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거자
방돔 지사장과는 내가 꼭 한번 따로 시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몇 차례 파리 출장을 다녔지만, 방돔 지사장과 단둘이서 깊은 회사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좀처럼 잡지를 못했었다.
“식사는 잘하셨습니까?”
섬유팀장과 늦은 점심을 끝내고 모직 본사로 들어온 지사장.
나는 홍준이 놈 호출 때문에 점심을 건너뛰어야 했는데, 빈속에 커피를 몇 잔 연거푸 마셨더니 물배가 차서 그런지 허기는 없는데 속이 살짝 쓰린 상태였다.
회사 안에 독립된 내 공간을 빨리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방돔 지사장과 함께 인사부 면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난 그 아쉬움을 달래기에 급급했다.
“회장님께서 급하게 찾으셨다고요?”
함께하기로 했던 점심 식사 자리에 나가지도 못하고 갑작스러운 호출에 불려 나간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네, 회장님도 패턴 원단 업체 측과의 미팅 결과가 궁금하셨던 것 같습니다.”
대충 그렇게 둘러댄 후 지사장에게 물었다.
“아까 있었던 미팅 결과 정도면, 파리 돌아가셔서 브랜드들 쪽으로 접촉이 좀 더 쉬워지시겠죠?”
“브랜드 접촉이야, 명분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부분이죠. 다만, 기존 계약된 브랜드들 제외하고도 열 브랜드 가까이 접촉을 한 상태인데 너무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방돔 지사장.
실력이 있는 친구다.
생뚜앙 지사 시절 때부터 지사 관리는 물론이고, 브랜드 캐스팅, 브랜드 측과의 관계 유지까지.
지난 몇 년간 차분하게, 큰 잡음 없이 좋은 실적을 유지하며 조직을 잘 이끌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
“저는 가능하다면 이번 한국 출장 끝내 놓고 다시 돌아가셔서, 그때부턴 지사장님께서 무리라는 걸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는데요?”
“무리요?”
“네. 지금은 방돔 지사뿐만 아니라, 우리 재경모직 전체를 놓고 봤을 때도 무리를 해야 할 때라고… 저는 그렇게 보고 있거든요.”
확실히 신중한 친구네.
내가 주문한 ‘무리’의 본뜻을 헤아려 보기 위함일까, 한참을 말없이 내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이 예상하는 리스크를 조심히 입에 담았다.
“저희 쪽에서 신규 브랜드들을 캐스팅해 내면, 그걸 한국 본사에서 다 소화가 가능하겠습니까?”
지사장은 자신의 염려를 숨기지 않고 차분하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브랜드 측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해외 라이선스 업체가 우리 재경모직이든 KS 인터내셔널, 한일 어패럴이든 그런 건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자기들은 시즌별 미니멈 개런티 물량을 제시할 것이고, 라이선스 업체가 그 물량을 지속적으로 맞춰 주기만 한다면 충분한 거죠.”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패턴 원단을 기존 시장 단가에서 10퍼센트 가량 낮춰서 공급해 줄 채널을 확보하게 된다면, 갈아타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다만 급하게 많은 브랜드를 다 받아 와서 그걸 모직 본사가 한국 시장에서 핸들링을 다 할 수 있을지, 그들이 제시할 미니멈 개런티를 맞춰 줄 수 있을지, 그래서 결국은 브랜드들 쪽으로 실수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저는 그런 부분에 대한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지사장님, 혹시 ‘진거자’라는 표현을 들어 보셨습니까?”
“진거자요?”
“네.”
그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더니, 이내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단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처음 들어 봅니다.”
“‘진급 거부자’라는 뜻이랍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쓰는 줄임말 같은 거군요.”
“네, 진급 거부자.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우리 모직 본사에도 꽤 됩니다. 제가 그 이유로 직접 상담을 해 본 직원들이 벌써 몇 명이나 될 정도로요.”
지사장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주재원 근무, 해외 파견을 희망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승진과 높은 복지, 해외 경험, 자식이 있는 경우 자녀들의 수준 높은 교육 환경 등을 이유로 그 자리에 지원을 한다.
그런 자신들만의 욕심과 인생에 대한 희망을 어느 정도는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근무를 하고 있는 해외 지사에서 스스로 진급을 거부하려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하지만 그런 다양한 기회가 기저에 깔려 있는 해외 지사가 아닌 국내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층들 사이에선 최근 들어 이런 기조가 조금씩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특히 인사부라는 최전선에서 직원들을 상대해 오다 보니, 그 심각성이 이제는 피부로 와닿는 수준.
“특히 본격적으로 실적을 만들어 내야 될 책임, 대리급에서 그런 경우가 왕왕 나옵니다.”
“왜 그런 건가요?”
“다들 똑똑해서 그렇죠.”
“똑똑해서요?”
“신입일 때야 다들 뭘 알겠습니까? 열심히만 하는 거죠. 그러다 연차가 조금씩 쌓이면서 대기업도 별거 없구나, 라는 걸 알아 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조직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따져 보게 되는 겁니다.”
“…….”
“월 50만 원, 60만 원 더 받겠다고 팀 실적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위에서 까이고, 밑으로는 싫은 소리, 악역을 해야 하는 과장 승진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는 거죠. 그런 스트레스를 감당해 내야 할 시간과 에너지로 자기 스스로를 개발하고 워라밸을 즐기겠다… 그런 거죠.”
“허허….”
“차라리 돈을 조금 덜 벌더라도, 마음 편하게 자기가 딱 해야 할 일만 해도 되는 위치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리고 사실상 딱 대리까지가 이직이 수월한 이유도 크고요. 과장 넘어가고 하면 받는 회사에서도 부담이 크죠.”
