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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게 진짜 큰 겁니다 (136/303)

사소한 게 진짜 큰 겁니다

“부경유통을 상대로 오프라인 유통판을 가져오기까지 모직의 손정훈 과장의 역할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류 전무가 자리에 모인 전 임원을 대표해 불편한 내용을 꺼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 임원들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정말 손정태 사장이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기쁘게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워 놓고 손 사장이 말했다.

“제가 제 입으로 제 동생 칭찬을 하자니 낯간지럽긴 한데… 이게 안 할 수가 없네요. 기특하지 않습니까?”

벌써 자리에 참석한 임원 몇몇은 손 사장의 반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눈치다.

“처음 부경유통을 상대로 모직과 식품 쪽에서 보이콧을 강행하겠다 했을 때, 기업 이미지 하락은 둘째 치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생각을 했어요. 도대체 그걸 왜 하겠다는 건지, 결국 우리 스너프 자체 매출만 보면 반사 이익으로 긍정적인 효과가 컸던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냥 좋게 좋게 서로 조금씩 양보해 가며 풀어도 충분할 것을 꼭 그렇게 야만적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 건지… 저는 이해를 못 했습니다.”

자리에 모인 모두가 불과 몇 달 전의 상황들이 눈앞에 다시 펼쳐지기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손 과장이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그 바위를… 아예 통째 쪼개 놨어요.”

과한 표현이 결코 아니었다.

표현의 강도는 강했지만, 실제 부경유통을 반토막 내 버린 게 사실.

“진짜 멋지지 않습니까? 와, 저 놀랐어요. 솔직히 이게 가능할 거라고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셨던 분 혹시 계세요? 저는 무조건 불가능이라고 봤거든요. 근데 진짜 이게 되네요. 아니, 됐네요. 2002년도에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올라간 거보다, 이게 더 기적 아닙니까? 하하하… 그걸 제 동생, 손정훈 과장이 해냈어요.”

현재로써는 손 사장의 가장 최측근인 류 전무마저 헷갈리고 있었다.

과연 이게 손정태 사장의 진심인 것인지, 아님 자리에 모인 임원들을 돌려 까고 있는 것인지.

하지만 자리에 모인 임원들을 돌려 깔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것도 상당히 이성적인 손정태 사장이….

어쨌거나 현재의 스너프는 작년에 산출한 예산 대비 실적을 크게 웃돌며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중인데.

다시 한번 류재현 전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경에서 받아 온 오프라인 유통판을 우리 스너프에서 운영을 하는 부분에 있어, 손정훈 과장은 아무런 불만이 없었던 겁니까?”

“에이, 전무님.”

손까지 휘휘 저어 가며 손 사장이 말했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내용을 앞에 놓고 왜 그렇게 조심을 하세요? 안 그러셔도 됩니다. 그리고 해당 내용은 손 과장이 회장님께 직접 건의한 내용이에요.”

“손정훈 과장이 직접이요?”

“네. 유통은 유통끼리 묶어 놔야 교통정리도 빠르게 될 것이고, 운영 정상화에도 도움이 될 거 같다고 하면서요. 우리 입장에선 땡큐죠. 아무리 지점별로 적자 영업이 많이 일어나고 있던 오프라인 유통판이라도, 아무런 오프라인 유통판이 없었던 우리 스너프 입장에선 요긴하게 쓰일 테니까요. 그리고 다들 이젠 오프라인 유통판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말을 하지만, 지점별로 놓고 봤을 때 잘되는 곳은 잘됩니다.”

그걸 말로 해서 뭐 할까.

단순 매출 총합이지만, 백화점 사업 중 단일 지점의 1년 매출 총합이 조 단위를 훌쩍 뛰어넘는 곳만 국내에 6군데가 된다.

그중 세 군데가 바로 부경백화점 잠실점, 부산 센텀점, 그리고 본점이 있는 중구점이다.

여전히 임원들의 표정이 환하게 펴지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간파하고 있었던 손정태 사장.

그가 말했다.

“집에 새는 구멍이 하나 있으면, 그것만큼 성가신 게 없어요. 여기 계신 분들은 다들 열심히 사셨고,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거기 때문에 어쩌면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안도감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

“나는 진짜 최선을 다해서 내 역할을 해내고 있는데, 가족 중에 누구 하나 정신을 못 차리고 집안의 골칫거리 역할을 하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죠. 집에 도움 되는 일을 하란 말은 안 할 테니까, 제발 가만히만 있어라.”

