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요긴하단 말이야?
유연하다.
그러면서도 단단하다.
진행되는 회의의 과정과 분위기, 그리고 그 회의에 임하는 재경 그룹 사장단의 자세, 태도 모든 걸 유심히 관찰했던 곽도일과 주형철.
그들은 자신들이 처음 경험해 보고 있는 재경 그룹 사장단 회의를 그렇게 평가했다.
유연하면서도 단단하고, 그래서 더 실속이 있는 회의.
마치 부경유통에 있을 당시 자신들이 그렇게나 바라고 희망했던 회의장 분위기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손홍준 회장은 귀가 열려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장단의 입이 열릴 기회가 많았다.
재경의 사람들….
자신들이 가진 생각과 소신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걸 회장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자연스레 곽도일과 주형철의 눈앞으로는 장선열 회장의 주관하에 이뤄졌던 부경유통의 수많은 회의가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공개적 질책과 비난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던 부경유통의 사장단 회의.
그 자리는 장선열 회장이 쏟아 내는 불만과 노여움, 그런 감정의 찌꺼기를 받아 내는 쓰레기통 역할만 하는 게 전부였다.
사업의 부문별로 장 회장의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영업 정책이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는 정책들이 한순간 사라지거나 수정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인물들처럼 자신의 생각과 소신을 가감 없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너무 큰 용기가 필요했고, 그 용기의 결과는 결국 장선열 회장의 눈 밖에 나는 거였으니까.
부경유통에서 장선열 회장은 말 그대로 신이었다.
그렇게 받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곳에서도 손홍준 회장은 신이 맞을 거다.
그럼에도 그 신을 떠받드는 사람들의 방식과 태도가 절대적인 복종이 아닌, 재경이라는 조직에 대한 애정과 소속감이라는 부분에서 크게 달랐다.
“이야… 이거 우리 잠깐만, 스톱, 스톱.”
기가 찬다는 듯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 회장이 손을 들어 회의를 중단시켰다.
“미리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이걸 또 막상 브리핑을 받으니까 적자 폭 체감이 너무 크게 되는데? 이건 우리 브리핑 그만합시다. 자료 다 있잖아. 딱히 아름다운 소리도 아닌데 계속 듣고 있을 필요 있나?"
바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재경모직의 사장 남필우가 마이크 머리를 조절해 놓고 자세를 앞으로 살짝 숙여 말했다.
그의 시선은 사이에 앉은 손홍준 회장을 건너뛰고 그 옆자리에 있는 손정태 사장을 향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 모직 쪽에서는 보이콧 철수한 브랜드들 위주로 재입점을 준비하고 있어요.”
“최대한 서둘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손정태 사장은 해당 내용이 오프라인 유통판 영업 정상화에 큰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고개까지 숙여 가며 부탁을 했다.
“매장 수수료 부분은 자체 회의를 다시 거쳐야겠지만, 최대한 모직 쪽으로 유리하게 산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부분은 디테일로 분류를 해야 하는 거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는 내용인 거고. 그것보다는 앞으로 스너프가 오프라인 유통을 가져가서 태영유통 쪽과의 관계를 어떠한 방향으로 재포지셔닝을 할지, 혹시 그 부분에 있어 미리 생각해 놓은 계산은 있는지가 더 궁금하네요. 어쨌거나 지금 우리 모직은 태영유통과 아주 각별한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어요.”
자리에 모인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남필우 사장의 입장에 공감했다.
남 사장은 부경에서 넘어온 인물들을 빠르게 훑은 후, 양해를 구한다는 눈빛을 보내 놓고 말을 이었다.
“스너프가 앞으로 오프라인 유통판을 이끌고 가면서 태영유통과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써 주셔야 할 거 같아요. 저희 모직이나 식품 같은 경우는 스너프에서 어떤 노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태영과의 관계가 불편하게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요.”
곽도일과 주형철은 목젖이 울렁일 정도로 크게 침을 한 번 삼킨 후 손정태 사장이 내어놓을 대답에 집중했다.
“물론입니다. 최대한 예민하게 접근을 할 생각이고, 또 가능하다면 지금껏 태영유통과 부경유통이 유지해 왔던 양강 경쟁 구도가 아닌 상생의 구도가 될 수 있도록 판을 새롭게 맞춰 볼 계획을 잡고 있습니다.”
손정태 사장의 시선이 류재현 전무를 향했다.
시선을 받은 류재현 전무는 곧바로 준비해 온 자료 뭉치를 회의 진행 비서에게 건넨 후 참석자들 전원에게 나눠 주길 부탁했다.
스너프 쪽에서 준비해 온 자료는 빠르게 손홍준 회장부터 시작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앞으로 전달되었다.
“금방 손정태 사장이 밝힌 입장처럼 저희 스너프는 태영유통과의 관계가 경쟁 구도가 아닌 상생의 구도로 발전될 수 있도록, 그 부분에 모든 초점을 맞춰서 운영 정상화 방안을 세울 생각입니다.”
