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요
그날 저녁 손홍준 회장은 본가로 손정태 사장 내외를 불렀다.
한참 동안 손주를 품에 안고 부경의 백화점, 면세점, 아웃렛을 다시 가져온 내용에 대해 기쁨을 즐기다 손주를 며느리에게 안겨 주고 아들을 서재로 데리고 갔다.
“승현이가 이제 말을 제법 한다.”
“네, 엄마가 계속 옆에 붙어서 말을 시키니까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는데 꽤 또렷해, 발음이.”
손 회장은 손정태 사장에게 꼭 네가 저만했을 때 그랬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또래에 비해 말도 빨랐고, 금방 뒤집는가 싶더니 혼자 기어 다니다가 대수롭지 않게 서서 걷기 시작했던 아들의 옛날 모습이 그립기도 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러서, 그 콩만 했던 녀석들이 회사를 이끌어 갈 만큼 성장을 했단 말인가.
“그런데 정훈이는 왜 안 부르셨어요? 이런 날 다 같이 식사라도 하면 좋잖아요.”
“네가 한번 물어보지 그랬냐.”
“저는 아버지가 따로 부르실 줄 알았죠.”
“언제는 하나 있는 동생이라고 알아서 잘만 챙기던 녀석이. 장 회장님이 같이 장기를 두자고 불렀단다. 나도 오늘 같은 날 다 같이 식사를 했음 싶긴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 회장님이 부르신 거잖아. 그냥 가라고 했어.”
손정태 사장은 어색한 미소를 얼굴에 띄워 놓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아들에게 손 회장이 말했다.
“정태야.”
“네, 아버지.”
“세상에 없는 걸 붙들고 애를 쓰는 것만큼 미련한 짓이 없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정태가 약해 보이기만 하는 손 회장이었다.
자식 사랑에 첫정만큼 무서운 게 있으랴.
손 회장에게 있어 장남 손정태 사장은 언제나 자랑거리였고, 그런 아들과 이곳 서재에서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게 몇 안 되는 즐거움 거리 중 하나였다.
가르치는 재미.
그리고 그 가르침에 빠르게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재미.
그 모든 재미를 부모 입장에서 원 없이 즐기게 만들어 준 자식이 바로 장남, 정태였다.
불과 작년.
정훈이가 모직 쪽에서 정신을 차리고 회사 일에 집중을 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손 회장에게 아픈 손가락은 장남 정태가 아니라 바로 정훈이었다.
그런데 두 아들의 입장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바뀌고 있는 지금, 손 회장에게 정태는 더 애틋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가 지금 뭘 붙들고 있는데요?”
“모든 사람, 모든 관계에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있잖아.”
“제가요? 전 그런 적 없는데요?”
애써 부인을 하는 아들의 그런 모습까지도, 이상하게 속이 상하는 손 회장이었다.
“그러냐? 그럼 네가 나보다는 좀 더 나은 거고.”
“……?”
“나는 여태 세상에 없는 걸 붙들고 미련한 짓을 해 왔던 거 같거든. 내가 그동안 왜 힘들었던 건지, 그걸 이제야 알겠어.”
“힘드셨습니까?”
정태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걱정하며 물었다.
“힘들었지. 힘든 걸 힘들다고 내색도 못 할 정도로 힘이 들었지. 근데 네 앞에서라도 이렇게 조금씩 표현을 해 보고 싶은 걸 보면, 이제라도 뭔가가 명확해지고 있다는 거겠지.”
“아버지는 그동안 세상에 없는 뭘 붙들고 계셨습니까?”
“내 손으로 반드시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 네 할아버지처럼 너희 형제들한테 원망을 받는 부모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그런 바람. 그런 것들에 복합적으로 압박을 받아 오고 있었던 거 같아.”
“요즘도 주무실 때, 쉽게 잠 못 이루고 그러세요?”
“그거야 이제 만성이 돼서 괜찮아. 애비 건강은 걱정 안 해도 돼. 잘 챙기고 있어.”
“제가 좀 더 자주 들여다보고 해야 하는데, 앞으로 좀 더 신경 쓸게요.”
잠시 딴청을 부리다, 용기를 내어 손 회장이 정태에게 말했다.
“그런데, 역시나 이것 역시 네 할아버지가 맞으셨던 거 같다.”
“…뭐가요?”
“더 사랑하는 자식을 가리는 게 아니야.”
“……?”
