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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넘지 마라 (123/303)

겉넘지 마라

채서린 측과의 미팅을 성공적으로 끝낸 하늘이.

그녀는 채서린과 그 소속사 대표를 엘리베이터 복도 입구까지 배웅해 준 뒤, 광고기획팀 팀장을 찾아갔다.

“어떻게 됐어요?”

광고기획팀장이 궁금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요? 웃으면서 나가는 거 봤잖아요. 잘됐어요.”

“계약하겠대요?”

하늘이가 애써 무심한 척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이자, 광고기획팀장은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 장난을 걸어왔다.

“이러다 조만간 팀장님이 제 자리까지 넘보시겠어요?”

“넘볼 거면 본부장님 자릴 넘봐야지, 제가 왜 팀장님 자릴 넘봐요?”

“들으실라….”

“헐… 계세요?”

“웃자고 한 소리예요, 웃자고.”

그제야 하늘이도 팀장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한 농담이었다는 걸 눈치채고 뚱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그런 하늘이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며 팀장이 말했다.

“나야 고맙지. 팀장님이 우리 쪽 일까지 직접 다 해결해 주시고, 거기에 건져 온 모델이 채서린이야. 설마 시니어즈 광고 성사금까지 영상팀에서 가져가겠다는 건 아니죠?”

이번엔 하늘가 팀장을 놀리겠다고 장난을 걸었다.

“확 그럴까 보다.”

하지만 수가 뻔한 하늘이의 장난에 넘어갈 팀장이 아니었다.

“그럼 나랑 싸움 나는 거고.”

“그러고 보니까, 우리 안 싸운 지 꽤 오래됐다, 그죠?”

“그럼 이참에 서로 몸 한번 풀어 봐요?”

“좋으실 대로? 그럼 나도 스텝 한번 밟아 봐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동료 팀장 연애사 지원해 주면서 내 밥그릇까지 빼앗기면 그건 호구잖아. 설마 우리팀 사무실에 와서 나 호구 만들 생각이에요?”

“연애사 같은 소리 하고 계신다, 또.”

재빨리 자신이 한 말을 수정하며, 팀장이 한층 더 강한 장난을 걸었다.

“맞네, 이건 연애사가 아니지. 가정사지. 그죠?”

“팀장님!”

“왜? 내가 어디 틀린 말 했어요? 재경 그룹. 그 안에서도 재경모직 관련된 내용은 팀장님 가정사라고 봐야지.”

다른 팀 동료들을 둘러보며 팀장이 자신의 편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디 내 말이 틀렸어?”

자신을 공개적으로 놀리고 있는 팀장과 그 팀장을 지지하고 있는 광고기획팀 직원들의 모습에 하늘이는 입을 꼭 다문 채 코로 뜨거운 숨을 내뿜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인정해야만 했다.

“네, 네. 좋으실 대로 생각들 하세요.”

이번엔 조금 진지해진 모습으로 팀장이 다가와 물었다.

“얼마 부르던가요?”

“3억 5천.”

“채서린이 계 탔네.”

하늘이와 팀장은 광고기획팀 복도를 지나쳐 영상팀 사무실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대화를 이어 갔다.

“기존 채서린 몸값 생각하면 그 정도는 당연히 불러야겠지만, 팀장님이 죽은 드라마도 하나 살려 줬고,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줬는데 너무 크게 부른 거 아니에요?”

“터무니없이 적게 줘서 나중에 후려치기 했단 소문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 갉아먹게 만드는 거 보단 낫죠.”

“설마 그쪽에서 3억 5천 불렀다고 거기에서 바로 오케이 본 거예요?”

어느새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하늘이는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책상 위로 올려놓고 팀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팀장님. ‘근자열 원자래’라는 말 알아요?”

“근자열 원자래? 뭐 고사성어 같은 거예요?”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서도 그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뜻이래요.”

“……?”

하늘이는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팀장의 모습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며칠 전 정훈이가 자신에게 해 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자 다시금 미소가 지어지는 하늘이었다.

