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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쳐 있는 힘 (137/303)

뭉쳐 있는 힘

회의 당일.

정태는 1시간 일찍 류재현 전무와 함께 그룹 본사 회장실을 찾았다.

자리엔 아버지가 미리 소개를 시켜 주겠노라 했던 인물 두 명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전 부경유통 백화점, 아웃렛 사업부 부문장직을 맡았던 곽도일 전무.

그리고 전 부경유통의 면세점 사업부 총괄직을 맡았던 주형철 전무.

이번에 재경 그룹이 부경의 오프라인 유통판을 다시 가져오는 데 꽤 중요한 역할을 해 준 인물이란 이야기 정도는 며칠 전 아버지와의 술자리를 통해 대충 전해 들어 알고 있었던 정태였다.

손 회장의 주선으로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네 사람은 각각 2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아 서로를 마주 보기 시작했다.

정태는 의식적으로 곽도일과 주형철을 상대로 거리를 뒀다.

그룹 회장이 직접 마련한 자리임에도 건조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런 냉랭한 태도로 인해 상대들이 당황을 하는 모습까지도 무관심하게 넘겨 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태의 기질과 인물됨을 파악하고 있는 류재현 전무는 현재 손정태 사장이 이 두 사람을 상대로 자기 나름의 평가라는 걸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관심이 없는 대상에게는 의외로 호의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는 게 손정태 사장의 특징이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사람들에겐 무척이나 엄격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특히 완벽하게 자신의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아마도 지금 손정태 사장은 이 두 인물을 앞에 두고 차후 자신과 함께 갈 수 있을 만한 인물인지, 데리고 갈 가치가 있는 인물인지를 평가해 보고 있는 중이리라.

그랬기에 류 전무는 그룹 회장이 앞에 계시긴 하지만, 의외로 지금의 자리가 퍽 편안하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죠?”

정태가 운을 띄웠다.

그 질문 앞에 곽도일과 주형철은 언제 손 사장의 냉랭한 태도에 당황을 했냐는 듯,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슬며시 미소를 흘렸다.

그 미소를 옆에서 지켜보던 류재현 전무는 속으로 ‘역시….’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양대 쇼핑 기업의 주요 사업부 전무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들.

그 내공이 가벼울 수는 없는 거였다.

손 사장이 던진 질문에 예의상 대답을 하듯 곽도일 전무가 주형철 전무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부침이라는 건 항상 있어 왔던 거니까요.”

“그런데 그 부침이 너무 길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곧 나아지겠죠. 상황이 다 정리가 됐으니까요.”

“아주 긍정적인 분이신 거 같습니다. 백화점, 아웃렛. 작년 3/4분기 대비 매출이 60퍼센트나 떨어졌던데, 이 정도면 거의 기록적인 매출 하락 아닙니까?”

손홍준 회장이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정태를 말렸다.

“지금은 가볍게 인사 정도만 해. 그 관련된 내용은 잠시 뒤에 회의 하면서 꺼내도 되잖아.”

적당한 선에서 곽도일 전무의 면을 챙겨 주기 위해 신경 써 자신의 아들을 말린 것임에도, 그간 말없이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던 주형철 전무가 대신 말을 받았다.

“제가 맡고 있었던 면세점 쪽 역시 작년 3/4분기 매출 대비 50퍼센트 이상 감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국내 유통판을 훑고 지나갔던 파도들이 너무 높고 파괴적이어서 그런지, 저나 곽 전무는 이 정도는 얼마든지 반등을 시킬 수 있다고 자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요? 와우. 전년대비 60퍼센트, 50퍼센트씩 매출이 떨어졌는데, 이걸 이 정도라고 표현하신다는 게 전 개인적으로 무척 놀라운데요?”

곽도일 전무가 말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때부터 손 회장은 한발 뒤로 물러나 아들의 그릇과 새로운 인물들의 역량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곽 전무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국내 소비 시장 전체가 얼어붙은 건 아니죠. 만약 태영유통 쪽도 비슷한 수치의 영업 매출이 감소했다고 하면, 이건 심각한 사안이 맞습니다. 위기의식을 느껴야겠죠. 하지만 저희가 놓친 매출 감소만큼 태영 쪽에선 매출 상승 효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소비 시장은 유지가 되고 있다는 말인 거죠.”

“매출이 반토막까지 났는데, 해당 사업 부문장까지 계셨던 분이 너무 남의 집에 난 불구경하듯 말씀을 하시니 살짝 당황스러운데요?”

그 와중에도 곽도일은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31년 전 부경 그룹 본사로 입사를 해, 유통에서만 22년의 경험이 있는 곽도일이었다.

그룹의 후계자인 손정태 사장을 가볍게 보고 있는 건 결코 아니지만, 가볍게 보일 자신도 아니었다.

만약 상대가 자신을 가볍게 보겠다고 하면 미련 없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고 악수 후 이 방을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받을 건 이미 다 받았다.

재경에서의 새 출발은 곽도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옵션일 뿐.

