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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이 많이 없네요 (119/303)

버릇이 많이 없네요

내가 던진 질문 앞에 홍준이와 장혜란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메리트 없겠습니까?”

대답이 나오지 않길래, 재촉하듯 다시 물어봤다.

“현재 부경이 가지고 있는 사업 중에 우리한테 메리트가 없는 사업은 없다.”

그렇지.

그 많은 우리 재경의 계열을 제 손으로 넘겨준 너라면,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너라면 최소한 그 정도 부끄러움은 가지고 있어야지.

앞으로 흘러가게 될 대화의 방향을 읽어서였을까.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장혜란은 저녁을 준비하겠다며 불편해진 표정을 애써 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준이 놈과 단둘이서만 마주하게 된 자리.

“그 말씀은 현재 마이너스 영업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부경호텔도 우리 재경 입장에선 메리트가 있다는 말씀이세요?”

“사업을 어떻게 메리트로만 따지나. 우리가 장사치도 아니고.”

됐다.

아직 그 정도 분함과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제가 제안 하나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봐.”

“빠른 시일 내로 내일 항공 사장 호출하셔서 태영면세점 쪽과 손을 잡게 만드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항공?”

“네. 작년에 이미 우린 부경 백화점, 마트를 상대로 보이콧을 한 번 했습니다. 한 번이야 구경꾼들 입장에서도 흥미를 가지겠지만, 이게 두 번, 세 번 이어지면 구경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피로도가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대충은 알겠다만, 이게 이렇게까지 판을 키울 일이냐?”

“판을 키우자는 게 아닙니다.”

“그럼?”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겁니다.”

“기회?”

“부경백화점 쪽에서도 우리가 이만한 일로 작년과 같은 그룹 차원의 보이콧을 시도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러는 거겠죠. 그리고 자기네 백화점 지분 12퍼센트를 우리가 쥐고 있는데, 설마하니 백화점 주가가 떨어질 짓을 우리가 다시 또 하겠냐는 계산 아니겠습니까?”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기네 백화점 지분 12퍼센트를 지금 그 사람들은 지분이 아니라 수갑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이번에 확실하게 한번 보여 주시죠. 우린 그 12퍼센트 지분 박살이 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입장.”

“보이콧을 다시 또 하자?”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신 뒤, 자세를 소파 앞으로 당겨 앉으며 홍준이가 물었다.

“아뇨. 이번엔 그냥 보여 주기식의 보이콧이 아니라, 진짜 우리 쪽 브랜드들이 부경백화점 쪽에서 다 빠지는 걸 경험하게 해 주자는 겁니다.”

“너 설마 지금 고의로 부경백화점 주가를 떨어뜨리자… 그런 소리야?”

“대신 재경모직의 주가는 크게 올라가겠죠.”

“……?”

“현재 방돔 지사가 캐스팅 중인 브랜드들. 유통판 개수와 매출이 비례하는 브랜드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통판 수가 절반으로 확 줄어 버리면, 거기에서 일어나는 희소성에 의해 매출이 더 많이 잡힐 브랜드들이죠. 돈 안 들이고 그 브랜드들을 우리 재경모직이 유통 중이라는 걸 홍보할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동시에 우릴 놓친 부경 백화점, 면세점, 아웃렛은 해당 브랜드에서 잡히게 될 매출 로스 그 이상의 영업 적자를 감당해야 할 겁니다. 절호의 기회 아닙니까? 백화점 사업이 흔들릴 때, 마트 쪽 말고 과연 부경의 어디에서 백화점 사업을 지원하고 나설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

“그리고 그 지원을 중간에서 우리가 끊어 버리면 과연 부경백화점이 얼마나 자력으로 버틸 수 있을지도 확인이 가능하겠죠.”

“우리가 무슨 수로 백화점 쪽으로 들어갈 지원을 끊을 수가 있어?”

“아무 사업도 안 물려받는 대신, 부경의 전 계열 지분을 12퍼센트씩 받아 놨잖아요, 어머니가. 그 사람들을 상대로 그것보다 강력한 협상 무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족, 형제보다 자기 사업 경영권 방어가 최우선인 사람들입니다.”

난 홍준이의 눈을 지긋이 쳐다보며 질문을 던져 봤다.

“그런 사람들 눈에 숫자 말고 보이는 게 있겠습니까?”

