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를 좀 해 볼까 해서요
장선동이.
내가 재경을 이끌던 시절 두어 번 정도 사돈 양반과 함께 홍명이를 데리고 밖에서 따로 자리를 가졌던 기억이 있다.
셈이 빠르고 처세에 능한 친구였다.
그런데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이 친구도 세월을 비껴가진 못했네.
얼굴에 쪼잔한 욕심 주름이 그렁그렁한 게, 요즘 젊은 친구들 표현대로 하자면 세월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젊었을 때 얼굴은 훤칠했던 기억이 있는데, 아마도 사돈 양반 돌아가시고 유산 상속을 받는 과정에서 뭔가가 자기 뜻대로 잘 안 됐던 모양이지.
화학에 통신까지 함께 잡았음 얼마나 좋았겠나.
그걸 바로 밑에 동생과 나눠야 했으니 속이 쓰렸을 만도 하다.
집안 궂은일은 혼자 다 맡았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내가 저 친구라도 아깝고 분해서 곱게는 못 늙었을 거다.
그러고 보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돌아가신 사돈 양반도 참 고약한 구석이 있다.
뭐 얼마나 자식들 모두 고루 만족시켜 주겠다고 이거 떼서 이놈 주고, 저거 떼서 저놈 주고… 그렇게 복잡하게 부경 그룹을 찢어 나눠 준 뒤 눈을 감으셨단 말인가.
그 덕에 지금 내가 부경을 압박할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거겠지만….
“외삼촌.”
“어, 그래. 들어와, 들어와.”
그리 가까운 관계는 아닐 것이다.
어느덧 정훈이로 1년 가까이 살고 있다.
부경가 둘째 집안 자식 결혼식 날 잠깐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이렇게 밝은 곳에서 말을 섞어 본 건 오늘이 처음.
그 결혼식 날 이후로 처음 보는 거니까, 특별히 집안 대소사가 있지 않은 다음에는 얼굴 볼 일이 크게 없는 관계였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우선 입구에서 적당한 깊이의 인사를 해 놓고 장혜란이 앉아 있는 소파 옆자리까지 반듯하게 걸어갔다.
“우리 정훈이가 언제 이렇게 의젓해졌어? 혼사 이야기 오가는 중이라고 하더니, 그래서 이렇게 부쩍 의젓해진 건가?”
장혜란이 이건 혼자 먼저 들어가서 분위기를 만들어 놓을 생각인가 했더니, 도대체 20분 넘게 이 안에서 뭘 했던 걸까?
어떻게 된 게 분위기를 내가 새로 만들어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장선동이가 인사차 던지는 우스갯소리에 가볍게 웃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 놓고 숨을 골랐다.
“그래, 네 엄마하고 이야기를 잠시 좀 나눠 봤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장혜란이 이 친구 이거.
답이 없는 사람일세.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나눴길래 돈을 만들러 온 사람을 돈을 꾸러 온 사람 취급을 받게 만드나?
아직도 재경과 부경 사이에 걸쳐서 방향을 못 잡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건가?
“돈이 필요한 건 맞는데, 빌리러 온 건 아니고요. 외삼촌만 여유가 된다고 하시면 거래를 좀 해 볼까 해서요.”
내 말에 장선동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부리는 재롱을 받아 주듯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냈다.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거래?”
“엄밀히 말하면 아직은 제가 직접 할 수 있는 거래는 아니고요, 어머니를 대신해서 제가 하는 거다… 하는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네 개인 장사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이 정도까지 분위기를 잡아 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면 최소한 응하는 성의 정도는 보여 줘야 할 텐데, 여전히 날 어린애 취급하고 있네?
이건 단순히 나만 어린애 취급하는 게 아니라, 재경이라는 이름 자체에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뜻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 같은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기분이 영 별로네.
난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장혜란을 한 번 쳐다봤다.
장혜란 역시 내 표정이 눈에 들어왔던지 장선동이의 태도에 불편한 내색을 하고 있었다.
