪽 미팅은 어떻게 됐어?”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난 로비 출입문까지 홍준이의 걸음에 맞춰 걸으며 대답해 줬다.
“돈 앞에 장사 있겠습니까? 우리 쪽에서 확보한 브랜드 리스트 보여 주고, 언제든지 그쪽에서 용기만 내면 바로 진행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여 줬더니, 다들 계산이 많아진 눈치입니다.”
“아예 계산을 못 하게 만들어 버려야지, 계산이 많아지게 만들면 되나.”
“업체 측 입장에선 이미 유럽 총판 쪽으로 넘어가 있는 자기네 재고 물량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요. 재고 처리에 관한 계산이 많아진 눈치라는 거지, 우리랑 손을 잡고, 안 잡고의 계산은 아닐 겁니다.”
“브랜드들 쪽과는 이야기가 잘 풀리고 있는 중인 거 맞지?”
“우린 그게 목적이니까요. 오늘 패턴 원단 업체 사장들과 미팅할 때에도, 브랜드 측에서 기대하는 평균 마진 베이스를 놓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부분만 서로 조건이 맞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로비 앞에서 먼저 들어와 있는 차량을 앞에 놓고 나와 홍준이가 마주 보고 섰다.
사장실에서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내 어깨를 두어 번 쓸어 놓고 홍준이가 말했다.
“보인 자신감만큼만 결과로 만들어 봐.”
“네.”
차에 오르기 위해 몸을 돌렸던 홍준이.
갑자기 뭔가 할 말이 생각이 난듯, 다시 몸을 돌려 내게 말했다.
“언제 하늘이 집에 한 번 데리고 와라.”
“네, 시간 한번 맞춰 보겠습니다.”
그리고 남 사장을 불렀다.
“남 사장.”
“네, 회장님.”
“내가 오늘 좀 예민했다.”
“아닙니다.”
“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