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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 괜히 하자고 했네 (127/303)

미팅 괜히 하자고 했네

“오빠.”

이 자리에서는 처음으로 장혜란이가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키고 있는 거였다.

실망스러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며 장혜란이 말했다.

“내 미리 말했잖수, 정훈이 애 취급하지 말라고.”

손윗사람의 입장에서 겪어 봤던 장선동이는 무척 처세가 바른 친구였는데, 손윗사람으로서의 장선동이는 꽤나 피곤하고 능글맞은 구석이 많은 사람이네.

“누가 애 취급을 했다고 그래? 이 방에 지금 애가 어디에 있다고….”

나는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그제야 심술 난 아이 손에 사탕 하나 쥐여 주며 선심이라도 쓴다는 식으로 장선동이가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정훈이가 이제 봤더니 손 서방 기질을 많이 물려받았네. 든든하긴 하겠다만, 앞으로 손 서방이 생각이 많아지겠어.”

이거 지금 칭찬이야, 욕이야?

협탁 위로 올려져 있던 내선 전화.

장선동은 그 내선 전화기의 호출 버튼을 눌러 놓고 그쪽으로 상체를 틀었다.

“고모 왔다고, 부사장 잠시 내 방으로 올라오라고 해.”

이 자리에 장민석이를 부르겠다?

구색 정도는 갖춰 놓고 본격적인 흥정을 해 보자 이건가?

아님 우리 쪽에서도 홍준이가 직접 나온 게 아니기에 막내 조카를 자기가 직접 상대하는 그림은 최대한 피해 보겠단 심산인가?

“기회가 좋잖아. 한두 푼짜리 거래도 아니고, 어쩌면 앞으로 그간 소원했던 관계를 이놈들이 함께 회복해 나갈지도 모르는 판인데, 대세에 큰 지장이 없다면 시작부터 같이하는 게 좋지. 안 그래?”

마치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5분도 지나지 않아 장민석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부경가의 장손.

그래도 회사 안이다 이건가?

결혼식 날 그 촐싹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른들 앞이라 그런지 꽤나 의젓한 모습을 유지하며 나와 장혜란이 앉은 맞은편 소파 자리에 앉았다.

“자, 내가 짧게 요악을 해 줄게.”

장선동이가 이 자리의 성격을 아들에게 간략히 전달했다.

“네 고모가 부경백화점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그걸 앞으로는 재경 쪽에서 직접 한번 해 보고 싶다…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데, 화재 지분 12퍼센트를 받을지를 물어보네. 네 생각은 어떠냐?”

장민석은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깍지 낀 두 손을 탁상 아래로 숨기며 나와 장혜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화재 지분 이야기는 상당히 의외인데, 현재 재경모직이 진행 중인 보이콧을 보고 어쩌면 고모부가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저도 조심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뜨리며 장선동이 장민석에게 다시 물었다.

“그게 끝이야?”

“네.”

“화재 지분 12퍼센트를 받는 게 좋을지를 물어본 거였다.”

“조건을 알아야 고민을 해 보죠. 미래금융이 바로 곁에 있는데, 돈줄이 필요해서 화재 지분 12퍼센트를 던지겠다는 건 아닐 테고, 돈줄이 필요한 거라도 한 종목 전량 매도보단 고모가 가지고 계신 부경 계열사 지분들을 몇 퍼센트씩 분할 매도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인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장선동이는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봤다.

“부경화학이 들고 있는 부경유통 지분 2.9퍼센트. 그리고 큰외삼촌이 잡고 계신 부경유통 이사회 인맥. 저희 쪽 화재 지분 12퍼센트를 팔면서 동시에 그 두 가지를 사 가고 싶습니다.”

이번엔 장혜란이가 싱긋이 웃으며 장민석이를 쳐다봤다.

“조건이 좀… 많이 기우는 거 같은데?”

장민석이의 일보 전진으로 본격적인 흥정이 시작됐다.

“지금 우리 회장님더러 재경이 백화점 사업을 가져가는 데 가장 앞에 서서 대신 칼춤을 춰 달란 소리 아냐?”

“그 칼춤 한 번의 수고로 부경화학은 재경 그룹과 미래금융이라는, 부경유통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파트너를 만드는 건데 그 정도면 꽤 괜찮은 조건 아닌가?”

“관계는 돈이 안 돼.”

“그 돈 안 되는 관계로 만들어지는 게 돈이야.”

그 말에 장민석은 차마 고모 앞이라 솔직한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다 전달하기가 민망하다는 듯, 마치 일부러 한발 뒤로 물러나 주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내가 바로 따라가 뒷걸음질하려는 녀석의 입장을 잡아 세웠다.

“왜? 우리 재경이 부경화학 입장에서 그 정도 레벨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어른들 앞에서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나는 지금.”

“…….”

“그래야 나중에 다른 파트너를 찾더라도 이 자리에 대한 미련이 안 남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장민석이 물었다.

“다른 파트너?”

“4.2퍼센트. 부경통신이 가지고 있는 부경유통 지분. 만약 지금 이 거래가 불발로 끝나면 어쩔 수 없이 난 어머니 모시고 둘째 외삼촌을 만나 볼 수밖에 없어.”

