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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정도 사이즈는 나와 줘야 돼 (129/303)

백화점 정도 사이즈는 나와 줘야 돼

몇 날 며칠 사람을 늘어지게 만들었던 비가 그치고, 드디어 바닥에 깔려 있던 돌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 부경가의 장손, 장민석이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의외의 전화였지만, 전화 통화를 끝내고 나서 장민석이의 기질을 짐작해 보니까 어쩌면 당연한 전화였던 것도 같다.

따로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하늘이와 함께 나오라며, 자기도 자기 처와 함께 나갈 테니 사촌 형제끼리 편하게 식사나 한번 하자는 제안.

안 받을 이유가 없는 제안이다.

그리고 어쩌면 부경가의 밑천을 조금은 그들의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파악을 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연락이 왔더라며 하늘이에게 의향을 물어봤는데, 딱히 내키는 자리는 아니지만 필요한 자리라면 준비를 하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정태 오빠네도 함께하는 자리야?

“따로 그런 이야기는 없었어. 일단 주말에 너 시간 괜찮은지 물어보고 내가 다시 전화 주기로 했으니까, 그때 물어볼게.”

주말에는 하늘이도 시간이 괜찮다고 하더라며 장민석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혹시 정태 내외 쪽으로도 연락을 넣었는지 물어봤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그 자리에 정태 내외는 생각을 안 하고 있었던 장민석이었다.

그에 장민석은 “부르는 게 좋을 거 같으면, 네가 한번 물어보든지….”라며, 자신은 그런 형식의 자리를 제안한 게 아니었다는 식의 마음을 우회적으로 돌려 내게 전달했다.

“그럼 그냥 우리끼리 만나자. 그 집도 애가 있어서 그런 자리 좀 불편할 거야.”

―그래, 형 생각도 그렇다. 다 같이 만나면 좋기야 하겠지만, 괜히 또 제수씨 애 때문에 신경만 쓰이고 그럴 거 아냐. 다 같이 만나는 건 다음에 형이 따로 자리 만들어 볼 테니까, 이번엔 그냥 우리끼리 가볍게 만나자. 네 형수가 하늘 씨를 보고 싶어 해.

“왜?”

―왜긴 인마. 아무리 한 다리가 천 리 길이라도 우리가 가족은 가족이야. 집에 들어올 새 식구인데, 어른들한테 인사 오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만나서 미리 좀 가까워지고 하면 서로 좋잖아.

* * *

그렇게 주말이 찾아왔다.

“야, 너 뭐….”

“왜?”

집까지 들어가지는 않았고, 그냥 집 앞에 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다가 하늘이를 차에 태웠다.

최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느라 정확한 날짜 계산은 못 하겠는데, 거진 일주일? 아니다, 10일 정도 만에 만나는 하늘이었다.

얼굴이 홀쭉해 보일 정도로, 딱 봐도 살이 부쩍 빠져 있었다.

뭘 잘못 봤나 싶어서 하늘이가 차에 오르고 안전띠를 매는 동안 다시 유심히 얼굴을 살펴봤다.

“그동안 어디 아팠냐?”

“아니? 왜?”

“뭔 살이 이렇게 빠졌어?”

“나? 그래 보여?”

평소 적당히 살집이 있는 녀석 같았으면 보기가 좋았을 수도 있는데, 안 그래도 비쩍 마른 놈이 얼굴에 살까지 쫙 빠져 있으니 영 보기가 안 좋았다.

“뭔 일 있었냐?”

그제야 하늘이는 바로 어제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느라 꽤 고생을 했다고 사실대로 털어놨다.

“이틀 전부터 식단 관리 들어가고, 전날엔 알약에 물만 계속 먹으면서 장을 싹 다 비웠더니 어지럽더라.”

“내시경? 어디 안 좋아?”

순간 나도 모르게 철렁했다.

다른 쪽도 아니고 대장 쪽 내시경을 받았다고 하니까.

“아니, 그냥 받을 때 된 거 같아서 한번 받아 봤어. 회사 입사하고 2년 차에 사람들 받는 거 보고 같이 한번 받아 봤거든. 그때 이만한 용종이 세 개가 발견됐었어. 두 개는 좁쌀만 한 거라 신경 안 써도 되는 거였는데 하나가 1센티가 조금 넘는 선종이었거든.”

“선종이 위험한 건가?”

헷갈렸다.

“위험하다고 하기보다는 암으로 발전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했던 거 같아. 암튼 그냥 매년은 좀 부담스러워서 그렇고, 병원에서는 아직 나이가 있으니까 4년마다 한 번씩만 받으면 될 거 같다고 하긴 하는데 그냥 2년에 한 번씩은 받아 보려고. 며칠만 고생하면 일이 년은 안심하고 지낼 수 있잖아.”