코로 짧게 숨을 흘려 놓고 지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현재 제가 패턴 원단을 가지고 무리를 해 보려고 하는 이유예요. 저는 진급을 거부하는 직원들의 생각과 용기를 회사가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존중은 존중에서 끝이 나야지.
“회사가 필요에 의해 진급을 시키려고 하는데, 그걸 거부한다면 그런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은 회사도 함께 내려놓아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
“직원들 개개인이 이렇게 스마트해지고 있는데, 조직도 함께 스마트해지지 않으면 안 되겠죠. 조직이 스마트해지기 위해선 조직과 타협이 가능한 직원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어야 합니다.”
“…네.”
“그리고 그런 직원들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선 회사가 직원들에게 비전을 약속해 줄 수 있어야겠죠. 재경모직.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업계 1위 자리에 올려놓을 계획입니다. 이건 목표가 아니라 생존입니다.”
“생존…이요?”
내 눈에만 위태로워 보이는 것일까?
내 눈에만 불안하게 보이는 것일까?
난 지금의 재경모직에 앞으로도 아무런 변화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고이고 고여 그나마 담겨 있던 물들도 함께 썩거나 다 말라 버릴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기회가 많은 곳으로 욕심 많은 인재들이 모여드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겠죠?”
내 말뜻을 꼭꼭 되새겨 보던 지사장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지고 있었다.
“좋은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선, 우선 조직이 먼저 그럴 역량을 갖춰야 하겠죠?”
“…네.”
“재경모직이 좋아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실력 있는 인재들을 유혹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이젠 확실히 알겠다는 투로, 그렇게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인 지사장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과장님. 덩치만 키운다고 해서 내실까지 함께 커지는 건 아닙니다. 사이즈와 내실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셔야 됩니다.”
“새 브랜드 캐스팅에 성공할 때마다, 그 캐스팅 성공 인센티브를 크게 잡아 주세요.”
“캐스팅 성공 인센티브요?”
난 고개를 짧게 끄덕여 보인 후 말을 이었다.
“브랜드별 지난 3년간의 한국 매출을 기준으로 그 총매출의 1퍼센트 정도를 브랜드 영업팀 캐스팅 인센티브로 잡으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초, 총매출의 1퍼센트요?”
“한국 매출 기준입니다.”
“그래도 그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 정도 특별비는 패턴 원단 영업 통해서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지사장이 입을 반쯤 벌린 채로 혼자만의 계산에 잠겨 있을 때.
얼른 그 혼자만의 계산에서 그를 깨우며 내가 말했다.
“통화로 한번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 이번 상반기 공채 때 외국어 가능한 신입을 대거 뽑아 놨습니다. 주재원 파견 근무 티오도 스무 자리 이상 그 폭을 넓혀 놨고요. 브랜드 캐스팅에 필요한 만큼 인원 충원 요청을 넣어 주세요. 들어오는 만큼 다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본사는….”
“필요한 만큼 다시 또 뽑으면 됩니다. 그게 경력직이든, 신입이든. 오히려 요즘은 신입보다 경력직 뽑기가 훨씬 더 수월합니다. 특히 방돔 지사에서 공격적으로 브랜드 캐스팅을 성공시켜 내면, KS 인터내셔널, 한일 어패럴 쪽에서 해당 브랜드의 핸들링 경험이 있는 인재들을 데리고 오는 데, 그만큼 수월해지겠죠.”
“……!”
“진급을 거부하는 직원들에게 진급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급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그 기회를 돌리면 되는 거니까요. 더 이상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 대기업이라고 해서 꼭 신입 때부터 원 맨으로 성장해 온 직원들 위주로 챙겨 줘야 하는 시대도 더 이상 아닌 거죠.”
“그럼 혹시 지금 지사 통해서 새 브랜드들을 캐스팅하게끔 하시는 의도가….”
“네, 진급에 욕심이 있고, 조직 생활이 적성에 맞는 인재라면, 그게 설사 KS 인터내셔널 직원이든, 한일 어패럴 직원이든 우리 쪽으로 데리고 와야죠.”
내가 그렸던 큰 그림을 이제야 눈치챘는지, 지사장이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내게 물었다.
“그럼 그간 고 부장 시켜서 지사 사무실을 방돔 쪽으로 확대 이전시키고, 패턴 원단 사업 기획안을 만드신 모든 이유가 바로 이거 때문이었단 말씀이세요?”
“수평적 조직 문화? 저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많은 대기업이 요즘 트렌드에 맞춰서 대리, 과장, 차장, 부장… 그런 직책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FD니, RD니 하는 직책으로 근속 연수를 무시한 채 통일을 시키고 있잖아요.”
“그렇죠.”
“언제부턴가 많은 기업이 이직률을 낮추기 위해 진심이 담겨 있지도 않은 수평적 조직 문화를 앞세워 젊은 인력의 마음을 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네.”
“치사한 거죠. 쪼잔한 거고. 뭘 사려면 돈을 주고 사야지, 왜 돈 대신 딴 걸 이용해서 직원들의 마음을 사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돈을 더 주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기회를 제공해 주면 됩니다. 비전을 만들어 주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회사가 무리를 해야죠.”
싱긋이 웃어 주며 지사장에게 말했다.
“지사 직원들이 성공 인센티브를 최대한 많이 가져갈 수 있게끔 영업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럼 저는 이곳에서 지사 직원들을 상대로 본사 직원들이 부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겠습니다.”
“네.”
“선순환은 금방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본사에서 지사 쪽으로 보내게 될 직원들의 실력도 자연스레 상향 평준화가 될 겁니다. 그리고 지사 경험을 하고 돌아온 직원들은 다시 모직 본사에서 본사 직원들의 수준을 상향 평준화를 시키는 데 일조를 해 줄 거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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