류재현 전무가 서론을 뽑고 있는 동안 자료를 받는 사람들은 그 안에 든 내용물을 빠르게 확인해 나갔다.
“이미 우리 재경 그룹은 태영유통으로부터 너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 태영유통을 상대로 재경항공 콜라보 건을 중단시킨다는 건 언감생심, 상도덕에 어긋나는 무염치가 될 겁니다.”
곽도일과 주형철의 기준에서 이곳 재경 그룹의 사장단 회의실은 최소한의 상식은 통용이 되는 공간이었다.
“충분히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매출 반등까지 고려를 하고도요?”
“네. 물론 장기전으로 가야죠. 하지만, 그 장기전이 결국은 최선의 선택이 될 겁니다. 우리가 스탠스를 장기전으로 잡는 순간 재경의 모직과 식품은 국내 유통판 전체를 아군으로 확보하게 되는 겁니다. 그냥 아군이 아니죠. 절대적 아군이죠. 유통판을 아군으로 잡고 있는 제조는 날개 달린 사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날개, 저희 스너프가 달아 놓겠습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류재현 전무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내 류 전무의 입에서 곽도일과 주형철을 경악하게 만드는 사업 기획안이 흘러나왔다.
“스너프 스크린.”
류 전무의 입에서 스너프 스크린이라는 말이 나왔음에도 류 전무를 쳐다보는 시선은 거의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자료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손홍준 회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스너프 이름으로 스크린 골프장 가맹 사업을 기획하기 시작한 건 석 달 전쯤 됩니다. 해당 기획은 저희 스너프 내부적으론 이미 다 통과가 된 상태이고, 디테일을 잡는 과정까지 다 끝마쳤지만, 그동안 그룹 전체적으로 부경유통과의 신경전이 극에 달해 있었던 만큼 마땅한 기회를 기다리며 딜레이를 시켜 오고 있었던 내용입니다.”
해당 자료를 모두 확인한 손홍준 회장.
그가 류 전무에게 물었다.
“디테일을 잡는 과정까지 다 끝냈다면 어느 수준까지 디벨롭이 된 상태란 소리야?”
류 전무가 빠르게 말을 바꿨다.
“저희 쪽에서 오프라인 유통판을 받는 게 확정된 이후 그 디테일에 약간의 변화는 생겼습니다, 회장님.”
“변화 전 디테일도 괜찮으니까 말 꺼낸 김에 설명을 해 봐.”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몸을 회의 테이블 쪽으로 최대한 붙여서 앉기 시작한 곽도일이었다.
“현재 저희 스너프의 골자 사업 부문은 커머스, 핀테크, 콘텐츠로 나뉩니다. 지난 4월에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시작한 웹 콘텐츠 사업으로 10대, 20대 트래픽에서 높은 유입을 이끌어 내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저희가 기대하는 수준의 토탈 트래픽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에 저희는 오프라인 시장에서도 트래픽을 가져올 방안을 동시에 궁리해 보자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장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손정태 사장의 기획이 적중을 한 모양이다.
류 전무는 상기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손 회장의 모습에 더 큰 자신감을 가지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신규 트래픽 유도에만 모든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기존 트래픽의 충성도를 높이는 방안도 함께 고려를 해야 했습니다. 스크린 골프. 작년 한 해 국내 스크린 골프 시장 규모는 2조 4천억이 조금 넘었습니다.”
“…….”
“여전히 그 잠재력은 어마어마합니다. 그 잠재력을 몇몇 특정 브랜드가 독식을 하고 있는 구조가 바로 현 국내 스크린 골프 시장이죠. 이에 저희 스너프는 인공 지능 스윙 코치 AI 분석 프로그램 제조 기술력을 가진 업체 세 곳을 상대로 자체 프로그램 생산 견적을 미리 받아 놓은 상태이고, 가맹 사업에 필요한 재반 시스템을 준비 중에 있었습니다.”
식품 쪽에서 가맹 사업에 관한 경험을 충분히 해 봤던 손정태 사장, 그리고 그가 스너프로 데리고 온 인물 중 재경식품의 요식 사업부 가맹 총괄 이사가 있었기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세팅을 끝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저희 스너프가 백화점 사업권을 되찾아 오게 됐습니다.”
류 전무는 자리에 모인 모두를 상대로, 손 회장을 대신해 백화점 사업을 가져온 게 그냥 가져온 것이 아니라 ‘되찾아’ 온 것이라고 힘을 실어 표현했다.
“‘문센’이라고 하죠. 문화 센터. 요즘은 백화점 안에 문화 센터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많은 부모가 자식들을 데리고 백화점을 찾아옵니다.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백화점을 찾았던 소비자들이 이젠 문화를 구매하기 위해 백화점을 찾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문화 센터에서 문화를 서비스받는 동안 그 부모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거나, 조금 큰 아이의 부모들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윈도우 쇼핑을 하기 시작합니다.”
“…….”
