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누나 같아 보인다
정태 놈 덕에 내가 재밌는 공간을 다 경험해 보네.
이런 공간을 백화점 안에다가 넣어 버리겠단 말이지?
나쁘지 않다.
아니, 기본 뼈대가 꽤 괜찮은 기획이다.
여기에 근육과 살만 적당히 잘 갖다 붙이면 꽤 괜찮은 사업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다 싶다.
허, 고놈 거참….
고민이라는 걸 했네.
내가 너무 맹탕으로만 봐 왔던 것일까?
소리만 요란한 깡통일 줄 알았더니, 제법 수가 있다.
잘 해냈으면 좋겠다.
정태 놈.
하늘이처럼 손이 많이 갈 줄 알았더니, 의외로 혼자서 치고 나가는 힘이 있는 녀석이네.
기특하다.
이 손중길이의 손자답다.
이렇게 잘하는 놈이, 그동안 어째서 하나 있는 동생, 정훈이 놈을 따로 챙기는 건 못해 왔던 것일까.
정엽이 놈은 왜 따로 살피지 않았던 것이고.
내가 정태 놈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것일까….
남 사장을 통해 듣기론 오프라인 유통판과는 별개로 스너프 자체적으로 스크린 골프장 사업을 준비 중에 있었다고 한다.
팡!
시원한 스윙 한 번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흘리며 하늘이가 자리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자리에서 내려온 후 곧장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흘겼다.
“아까부터 뭐 해? 게임하러 오자며? 집중 좀 하자, 게임 재미없게 만들지 말고.”
나에겐 태양이가 있었다.
“태양이.”
“네, 형.”
“네가 쳐라.”
“형 차례예요.”
“네가 좀 치고 있어.”
나는 이만하면 됐다.
진작에 글러브를 벗어 놓고 있던 참이다.
난 태양이에게 내 순서를 양보해 놓고 하늘이를 옆으로 앉혔다.
“이런 공간이 백화점 안에 들어가면 어떨 거 같아?”
“스크린 골프장?”
“응.”
내가 게임에 집중할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하늘이는 결국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치마 주머니 속으로 찔러 넣고 실내 안을 천천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미 스크린 골프장을 끼고 있는 백화점들은 더러 있어.”
“아, 그래?”
“응. 스타필드도 그렇고, 하남 갤러리도 아마 안에 스크린 골프장이 들어가 있을걸?”
이미 스크린 골프장을 끼고 있는 백화점이 있다?
하지만 정태 녀석이 생각해 낸 기획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곳들이겠지.
“그런데 정태 오빠가 만들었다는 기획처럼, 백화점 자체 스크린 골프장 브랜드는 아직 없어.”
하늘이 역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출발을 하면 어쨌거나 스크린 골프장 브랜드 자체에 프리미엄은 확실하게 붙겠네.”
“백화점 쪽으로는 직영 운영을 하는 걸로 하고, 나머지는 가맹 사업을 하겠다… 그 계산인 거 같은데, 백화점 이미지에 많은 도움이 될 거 같긴 하네. 여기가 특별하게 장사가 잘되는 매장은 아니지?”
“시간대가 어중간하잖아. 이 시간에 손님들이 이 정도로 있다는 건 장사가 그럭저럭 잘되는 곳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토요일 오후 4시.
하늘이의 생각에 저절로 동의가 되고 있었다.
“너는 어때?”
“뭐가?”
“너는 종종 스크린 골프장을 이용한다며? 경쟁력이 있을 거 같아?”
“오빠 말대로 스너프 포인트도 적립을 시켜 주고, 스너프 뱅크로 결재를 하면 할인 혜택까지 준다면야 나 같아도 동네 스크린 골프장보다는 백화점 안에 있는 곳을 이용할 거 같긴 해.”
“그렇지?”
“백화점 입점 매장에서 브랜드 이미지만 잘 만들어 놓으면, 가맹주들 끌어모으는 것도 수월할 거 같고… 안에 인테리어나, 프로그램, 그리고 상주하는 프로 코치들 퀄리티만 잘 유지를 해내면… 괜찮을 거 같은데?”
