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해도 좋아
장민석이가 하는 걸 가만히 지켜만 봤다.
손바닥만 한 고기 한 덩어리를 고르더니, 그걸 바로 그릴에서 초벌구이를 해 달라고 주문하던데 이걸 또 그릴 통까지 따라갈 생각인 모양이다.
뒤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날 밖으로 따로 부른 이유가 상대의 입에서 먼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고모가 들고 계신 계열사 지분들… 그거 다 네가 받기로 했다며?”
“줘야 받는 거지. 내가 먼저 달라고 하긴 했는데, 조건이 많이 붙네. 그리고 아직은 그런 이야기가 밖으로 나도는 게 조금 부담스럽네. 조심스러워.”
“왜? 정태 때문에?”
글쎄… 그렇다 치자.
대답 없이 슬쩍 웃어 줬더니, 장민석이는 충분히 내 입장을 이해한다며 엉뚱한 소릴 늘어놓았다.
“고모랑 고모부가 어련히 알아서 교통정리를 잘 안 해내실까. 그건 그렇고 재경모직, 다음 분기엔 업계 1위 찍겠던데?”
“그것도 찍어야 찍는 거지.”
“형 앞에서 뭘 그렇게 조심하냐? 우리가 남도 아니고.”
잠시 뒤 혼잣말을 하듯 신세 한탄 비슷한 걸 내게 시작하는 장민석이었다.
“그래도 얼마나 깔끔하시냐. 이리저리 자식들 서로 눈치 보게 만들지도 않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 주겠단 입장을 보여 주신 거잖아.”
난 그저 “그런가?”라며 싱겁게 동의를 해 준 뒤 그릴 속에서 겉만 대충 익고 있는 고깃덩어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형은 그날 네가 했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날?”
“우리 아버지, 고모 계신 자리에서 네가 했던 말 말이야.”
장민석이 이놈 이것도 어지간히 스스로를 달변이라고 자신을 하는 모양이네.
그런데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냐.
네가 무슨 생각을 말하든, 무슨 말을 어떻게 돌려서 하든 지금 네가 하고 있을 계산들이 A부터 Z까지 내 눈에 선하게 다 보이고 있는데….
“무슨 말?”
“고모가 가지고 계시는 계열사 지분들 때문에 형제들끼리 알게 모르게 눈치 싸움을 해야 했고, 그렇게 거의 한 대가 지나가고 있는 거잖아. 그런 불편한 관계를 우리 대엔 좀 끊어야 하지 않겠어?”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
그리고 당연히 끊어 내야지.
그런데 그 끊어짐이 네가 상상하는 그림은 아닐 거다.
“작은아버지네와 재경 사이에 이런 불편한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어른들이 미리미리 교통정리를 잘해 놨으면 좋았을 텐데, 형은 이제 와 그런 부분이 참 많이 아쉽다.”
내 눈엔 아쉬운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재경과 부경유통이 맞붙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을 기회로 보고 있는 거 같은데?
중간에서 콩고물 좀 안 떨어지나… 하고 지켜보는 하이에나처럼.
“그게 다시 답습이 되고 있거든.”
“답습?”
“이번에 화재 지분 가져오시면서 그걸로 생각이 많아지시는 모양이야.”
“누가? 큰외삼촌?”
“응. 화재를 자영이한테 주겠다, 그런 뜻을 보이시네.”
장자영.
장민석의 여동생이다.
“자영이 누나 앞으로 지분을 받겠다고 하시는 거야?”
“그게 좋지 않겠냐며, 내 생각을 물으시네.”
“어차피 형네는 화학이 지주잖아. 화학은 형이 맡아 나갈 거고.”
“나는 그런 계산이 사업에는 적용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
그러면서 자기 작은아버지 장선열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흘리기 시작했다.
“너도 잘 알겠지만, 작은아버지가 참 염치가 없는 사람이야. 이번에 화재 지분 넘겨받기로 한 거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고,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쭉 해 왔어.”
“어떤?”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게, 원래는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양반이야.”
“…….”
“내가 공평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실제로 공평한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 공평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들은 뭐든 자기 기준에서만 공평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려고 해. 그 공평이라는 단어가 조금이라도 자기를 불리하게 만들 거 같으면, 바로 얼굴을 바꿔 버린단 말이야. 내가 그래서 작은아버지한테는 정이 안 간다는 거야.”
그쪽에서도 널 딱히 좋아할 거 같지는 않다만….
“둘째 작은아버지야 당연히 인정을 해 드려야지. 어쨌거나 할아버지 살아 계실 당시, 우리 아버지랑 함께 부경 그룹의 온갖 궂은일은 다 도맡아 하셨던 분이니까. 할아버지 대신해서 징역까지 살다 나오신 분이고, 숙모 쪽 라인 통해서 필요할 때마다 자금 수혈도 직접 다 받아 오신 분이니, 통신 정도는 당연히 둘째 작은아버지가 가져가시는 게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을 해. 그런데 큰고모하고 막내 작은아버지는 그런 게 아니잖아.”
“…….”