“지금 악녀검사에 잡혀 있는 총제작비가 64억이에요. 중간에 터진 스캔들이 없었다면 채서린 기본 회당 개런티를 감안했을 때 못 잡아도 70억은 잡았어야 하는 작품이죠.”

“그건 그렇죠.”

“이유야 어찌 됐든 같이 작품을 하기로 한 이상, 우리 작품 주연 배우 기 정도는 살려 줘야 할 거 아니에요. 배우 기가 살아야 그 작품이 살죠. 그 기 살리는 데 우리 회사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재경모직 쪽에서 대겠다고 하는데 3억 5천이면 어떻고 5억이면 어때요?”

광고기획팀장은 그저 고개를 수차례 끄덕이는 것으로 더는 이 내용을 가지고 하늘이에게 장난을 쳐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우리가 대신 생색을 낼 수 있는 너무 좋은 기회인데,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잖아요.”

“맞아요. 이 바닥 좁죠. 우리 쪽에서 채서린 상대로 그 정도 호의를 베풀고 그 지원 덕에 채서린이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소문만 날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계약이긴 하네요.”

“그러니까. 어차피 채서린 밀어주기로 한 거 확실하게 밀어주고 작품이 안 남더라도 사람이라도 남을 수 있게, 그렇게 한번 만들어 보자고요.”

하늘이는 책상 가장 아래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던 서류 봉투를 팀장에게 건넸다.

“이건 뭔가요?”

“재경모직에서 이번에 새로 론칭한 퍼스펙티브 의뢰 건이에요. 한번 검토해 봐 주세요.”

“퍼스펙티브는 이미 받았잖아요. 프로덕션 쪽과 조율 중에 있어요.”

“아뇨, 이건 PPL 의뢰 건이에요.”

“PPL이요?”

팀장은 PPL 건을 왜 영상기획팀장인 하늘이가 직접 진행을 하지 않고 광고기획팀장인 자신에게 건네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봉투 속에 든 내용물을 꺼내 봤다.

“응? 이건 또 뭐래?”

“JBS에서 이번에 골프 예능 프로그램 편성 잡았잖아요.”

“홀인원?”

“네.”

“이야, 이젠 예능팀까지 시야를 넓히시네?”

“퍼스펙티브 광고 모델로 송유라 선수 쪽이랑 이야기 중이죠?”

팀장은 PPL 관련 서류를 대충 넘겨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을 심산인지, 꽤 까다롭게 구네요.”

“그 프로 1대 진행자로 송유라 선수를 추천해 놨어요. 조건은 해당 프로에 나오는 전 출연진에게 퍼스펙티브를 입히는 걸로.”

“……!”

“JBS 예능국에서도 관심을 크게 보이고 있어요. 자기들도 애매하지. 골프 브랜드라고 해 봤자 70퍼센트, 80퍼센트 이상이 다 일본 브랜드들인데, 공중파도 아닌 종편 채널에서 PPL 없이 무슨 프로그램을 만들겠어요? 그렇다고 대놓고 일본 브랜드들 노출시켜서 시청자들 상대로 위화감을 조성할 수도 없을 것이고.”

“…….”

“닭이 먼저다, 알이 먼저다… 그거 고민할 시간에 우린 그냥 프라이팬에 기름 두르고 불 켜서 프라이를 만들자고요. 그 PPL 건만 성공시키면 송유라 쪽에서 더 이상 우릴 상대로는 노 젓겠다고 못 할 거 아니에요.”

* * *

스너프 사장 손정태는 마치 체한 것처럼 명치가 답답했다.

그룹 본사에서 함께 스너프 쪽으로 옮겨 온 부사장 윤종길 때문이었다.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며, 윤종길 부사장이 가져온 기사 내용.

그 기사 내용을 전달하고 윤종길 부사장이 사장실을 나가기까지, 정태는 불편한 심기를 간신히 들키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가 사라진 이후 부들거리며 떨려오는 자신의 몸을 정태는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부경백화점을 상대로 재경모직이 던진 보이콧 강수.

해당 보이콧은 재경모직에서만 그치지 않고, 부경마트를 상대로 하는 재경식품의 보이콧으로까지 점차적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 기사였다.

정태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2주 전이었나?