하늘이 이놈이 은근히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
똑똑한 놈인 건 확실하다.
큰 그림을 보는 경험이 부족한 것뿐이었지.
처음 날 상대로 자기 잘난 걸 보여 주겠답시고, 채서린을 이용해 시니어즈를 확실히 띄워 보이겠다고 자신을 했던 녀석.
나름대로 애를 쓰고,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고작 유명 연예인을 메인 모델로 바꾼다고 해서 브랜드 이미지가 드라마틱하게 바뀔 수 있을 리 만무.
난 애초에 그 한계를 알고 있었지만, 녀석이 큰 기대를 하며 애를 쓰는 모습이 보기가 좋아서 별말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만 줬었다.
내 예상보다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냈던 것 역시 사실이었고.
그럼에도 자기 스스로 아는 거지.
자기가 채서린을 통해 만들어 낸 시니어즈 홍보 효과보다, 내가 방돔 지사를 활용해서 뚫어 놓은 시니어즈의 판로가 몇 배는 더 큰 성과를 만들어 냈고, 실제 채서린의 홍보 효과는 시너지를 만들어 내는 역할 정도로 그쳤다는걸.
내가 당연하다는 듯 재경모직을 업계 1위로 올려 놓고, 이번에 부경유통의 대표 사업부를 다시 재경으로 가져온 이후부터는 날 대하는 하늘이 녀석의 태도가 무척 온순하게 바뀌어 있다.
“근데, 형. 나 이거 계속 혼자서만 쳐요?”
하늘이까지 게임에 흥미를 잃어버린 모습을 보이자, 혼자 연거푸 스윙을 하던 태양이가 언제까지 자기 혼자 연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게임은 더더욱 아닌 이걸 계속해야 하냐며 물었다.
“조금만 더 치고 있어.”
“네.”
자기 앞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정반대로 내 앞에선 온순한 양이 되어 버리는 태양이의 모습이 신기해서일까, 피식하고 웃음을 흘려 놓고 하늘이가 내게 말했다.
“나는 참 이해가 안 되네.”
“뭐가?”
“이렇게 걱정이 될 거 같음, 오빠가 직접 백화점 쪽으로 옮겨 가지, 그걸 왜 정태 오빠가 맡아 나가게 밑그림을 그렸어?”
걱정?
유통판 사업에 무슨 큰 굴곡이 있을 수 있다고, 고작 남의 브랜드 깔아 주고 자릿세 장사나 하는 백화점 사업에 걱정이라는 걸 할까.
“걱정 같은 건 안 되는데?”
“그런데 여긴 왜 같이 오자고 한 거야?”
“그냥 궁금해서. 나는 전혀 생각을 못 해 본 내용이거든. 과연 이런 공간이 백화점 안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 말이야.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까… 충분히 넣어 볼 만하겠어. 백화점 유입을 떠나서, 이건 이 자체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사업 아이템이란 생각이 들어.”
“정태 오빠는 알아?”
“뭘?”
“오빠가 계속 뒤에서 이렇게 정태 오빠 능력을 가늠해 보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래 보여?”
“아냐?”
“능력을 가늠해 본다고 하기보다는… 관심사가 궁금했던 거 같아.”
“관심사?”
“사업이라는 것도 결국엔 키를 잡은 선장의 관심사와 취향을 탈 수밖에 없는 거니까.”
“그럼 오빠의 취향이랑 관심사는 뭐야?”
“나?”
“응. 만약 오빠가 백화점 사업을 맡았다고 하면, 어떻게 운영 정상화를 시켰을 거 같아?”
이 녀석이 또 날 떠보는구나.
그래, 궁금한 게 많을 거다.
궁금한 게 많아야 정상이지 않겠나.
자기 기준에선 불가능일 줄 알았던 재경모직을 장담했던 대로 단숨에 업계 1위 자리로 올려놓고, 부경유통의 백화점, 면세점, 아웃렛 사업을 다시 재경으로 가지고 왔다.