“그 사람들이 지금의 부경이 있기까지 도대체 한 게 뭐야? 할아버지의 아들, 딸로 태어났다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잖아. 그런데도 아직까지 할아버지가 하신 분배에 공평, 불공평을 이야기하고들 계신다. 내가 그 사람들 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말 기가 막혀. 이번에 너희 쪽이랑 문제가 난 것도 그래.”
뭐라고 하는지 한번 들어나 보자.
“이유 없이 매장 수수료로 장난을 친 거겠어? 그것도 재경모직을 상대로만? 아니지. 절대 그럴 수가 없지. 가만히 보면 막내 작은아버지… 상당히 뱀 같은 구석이 있는 사람이야. 아마 다른 패션 업체들 상대로는 절대 못 그러실걸?”
그럴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내가 깊게 따져 보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는 상대였으니까.
“상대가 바로 너희, 재경모직이니까 그렇게 하셨던 거야. 왜? 서로 불편한 입장이 되어도 결국은 고모부가 좋게 좋게 넘어가 줄 거라고 믿고 계시니까. 지금까지 쭉 그래 왔잖아. 고모부가 어지간하면 다 져 주시는 그런 그림이었잖아.”
“…그랬나?”
“모르는 사람 없어. 막내 작은아버지 몰상식하고, 염치없는 거 모르는 사람 거의 없다.”
“그래?”
“당연하지. 고모부가 얼마나 많이 이해해 주셨냐, 그동안. 고모부 입장에서도 크게 감정 섞일 일 만들고 싶지 않으셨을 거고. 재경에서도 모직은 크게 주요 사업이 아니잖아. 유지 정도만 되면 충분한 사업이니까, 그쪽으로 에너지 빼앗기고 싶지 않으셨던 마음, 충분히 이해해. 그런데 그 결과 막내 작은아버지는 감을 완전히 잃어버리신 거지. 찌르니까 들어가지거든. 계속 들어가거든. 조금만 더 찌르면 고모가 가지고 계신 부경백화점 지분 12퍼센트도 받아 올 수 있을 거 같거든.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고 싶으셨을 거야.”
고기 참 더럽게 안 익네.
도대체 저 손바닥만 한 고기 초벌하는 데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먹는 거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고….
“정훈아.”
“응.”
“형이 아직 그렇게까지 큰 힘이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이번에 재경에서 백화점 사업 다시 가져갈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지원을 해 줄게.”
“말만이라도 고맙네.”
“으으음… 이건 네가 고마워할 내용은 아니야. 이치상 백화점 사업 정도는 다시 재경이 가져가는 게 맞는다고 나부터도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이치상 백화점 사업 정도는?
이놈이 지금 날 웃겨 주는구나….
“그래서 말인데, 물산 지분 12퍼센트 있잖아.”
그렇지.
왜 그 말이 안 나오나 했다.
“그것도 나중에 고모한테 네가 계열사 지분들 넘겨받게 되면 형 쪽으로 유연하게 생각을 한번 해 봐라.”
“무슨 뜻이야?”
“오해는 하지 마. 괜히 또 지금 내가 꺼낸 말 때문에 서로 불편해지는 건 형이 정말 피하고 싶어. 그런데… 사실 물산 지분 그거 네가 들고 있다고 해도 딱히 쓸데는 없잖아.”
“…….”
“그냥 형 쪽으로 넘기라는 거 아냐, 인마. 당연히 시가대로 계산해 줄 거고,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네가 결정만 하면, 그 결정을 한 시기 종가로 10년 상환 수익금까지 다 계산에 넣어 값을 쳐줄 거야.”
마치 앞으로는 우리 쪽의 충실한 개 역할을 자처해 주겠단 말처럼 들리는군.
듣던 중 아주 반가운 소리다.
이 정도까지 나오니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화재랑 비교해서 물산은 그 구찌가 좀 크지 않나? 그걸 지금의 부경화학이 받을 수 있어?”
“우리가 어디 돈이 없어서 지금까지 고모한테 이런 이야기를 못 꺼낸 거였겠어? 염치가 없어서 못 꺼냈던 거지. 지금도 솔직히 형 이런 말 꺼내는 거 상당히 민망하다. 그런데 너랑 고모가 먼저 화재 지분을 들고 와서 현금을 만들겠다 하니까, 말 나온 김에 물산 지분 이야기도 같이 꺼내 보는 거야.”
“하긴, 형 입장에선 그렇게만 되면 자영이 누나가 화재를 가져간다 해도, 물산이 오로지 형 앞으로 떨어질 거니까, 안심이 되긴 하겠다.”
“내가 뭐 자영이랑 화학 놓고 경쟁을 할 것도 아니고,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닌데… 그렇게만 된다면, 나중에 가서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불편한 장면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긴 하지.”
그 자리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밖에 없었다.
“지금은 아직 좀 이르고, 내가 그 지분들 다 받아 오면 가장 먼저 그 내용부터 고민을 좀 해 볼게.”
“그래, 그래. 벌써부터 부담 같은 거 느낄 필요 전혀 없고, 지금은 그냥 편하게 형 입장, 생각이 그렇다…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으면 돼. 우리가 뭐 남도 아니고, 앞으로 계속 좋게 지낼 건데 급하게 갈 필요는 없잖아. 오늘 이 이야기도 겸사겸사 꺼내 본 거야.”