내 눈을 한참 동안 주시하던 홍준이는 결국 허무한 듯 가볍게 웃음을 토해 내며 내게 물었다.

“태영면세점 쪽과 어떻게 손을 잡게 만들란 소리야?”

“백화점, 면세, 아웃렛. 현재 국내 유통은 부경하고 태영이 양등분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우리 재경항공이 조금만 밀어줘도 그 균형은 금방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예 네 작은외삼촌네와는 등을 돌리게 되는 건데….”

“등은 그쪽에서 먼저 돌렸죠. 우리가 왜 등 돌린 사람 등만 쳐다보며, 다시 우릴 봐 주길 기다려야 합니까? 그 정도 가치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태영이라는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 다음엔?”

“백화점 사업, 메리트가 있는 사업이라면서요? 그럼 다시 가져와야죠.”

* * *

다음 날 장혜란은 남편과 이야기 끝에 직접 남동생인 부경백화점 회장과 약속을 잡고 만남을 가졌다.

누나의 입장과 주주로서의 입장을 함께 가지고 찾아간 회장실.

그곳에서 장혜란은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내가 언제 사업 관련해서 너 찾아온 적 있니? 가족들끼리 너무 그렇게 빡빡하게 굴지 말고 정훈이 좀 도와줘라.”

“평소 안 그러시던 분이 왜 이만한 일로 회사까지 찾아와서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들어요?”

“정훈이 모직 들어가서 처음 해 보는 브랜드 론칭이야. 재경모직에서도 거진 30년 만에 처음 나오는 자체 브랜드고. 외삼촌이 되어서 집안 막내 조카 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시작부터 네가 앞장서서 애 기를 죽여야겠니?”

“누님 참 말씀 이상하게 하시네. 우리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걸 일부러 안 해 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입장에서는 최대한 배려를 많이 해 주고 있는 거예요.”

장헤란의 두 눈에 동생에 대한 가소로운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지금 골프 시장이 엄청 호황이에요. 인지도 있는 브랜드들도 백화점 쪽으로는 자리를 못 구해서 신상 들고 아웃렛 쪽으로 들어가고 있는 실정이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자리를 만들어 준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매장 수수료까지 일반 브랜드 비율로 맞춰 달라는 건 너무 과한 거죠.”

“호황은 무슨. 너는 내가 집에서 살림만 산다고 누나를 바보로 아니? 최근 다시 하늘길 열리고 젊은 2, 30대 사이에 끼어 있던 골프 거품이 다시 해외여행 쪽으로 싹 빠지고 있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다리를 꼬며, 찻잔 받침대를 손바닥 위로 올려놓은 장혜란.

그녀는 여전히 미소가 번진 얼굴로 조용히 찻잔을 입술에 붙였다.

“그냥 저한테 정훈이 따로 불러서 용돈을 좀 챙겨 주라고 하세요. 그럼 내 정훈이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챙겨 줄라니까.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가족이라고 안 되는 걸 되게 해 주고, 다른 사람들 박탈감 느끼게 노골적으로 밀어주고… 그렇게 못 해요. 그렇게 하면 언제 어디에서 말이 나와도 말이 나온다니까?”

“그러니?”

“당연하죠. 그런 말 나오면 정훈이나 재경모직한테도 좋을 거 하나 없어요.”

손바닥 위로 올려놓고 있던 찻잔 세트를 낮은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장혜란이 말했다.

“내가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부탁까지 하는데도… 그래도 안 되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누님. 지금 이거 매장 수수료 퍼센티지 때문에 이러시는 거 아니죠?”

“너도 그깟 푼돈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지 않니?”

“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세요?”

장혜란은 동생의 당황한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다, 평소 그녀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걸어 놓고 말했다.

“아버지 살아 계셨을 때 말이야.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세상 물정을 아무것도 몰랐던 거 같아.”

“…….”

“물론 다시 그 입장이 된다고 해도 비슷한 선택을 할 거 같긴 한데, 만약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그땐 미처 셈에 넣지 못했던 내용을 다 구체화시킬 거 같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나는 우리 형제들, 다들 각자 알아서 남들한테 큰 손 안 벌리고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을 내 손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

“…….”

