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좀 차려라
“이름을 바꿔야 된다?”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꼭 바꿔야 한다는 게 아니라 바꾸는 게 좋지 않겠냐는 거죠, 제 말은.”
내 생각은 그런데, 네 생각은 어떠냐….
“물론 결정은 회장님 이하, 이번 분할 인수전에 총력을 기울였던 임원진들이 해야겠지만, 제 생각은 그렇다는 겁니다.”
결국 재경 그룹은 부경의 백화점과 면세점, 아웃렛 사업의 분할 인수에 성공했다.
어지간히 시원했던 모양이다.
그만한 사업권 하나 다시 받아 온 것으로 이렇게 뛸 듯이 기뻐하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속이 쓰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도 됐다.
한발 뒤로 물러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던 내가 이렇게까지 시원한데, 그걸 제 손으로 직접 내어 줘야 했던 홍준이 본인은 그걸 다시 가져오면서 오죽 시원했을까.
뭔가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오래 묵은 숙제를 하나 끝마친 기분일 거다.
분할 인수 합의서에 도장을 받아 낸 당일, 홍준이는 가장 먼저 날 찾았고 그룹 본사로 불렀다.
홍준이는 부경유통으로부터 되찾아 온 사업장들의 영업 정상화 방안에 관해 떠보듯 내게 물었고, 난 영업 정상화보다 더 시급한 건 교통정리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분명 아주 좋은 계기가 될 겁니다.”
“계기?”
“네.”
“어떤?”
“아예 새롭게 다시 태어나겠다는 걸 소비자들에게 보여 줄 계기요.”
“아예 새롭게?”
한 번 부경의 손을 탄 사업들에 굳이 다시 재경의 이름을 입힐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내가 틀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겠나, 이게 나 손중길이의 성격인 것을.
나의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나의 재경.
다시 또 그렇게 살고 있는 지금의 나.
그런 재경의 이름에 불편했던 역사를 다른 사람들이 떠올리게 만들고 싶지 않다.
만약 백화점 이하 모든 쇼핑 쪽에 다시 재경의 이름을 쓰게 된다면, 그건 부경과의 불편했던 지난 세월들을 소비자들에게 계속해서 각인시키는 꼴 아닐까?
난 나의 재경이 기본도 모르는 장가 형제들의 부경과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엮이는 걸 가급적 피하게 만들고 싶었다.
우리가 다시 가져온 부경의 오프라인 쇼핑 사업은 그저 그쪽으로 빼앗겼던 걸 다시 가져왔다는 것에만 큰 의의를 두고 싶다.
나는 다른 사람의 손을 탄 물건에 크게 집착을 하는 편이 아니다.
애초에 다른 사람 손에 있던 걸 내가 탐이 나서 가져온 게 아니라면 말이다.
부경에서 가져온 쇼핑 사업들.
솔직히 크게 탐이 나는 물건은 아니었다.
들어가는 수고 대비 이게 큰돈이 될 거라는 기대도 없고.
그저 그냥 다시 가져왔으면 됐다.
그걸 다시 가져오면서 그집 장가 형제들 사이에 불편한 관계를 유도해 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프로젝트였다.
딱 거기까지.
여기에 쇼핑 쪽 전부를 우리 재경의 이름을 입혀 다시 세상에 내어 놓을 필요까지는 못 느끼고 있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하지만 홍준이 놈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겠다면야….
“그렇네. 일리가 있다. 가뜩이나 비슷한 이름을 쓰고 있는데… 아예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내가 따로 구상을 해 놓은 그림이 있다.
이걸 홍준이가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현재의 재경 그룹 사장단의 수준이나, 인력조달 형편으로는 내가 그린 그림 그 이상의 것은 만들어 내기 힘들 것이다.
“스너프로 고쳐 쓰는 건 어떻겠습니까?”
“스너프?”
“네. 유통은 유통끼리 묶어 놔야 자기들끼리 시너지 효과도 만들어 내고, 사업 확장의 기회와 선택의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요?”
정태 놈의 실력을 제대로 확인해 보고 싶은 이유가 가장 컸다.
스너프.
아닌 말로 내가 밥상을 차려 밥까지 다 떠먹여 준 프로젝트 아닌가.
물론 그걸 맡아서 진행시키는 추진력은 나름 쓸 만했다.
생각 없는 놈들한테 맡겨 놨으면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아직까지도 방향을 못 잡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정태 놈은 다행스럽게도 스너프가 우리 재경에 어떤 역할이 되어 주어야 하는지,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고 빠르게 트래픽 비즈니스 업계 안에서 스너프를 궤도에 올려놓았다.