“…….”

“물론 백화점 지분 12퍼센트가 전부인 우리 입장에서 지분 1퍼센트, 2퍼센트 더 확보하는 게 크게 중요하지는 않아. 오히려 큰외삼촌이 잡고 계신 부경유통의 인맥이 더 귀하게 쓰이겠지.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우린 부탁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구걸을 하러 온 건 더더욱 아닌데.”

장민석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곁눈질로 자신의 아버지 눈치를 살폈다.

반면에 장혜란은 태연했다.

“내 말은 가족들끼리 사업 이야기하면서 ‘레벨’이라는 표현을 입에 담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었어.”

장혜란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살짝 곁눈질로 살폈더니 광대가 꽤나 높게 올라가 있었다.

“외삼촌.”

“어, 그래.”

“가족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우리끼린 원수처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사람들처럼 헐뜯고 싸우더라도, 밖에서 누가 내 가족 흉을 본다거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다니면 대신 싸워 줄 수 있는. 그런 게 가족 아닙니까?”

“그렇지.”

“그리고 가족들끼리도 계산은 확실하게 해야 하는 거죠?”

“…….”

“부경의 물산, 화재, 건설, 백화점, 호텔. 좀 불편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원래는 저희 재경 거였죠.”

“그건….”

장민석이 재빨리 말을 끊으려 했지만, 오히려 장선동이 그런 장민석을 막아 세우며 내게 계속 이야기를 해 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 덕에 제 어머니는 재경 사람도 아니고, 부경 사람도 아닌 상태로 30년 가까이 사셨어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분명 외로운 삶이었을 겁니다. 결국은 그 계열사 지분들이 제 어머니를 외롭게 만든 거겠죠. 삼촌들, 고모… 다들 어머니가 들고 있는 계열사 지분 때문에 각자 계열사 들고 분사해서 나가 기업 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찝찝하셨을 테니까요.”

“흠….”

“외삼촌이 가장 어른이시니까 정리해 주시죠, 이 찝찝한 관계. 윗대에서 이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해 주지 않으면, 이게 저희 대엔 얼마나 더 말 같지도 않게 이어져 내려오겠어요?”

장선동의 얼굴에선 더 이상 능글맞은 느끼한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백화점만 가지고 갈 거지?”

큰오빠가 던진 질문 앞에 장혜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워도 어쩌겠수? 우리한테나 집안 막내지, 제집에선 시집, 장가보내야 할 자식이 둘이나 있는 가장인데 속옷까지 탈탈 벗길 순 없는 노릇이잖아. 마트, 홈쇼핑 정도는 남겨 줘야 하지 않겠수? 따지고 보면 그 두 개는 선열이가 직접 키운 거기도 하고.”

“면세점, 아웃렛 다 가져갈 거냐?”

“그렇게까지 한 세트인데 어쩌우?”

“흠….”

“에이, 애들 있는 앞에서 그렇게 한숨을 쉬어 버리면 우리 그이가 너무 모진 사람 되는 거잖아요. 입장을 바꿔 놓고 오빠가 우리 그이였다고 생각을 해 봐요. 오빠는 속옷이 아니라 가죽까지 다 벗겨서 쫓아내 버렸을 거요. 어디 내 말이 틀려요?”

“내 입장이 손 서방이 될 수가 없는데, 어떻게 손 서방 입장에서 생각이 되겠나. 정훈이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만 어쨌거나 팔은 안으로 굽는 건데.”

그 말이 왜 이렇게 웃겼던 걸까?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을 들켜 버렸다.

“아, 죄송합니다.”

장민석이의 이마 위로 가는 힘줄이 꿈틀거렸다.

“아니, 제 어머니도 엄연히 동생인데, 왜 외삼촌 팔은 그쪽으로만 굽어야 하는 걸까 싶어서요.”

네놈들이 찢어서 가져간 내 재경의 계열사들 따윈 이제 크게 관심이 없다.

당연히 다 다시 가져오긴 하겠지만, 그 전에 난 네놈들 장가 형제들을 서로 헐뜯고 찢어지게 만들어 놔야겠다.

네놈들이 홍명이, 홍준이를 상대로 그렇게 했던 것처럼

한참을 빤히 나와 제 아들을 번갈아 쳐다보던 장선동이.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 웃음을 적절히 갈무리해 놓고 장혜란에게 말해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하자. 근데 언제 다 같이 식사를 한번 하긴 해야 할 텐데… 손 서방한테 말해서 이번 건 잘 마무리해 놓고 애들이랑 다 같이 집에 한 번 와.”

“이야기는 한번 해 볼게요.”

“무슨 그런 대답이 있어? 정훈이 식 올리기 전에 조카며느리 소개도 안 시켜 주고 장가보낼 거야? 정태 식구들하고 다 같이 해서 날 한번 잡아 보자.”

“그럽시다, 그럼.”

* * *

재경모직 본사 안팎으로 전에 없던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종학 씨.”

“네, 대리님.”

“잠시 이리 좀 와 봐요.”

재경모직 본사 해외영업팀.