동생의 표정 변화를 읽어서일까, 장선동이의 모습에서도 진지함이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래, 무슨 거래를 어떻게 하자는 건지 이야기나 한번 들어 보자.”
“저희 집에서 백화점 사업을 다시 가져올 계획을 하고 있는 중인 건… 혹시 알고 계세요?”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밖에서 기다리는데, 안에서 이야기가 길어지는 거 같더라고요. 같이 해도 될 이야기인데, 어머니가 먼저 하셨나 싶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장씨 집안 남매의 표정에서 더 이상은 웃음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 음… 정훈아.”
“네.”
장선동이 말했다.
“백화점이라는 게 말이다. 집 하나 사고파는 거랑은 그 개념이 많이 다르다. 더군다나 부경백화점은 네 막내 외삼촌이 회장으로 있는 부경유통의 지주사야. 그걸 내 앞에서 마치 동네 작은 건물 하나 사는 거처럼 가볍게 이야기를 해 버리면 내가 많이 당황스럽지 않겠니?”
“아….”
난 잠시 말을 끊어 놓고 장혜란을 다시 한번 쳐다본 뒤, 그 시선을 무겁게 장선동이 쪽으로 돌려 말했다.
“아직 오해를 하고 계시는 거 같습니다, 외삼촌.”
“무슨 오해?”
“부탁이 아니라 거래를 하러 온 거라고 조금 전에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부탁이 됐든, 거래가 됐든 중간에 가족이 끼어 있는데 그런 내용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해서야 쓰나.”
이쯤 되면 내가 아니라 재경 자체를 우습게 보고 있다는 걸로 이해를 해야 하겠네.
하긴, 고작 백화점을 지주사로 들고 있는 부경유통 쪽에서도 홍준이 놈을 그렇게 물티로 보고 있는데, 화학의 장선동이야 오죽할까.
“거래라는 건 합리적인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억지로 가족이라는 감정적 관계를 쑤셔 넣으시면 저희 재경은 다른 거래 상대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게 말한 다음 장혜란에게 여긴 괜찮은 거래 상대가 아니라는 뜻을 담아 인중에 바람을 넣은 채 고개를 짧게 저었다.
“꼭 네가 재경을 대표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저는 그렇게 나왔습니다. 저희 쪽 회장님도 지금 제가 어머니와 함께 여기에 와 있는 걸 알고 계시고, 비록 여기보다 더 중요한 자리가 있으셔서 함께 오시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이야기를 잘 끝내고 오라는 당부까지 하셨습니다.”
“여기보다 더 중요한 자리?”
“아마도 지금쯤 부경유통 회장님과 자리를 하고 계시겠네요. 저희 쪽에서 부경유통이 가지고 있는 백화점을 다시 가져와야겠단 말씀을 하고 계신 중일 겁니다.”
장선동은 실눈으로 장혜란을 쳐다봤고, 장혜란은 그저 한쪽 입꼬리만 크게 노골적이지 않게 말아 올리며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다시 떴다.
“거래라는 건 뭔가 가치가 비슷한 걸 주고받아야 하는 건데, 재경이 돈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난 재경이 가진 것들 중에 돈을 주고 가져올 만한 게 없어.”
“아뇨. 저희 재경에서도 외삼촌께 팔 만한 물건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거래야?”
“재경에는 없지만, 제 어머니에겐 있는 거.”
“……?”
“제 어머니보단 외삼촌이 더 많이 가지고 계시지만, 전부를 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제 어머니가 가지고 계신 게 항상 불안하고 신경이 쓰이시는 거.”
자세를 살짝 고쳐 잡고 앉아 말을 끝맺었다.
“부경화재의 지분 12퍼센트를 팔아 볼까 합니다.”
“……!”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은 느낌상 내가 입을 열지 않는 다음에야 쉽사리 깨어질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나와 장선동이의 입장이 바뀔 차례이니까.
“뭐를 팔겠다고?”
“제 어머니가 들고 계신 부경화재의 지분 12퍼센트를 준비해 왔습니다.”