다만 내가 여기에서 알고 싶은 건, 차려진 밥상을 효과적으로 먹을 줄만 아는 놈인지, 아님 직접 밥상을 차릴 줄도 아는 놈인지에 대한 확신이다.
뭐라도 하나쯤은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릇이어야 하지 않겠나.
내 기준에서 정태 놈은 아직 한참 멀었고, 그런 놈에게 나의 재경 후계자 자리를 허락한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내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어디 감히.
정태 놈 실력이 나보다 뛰어나다면야, 앞으로 나란 존재로 인해 빠르게 욕심을 챙기고 발전을 한다면야 나의 재경을 위해 얼마든지 양보를 하겠다만, 글쎄….
내가 정태 놈에게 과연 양보를 할 기회가 있기는 할까?
시키는 것만 해내는 놈은 필요 없다.
지키는 것만 해내는 놈은 필요 없다.
그런 놈들은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다.
내가 키울 수도 있는 거고.
뭐라도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어 낼 줄 아는 놈이 필요하다.
실패를 할 수 있는 놈이 필요하다.
그 실패를 딛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설 수 있는 놈이 필요하다, 지금의 재경에겐.
부경에서 다시 가져온 쇼핑.
틀림없이 정태에게 많은 고민과 한계를 안겨다 줄 거다.
그리고 그놈이 그것들을 다 극복해 내기만 한다면… 나는 그놈과 좀 더 큰 재경을 함께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쇼핑 쪽을 아예 다 네 형이 차고 나가게 만들어 주란 뜻이야?”
“가짓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 고작 백화점에 면세점, 아웃렛만 추가가 되는 건데 이걸 다른 경영진을 붙여 별개로 가지고 가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건 정말 비효율적인 거지.
부경유통만 해도, 그 전까지는 백화점과 면세, 아웃렛, 마트와 홈쇼핑을 동시에 다 이끌고 가지 않았나.
“손정태 사장이라면 틀림없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동시에 묶어서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흠….”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홍준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왜? 부담스럽냐?”
부담스럽냐니?
“뭐가요?”
“백화점, 면세점, 아웃렛 말이다. 나는 그걸 너한테 한번 맡겨 볼까 했는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걸 내가 맡아서 뭐 할 건데?
크게 돈이 되는 사업도 아니고, 재경모직처럼 우리 자체 브랜드를 키울 수 있는 사업도 아니다.
“모직 쪽에서 그간 만들어 낸 성과도 그렇고, 모직하고 직결되는 쇼핑 쪽이라면 틀림없이 잘 해낼 수 있겠다 싶어서 말이야.”
난 다시 한번 말했다.
“유통은 유통끼리 묶으셔야 됩니다. 그게 훨씬 경제적이고 효율적입니다.”
“형 밑에선 일하고 싶지가 않다?”
“아뇨, 이왕 주기로 결정을 하셨음 손정태 사장에게 제대로 된 기회를 한번 줘 보시란 말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눈을 가늘게 뜨며 홍준이가 물었다.
“무슨 기회?”
“스너프. 그거 결국은 제가 만든 사업 아닙니까?”
눈썹 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걸 저랑 한마디 상의도 없이 바로 손정태 사장에게 주신 건 회장님이시고.”
“그게 섭섭하냐?”
섭섭하긴….
“섭섭한 게 아니라 걱정이 되는 거죠.”
“무슨 걱정?”
“과연 회장님께서 하신 교통정리가 맞는 것일까… 하는 걱정이요.”
정태에게 스너프를 줘 놓고 기반을 닦아 보게 만든 건 잘한 게 맞다.
그걸 내가 기획안으로 만들어 넘겼을 때까지만 해도 자기 둘째 아들놈에 대한 홍준이의 믿음과 확신은 바닥을 찍고 있었을 테니까.
다만….
“저는 회장님께서 손정태 사장에게 스너프를 맡아 나가게 하면서 지분을 그 정도로 많이 챙겨 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게 억울해?”
“저는 계속해서 재경 그룹을 걱정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회장님은 줄곧 저와 손정태 사장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고 계시네요.”
“…….”
“그게 억울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게 억울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표현을 했겠죠. 전혀 안 억울합니다. 억울할 것도 없고, 그딴 내용에 억울한 감정을 느낄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결과물이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큰 지분을 주신 거잖아요.”
홍준이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제 눈에는 회장님의 그런 결정이 스너프라는 사업에 대한 절실함보다는 손정태 사장을 사장 자리에 앉히려는 절실함으로만 보였거든요.”
내가 해 봤던 실수였기에, 나도 똑같이 해 봤던 실수였기에 내 아들 홍준이는 그런 실수를 똑같이 되풀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었다.