“이거 지금 뭐예요?”

“방돔 지사로 넘기는 시니어즈 수출 오퍼 시트입니다. 대리님께서 오늘 중으로 올려야 하는 거니까, 최대한 빨리 준비해 놓으라고 하셨잖아요.”

“아니,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요? 볼륨 레이트를 왜 이렇게 잡았어요? 1차 선적은 6밀리언이 아니에요. 4밀리언 먼저 띄우고, 2차 때 3밀리언을 추가로 보내기로 했잖아.”

“아닙니다. 잠시만요. 여기 이거 좀 보십시오. 6밀리언이라고 명시되어 있잖아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식으로 눈을 감아 버린 대리.

“아… 종학 씨 오늘 점심 못 먹겠다.”

“…왜요?”

“우리 입장에서 바이어는 방돔 지사예요. 시니어즈 유럽 라이선스를 가져간 엠뷔 트레이딩이 아니고.”

“아!”

“왜 밴더인 방돔 지사가 엠뷔 트레이딩이랑 주고받은 오퍼 시트를 가지고 볼륨 레이트를 만들었어요.”

“하, 씨… 죄송합니다, 대리님. 중간에 밴더 끼고 진행을 해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 아닌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제가 잠시 미쳤나 보네요.”

“딱 보니 그렇네. 얼라리요? 대금까지 T/T로 잡아 놨데? 이거 L/C로 잡아야 한다는 거 알고 있죠.”

“점심만 못 먹는 게 아니라, 이거 계산 싹 다 다시 하려면 퇴근도 못 하겠네요.”

“우와, 양심 없다. 이거 못 올리면 나도 오늘 같이 퇴근 못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대리님. 최대한 빨리….”

“됐어. 어차피 제시간에 퇴근 못 하게 생긴 거, 괜히 급하게 한다고 다른 실수 만들어 내지 말고, 얼른 내려가서 머리 식히면서 커피 한잔하고, 올라와서 오늘은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오퍼 시트 작성에만 매달려요.”

“네!”

“유로 아니다. 방돔 지사랑은 달러예요.”

“그럼요! 잠시 내려가서 커피만 얼른 한잔하고 다시 올라오겠습니다!”

ATM(홍보, 마케팅) 합동 미팅 현장.

“지금 JBS에서 홀인원 편성 잡힌 거 확인들 하셨죠?”

“네.”

“이건 미래기획 쪽으로만 다 맡길 게 아니라, 송유라 선수 촬영 날은 무조건 촬영장에 사람 한 명 붙여야 해요.”

“안 그래도 그 부분을 VMD 쪽이랑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거기에서 붙박이 해 줄 인원을 한 명 보내겠답니다.”

“VMD팀에서? 매장 인테리어, 디스플레이 전문가들이 협찬, PPL 쪽으로 뭘 안다고?”

“야외 촬영, 실내 촬영 둘 다 섞여 있잖습니까. 골프장마다 배경도 다 조금씩 다르고 잔디 색깔도 차이가 나고. 어쨌거나 시각 노출 쪽으로는 우리보다는 그쪽이 더 전문가들이라고 봐야죠.”

“음… 그건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신기한 팀장이 진짜 인원을 빼 준다고 해요?”

“자기가 직접 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하던데요?”

“하긴, 신 팀장님이 성격 특이한 거 빼놓고 일만 보면 넘사벽이긴 해. 오케이. 그럼 퍼스펙티브 PPL 건은 그냥 넘어가는 걸로 하고, 시니어즈는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미팅실 안으로 모인 사람들의 눈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누군가가 침을 한 번 꿀꺽하고 삼킨 뒤 말했다.

“다음 주 토요일 ‘악녀검사’ 첫방이잖아요. 스캔들 터지고 채서린이 작품으로는 첫 컴백작이라 벌써 화제성이 대단합니다. 시작 전 30초 플래시 광고랑 중간에 끊어갈 때 노출 광고 모두 미래기획 쪽에서 확보했다고 하니까, 우린 블로거들, SNS 쪽, 드라마 다시 보기 유튜브 채널들 쪽으로 적당한 바이럴 마케팅만 지원해 주면 될 거 같습니다.”

“그 부분도 미래기획 쪽이랑 홍보 콘셉트 맞추고 진행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건 우리가 그쪽에 맞춰 줘야죠.”

“뭔 소리 하는 거예요? 우리 브랜드야. 우리가 왜 돈 주고 고용하는 미래기획 쪽 의견에 맞춰?”

“중간 컨트롤을 그쪽 장하늘 팀장이 직접 한답니다.”

“아….”

“맞춰 줘야죠. 그냥 광고 기획 에이전트가 아니라, 우리 회사 대주주 중 한 명이 팀장으로 있는 미래기획인데.”

“그건… 그렇네. 그럼 뭐야? 우린 딱히 지금 할 게 없는 거예요?”

“…….”

“그럼 우리 지금 이 미팅 왜 하고 있는 거야?”

“커피나 한잔할까요?”

“그거라도 해야겠는데? 에이 씨… 다들 일어납시다, 커피나 한잔하게. 미팅 괜히 하자고 했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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