그 말에 비슷한 경험이 있던 몇몇 인물이 실소를 몰래 터뜨렸다.

“큰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사고 치지 말고, 그냥 가만히만 있어라. 그게 다른 열심히 사는 가족들을 도와주는 거다… 혹시 여기 계신 분 중에 그런 경험 해 보신 분 안 계세요? 제가 그랬거든요, 이번에 큰일을 해낸 제 동생 손정훈 과장이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하고 다니는 꼴을 볼 때마다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인 손 사장이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기존 스너프에서 합류하신 몇몇 분을 제외하고는 제 동생에 관해 다들 조금씩은 이야기를 들으셨을 거 아닙니까. 그놈이 어디 보통 별난 놈이었습니까? 집안의 골칫거리였어요. 그런데 어떠한 계기로 이 녀석이 정신을 차리더란 말입니다. 더 이상 제가 따로 챙길 이유가 없을 정도로 요즘 너무 열심히, 잘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너무 기쁩니다. 따로 제가 손을 안 대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고요.”

임원들의 얼굴에 하나둘씩 환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앞으로는 지금껏 해 왔던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열심히 해야 할 책임감이 생겨났죠. 아무리 내 가족이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지만, 형이 되어서 동생한테 밀린다는 소릴 제가 들을 수는 없잖아요.”

임원들의 얼굴에 번져 있던 미소에 마땅한 책임감도 함께 생겨나기 시작했다.

저마다 손 사장의 말에 공감을 한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 중, 6분을 제외한 8분은 각각 재경 그룹 본사와 항공, 식품 쪽에서 제가 직접 모셔 온 분들입니다. 모직 쪽 인사는 한 분도 안 계시죠. 제 실수죠. 조동희 전무님 말고는 딱히 모실 분이 없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제가 우리 재경의 모직을 너무 얕잡아 봤어요.”

이건 손정태 사장의 실수가 아니다.

그게 사실이었다.

그룹 내에서 가장 열등했던 사업 부문이 바로 모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을까.

“제가 얕잡아 봤던 모직이 업계 1위로 올라갔고, 결국엔 부경이라는 유통판을 쪼개어 놓기까지 했어요. 저는… 이젠 우리 스너프에서도 뭔가를 보여 줘야 할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도 한번 해 봅시다, 트래픽 플랫폼 비즈니스 업계 1위.”

“…….”

“저를 좀 도와주세요. 동생한테 밀린다는 소릴 들을, 그럴 쪽팔릴 자신이 없어요. 이틀 뒤, 회장님 주관하에 우리 쪽으로 함께 넘어올 부경유통 임원진들과 간단한 형식의 인사 자리가 있을 겁니다.”

자리에 모인 전 임원들을 쭉 둘러본 후 손 사장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참석하시는 자리인 만큼, 우리 쪽에서도 오프라인 유통판을 받을 만한 준비 정도는 충분히 되어 있다는 걸 보여 줘야겠죠. 32시간 드리겠습니다. 부경에서 넘어온 오프라인 유통판의 경영상태 정확하게 확인하시고, 그걸 우리 스너프에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정상화를 시킬 수 있을지 영업 정상화 방안을 만들어 오세요. 지금이… 10시. 다음 회의는 내일 밤 10시에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 * *

손정태 사장이 류재현 전무와 함께 회의장을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32시간?”

“퇴근은 다 했네.”

“지금 이 와중에 퇴근 소리가 입에서 나와?”

“말이 그렇다는 거죠. 이거 지금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되는 거예요?”

“낸들 알아? 우리가 그 유통판들을 받을 줄 누군 상상이나 했겠냐고.”

“아무래도 그쪽으로 지점별 분석지부터 요청을 해야겠죠?”

“그걸 받아 뭐 하게? 그거 받아 본다고 답이 나와? 지점별 분석지 확인하는 데만 32시간을 훌쩍 넘기겠구만….”

“그렇다고 32시간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어요?”

그나마 그런 머리라도 굴리는 건 손 사장이 스너프로 직접 데리고 온 재경의 본사, 항공, 식품 출신의 임원들이었다.

기존 스너프 출신의 임원들은 오프라인 유통판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었을뿐더러 각기 다른 분야의 사업을 하나로 묶어 내는 노하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넋을 놓고 다른 사람들이 허둥대는 꼴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그러고 있던 와중, 닫혔던 회의실 문이 다시 열리며 조금 전 손정태 사장과 함께 나갔던 류재현 전무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님은….”

