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가 없다고 합니다
남 사장 특유의 신중함과 조 전무의 정치력이 합쳐져, 썩 봐 줄 만한 리더십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물론 내 눈엔 여전히 성에 차지 않았다.
두 놈 다 홍준이 놈이 부경백화점을 상대로 던진 도발, 그 도발이 만들어 내고 있는 파장 앞에서 몸을 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럴 때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어 이빨이 나갈 정도로 상대를 물어뜯을 만큼의 근성을 가진 놈이 많지 않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 재경 그룹의 가장 큰 약점이고 한계였으며, 다른 놈들 눈엔 아직 안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내 눈엔 위기였다.
이럴 때 홍준이 놈에게 정태 같은 자식 놈이 한 명이라도 더 있었다면, 정엽이라도 품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장혜란이가 지분 12퍼센트나 틀어쥐고 있는 부경백화점 하나 구워삶는 데 이렇게까지 준비 운동이 많이 필요하다는 건, 나 손중길이 입장에선 퍽이나 피곤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부경백화점을 압박할 무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닌 지금 이 상황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난 손중길이 아니고, 부경도 그 시절의 부경이 아니기에….
“KS 인터내셔널에서 해외 지사 근무 경력이 4년이나 있으시네요?”
때를 기다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남 사장의 신중함과 조 전무의 정치력이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그 친구들에게 부족한 과감함을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업계 전문가들 스카우트 면접.
업계 평균 연봉 테이블에서 10퍼센트 수준의 연봉 인상을 약속하고 한 직급씩 승진을 시켜 데리고 온 HRO 직원들.
그들의 추천을 받아 브랜드 영업 쪽으로 해외 지사 근무가 가능한 인재들, 유통판 매장 직원 관리와 재고 처리 능력에 뛰어난 인재들을 끊임없이 만나며 내 손으로 직접 외부 인력을 충원해 나갔다.
“네, 작년까지 밀라노에서 4년간 근무를 했었습니다.”
“한국으로 다시 들어오신 이유는요?”
“해외 지사 생활이라는 게, 주재원 메리트도 분명 있긴 하지만 너무 길어져 버리면 본사와의 인맥이 약해진다는 단점도 있거든요.”
맞는 말이지.
“적당히 하고 들어와야죠. 그래야 한국 들어와서도 자리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죠.”
“4년이면 사실상 지사 생활을 할 수 있는 만큼 다 하고 돌아온 거라고 보셔야 합니다. 재경모직의 지사 근무 시스템에 대해선 조금 더 공부가 필요한 게 사실인데, KS 인터내셔널에서는 추가 연장이 두 번 이상은 힘듭니다.”
“그 추가 연장이라는 건 한 번 할 때마다 1년씩 늘어나는 겁니까?”
“네. 저는 운이 좋았던 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요?”
“원래라면 3년 차에 한국으로 들어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시겠지만, 2년 전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코로나 비상이 걸렸지 않습니까.”
그랬다는 내용은 그간 지난 신문 기사들로 충분히 공부를 해서 알고 있는 내용.
“본사에서도 가급적 지사 직원들을 한국으로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러는 와중에도 지사를 지켜야 할 최소한의 직원들은 남겨 놓아야 하는 상황이었죠.”
“네.”
“가족이 있는 직원들부터 한국으로 복귀를 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처럼 대리, 과장급 중 미혼인 직원들 위주로 지사에 남아서 연장 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왔고요. 저 역시 원래부터 할 수만 있다면 1년 정도 더 연장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본사에서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먼저 제안을 해 주셔서 그러겠다고 했죠.”
“그럼 과장 승진은 거기에서 하고 들어오신 거겠네요?”
“네.”
이 정도까지 이야기를 주고받은 상대는 대체로 내 선에서 합격을 시켰다.
“알고 오셨겠지만, 저희는 해외 지사가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 있습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가깝다고 하면 가깝고, 또 거리가 있다고 하면 거리가 있는 건데 프랑스 생활에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기회만 주어진다고 하면 해 보고 싶습니다. 새로 옮긴 지사가 방돔 지사라고 들었습니다.”
“네.”
“파리 쪽은 저 역시 지사 생활을 하면서 출장차 자주 다녔던 곳입니다. 제가 컨트롤을 했던 브랜드 중 절반 이상이 프랑스 브랜드였거든요.”
“네.”