“젊은 놈이 몸 걱정 어지간히 하는 모양이다.”

“또, 또… 아 나, 진짜. 꼴랑 두 살밖에 안 많으면서 더럽게 어른인 척하네.”

“그래서 이번엔 뭐래? 괜찮데?”

“깔끔, 멀쩡. 근데 나 진짜 살 많이 빠진 거 같아?”

“홀쭉한데?”

“매년 해야 하나?”

“다른 데는? 딱 대장 내시경만 받았어?”

“아니, 하면서 위랑, 복부, 심장 쪽 초음파까지 싹 다 받았지. 아 참, 잠깐. 오빠도 이참에 한번 받아 보지?”

내가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간 적응이 잘 안 되는 정훈이로 살아가며, 회사 일까지 적응하느라 따로 신경 쓸 겨를이 없긴 했지만, 병원 냄새라면 나도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

이 몸이 젊긴 해도, 미리미리 병원에서 건강 체크 정도는 하면서 살아야지, 두 번 다시 그 역한 약물에 취해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못 먹고, 죽을 날만 기다리며 시간 가는 걸 지켜보는 경험은 안 하고 싶다.

“그래서 다른 데도 다 괜찮은 거야?”

“적응 안 되네, 진짜.”

“또 뭐가?”

“아니다.”

“이건 뭐 무슨 말만 하면 아니래? 뭔데? 뭐가 적응이 안 된다는 건데?”

나는 이제 막 이 시대에 그나마 적응이 되는 거 같고, 그래서 조금씩 자신감이 붙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꼭 저런 말로 사람 초를 친다.

“오빠인 척하는 거. 그것도 진심인 척하는 거.”

걱정을 진심으로 하지,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인가.

“도대체 네 주위엔 어떤 사람들만 있길래, 진짜 진심으로 걱정을 해 줘도 난리냐?”

“당연히 내 주위엔 좋은 사람들만 있지. 오빠 빼고.”

“가만히 보면 넌 참 겨울용이야.”

“겨울용?”

“사람 열을 잘 채우거든. 여름엔 같이 있으면 안 되겠다. 너랑 같이 이야기 좀 하다 보면 더워져.”

“푸훕….”

약속 장소까지 가는 동안, 난 하늘이에게 태산이의 건강에 대해 물었다.

기억력이 예전만 못한 것 빼놓고는 전반적으로 다 괜찮다는 대답.

물론 그 대답엔 태산이의 나이가 전제로 깔려 있었다.

나이에 비해 건강이 양호한 편이라는 거지, 항상 누군가가 신경 써서 옆에서 챙겨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 백화점 사업권 다시 우리 쪽으로 가져오는 것만 잘 마무리되면, 그땐 다시 저 때처럼 집에 자주 찾아뵙겠다고 네가 말씀 좀 드려.”

대꾸가 없길래, 운전을 하면서 옆을 쳐다봤다.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던 하늘이와 눈이 마주쳤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난 급하게 시선을 정면으로 돌려놓고 물었다.

“나야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국내 백화점 사업에서 부경은 태영백화점이랑 같이 원투 펀치야. 그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할 수 있는 내용인가 싶어서.”

“쉽지 않지. 어려워.”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주의 깊게 보고 계시긴 한데, 객관적으로는 쉽지 않을 거라고 하셨어. 너무 성급하게 접근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하고 계시고.”

차 핸들을 내비게이션 지시대로 꺾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백화점이 제일 적당해. 고맙게도 그쪽에서 먼저 명분도 만들어 줬고. 쉽지 않고 어려운 일이라도 해야지, 필요하다면….”

“적당해? 뭐가?”

“내가 뭘 좀 확인해 봐야 되는 게 있어.”

“확인?”

“응. 다행히 일단 1차 테스트 정도는 무난하게 통과를 해내던데, 아직은 이게 운인지 실력인지 그걸 내가 잘 모르겠단 말이지. 운이라고 하기엔 과정이 너무 깔끔했고, 실력이라고 하기엔 내가 미리 깔아 줬던 판이 너무 완벽했고.”

“……?”

“다른 사람들 말만 듣고, 그 말만 믿기엔 나부터도 아직은 확신이 안 서는 내용이 있어. 그걸 확인해야 내가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걸 확인하기엔 최소 백화점 정도 사이즈는 나와 줘야 돼.”

잠시 조용하다가 혼잣말을 하듯 하늘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오빠는 가면 갈수록 복잡한 사람이 되는구나.”

