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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저 혼자 깨어 있는 척을 했어요 (140/303)

너무 저 혼자 깨어 있는 척을 했어요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태양이 놈한테 한번 물어봤다.

태산이가 말은 안 해도 태양이 놈 때문에 걱정이 많은 눈치였거든.

걱정이 많을 수밖에.

말은 하늘이를 장남처럼 키웠다 해도 엄연히 집안의 장손은 태양이가 아닌가.

“근데 너는 1년만 더 하면 되는데, 왜 복학을 안 하겠다는 거야?”

그 말에 태양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맛까지 다셨다.

“의미가 없겠는 거예요.”

“의미?”

의미.

웃음이 나왔다.

이놈 입에서 지금 의미라는 말이 나왔다고?

“네. 애초에 전공은 적성에도 안 맞는 거였고….”

그렇게 말 같지도 않은 핑계들을 늘어놓다가 태양이 녀석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형한테는 무슨 계기 같은 게 있었던 거예요?”

그 질문에 하늘이까지 놀란 눈으로 태양이를 쳐다봤다.

“계기? 무슨 계기?”

“에이. 저도 알 건 다 알아요. 형 요즘 완전 딴사람으로 변했잖아요. 형도 학교 다닐 때, 학교생활은 거의 안 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렇게 들었는데.”

“그랬…지.”

“지금처럼 바뀐 계기가 있었던 거예요, 아님….”

“그게 왜 궁금해?”

“저도 하루빨리 제가 잘하는 걸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평소 생각 없어 보이던 녀석의 모습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꽤 진지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제가 남들처럼 취업이 필요해서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적성에도 안 맞는 학교 졸업장 따겠다고 다시 또 1년을 버리는 거. 크게 의미가 있을까 싶은 거예요. 저도 형처럼 뭔가 계기가 필요할 거 같은데, 그 계기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 방법을 모르겠어요.”

태양이를 쳐다보는 하늘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함부로 막 대하는 동생에게 이런 고민이 있다는 걸 미리 발견할 기회는 없었던 모양이다.

태양이는 진심으로 내게 방법을 묻고 있는 거였고, 하늘이는 혹시나 하는 기대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슈퍼 카, 명품 시계, 살고 있는 집의 위치와 평수, 브랜드… 그런 것들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어. 그런 게 내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 줄 거라고 믿었거든.”

내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정훈이가 그랬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면 나 역시 그랬던 시절이 한 번쯤은 있었던 것도 같고.

사업이 내가 가진 능력에 비해 너무 잘 풀리기 시작하면서, 아직은 재경의 틀이 제대로 잡히기 전 즈음엔 나도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겸손하지 못한 행동을 더러 할 때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안 거야.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누리고 있는 것들 중에 내 힘으로 가지게 된 건 아무것도 없다는걸.”

와인 한 모금으로 입안을 대충 헹궈 놓고 말을 이었다.

“쪽팔리잖아.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누리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게 내 능력인 것처럼 뽐내고 과시하며 살고 있다는 게. 쪽팔린다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 순간, 내가 내 할아버지의 손자로 태어난 거, 내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난 걸 빼면 내가 잘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덤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어.”

“…….”

“그래서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들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건 이제 그만하고, 앞으로는 내가 할 것들, 해낼 것들로 관심을 받고 그걸로 내 가치를 증명해 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

“그게 전부예요?”

“사람이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순 없어. 특히 지금 너처럼 이거 아니면 안 되겠다… 하는 게 없는 상태에선 더더욱.”

“…….”

“너는 지금 마땅히 하고 싶은 건 없으면서, 하기 싫은 것만 있는 거잖아. 하긴, 우린 그렇게 살아도 되는 인생이긴 하지? 그런데….”

내려놨던 와인 잔을 다시 들어 천천히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살면 넌 평생 동물원 원숭이밖에 안 된다.”

“동물원 원숭이요?”

“재벌 3세의 삶. 호기심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는 있어. 그런데 우리에 갇혀서 사람들이 던져 주는 먹이만 받아먹고, 사람들이 주는 관심에 엉덩이를 흔드는 그 삶이 부럽냐? 어차피 우린 점이다.”

“점….”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존재들인 거 같고, 우릴 대단하게 만들어 주는 배경이 엄청난 거 같아 보여도 막상 저 위에서 우리가 사는 걸 내려다보면 결국엔 크게 차이가 안 나는 점일 뿐이야, 우리 인생이라는 건. 조금씩의 크기 차이만 있을 뿐, 결국은 다 같은 점이니까 우리보다 적게 가진 사람들을 무시할 필요도, 우리보다 더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는 거야. 누구와도 붙어서 깨질 수 있고, 누구와도 붙어서 이길 수 있는 거니까. 그 당연한 걸 깨우치지 못하면 우린 평생 원숭이에 열광하는 애들만 모여드는 동물원의 원숭이로 살아가는 거고.”

“…….”

“그런 거 다 차치하고 한 번뿐인 인생, 좀 재미있게 살아 보고 싶지 않냐? 원하는 거 내 힘으로 다 가져 보고, 재미있는 거 내 손으로 직접 다 해 보고… 그렇게 살아도 짧은 게 우리네 인생이야. 왜 그렇게 네가 가진 배경을 대단하게 생각해? 네가 만든 배경도 아니면서. 넌 그냥 네 할아버지, 네 부모님이 힘들게 만들어 놓은 결과물에 무임승차하고 있는 거뿐이잖아.”