“주요 근무지만 바뀐다뿐이지, 제게는 활동 범위가 비슷한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오히려 밀라노 생활을 4년 정도 해 봤기 때문에, 이번에 재경모직 쪽에서 브랜드 라이선스를 확보한 이탈리아 브랜드들 관리 쪽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해질 거라는 확신도 있습니다.”
이만하면 됐지, 뭐.
“첫 3개월은 현재 KS 인터내셔널에서 받고 계신 과장 직급으로 본사 근무를 해 주시고요, 그 기간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고, 함께할 만한 기업이라는 확신이 들면 정식 계약을 통해 지사 근무 쪽으로 업무 방향을 잡아 보는 것으로 했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 많이도 뽑았다.
거진 2주 사이에 30명이 넘는 경력직 인재들을 스카우트해 냈으니, 주말 빼고 평균적으로 하루 서너 명씩은 직접 면접을 보고, 그들 대부분을 뽑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 나의 형식적인 면접, 대책 없는 채용에 김원호 부장의 우려 섞인 질문이 들어왔다.
“해외 지사 업무 범위도 많이 넓어졌고, 새로 받기 시작한 브랜드들도 갑자기 확 늘어서 앞으로 직원들이 많이 필요해질 거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거 너무 많이 받으시는 거 아닙니까?”
해당 걱정은 김원호 부장뿐 아니라, 박종근 차장, 새로 들어올 경력직들을 교육해야 할 책임이 있는 HRD의 민은석 과장도 함께 하고 있는 걱정이었다.
“소나기가 한 번 크게 오고 나면 바닥에 있던 돌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또 소나기 소리예요?”
“제 눈에는 곧 이 업계에 큰 소나기가 내리겠다는 게 보이는데, 부장님 눈엔 안 보이세요?”
“소나기요?”
부경백화점 쪽에서 브랜드들이 본격적으로 빠지기 시작하면 태영백화점 쪽으로 매장 직원들 뿐 아니라 매장 관리, 재고 관리를 해야 하는 직원들의 손길이 분주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크고 작은 실수와 사고 모두 리스크 범위 안에 넣어 놓아야만 하는 상황.
그 리스크를 커버할 수 있는 인원을 충분히 확보해 놓지 못하면, 부경백화점 쪽으로 비웃음을 당할 수가 있다.
반대로 그 큰 브랜드 이동을 하면서도 아무 문제점들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는다면, 그만큼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가진 역량과 배짱은 큰 소나기가 내리기 전까지는 절대 상대에게 보여 줄 수가 없는 법.
그리고 상대가 가진 불안과 약점 역시 그 소나기가 끝나기 전엔 우리 쪽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우린 우리가 가진 불안과 약점은 최대한 숨기고 역량과 배짱만 드러낸 뒤, 시장 전체를 상대로 부경백화점의 불안과 약점을 노출시켜야만 했다.
그게 내가 지난 2주간 서른 명이 넘는 외부 인재를 흡수해 나가며 남 사장과 조 전무를 상대로 부담과 압박, 과감성을 함께 던져 준 이유였다.
* * *
쾅!
부경 유통 본사 회장실.
사무실 주인이 있는 힘껏 손바닥으로 탁상을 내리쳤다.
그 앞으로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정책본부장은 회장의 노기 앞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지금 이걸 자랑이라고 가지고 와서 나한테 보여 주는 거야?”
본격적으로 브랜드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빠진 브랜드들과 여전히 남아 있는 브랜드들.
그 속에서 이미 빠진 브랜드들이야 어쩔 수 없는 내용이지만 남아 있는 브랜드 매장에서라도 데일리 매출을 방어해 내라고 지시를 내렸건만, 브랜드들이 빠지는 속도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매출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부경 유통의 장 회장이 정책본부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지금 자네들한테 달나라 갈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들어 오라고 했나?”
“…….”
“어디 가서 존재하지도 않는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했느냐고! 한 달. 딱 한 달. 매출을 올리라는 것도 아니었고 매출 방어에만 신경 쓰고 있으면 재경 쪽에서 먼저 숙이고 들어올 거라고 그렇게 말을 했잖아. 근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주문이었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놈의 팔아먹지도 못할 죄송하단 소린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올라올 때마다 입에 달고 들어와!”
“…….”
장 회장도 알고 있었다.
재경 그룹 쪽에서 작정을 하고 칼을 갈고 있는 중이라는 걸.
그래서 더 양보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브레이크 없이 달려들 거라는 것쯤은 이 사달이 나기 전부터도 냄새를 맡고 있었고, 그래서 유통 그룹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비와 방어책을 마련해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대비와 방어책이 속수무책으로 뚫리고 있다.