“응?”

“뭐가 그렇게 매사에 혼자 비장하고, 혼자 계산이 많아? 가끔 오빠랑 이야기하다 보면, 과연 지금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심플하게 가자, 좀.”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내가 너니까 이 정도 말이라도 편하게 할 수 있는 거다, 그나마 너니까….”

“뭐?”

“지금 나한테 너라도 옆에 없었음 혼자 혈압 올라 쓰러졌을 거다, 아마.”

“…….”

지금 정훈이 놈의 몸으로 누굴 찾아가 답답한 재경 꼴을 놓고 내 기분대로 하소연을 할 수가 있겠나.

“고맙다고.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도 한땐 내가 요란다 일로 널 상당히 입장 곤란하게 만들었을 텐데, 그런데도 나랑 같이 가 주겠다고 해서.”

“이런 태세 전환은 갑자기 또 뭐지?”

“태세 전환이 아니라 난 한참 전부터 네 앞에서 최대한 노력을 하고 있었어. 네 말대로 심플해져 보기로. 그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지?

그래, 몰라야지.

나부터도 내가 지금 태산이 손녀인 너랑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네가 안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거지.

* * *

북촌의 <우정쉐프>라는 다소 특이한 레스토랑이었다.

분명 한옥인데, 메뉴는 프랑스식이 분명했다.

개방된 대문 옆으로 작은 안내 포션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으로 추천 와인 리스트가 큼지막하게 사이니지로 세워져 있는 곳.

마당 중앙에는 넓은 평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바베큐 통그릴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세워져 있었다.

“예약자분 성함이….”

“장민석으로 되어 있을 겁니다.”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온돌식 바닥 위로 유럽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긴 식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로는 앤티크한 촛대 위에서 제 몸을 녹이고 있는 초가 두 개나 끼워져 있었다.

“왔어?”

장민석 내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이 자리의 호스트라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직접 의자를 빼어 내 하늘이에게 자리를 권한 장민석은 이내 아직 코르크가 막혀 있는 와인 두 병을 눈짓하며 나와 하늘이가 직접 초이스를 하길 주문했다.

크게 신경 써서 보지도 않았다.

한 병은 프랑스 와인이었고, 한 병은 스페인 와인이었다.

스페인 와인을 지목하며 코르크를 열어 보라고 한 다음, 다시 정식으로 장민석 내외와 인사를 나눴다.

대충 고른 것치고는 와인 향이 내 취향이었다.

“나도 네 형수 따라서 처음 와 보고 그 후로 몇 번 더 와 보긴 했는데, 이 집이 좀 특이해. 고기를 우리가 직접 가서 골라야 해.”

느낌상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고 나랑 같이 밖으로 나가서 고기를 고르자는 소리 같았다.

“아, 그런 거야? 어쩐지… 들어오면서 보니까 평상 옆에 그릴 판 놓고 고기 굽는 사람이 있더라. 그걸 왜 저렇게 다들 서서 구경을 하고 있나 했더니, 그런 거였나 보네.”

“그냥 알아서 갖다 달라고 해도 큰 상관은 없는데, 재미있잖아. 어떻게 할래? 그냥 시킬래, 아님 같이 가서 고기 보고 올래?”

하늘이가 보기와는 달리 눈치가 빠르다.

장민석이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의 처에게 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식사 초대받고 빈손으로 오기가 조금 그래서요.”

가방에서 꺼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에르메스 종이 백.

“어머? 가족끼리 편하게 저녁 한 끼 같이하자는 거였는데 뭘 이런 걸 다 챙겨 왔어요? 난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맛있는 거 사 주시잖아요. 진짜 별거 아니에요. 립밤이에요, 립밤. 핸드크림 작은 거 하나랑요.”

“립밤?”

“네. 제가 여름에도 입술이 좀 잘 트는 편이라서 이것저것 어지간한 건 다 써 봤거든요. 근데 확실히 이름값을 해요. 이게 제품력도 좋고, 발랐을 때 부담스럽지가 않아서 너무 좋은 거예요. 핸드크림은 달랑 립밤 하나만 넣어서 오기에 민망해서 같이 넣은 거고요. 마음은 더 컸는데, 여기에서 선물로 더 오버를 하게 되면 촌스러울 거 같아서요.”

“너무 센스 있다. 조금만 친했음 바로 경우 있단 소리까지 내 입에서 나왔어요. 호호호. 그냥 편하게 만나자고 한 거였는데, 이거 준비하느라 고민 많이 했겠어요. 그냥 편하게 나오지….”

“마음이 잘 전달된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난 그런 하늘이를 뒤로하며 장민석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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