상대가 평생을 몸담았던 부경의 후계자도 아니고, 이름 있는 아파트 한 채에 자신의 지난 세월 모든 의리를 버리면서 흘러온 이곳의 후계자라면야, 그 후계자가 자신의 힘들었던 결단을 비웃듯 가볍게 본다면야 그 옵션 하나 포기하는 게 일일까.

스너프로 이름이 바뀔 백화점, 아웃렛 사업 부문의 부문장 자리?

더 이상의 큰 욕심도, 절실함도, 조금의 미련도 없는 자리다.

이미 손 회장 내외의 설득에 부경유통 안에서 임시 이사회를 주도할 결심을 했을 때부터 곽도일은 사실상 은퇴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마음의 든든함이 오히려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고, 자신이 애써 지켜 주고 있는 예의의 가치를 올려 주고 있었다.

“저나 여기 주형철 전무는 옆집에 난 불이 우리 집으로 안 옮겨붙을 수 있도록 각자의 소신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확실히 연륜이 있다.

정태는 자기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상대에게 들키고야 말았다.

억지를 부리면 감정에 흔들림이 있을까, 고의로 몇 차례 건드려 봤는데 오히려 감정에 변화가 생기기는커녕 아주 세련되게 억지를 받아 내고 있다.

그 큰 마이너스 매출에 1등 공신이 바로 재경모직, 재경식품, 그리고 재경항공과 손을 잡은 태영유통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그런 노골적인 공격이 먹힐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에 무능한 주제에 욕심만 가득한 부경유통 그룹의 회장 장선열이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그럼에도 그런 내용은 일체 입에 담지 않고 있다.

이번에 재경의 편에 서면서 꽤 큰 목돈을 뒤로 따로 챙겼던 걸로 안다.

그래서 크게 아쉬울 게 없다는 입장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지.

크게 아쉬울 게 없다면, 왜 이런 억지를 가만히 들어 주고만 있겠나.

정태가 상대들이 가진 전력을 속으로 가늠해 보고 있는 동안, 곽도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꽤 지난 일이지만, 국내 오프라인 유통 쪽은 그 힘들었던 사드 시절도 효과적으로 극복을 했고, 코로나 시국에도 반시즌 정도 휘청거렸지 금방 제자리를 되찾았습니다. 오히려 진짜 오프라인 유통판의 위기는 그때였죠. 그땐 소비 시장 자체가 얼어붙었으니까요. 많은 경제 분석가들이 터무니없는 시장 분석을 내어 놓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오프라인 유통은 아예 다 죽고, 온라인 유통으로 모두가 대체될 거라는… 그런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 지가 벌써 10년, 15년… 그 정도 됩니다.”

“…….”

“그런데 현실은 그런 게 아니죠. 적자 지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오프라인 유통판에 빌리언 클럽(10억 달러, 즉 1조 원 클럽)이란 말이 생겨나기 시작한 건 5년이 채 안 됩니다. 적자 영업이 시작된 곳도 분명히 있지만, 단일 지점에서 조 단위 매출이 찍혀 올라오기 시작한 곳들도 생겨나고 있다는 거죠.”

정태가 물었다.

“그래서 전무님 말씀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다시 예전 매출 수준으로 반등을 시킬 자신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아님 시간이 필요하단 말씀이십니까?”

그에 곽도일은 불쾌한 감정을 요령껏 숨겨 놓고 절제된 미소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 부분은 사실 저나 주 전무가 더 궁금해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정태의 몸이 옆으로 살짝 틀어졌다.

소파 쪽으로 등을 기대며 고개를 뒤로 살짝 빼어 내 맥락 없는 대답을 내어 놓은 곽도일과 아버지 손홍준 회장을 차례대로 쳐다봤다.

“궁금하다면 뭐가 궁금하단 말씀이십니까?”

“저나 주 전무는 아직 재경이라는 기업에 대해 실질적 경험이 없다 보니 구체적으로 잘 알지를 못합니다. 재경의 색깔, 스타일… 아직 파악을 못 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저희의 소속이 여전히 부경이었다면, 그 안에서 조금 전 사장님께서 주신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장선열 회장으로부터 받았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대답을 올렸을 겁니다. 길게 잡고 1년. 1년 안에 평년 매출치까지 반등을 시켜 놓겠다고 자신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아니다?”

“현재 태영유통이 재경항공과 콜라보를 하고 있죠. 면세점 쪽 매출이 크게 떨어 진 1차적 원인이 바로 재경항공에서 태영유통과 손을 잡고 진행 중인 면세점 포인트 프로젝트입니다.”

반박의 여지가 손톱 하나만큼도 없는 내용.

“장선열 회장은 얼굴이 무척 두꺼운 인물입니다. 만약 그분이 항공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이와 같은 작전을 펼쳤다고 가정을 해 보면, 유통 쪽을 다시 살려 보겠다고 얼마든지 태영유통을 버리라는 지시를 하겠죠. 만약 회장님과 사장님의 허락하에 항공 쪽에서 그러한 움직임을 만들어 내 주기만 한다면, 제 대답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매출 반등을 시키겠습니다…가 될 겁니다.”