겸사겸사가 아니라 이게 오늘 이 식사 자리의 목적인 거 같은데?
“그런데 형이 뭐 하나만 더 물어보자.”
“응.”
“백화점 사업. 이거 너무 죽은 사업 아니냐? 장래성이 불투명한데, 이게 지금의 재경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쩐 일인지, 지금 이 말엔 어느 정도 장민석이의 진심이 묻어 나왔다.
“사이즈만 크지, 크게 돈 되는 사업도 아닌데 이걸 화재 지분까지 팔아 가며 잡기엔 좀 아깝지 않아?”
“고작 백화점 지분 팔아서 화재나 물산을 잡는 건 불가능이잖아.”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던데, 그럼에도 녀석의 눈썹 끝은 꿈틀거렸다.
재빨리 얼굴에 미소를 걸었다.
“웃자고 한 말이야. 그 사이즈만 크지, 크게 돈도 안 되는 사업 하나 다시 가져오겠다고 화재 지분까지 팔아야 하는 상황이 너무 민망해서.”
“민망할 게 뭐가 있어? 다 그렇게 사는 거지.”
“형네 기준에선 눈에 보이지도 않겠지만, 지금의 재경에선 크게 유용하단 판단이 섰으니, 우리 회장님도 지금처럼 진심을 다해서 가져오려고 그러시는 거 아니겠어?”
“고모부 생각이 아니라 네 생각이었다고 하던데?”
“재경항공 21,487명, 재경식품 6,479명, 모직 3,431명, 스너프 커머스 1,558명.”
“응? 그게 뭐야?”
“이번 주, 그러니까 어제 날짜 기준으로 현 재경 그룹의 계열사별 총직원 수야.”
“…….”
“3만 명이 넘는 직원들의 월급과 가정, 생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야. 우리 회장님.”
“…….”
“본인이 전면에 서서 사활을 걸어도 될까 말까 한 이런 내용을, 어떻게 내가 하자고 한다고 아무 계산 없이, 의심 없이 진행을 시키실 수 있겠어? 우린 부경화학이 아니야, 형. 형네 입장에선 그만한 건인지 몰라도, 우리한텐 진짜 사활이 걸린 내용이야.”
어른인 척 내 어깨를 토닥이며 장민석이가 말했다.
“그렇네. 듣고 보니 내가 말을 좀 가볍게 했네.”
“앞으로 형이 도와만 준다면, 힘이 많이 될 거야. 우리가 또 빚지고는 못 사는 스타일이잖아. 진 빚은 반드시 갚아.”
이 말은 네가 꼭 명심을 해야 할 거다.
나는 진짜 진 빚은 반드시 갚고야 마는 사람이니까.
“가족끼리 빚은. 서로 돕고, 도와주고, 필요하다면 도움도 요청하고… 그런 게 가족 아냐?”
“그렇지.”
“너하고는 내가 말이 좀 잘 통하는 거 같다. 정태는 뭐랄까… 왜 그러는지는 충분히 알겠는데, 애가 필요 이상으로 방어적일 때가 있어. 특히 가족들, 사촌 형제들 앞에서는.”
“…그래?”
“내가 그래서 오늘은 그냥 편하게 우리끼리만 보자고 했던 거야. 정태 앞에선 내가 또 아까 꺼냈던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많이 불편하거든. 말하는 사람 의도를 꼭 이상한 쪽으로 불편하게 왜곡해서 받을 때가 종종 있어, 정태가.”
“…….”
“네 형 욕하는 거 아니다? 네 형보다는 너랑 좀 더 말이 잘 통하는 거 같단 말을 하는 거지.”
“나라님 욕도 없는 자리에선 말 통하는 사람들끼리 주고받고 할 수 있는 거지, 뭐 어때? 너무 신경 쓰지 마. 나 그런 거 신경 안 써.”
식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하늘이에게 물어봤다.
아까 나와 장민석이가 고기를 고르러 잠시 밖에 나가 있는 동안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었냐고.
그냥 시시한 이야기만 나눴다고 했다.
그러면서….
“확실히 수경 언니가 인물은 인물이네.”
원수경?
“형수는 왜?”
“무게감이 달라. 수경이 언니는 그날 할아버지 생신날 잠깐 본 게 전부였지만, 뭔가 무게감 같은 게 느껴졌거든. 그 무게감이 정태 오빠를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어. 그런데 오늘 만난 거기는 좀….”
“가벼워?”
“글쎄? 일부러 편하게 대해 준다고 그랬던 거겠지? 아무튼, 잠깐이었지만, 단둘이 같이 있는 동안 좀 지루했어. 딱히 내 텐션을 건들지는 못하더라.”
“아 참. 아까 이야기한다는 걸 깜빡했네. 지난주 악녀검사 첫방 나오고 화제성 대단하게 올라오는 거 같더라?”
그 말에 하늘이는 꽤나 거들먹거리며 목 근육을 풀었다.
“아직 본격적인 스토리 라인은 진행도 안 됐어. 상당히 크게 터질 거야. 기대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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