“내 말을 잘 듣고, 내 눈에 드는 자식을 가리는 게 아니었어.”
“무슨…”
“우리 재경쯤 되면, 재경을 더 잘 이끌 수 있는 자식을 가려야 하는 거였어. 그게 당연한 건데, 그간 정훈이 놈 해 다니는 꼴 때문에 그 당연한 걸 내가 잊고 지냈어.”
정태는 침묵했다.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이렇게 힘들게 하시고자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내가 너나 정훈이 상대로 피할 게 아니라, 이제라도 둘 다 같이 앉혀 놓고 언젠간 이야기를 해 줘야 할 거 같단 생각도 들고. 나는 나와 네 큰아버지를 함께 앉혀 놓고 네 할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종종 하실 때마다, 왜 자식들끼리 경쟁을 붙이시는지, 그게 참 불만이었거든.”
“…….”
“그래서 나는 안 그래야지… 했는데, 이게 안 할 수가 없네.”
아버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며 정태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저도… 어쩌면 아버지가 그렇게 해 주시는 게 훨씬 더 마음이 편할 것도 같아요.”
정태 역시 쌓여 있는 게 많았다.
오늘 아버지가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거, 그리고 서재로 따로 불러 이런 내용을 먼저 꺼내 주신 부분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정태가 말했다.
“그날 제가 전화로 아버지께 실수를 크게 한 적이 있잖아요?”
“언제? 보이콧할 당시에?”
“네.”
벌써 몇 달도 더 지난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아들이 괜스레 측은해 보이는 손 회장이었다.
“겉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저 순간 아차 했습니다.”
손 회장은 가볍게 웃었다.
“진짜 제가 겉넘었더라고요. 그런데 아버지하고 통화를 그렇게 끝내고 나서 곰곰이 생각을 다시 해 봤어요. 겉넘은 건 명백하게 제가 한 실수가 맞는데, 그때의 저는 겉넘을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왜?”
“우리 재경에 관련된 내용인데, 그것도 그룹 본사가 계획적으로 진행을 하고 있는 내용인데, 그걸 제가… 아버지의 귀띔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제 측근들을 통해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닌 신문에 기사가 나온 뒤에야 확인했거든요. 저는 그게 너무 섭섭했어요.”
“그러냐?”
“네. 전 제가 당연히 모든 내용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리 재경 그룹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뻗어 나갈지 정도는 다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손 회장은 아들의 섭섭함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 역시 그랬던 적이 있었고, 그 소외받는 섭섭함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어쩌면 앞으로 그런 상황이 더 자주 벌어질 수도 있다.”
“정훈이 때문에요?”
“아니. 내가 너, 그리고 스너프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기 때문에.”
“…….”
“지금쯤 네가 뭔가를 해내야 한다. 다른 거 챙길 정신이 없을 정도로, 오로지 스너프에만 집중을 해야 해. 그래야 나중에 정훈이 하고 네 사이가 불편해지지 않을 수 있어.”
“하….”
정태는 답답했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고작 철부지 동생 정훈이를 상대로 전력투구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번에 다시 가져온 백화점, 면세점, 아웃렛. 그거 다 스너프로 이름 바꾸고 네가 직접 운영 정상화시켜 봐.”
손 회장의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차분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정태였다.
하지만 차분한 입에서 나온 질문은 결코 차분하지 못했다.
“혹시 그것도 정훈이 계산입니까?”
“왜? 그렇다고 하면 싫다고 할 거냐?”
차분하게 고개를 저으며 정태가 말했다.
“아뇨. 만약 그것도 정훈이 계산이라면 살짝 신기해서요.”
“신기해? 뭐가?”
“저도 똑같이 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실은… 염치없지만 그 백화점, 면세점, 아웃렛. 제가 스너프로 담아가서 정상화를 시켜보고싶단 말씀을 드려볼까 했거든요.”
정태는 진심이었다.
“보이콧 진행되는 과정에서, 상황이 점점 우리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할 즈음부터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쨌거나 유통은 유통끼리 묶어놓는 게 써먹을 길이 많이 열릴테니까요. 스너프의 가장 큰 약점이 오프라인 매장이 없다는 거 아닙니까. 반대로 홈쇼핑이 빠진 상태로 오프라인 사업권만 다 가지고 온 거니까, 따로 온라인 쇼핑 쪽을 열어야 할테고. 이미 우리한테는 스너프가 있는데, 돌아갈 이유는 전혀 없는 거니까요.”