재경항공이 부경백화점을 등지고 태영유통 쪽과 손을 잡는다는 기사가 나오자마자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부경유통을 상대로 지나친 도발을 하게 되면, 그 도발의 수위가 여기에서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면 이는 곧 재경 그룹 전체에 손실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진심으로 만류를 했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걱정과 만류는 전혀 통하지 않았고, 마치 지금 이때를 기다려 오셨던 것처럼 태영이 가진 언론을 통해 부경유통, 어쩌면 부경 그룹 전체를 상대로 공격을 강행하고 계신다.

아직은 시기상조.

지금의 재경은 국내 재계 순위 7위, 8위를 왔다 갔다 하는 부경을 상대로 이런 무모한 전면전을 펼칠 이유가 전혀 없다.

“아버지, 저 정태예요.”

정태는 결국 아버지, 손홍준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위해 귀에 붙이고 있는 스마트폰이 덜덜 떨릴 정도로 정태는 애써 자신이 느끼고 있는 답답함과 아버지가 하고 계시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에 화가 극으로 치달아 있었다.

“방금 기사 난 거 이거 혹시 태영 쪽에서 일방적으로 내보낸 기사예요, 아님 아버지도 알고 계신 내용이에요?”

―이 정도 파장을 가져올 기사를 우리 쪽 동의 없이 내보낼 만큼, 태영은 형편없는 파트너가 아니다.

“아버지!”

초조해진 마음에 사장실 안을 빠르게 걸어 다니며, 정태는 자신의 흥분을 삭이기에 급급했다.

“이거 아니라고요. 제가 그날 본가 찾아가서 몇 번이나 아직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네?”

―뭐 하는 거냐고, 지금!

수화기 너머에서 떨어진 불호령.

그 불호령에 정태는 명치 끝에 걸린 숨에 질식을 할 것만 같았다.

―어디 감히 버릇없이 전화질로 이 애비를 가르치려 들어!

“아, 아뇨, 아버지. 제가 설마 그런 의도로….”

―내가 네 의도까지 알아서 파악을 해 줘야 하는 사람이냐.

“…….”

―왜? 그럴 거면 거기 그러고 있지 말고, 네가 여기 와서 회장 자리에 앉든가!

억지로 숨을 뽑아 놓고 정태가 말했다.

“아뇨, 아버지. 제가 그런 뜻으로 드린 말이 아니잖아요.”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새끼. 이젠 내가 하다 하다 내 자식 놈 눈치까지 봐야 하냐!

“아버지….”

―사업체 하나 맡아 나가서 성과 좀 올려 보니까, 너 혼자 잘난 거 같고, 다른 사람들 하는 거, 이 애비 하는 꼴이 성에 안 차고 못 미덥고 그러냐?

“…죄송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지금 올라온 이 기사는 어떻게든 정정기사를 내든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크게 얻을 수 있는 게 없는데, 왜 굳이 작은 외삼촌네와 척을 지려고 그러세요?”

―너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너도 보기와는 다르게 자리를 많이 타는 놈이었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스너프. 그룹 본사 생활은 그만하면 됐으니까, 앞으로 다시 본사로 부르기 전까지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너프 운영에만 매달리라고 내가 몇 번이나 강조했을 텐데?

“…….”

―벌써 네가 거기에서 본사 일에 관여를 다 할 만큼, 이 애비가 내린 결정에 평가질을 할 만큼 네가 말한 궤도 위로 스너프를 올려놓은 거냐?

“…….”

―손정태 사장.

“…네.”

―겉넘지 마라. 이제 고작 사장 자리 앉은 네가 겉넘어도 될 정도로 이 애비, 그렇게 물렁한 사람 아니다. 내 아들만 아니었음 지금 이 전화 한 통으로 재경 안에서 네 자리는 없어진 거다.

정태는 피 맛이 올라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죄송하단 말 한마디로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자체가 네가 내 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더는 말 안 한다.

하지만 정태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혹시 정훈이 생각인 겁니까?”

―뭐?

“일을 이렇게까지 불필요하게 키우는 거. 이것도 스너프 인수 때처럼 정훈이 생각인 거냐고 여쭙는 겁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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