누군가의 질문에 류 전무는 자리에 앉으며 “올라가셨어요.”라고 대충 대답을 한 다음, 울상이 되어 버린 임원들을 쳐다봤다.

손 사장이 다시 이 회의장 안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란 소리에 여기저기에서 류 전무를 향해 우는소리를 터뜨렸다.

“전무님도 전혀 모르셨던 내용입니까?”

“아까 회의 때 졸았어요? 제가 어디 보통 당황을 합디까?”

“아니, 이게 사이즈가 작은 내용도 아니고, 그래도 명색이 부경의 백화점, 아웃렛, 면세점이 동시에 묶여서 들어오는 거 아닙니까. 이런 큰 내용을 어떻게 사전에 일언반구도 없다가 갑자기 우리가 받게 됐으니 준비를 하라… 이걸 어떻게 준비를 합니까? 그것도 32시간 안에? 하….”

류 전무의 표정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기획 본부장님.”

“네.”

“말씀을 좀… 생각이라는 걸 해가며 하셔야 할 거 같아요.”

“…네? 아니, 저는 그냥….”

“내일모레 회장님 참석하시는 자리에서도 그런 표현을 쓰실까 염려가 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무슨 표현이요? 제가 혹시 뭐 금방 말실수라도 했습니까?”

“우리끼리야 상관이 없죠. 부경의 백화점, 아웃렛, 면세점? 음. 틀린 내용은 없지. 그런데 그 부경이란 이름에 대해 오너가에서 가지고 있는 불편함을 모르세요?”

“…….”

“우리 쪽으로 넘어온 그 유통판들 앞에, 사장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부경의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우리까지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앞에 부경이라는 이름을 굳이 친절하게 안 갖다 붙여도 충분히 의미 전달은 다 되지 싶은데? 다른 일반 사원들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이미 우리 쪽으로 넘어온 이상 우리 임원진에서는 의식적으로라도 조심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사소한 게 진짜 큰 겁니다, 특히 본부장님 같은 비등기 계약직 임원들한테는. 고깝게 듣지 말고. 진심으로 걱정해서 해 주는 말이니까.”

그 말에 자리에 남은 전 임원들은 일제히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꼭 다물었다.

전 임원을 상대로 주의를 준 뒤 류 전무가 말했다.

“32시간이 부족합니까?”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솔직히 감이 안 잡힙니다. 전혀 예상을 못 하고 있던 내용이 되어 놔서….”

“참 답답들 하십니다, 정말. 아까 회의할 때 사장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힌트를 미리 다 주고 가셨잖아요. 다들 이렇게 눈치들이 없으니, 내가 다시 안 와 볼 수 있었겠냐고. 하이고….”

“…….”

“어제 밤늦게까지 회장님과 술잔을 나누셨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어제만큼 회장님의 얼굴이 편안해 보이셨던 적이 없었던 거 같다, 그래서 사장님도 무척 기분이 좋으셨다.”

“……?”

“그리고 동시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힌트란 말입니까?”

“사장님은 왜 그동안 회장님이 그렇게까지 좋아하실 만한 일을 사장님 손으로 직접 해내지 못했나… 아쉽단 말씀을 하셨잖아요. 지금 우리한테 사장님이 좋아하실 만한 일을 해내란 말씀을 그렇게 돌려서 하신 거 아니겠어요?”

그제야 눈치 빠른 임원 몇몇이 자신의 허벅살을 때리거나, 짧게 박수를 치며 류재현 본부장의 예리함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 현재 사장님이 스너프 자체 차세대 사업으로 기획하고 계신 내용이 뭡니까? 그거랑 엮어 낼 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우리 자체 오프라인 유통판까지 생기겠다, 그 안에서 출발하면 되는 거죠. 이만하면 사장님이 주신 시간 안에 제 역할은 다한 거라고 보입니다. 32시간. 면세점, 아웃렛에는 적용시키기 힘든 내용일 테니까 그쪽으로는 알아볼 필요도 없을 것이고, 백화점 위주로만 로케이션 분석 들어가세요. 그리고 발표 준비는 기획 본부장이 총합해서 맡는 거로 하고.”

“네.”

“그럼 저도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수고들 하세요.”

자리에서 일어선 류 전무는 출입문 쪽으로 몇 걸음 옮기다 잠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 발표 자료 준비 중간중간 나한테 보내서 피드백 받고.”

“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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