장선동이가 가지고 있는 계열사 중 물산과 더불어 화재가 원래는 우리 재경의 것이었다.
시가 총액 11조 400억.
부경백화점 하나 다시 가져오는 데 물산 지분 12퍼센트까지 꺼낼 필요는 없고, 장선동이가 이걸 잡겠다고만 하면 내어 줄 생각이다.
어차피 부경 쪽으로 넘어간 원래 우리 재경의 계열사들을 한꺼번에 모두 다 가져올 순 없는 일.
하나하나, 차례대로, 먹기 쉬운 순서대로 가져오면 그만이다.
“푸훕.”
장선동이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혜란아.”
장혜란은 고개만 살짝 돌려 장선동을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설마 이거 지금 손 서방 계산이야? 손 서방 계산이라고 하기엔 색깔이 너무 다른데?”
“아까 뭐 들었어요? 내 말했잖수. 내가 데리고 온 게 아니라, 정훈이 얘가 날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든 거라니까?”
“손 서방이 아니라 정훈이 계산이다? 그래, 그래야 말이 되지. 설마하니 손 서방이 이렇게 대책 없는 계산을 뽑아낼 리가 있나.”
놀고들 자빠졌다.
계산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야, 정훈아.”
“네.”
“삼촌이 기특해서 해 주는 말이야. 삼촌 순간 뭘 들었나 했다. 하, 하하. 아, 이걸 어떻게 이야기를 해 줘야 되지? 난감하네.”
최소한 자네 아버지 되시는 분은 가진 능력에 비해 욕심이 과하긴 하셨어도 그 욕심 앞에 솔직은 하셨던 분이었네.
지금 자네처럼 흥정을 위해 쓸데없이 혓바닥을 길게 놀리는 분은 아니셨어.
“보통 지금 너처럼 지분을 가지고 뭔가 거래를 하려면 상대에게 그 지분이 왜 필요한지, 꼭 필요한 건지, 필요한 이유가 뭔지 정도는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어야 돼.”
“그렇게 둘러 가실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요?”
“뭐?”
“그냥 편하게 이야기해 주셔도 됩니다. 큰외삼촌이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 어머니가 들고 있는 건설 지분을 들고 둘째 외삼촌을 만나보면 됩니다.”
“……!”
“어차피 어머니가 들고 계신 부경 계열사들 지분 중 하나만 내놓을 거거든요. 저희가 화재나 물산, 건설처럼 구찌가 큰 걸 다시 가져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백화점 하나 다시 가져오겠다는 건데 여러 개 내놓을 필요는 없잖아요. 지금 당장 백화점 가져오는 데 필요한 자금 정도만 준비하겠다는 건데.”
“…….”
“외삼촌.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현재 저희 회장님께서 부경유통 회장님과 같은 건으로 자리를 하고 계십니다. 저희 쪽에선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관심이 없다고 하시면, 저랑 어머니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둘째 외삼촌이라도 만나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선동이 물었다.
“네 둘째 외삼촌도 관심이 없다고 하면?”
“부경물산, 부경화재, 부경건설… 부경의 화학과 통신에는 못 미치지만 확보하고 싶어 하는 세력은 얼마든지 나올 겁니다. 제가 어머니께 부탁을 드려서 외삼촌을 가장 먼저 찾아온 이유는 앞으로는 형식적인 가족의 관계가 아닌 사업적 파트너의 관계로 외삼촌과 우리 재경이 발전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업적 파트너의 관계?”
“지금은 그보다도 못한 관계인 게 사실 아닙니까. 어쩌면 한 다리가 멀다고, 저희 재경 입장에선 친가도 아닌 외가 쪽 삼촌과 가족보다는 사업적 파트너 관계가 훨씬 더 효율적일 수도 있는 거고요.”
겁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 여기에서 내가 내민 손을 잡지 않는다면 부경통신 쪽 사돈 총각을 만나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현금 흐름은 그쪽이 훨씬 더 원활할 테니.