그 감정이 기대든, 신기함이든, 아님 의심이든 떠봐서라도 확인을 해 보고 싶겠지.
그리고 나 역시 재경 그룹 쪽으로 태산이와 미래금융의 도움을 계속해서 유도해 내고 있는 입장이기에, 적당한 선에서 나에 대한 하늘이의 신뢰를 유지시켜 낼 필요가 있었다.
“나였으면?”
“응. 뚜껑은 열어 봐야 알겠지만, 스크린 골프장 브랜드를 만들겠다? 난 개인적으로 아주 괜찮은 아이디어 같거든. 이게 얼마나 큰 투자가 필요한 사업이 될는지는 몰라도, 일단 단순하게만 생각해 보면 백화점 유입도 어느 정도 늘릴 수 있을 수 있을 거 같고, 스너프 브랜드 노출도 더 자연스럽고 강력하게 유도해 낼 수 있을 거 같고. 오프라인 유통판을 아주 효과적으로 잘 활용하는 기획인 거 같아. 오빠 생각은… 어때?”
“나도 나쁘지는 않은 거 같아.”
“나쁘지는 않다? 오빠는 더 좋은 생각이 있다는 소리로 들린다?”
“글세… 사업이라는 게 어디 기획만 가지고 다 되는 거야? 똑같은 레시피로도 요리사에 따라 맛이 다 다르게 나오는 게 음식이고, 사업이라는 건데.”
“그러니까 오빠는 똑같은 재료로 어떤 레시피를 만들 수 있느냐는 건지, 내 질문은.”
“나였으면….”
그 물음에 나는 짤막하게 지금의 재경에 대한 아쉬움을 하늘이에게 전달했다.
“아마 야구단을 매입했을 거야.”
“야구단?”
“나였으면 그렇게 했을 거 같다고. 재경 맘모스가 2001년도에 매각이 됐더라.”
“…….”
“꼭 다시 재경이라는 이름을 쓸 이유는 없잖아. 스너프라는 또 다른 재경의 이름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 사업과는 별개로 사람들에게 기업 이름이 응원을 받을 수 있는 거. 그 기업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기대와 사랑을 유도해 낼 수 있는 거. 그리고 사람들에게 기쁨과 재미, 엔터테인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거. 그래서 결국엔 팬덤을 형성시켜 낼 수 있는 거. 그런 쪽으로 고민을 해봤을 거 같아. 만약 나였다면 말이야.”
“…….”
“그런데 이것도… 나쁘지는 않은 거 같아. 이걸 어떻게 해내겠다는 건지 기대도 되고.”
* * *
집에 손님을 초대한다는 것.
내겐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내가 재경을 이끌 당시만 해도, 중요한 사업 대부분은 집에서 이뤄졌으니까.
그런데 이 집에 누군가를 데리고 와 보긴 정현수 과장 이후 하늘이와 태양이가 처음이었다.
“우와, 형! 저 이거 좀 구경해도 돼요?”
차고에서 태양이는 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정훈이 놈이 장난감처럼 수집해 놓은 차들 주위를 맴돌고만 있었다.
어쩌다 보니 이 차들을 아직도 처분을 못 하고 있다.
차뿐만 아니라, 정훈이 놈이 수집해 놓은 명품 시계들, 고가의 오디오 세트들… 그냥 그대로 놔두고 있다.
버리자니 아깝고, 이걸 누군가에게 줘 버리자니 그건 더 아깝고, 그렇다고 구차하게 내다 팔자니 그건 더 아닌 거 같고….
그래서 내 취향도 아닌 것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이젠 정훈이 놈의 취향 속에서 살고 있는 게 어쩌다 보니 자연스러워지고 있는 중이다.
“그럼 천천히 보다가 올라와.”
난 태양이에게 차고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방법을 알려 준 뒤 하늘이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직접 와 보는 건 하늘이도 처음이다 보니, 내가 해 놓고 사는 집 안 모습을 꽤 조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해 놓고 사네?”
“일주일에 한 번씩 누가 와서 청소를 해 줘.”
“그래도.”