그리고 정태는 그 자리에서 정훈이를 인정하기까지 했다.
“정훈이 이 자식 이거 진짜, 능구렁이 같은 놈 아닙니까?”
“왜?”
“하면 이렇게 잘 할 수 있으면서, 그동안 도대체 뭐 때문에 얼 빠진 놈 마냥 정신 못차리고 돌아다녔던 거랍니까?“
그와 동시에 자심감까지 드러냈다.
“제대로 한 번 키워볼게요. 그래서 현재 아버지가 저랑 정훈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고 계시는 고민, 더는 안 하실 수 있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말씀하셨던 거요.”
“조금 전? 뭐?”
“세상에 없는 걸 붙들고 애쓰는 것 만큼 미련한 짓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잠시 입을 곧게 다문채, 단단한 표정을 아버지에게 보여준 뒤 정태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마도 제가 정훈이까지 끌어안아서 데리고 가려고 한다는 걸 꼬집어서 하신 말씀이겠죠?”
“…”
“저도 그게 힘들 거 같다는 건 진작에 눈치를 챘어요. 조동희 전무. 저한테는 회사 경영에 관해선 선생님같은 분이시잖아요.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사람 아닙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정태가 말을 이었다.
“이제야 말씀 드리는 건데, 저 처음 스너프 넘어갔을 때 밖에서 조 전무 따로 만나서 절 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손 회장 역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저 들어주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연륜이 있는 인물을 한 명 정도는 곁에 두고 있어야 할 거 같은 거예요. 그런데 당분간은 모직에서 움직이기가 힘들 거 같다고 하더군요.”
“…”
“남 사장님이 든든하게 버티고 계신데, 그 작은 모직에 굳이 조 전무님까지 계셔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제가 기회 봐서 회장님께 말씀을 드려볼테니까 그냥 못 이긴 척 와주십사 했거든요. 근데도 웃기만 하지, 대답을 미루는 거예요.”
이미 지나간 일들.
정태는 더이상 지난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결국엔 정훈이, 남 사장님이랑 같이 모직을 업계 1위 자리로 올려놓았네요. 그런 결과물을 만들어낸 게 정훈이인데, 제가 무슨 수로 끌어안아서 데리고 다니겠습니까? 같이 가자고 해야죠, 지금부터는.”
“역시 너 답다. 내 아들이지만, 나랑은 달리 마음이 넓어.”
하지만 손 회장이 눈치채지 못한 게 있었다.
그 말 속에 담긴 정태의 조소가 어떻게 발전해나갈 것인지…
“그럼 정훈이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어디로 옮겨가보고 싶다 그런 말이 있던가요? 내년 3월이면 벌써 모직 생활 2년이잖아요.”
그 질문에 손 회장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 대답을 하면서도 자신이 왜 정태 앞에서 솔직해질 수 없었던 것인지 미련이 남는 손 회장이었다.
“하긴. 어디든, 그간 해온 게 있는데 알아서 잘 하겠죠. 그럼 백화점, 면세, 아웃렛 건은 제가 정리를 해봐도 되는 겁니까?”
“내가 조만간 자리를 한 번 만들게. 그쪽에서 넘어온 인물들도 우리쪽 사장단들과 인사 정도는 정식으로 시켜줘야 할 거 아니야.”
“그렇죠.”
“그 자리에서 다같이 식사 한 번 하고, 내가 이야기를 꺼내보는 걸로 하면 되지 싶어.”
* * *
“이런 얼 빠진!”
같은 시각 장태산 회장의 집.
안방에서 함께 장기를 두고 있던 장태산 회장과 정훈이.
장 회장은 정훈이가 부경에서 다시 가져온 백화점, 면세점, 아웃렛을 스너프와 함께 묶어 그룹 내 유통으로 분류를 해보자는 건의를 손 회장에게 직접 했단 소릴 듣자말자 불 같이 화를 냈다.
“아. 놀래라!”
“뭐, 뭐?”
“아, 아니. 놀랬다고요.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내가 지금 소리를 안 지르게 생겼어? 바보냐, 천치야? 어떻게 지난 몇 달 네 손으로 건드려 다시 가져온 쇼핑 쪽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네 손으로 정태가 가져갈 수 있게 만들어!”
그런 장 회장을 상대로 정훈이는 장기판 위의 장기말 하나를 가볍게 옮겨놓고 말했다.
“장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