한 달.
딱 한 달만 버텨 내라고 회장이 직접 지방 지점의 점장들까지 본사로 불러들여 오찬 회의를 하며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한 달은커녕, 브랜드가 빠지는 매장마다 차례대로 매출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이젠 브랜드가 빠지기도 전에 기존 매장에서 올라오던 매출의 10퍼센트, 20퍼센트 수준의 매출만 찍혀서 올라오고 있다.
“앉아.”
결국 정책본부장을 자리에 앉게 만든 뒤 장 회장은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혔다.
“후… 도대체 뭐가 문젠데? 왜 아직 유지가 되고 있는 매장에서까지 매출이 이렇게 80퍼센트, 90퍼센트까지 쭉쭉 빠지기 시작하냐고.”
“…….”
“아,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까 입을 좀 열어.”
“저, 그게… 매장을 방문하는 유입 고객 수에는 큰 변화가 없는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빨리 좀 대답을 해!”
“네. 매장에 재고가 없다고 합니다.”
“뭐가 없어?”
“고객이 방문을 해도 팔 수 있는 재고가 매장에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장 회장은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재경모직 쪽에서 KS 인터내셔널, 한일 어패럴 및 지난 석 달간 빠르게 확보해 낸 전 브랜드 총판 업체들을 상대로 재고를 모조리 떠안았다고 합니다.”
순간 장 회장은 생각이라는 걸 해야 할 자신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그게 말이 돼? 아니, 말이 된다고 치자. 재경모직에선 죽자고 덤빌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뭔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치자고. 그런데 총판 업체들은 앞으로 우리랑 같이 일 안 하겠대? 우리 쪽 유통판은 앞으로 안 쓸 생각들이냐고.”
“라이선스 총판 업체들 쪽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소리뿐입니다. 자기들이 브랜드 계약 연장을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게 아니라 거의 통보 형식으로 연장을 못 한 입장들이라 브랜드 쪽으로 의리를 지킬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인 거죠.”
“…….”
“그러던 차에 재경모직 쪽에서 재고를 모두 떠안아 주겠다고 다가왔으니, 꼭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거겠죠.”
“그럼 지금 매장에는 있어야 할 상품들 대신 직원들만 상주를 하고 있단 소리야?”
“물건이 아예 다 빠진 건 아니고….”
“내가 그걸 몰라 물어!”
“네, 기본 구성 정도만 갖춘 채, 우리 쪽과의 계약이라는 게 있다 보니 매장을 오픈만 시켜 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했다.
그것도 너무 어이없이, 예상조차 못 한 방향에서 허를 찌르고 들어왔다.
“그럼 지금 백화점 유입 고객들은 해당 매장에 들어가서 뭘 사고 싶어도 못 사고 그냥 나와야 하는 그런 상황이란 말이야?”
“오늘 올라온 데일리 리포트에 그런 매장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장 회장은 엄지손톱을 딱, 딱 소리가 날 정도로 불안하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재경모직이 흡수한 브랜드가 그래서 총 몇 개야?”
“속옷 브랜드까지 다 포함해서 18개입니다.”
매장 한두 곳도 아니고, 18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재고 부족 현상이 일어나 고객들의 구매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건 매출과는 별개로 백화점 브랜드 이미지에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백화점 브랜드 이미지 타격은 언제나 태영백화점의 이미지와 비교가 되어 오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출로는 가릴 수 없는 뼈아픈 타격.
“KS 인터내셔널하고….”
장 회장의 음성이 건조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아니지, 이제 와 그쪽으로 부담을 준다고 달라질 게 없지.”
“…….”
급하게 폰을 꺼낸 장 회장.
어디로 전화를 걸어야 하는 것일까.
자형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가족들끼리 이게 뭐 하는 거냐며 먼저 숙이고 들어가 상황을 부드럽게 풀어 가 보자고 제안을 하는 게 좋을까?
아니다.
그건 너무 비굴하다.
숙이고 들어가는 거야, 사업을 위해서라면 누굴 상대로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작은 수고일 뿐이지만 그 상대가 자형인 손홍준 회장이어야 한다면 계산을 달리해 볼 수도 있는 노릇이다.
스마트폰 위에서 장 회장의 손가락은 빠르게 둘째 누나인 장혜란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일단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 봐.”
“네, 회장님.”
정책본부장이 회장실을 나가기도 전에 장 회장은 통화 버튼을 눌러 놓고 귀에 폰을 붙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