“집에선 거의 잠만 자는데, 크게 어지를 일도 없고. 구경하고 싶음 구경하고, 뭐 마실 거면 냉장고 안에 있는 거 아무거나 편하게 꺼내 마시고."
“근데 태양이는 왜 같이 데리고 오라고 한 거야?”
“와 보고 싶다잖아. 따로 시간을 만드느니, 겸사겸사. 왜 그렇게 불편하게 서 있어? 편하게 있어.”
“나는 누구처럼 처음 와 보는 집을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편하게 드나들었던 것처럼 할 만큼 넉살이 좋지 못하거든.”
“그 누구가 난가?”
뭘 알면서 물어보냐는 듯, 어색하게 집 안을 훑으며 하늘이가 말했다.
“거기에서 바로 이리로 올 줄 알았음 중간에 마트라도 잠시 들르는 건데.”
“마트는 왜?”
“어떻게 남의 집에 초대를 받아 오면서 빈손으로 와? 뭐라도 하나 사 왔어야 맞는 거지.”
“이 집에 필요한 게 있어 보이냐?”
“뭐가 꼭 필요해서 사 오냐? 매너지.”
“그럼 배달 음식을 네가 시키든지. 그럼 되겠네.”
함께 주방 안으로 따라 들어오며 하늘이가 물었다.
“진짜 배달 음식 시켜 먹을 거야?”
“나 요즘 배달 음식에 진심이다.”
“매일 배달 음식 시켜 먹는 거야?”
“가급적이면 그러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
“노력?”
“어. 내년 3월까지만 모직에서 일하다가, 식품 쪽으로 옮겨 간다니까? 거기 요식 사업부 쪽에 내가 관심이 많아. 그래서 미리미리 공부도 할 겸,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은 혼자 퇴근하고 집에 와서 배달 음식 시켜서 맛 비교를 해 보고 있어.”
냉장고 안에 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열어 보면 알 것을 왜 물어보냐고 했더니, 그걸 또 피곤하게 자기가 열어도 되냐고 묻는 하늘이었다.
“딱히 훔쳐 갈 거 없어. 열어 봐.”
냉장고 문을 열더니, 하늘이는 냉장고 안의 상황에 혀를 내둘렀다.
“아니… 무슨 사람 사는 집 냉장고가 이래?”
“왜?”
“집에서 반찬 같은 거 따로 안 챙겨 주셔?”
“안 받아 온 지 꽤 되지.”
“그래도 사람 사는 집인데, 최소한 김치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말했잖아.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은 집에 와서 배달 음식 시켜 먹는다고.”
“우와… 그래도 이건 좀….”
생수 한 통을 꺼내서 뚜껑을 돌려 딴 하늘이.
난 하늘이에게 태양이 혼자 남겨진 차고 쪽 문을 눈짓하며 물었다.
“그래서 태양이 저놈은 진짜 복학 안 할 거래?”
“선택권 같은 건 없어. 무조건 하게 만들어야지. 지난 3년간 학교 밑으로 들어간 돈이 얼만데, 그걸 안 하겠다고 해?”
“뭐 따로 하고 싶은 게 있는 거야? 그래서 복학을 안 하겠다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런 거라면 같이 고민이라도 해 줬겠지. 없어, 그런 거.”
“없어?”
“없어. 생각 자체가 없어, 쟤는. 딱 보면 알 거 아니야.”
내가 싱긋이 웃어 줬더니, 하늘이는 입을 댔던 생수병 뚜껑을 돌려 닫은 후 왜 그렇게 웃느냐고 물었다.
“정태는… 아니, 정태 형은 네가 태양이한테 하는 것처럼, 날 상대로 그렇게 애를 쓰고 답답해했을까?”
“……?”
“내가 너만 봤을 땐 잘 몰랐는데, 태양이랑 같이 있는 걸 몇 번 보니까, 확실히 누나 같아 보인다. 가만 보면 태양이도 아닌 척하지만, 널 많이 의지하는 거 같고. 보기 좋네. 할아버지가… 말은 안 해도 하늘이 널 보면서 많이 든든하시겠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