정태뿐 아니라 손홍준 회장의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빠져나간 의류 브랜드들이야 다시 입점을 할 테니까 크게 걱정은 안 됩니다. 지난했던 보이콧으로 인해 실추된 기업 이미지 역시, 이젠 스너프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될 것이고 경영진에서 소비자들을 상대로 사과와 반성의 차원에서 괜찮은 이벤트 몇 번만 진행을 한다면 서서히 덮히겠죠. 각 지점의 운영진들 또한 큰 파도를 직접 경험했고, 그 파도의 원인과 맥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신중함과 조심성이 많이 붙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게 끝입니까?”

곽도일은 대답을 잠시 미루고 그게 끝이냐고 묻고 있는 정태의 말뜻과 표정을 신중하게 살폈다.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는 알겠는데,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매출 반등을 일으켜 낼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준비가 안 되어 계시는 거 같네요?”

“…….”

“알겠습니다. 그 정도 자신감을 확인한 것만 해도 제 입장에선 충분합니다.”

* * *

묘했다.

애매했단 표현이 더 정확한 것일까?

손홍준 회장, 손정태 스너프 사장, 그리고 류재현 전무와 함께 회의장으로 내려가는 곽도일과 주형철은 조금 전 회장실에서 1시간 가까이 나눴던 시간들이 무척이나 애매하게 느껴졌다.

굉장히 공격적인 태도로 일관을 했던 손정태 사장.

하지만 크게 무례하단 느낌은 못 받았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들이 잠시 잊고 있었던 내용이 있었다.

바로 부경유통의 후계자인 장민수와는 고작 1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 인물이라는 점.

미리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는데도, 회장실에서 그와 1시간 가까이 서로를 탐색하는 동안 손정태 사장이 장민수보다 고작 1살밖에 많지 않은 사촌 형이라는 사실을 깜빡하게 만들 만큼 그 내공이 장민수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나이 상관없이, 경험 상관없이 그저 스너프라는 한 사업부를 총괄 운영하는 한 명의 실력 있는 사장으로 인식을 해 버렸던 거다.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서는 더한 혼란이 곽도일과 주형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재경의 전 계열 사장단이 참석한 자리.

비록 사장단은 아니지만, 손홍준 회장의 지시로 곽도일과 주형철은 백화점, 면세점, 아웃렛의 점장 전원을 참석시켰다.

극명하게 갈려져 버린 기운의 차이.

이건 결코 좌석 배치의 문제점이 아니었다.

재경의 사장단과 곽도일, 주형철이 함께 데리고 온 점장들의 기운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었다.

그 순간 곽도일과 주형철은 재경이라는 그룹의 숨어 있는 저력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이런 걸 한때나마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었던 일류 기업의 역사와 내공, 저력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비록 재계 순위는 한참 위에 있지만, 확실히 부경에는 없는 무엇인가가 재경에는 있었다.

“다들 앉지. 앉아요.”

가장 상석으로 손홍준 회장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당연하다는 듯 손정태 사장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반대편 손 회장의 바로 옆자리는 매출 규모로는 가장 작지만 이번 보이콧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재경모직의 사장 남필우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손정태 사장과 남필우 사장의 옆으로 각각 항공과 식품의 사장이 자리를 잡고 버티고 있었다.

저 다섯 인물들이 뿜어내고 있는 자신감과 자존심, 그리고 강력한 기운들을 곽도일과 주형철은 지난 세월 부경에선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게 바로 뭉쳐 있는 힘이라는 것인가?

형제들끼리 많은 계열사를 나눠 가지고 있는 부경.

비록 기업의 가짓수와 크기는 작지만, 손홍준 회장 1인 체제로 단단하게 유지가 되고 있는 재경.

도대체 장선열 회장은 그동안 무슨 생각으로 이런 단단하고 옹골진 조직을 상대로 배짱을 튕기며 시빗거리를 만들고 싸움을 걸어왔던 것일까?

그리고 그동안 재경은 부경유통을 상대로 얼마나 많은 인내와 양보를 해 왔던 것일까.

이 회의실 안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곽도일과 주형철.

더는 조직 생활에 큰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재경이라는 조직에 대한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오늘은 사람이 좀 많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많아서 그런 건지, 이상하게 조금 어색하네.”

손 회장의 가벼운 농담에 절반은 미소를, 절반은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 절반의 긴장 속엔 곽도일과 주형철의 긴장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평소 우리 하던 대로 하자니, 적응을 못 할 사람들이 더러 있을 거 같고… 뭐부터 하면 될까?”

그에 손정태 사장이 다른 사장들의 눈치를 빠르게 훑은 후 마이크 머리를 손바닥으로 덮은 채 고개만 살짝 손 회장 쪽으로 돌려 말했다.

“우선 지점별 매출 상황부터 확인을 하시죠. 저희 쪽에서 따로 준비해 온 내용이 있는데, 해당 내용은 지점별 매출 추이 확인부터 한 다음 꺼내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시작해 봅시다.”

이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거기에 새로운 얼굴이 이렇게나 많을 건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고?

이 역시 부경유통에서 넘어온 사람들에겐 상당히 낯선 회의 분위기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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