“12퍼센트를 다 내놓겠다는 거야?”
“찔끔 내놓고 나머지 어설프게 들고 있느니, 차라리 미련 없이 다 내놓는 게 관계 발전에 훨씬 더 도움이 되겠죠.”
침을 삼키는 장선동이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사실 이 지분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굳이 상대 찾아가서 살래, 말래 할 이유가 없는 거잖아요. 그냥 던지면 되는 건데.”
“그런데 왜 찾아왔어?”
“상속세. 어차피 민석이 형이랑 자영이 누나한테 때 되면 다 물려주셔야 되잖아요. 화재를 누구한테 물려주실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통해서 12퍼센트 지분을 민석이 형이나 자영이 누나 이름으로 받으시면 그만큼의 상속세 폭탄은 피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뭐 그리고 그런 복잡한 계산 다 떠나서라도 삼촌 계열사 지분인데 현금이 허락만 한다면 확보를 해 놓고 싶어 하실 것도 같았고요.”
검지로 인중 주위를 긁적이다가 장선동이 장혜란에게 말했다.
“정태가 똑똑하고 다부진 건 이번에 스너프 성공시키기 전부터도 재계 안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유명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장선동은 마치 노크를 하듯 주먹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정훈이까지 이렇게 단단할 줄은 몰랐네. 손 서방이 참 든든하겠어.”
“민석이만 할까 봐요.”
“아냐. 기분 좋으라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부럽네.”
날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어느 정도 진심이 느껴져서, 어디 감히 날 평가하느냔 생각을 지워 내고 나이에 맞을 만한 겸손을 만들어 보여 줬다.
“손 서방은 선열이 만나러 언제 갔어? 서로 불편한 대화 나누고 식사까지 함께하지는 않을 거 아냐.”
장혜란이 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대답했다.
“거기도 이야기가 길어질 건 없을 거예요. 얼추 지금쯤 이야기 다 끝났겠네.”
“내가 상황 봐서 같이 점심이나 했음 한다고 문자 한 통 보내 놔 봐.”
그래서 내가 말했다.
“아마 오늘은 시간이 된다고 해도 사양을 하실 겁니다.”
장혜란까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왜?”
난 장선동의 물음에 홍준이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는 뉘앙스를 심어 대답했다.
“저한테 이야기 잘 나누고 오라고 하셨거든요.”
“응?”
“제 생각엔 아마도 지금 이 자리는 회장님이 절 상대로 하고 계시는 첫 테스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테스트?”
“네. 큰외삼촌 상대로 화재 지분을 제값 받고 팔아 올 수 있을지, 없을지 상당히 궁금해하고 계실 겁니다.”
이번엔 아예 대놓고 기가 빨린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장선동이었다.
“선열이는 그 뭐 한다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사람 중간에 끼어서 난처하게 만들었다니?”
“걔가 종종 그래요. 한두 번이 아니었어.”
“하… 참, 입장 난처하네.”
난처할 게 뭐 있나.
사업하는 사람이 제 발로 굴러들어 온 복 앞에서 그렇게 체면을 차리는 것도 격 떨어져 보인다는 걸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걸까?
“그럼 우리끼리라도 점심하러 나가지?”
“식사를 하러 나가더라도 하던 이야기는 마무리를 짓고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무리 짓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어? 기간만 말해. 준비해 놓을 테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친구가 지금.
“외삼촌.”
“왜?”
“저희가 지금 꼭 돈이 필요해서 화재 지분 내놓고 여길 찾아온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죠?”
“…….”
“필요한 만큼의 돈이야 공용 지분 던져서 만들어도 충분한 것이고, 꼭 화재 지분을 안 내놓더라도 미래금융 통해서 얼마든지 준비를 할 수가 있습니다. 다 알고 계시면서 떠보겠다고 이러시는 거면, 제가 좀 불편한데요?”
그렇게 난 소파에서 엉덩이를 반쯤 뗀 장선동이를 다시 흥정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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