“하지만 그 윈도우 쇼핑이 매출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류 전무의 시선이 곽도일을 향했다.
“…네, 그렇죠.”
곽도일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을 한 류 전무.
“재경항공의 마일리지와 스너프 플랫폼의 포인트. 이 두 강력한 무기를 등에 업고 스너프 뱅크 시스템의 할인 혜택까지 적용을 시킨다면, 그리고 해당 문화 공간이 백화점 안으로 공격적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틀림없이 스너프 플랫폼을 이용하는 많은 고객, 그중에서도 스크린 골프장을 애용하는 소비자들의 발길을 효과적으로 유도해 낼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자체 백화점이라는 유통판이 없는 상태에선 어떻게 해당 프로젝트를 오픈시킬 계획이었어?”
손정태 사장이 질문을 대신 받고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타 스크린 골프장 브랜드가 했던 것처럼 론칭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확보하고 있는 배경이 든든하기 때문에 자리는 빠르게 잡을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스크린 골프장 사업은 오로지 국내 시장만 보고 준비를 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자리에 모인 사장단 이하, 유통판 점장들은 숨을 참으며 손정태 사장에게 집중했다.
“조금 전에 류 전무가 작년 한 해 국내 스크린 골프 시장 규모가 2조 4천억이라고 설명을 드렸는데, 국내 스크린 골프장 브랜드가 해외에서 올린 매출 규모는 그 시장 규모의 두 배가 더 넘습니다.”
“……!”
“특히 일본과 미국에서 한국의 스크린 골프 프로그램의 인기가 무척 높습니다. 실제 일본과 미국에 진출해 있는 국내 스크린 골프장 브랜드도 두 곳이나 되고요. 중국 시장도 염두에 두고 있어야겠죠. 향후 골프 쪽에서는 성장 가능성이 가장 크고 압도적인 시장이 바로 중국일 테니까요. 스크린 골프장 브랜드, 그와 동시에 자체 프로그램도 함께 수출이 가능한 겁니다. 현재 스너프는 웹 콘텐츠 사업에 더 집중을 하면서 내년 중순까지 미국과 일본 시장에 진출하는 걸 목표로 잡고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스크린 골프 기획이 추가가 된다면 해외 시장에서 스너프 브랜드 홍보는 아주 효과적일 것이며, 그와 동시에 우리 재경의 기업 가치도 크게 올라갈 것으로 기대 중입니다.”
* * *
“스크린 골프장이요?”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야?
전날 그룹 본사에서 열린 사장단 회의에 다녀온 남 사장.
기특하게도 내가 따로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어제 회의에 있었던 내용을 내게 알려 주기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정태 놈이 스너프의 이름을 달고 스크린 골프장 사업을 기획 중이라고 하는데, 난 실내 스크린 골프장이라는 게 있다는 것 정도는 오다가다 본 게 있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과연 이게 재경이라는 기업이 손을 댈 만한 가치가 있는 사업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기획이 아주 촘촘해. 준비를 많이 한 냄새가 나.”
남 사장아.
내가 네놈 코를 믿을 거 같으냐.
그런데 남 사장이 챙겨온 한 장짜리 기획안을 살펴봤더니, 정태 놈이 잘만 엮으면 정말 의외로 괜찮은 사업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은 스크린 골프장 이용해 보신 적 있으세요?”
“있지. 있기야 있는데, 옛날에 처음 골프 배울 때나 잠깐 다녔지, 그 후로는 안 갔지.”
옛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스크린 골프장이라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제 이 기획안 나오고 사람들한테 이야기 들어 보니까 요즘은 완전 최신식이라고 하는 거 같던데? 내가 한 스윙을 기록해서 자세도 바로잡아 주고. 상주하는 코치들 수준도 높다고 하고 말이야.”
내가 또 궁금한 건 못 참거든.
말만 들어 봐서 어떻게 알겠나.
가서 도대체 어떤 곳인지 직접 내 눈으로 확인을 해 봐야지.
사장실을 나서며 시간을 확인해 봤다.
그리고 강인성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과장님.
“과장님 혹시 골프 치십니까?”
―골프요?
“네.”
―아뇨, 아직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아… 그래요?”
강 과장은 힘들 것 같고….
인사부로 내려와 사무실 직원들을 주욱 훑어봤다.
몇몇 사내 골프 동호회에 가입한 직원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긴 했는데, 이걸 굳이 저 친구들한테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하늘이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결국 점심시간을 이용해 하늘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바쁜가?”
―괜찮아. 왜?
“점심은 먹었어?”
―미팅이 길어졌어. 지금 가는 중.
“너, 스크린 골프장 가 본 적 있어?”
―스크린 골프장? 응. 당연히 있지.
“자주 가냐?”
―자주? 음… 글쎄? 하긴 나 정도면 자주 가는 편이 맞는 거 같긴 하네.
“역시. 우리 하늘쓰. 은근히 요긴하단 말이야?”
―또 뭐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