“당시 손정태 그룹 상무를 사장으로 올리기 위한 명분이 필요하셨다는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느 정도의 지분을 챙겨서 보내셔야 했겠죠. 그런데 객관적으로 봐도 3퍼센트 내외면 적당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그 말, 너는 앞으로 네 형이랑 경쟁을 해 보겠다… 하는 정도로 내가 이해를 해야 하는 거야?”
경쟁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아뇨, 회장님. 또 그러시는데,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저는 우리가 스너프를 가지고 와서 우리 재경에 꼭 필요한 온라인 유통판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결혼을 걸었습니다.”
그 말에 홍준이의 두 눈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손정태 사장이 스너프에 뱅크 시스템을 빠르게 도입시킬 수 있도록, 그러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금을 미래금융을 통해 원만하게 조달할 수 있도록, 그리고 또 재경과 장태산 회장님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제 결혼을 걸었습니다, 회장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요.”
“…….”
“저는 더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재경이 지금보다 더 강하고 커질 수만 있다면요. 그렇게 강해지고 커진 우리 재경에서 우리 직원들이 자신들만의 그럴싸한 꿈을 키워 가며 살아갈 수만 있게 된다면요. 그런데 정작 저보다 더 절실하셔야 할 회장님은 지금 어떠십니까? 저와 손정태 사장을 놓고 이놈에게 이걸 주면 저놈이 섭섭해하지 않을까, 저놈에게 저걸 맡기면 이번엔 이놈이 또 입이 댓 발이나 나와서 꽁해 있지나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에 사로잡혀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아직 갈 길이 멀다, 홍준아.
세상엔 재미진 게 너무 많아.
그 재미난 것들 한 번씩은 다 찍어 먹어 봐야 하지 않겠냐.
이왕지사 태어났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다 가야 할 인생이라면 말이다.
이 애비가 30년 전 눈을 감았을 때 가장 억울했던 게 바로 그거였다.
재미난 게 너무 많은데, 그리고 그 재미난 걸 한 번씩은 다 찍어 먹어 보기 위해선 재경을 좀 더 키워 내야 하는데, 그걸 못 해 보고 눈을 감은 것.
평생 내 울타리 넓히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정작 그 울타리 안에 내가 집어넣어 놨던 것들은 제대로 즐겨 보지도 못했던 것.
그게 정말 후회스러웠고, 아쉬웠다.
그런데 넌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지금의 재경 울타리에 만족을 하겠다는 거냐?
왜 벌써부터 자식놈들 눈치 봐 가며, 어떻게 나눠 줄지를 고민하고 있느냐
쥐뿔 나눠 줄 것도 크게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지금의 너는 그런 허튼 곳에 기운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정신 좀 차려라.
“저는 내년 3월까지만 모직에 있다가, 식품 쪽으로 옮겨 가 봤음 싶은데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식품?”
“네.”
“그쪽으로 관심이 있었어?”
관심?
이걸 관심이라고 봐도 되는 걸까?
“식품도 업계 순위권 안으로 넣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홍준이의 광대가 봉긋 솟아 올랐다.
“항공이야 스너프까지 붙어 있으니, 순위권 방어는 저절로 될 것이고 모직 역시 남 사장이 알아서 잘 맡아 나갈 겁니다.”
“식품을 순위권 안에 넣어 보겠다? 쉽지 않을 건데?”
“적당한 지원 사격만 그룹 본사에서 해 주신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정태 역시 이와 비슷한 각오로 식품 쪽 생활을 했고, 업계의 벽에 부딪혀 아무런 성과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그룹 본사 생활을 시작했다는 걸.
하지만 걱정 마라.
다 방법이 있다.
“어떤 지원 사격?”
“지분을 좀 챙겨 주십시오.”
“지분?”
“저는 모직 지분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 않습니까.”
“…….”
“제가 모직에서 그만한 성과를 만들어 내며 업계 1위로 올려놓을 수 있었던 데에는 남 사장과 조 전무의 절대적인 양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양보는 제가 모직의 지분을 그 두 사람보다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도해 낼 수 있었던 것이고요.”
“지분 없이는 할 수 없다?”
“모직과는 달리, 식품 쪽은 사장부터 시작해 모든 임원진들이 다 손정태 사장 지지자들 아닙니까.”
뭘 그렇게 놀라나.
당연한 것을.
설마하니 내가 그 정도도 모르고 식품을 갈아엎으러 가는 거겠나.
“식품에서도 딱 모직에서처럼 할 수 있을 만큼만 쥐여 주시면, 성과를 만들어 내 보이겠습니다.”
“그거 말고는?”
“그건 제가 식품으로 넘어간 뒤, 천천히 식품의 상황을 확인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