“아버지가 재경 계열사들에 관심을 보이실 때 말이야. 어차피 그 사람이 재경을 가지게 되면, 원래 그 사람 몫보다는 그게 더 커지는 거니 자연스럽게 정태, 정훈이가 나눠 가질 몫도 늘어나는 거라고 생각을 했어. 큰오빠, 둘째 오빠 몫 외엔 딱히 너나 언니한테 나눠 줄 게 없었던 아버지 입장에서도 큰 걱정거리가 줄어들 거라고만 생각을 했지.”

“하… 누님, 제발요. 제발 그 먼지 나는 옛날이야기 그만 좀 합시다.”

“내가 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따로 한 적이 있었니?”

“…….”

“나는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 본 적이 없는데. 네가 항상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옛날이야기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오빠들은 몰라도 너랑 언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네가 지금 누구 덕에 회장 소리 들어 가며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섭섭하죠, 누님. 저 처음 백화점 받았을 때, 여기에 회장 자리는 없었어요. 이 자리를 회장 자리로 만든 건 저죠. 동네 구멍가게 백화점 사업을 이만큼 키워서 누님 지분 가치를 제가 몇 배나 키워 놨어요?”

“그러니?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거야? 그렇네. 내가 너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네.”

“말에 그렇게 뼈 박지 마시고요. 저 정도면 누님한테 할 만큼 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 당시 누님이 그런 선택을 한 게 어디 저나 큰누님 때문이에요? 아니잖아요. 그거 다 누님 욕심 아니었어요? 욕심대로 다 하고 사셔 놓고, 이제 와 그걸 저나 큰누님 생각해서 했다고 포장을 하시면 안 되죠.”

한쪽으로 내려놨던 핸드백을 무릎 위로 올려놓고 장혜란이 말했다.

“안 되겠다. 온 김에 오랜만에 너랑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같이 먹으면 체하겠다.”

“저도 점심은 선약이 있어서요.”

“일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볼게. 진짜 안 되겠니? 네 조카가 하고 있는 일이고, 좀 더 크게 보면 가족 사업인데 네가 만들어 앉은 그 회장 자리에서 조금만 더 신경 써서 챙겨 줄 수 없겠어?”

“가족 사업? 하하, 그럼 그때 자형은 도대체 우리 민수한테 왜 그랬답니까?”

“그때?”

“애들끼리 술 한잔하다가 다툼 좀 있었던 걸 가지고 유치하게 처남 기업 상대로 보이콧을 하지를 않나, 그걸로 우리 민수 시켜 정태, 정훈이 찾아가 사과를 하게 만들지를 않나. 사촌 형제들 앞에서 우리 민수 기를 그렇게 대놓고 죽여 놓고, 저한테 와서 정훈이 기를 살려 주라고요? 격려를 해 주라고요? 누님. 누님 지금 저한테 너무 뻔뻔하신 거예요. 저니까 그냥 참고 들어 드리는 거예요.”

“너는 말을 왜 그렇게 무섭게 하니? 그래, 알았어.”

핸드백을 챙겨 들고 장혜란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자형한테 전해 주세요.”

장혜란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거들먹거리는 동생을 내려다봤다.

“앞으로는 비즈니스를 좀 비즈니스답게 하자고. 자기 필요할 때만 이렇게 누님 보내서 가족이 어떻고, 저떻고… 이게 뭡니까, 이게. 명색이 재경 그룹 회장씩이나 되는 양반이 채신머리없게….”

“진짜 네 매형한테 전해 주라고 하는 소리야, 아님 누나 앞이라고 그간 쌓여 있던 싫은 소리 한번 해 보는 거야?”

장혜란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뻔뻔한 표정을 유지하는 동생의 모습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그렇게 전할게.”

“멀리 안 나갑니다.”

회장실 안을 한 바퀴 둘러보며 장혜란이 혼잣말인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멀리 나오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구만.”

“…….”

백화점 쪽 인물 하나가 대신 배웅을 한답시고 엘리베이터 복도까지 장혜란을 안내했다.

장혜란은 핸드백에서 폰을 꺼내 곧바로 손홍준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만나 봤어?

“네, 지금 만나고 나오는 길이에요.”

―뭐라던데?

장혜란은 앞만 보며 엘리베이터 복도까지 자신을 안내 중인 백화점 쪽 인물을 지긋이 쳐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버릇이 많이 없네요.”

―그래, 알았어. 집에 가 있어.

“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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