“……!”

"뭘 그렇게 놀라? 아냐? 아님, 설마 모르고 있었어?"

태양이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남들은 힘들게 뛰어가는 길을 편하게 차를 타고 가고 있는 주제에, 그 차가 느리다, 지루하다… 그런 투정이나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

“만약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배부른 투정이라면, 네가 편하게 차 타고 가고 있는 그 길을 힘들게 뛰어가고 있는 애들이 그 투정을 듣고 뭐라고 하겠냐?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겠어? 지금 당장 무임승차하고 있는 그 차에서 뛰어내릴 자신이 없으면, 다음 목적지까지는 군말하지 말고 따라가. 판단은 거기에서 해. 내려서 남들처럼 뛰어 볼지, 아님 더 멀리 가 보기 위해 직접 운전하는 법을 배워 네가 직접 차를 몰아 볼지. 나는 그게 맞는다고 본다.”

* * *

그때쯤 회사 내부적으로는 내년 초에 있을 나의 계열사 이동 건에 대해 많은 말들이 나돌고 있었다.

그룹 본사에서 홍준이가 어떠한 지시를 내렸는지, 벌써 식품 쪽에서 남 사장을 통해 나의 정보를 얻어 가기 시작했다.

“과장님.”

어디에서 무슨 말을 들은 것일까.

정현수 과장이 조심히 내 자리를 찾아와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소문… 사실이에요?”

“무슨 소문?”

“내년 3월까지만 하시고 식품 쪽으로 옮겨 가시는 거요.”

“그게 벌써 소문이 났어요?”

“진짜예요?”

“네.”

정 과장이 만들어 내고 있는 표정이 날 고맙게 만들고 있었다.

같이 지내는 동안 딱히 잘해 준 것도 없는데, 무척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 과장이 고개만 수차례 끄덕였다.

“저는 조금 더 저희랑 같이 계실 줄 알았어요.”

다른 직원들도 나와 정 대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벌써 정리하는 분위기를 만들기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걸로 아는데요?”

“그렇죠. 그런데 너무 생각지도 못한 소릴 갑자기 들어서요.”

“이런 분위기는 우리 천천히, 나 갈 때 다 되면 그때 만듭시다.”

정 과장에게 아직은 많이 이르다는 뜻을 전달해 놓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일반 사원들까지 다 알고 있을 정도라고 하면, 지금쯤 강인성 과장의 트랜스퍼도 함께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

그런 생각으로 강인성 과장을 따로 불러서 내년 3월에 식품으로 넘어갈 때 날 따라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에 강 과장은 당연히 자기는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준비 중이라고 대답했다.

“저희 쪽 팀장님도 그렇게 준비를 하고 계세요.”

생각보다 다들 제대로 준비를 하고 있는 기분인데?

“아, 그래요?”

“네.”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물어본 거였는데, 강 과장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였다.

“식품 쪽으로 저랑 같이 넘어가게 되면, 더 이상 전략기획팀 소속이 아닌 게 될 거예요.”

“여기에선 제가 전략기획팀 업무를 봤나요, 어디. 과장님 사람이 된 이후부터는 팀장님도 저는 항상 열외로 두셨는걸요.”

“식품으로 넘어가면 모직에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 과장님 일거리가 많아질 거예요. 일단 거긴 모직과 비교해 조직 사이즈도 크잖아요.”

“대신 오더는 과장님 한 분을 통해서만 받게 되겠죠.”

그간 전략기획팀 소속으로 있으며, 인사부 과장의 지시를 받고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 꽤나 불편함이 많았다고 이제야 고백을 하는 강인성 과장이었다.

“이곳에선 개인 공간도 없으셔서 항상 구내 식당 아니면 바깥 커피 전문점에서 절 따로 부르셨고요.”

“그런 부분도 식품으로 넘어가면 많이 개선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거기에선 개인 사무실을 따로 쓰실 생각이시죠?”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럼 제 책상 자리도 그 근처로 하나 만들어 주시면 되겠네요.”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혹시 뭐 더 필요한 내용이라도….”

“방돔 지사를 다녀올 수 있게, 팀장님한테 말씀드려서 중간에 일정을 좀 빼 보세요.”

“방돔 지사요?”

“네, 식품으로 옮겨 가기 전에 따로 준비할 내용이 있어요.”

“네,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더 지나서 방돔 지사 출장 일정이 잡혔을 때였다.

그때 나는 남 사장과 조 전무의 배려로, 모직을 떠나기 전 부서장들과 형식 없는 자리를 마련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요청했던 자리였다.

신입 사원 OJT 공간으로 사용되는 연수실.

그 공간을 인사부 직원들이 함께 회의 공간으로 만드는 걸 도와주었고, 간단한 스낵과 음료를 준비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부서장들이 하나둘씩 자신들의 업무 시간을 쪼개어 자리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우리 인사부에선 김원호 부장과 박종근 차장에게 함께 참석해 주길 부탁했다.

“저희도요?”

“네, 그냥 편하게 참석해 주시면 될 거 같아요.”

“에이, 우린 그냥 나중에 우리 인사부 회식 때 따로 자리를 가지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항상 뺀질거리기만 하던 김 부장도, 이젠 나와 한 공간 안에서 함께할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걸 느껴서일까, 괜히 빼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건 또 그때 가서 따로 하는 걸로 하고요. 바쁜 거 없잖아요. 왜 바쁜 척하고 그러세요?”

“아직까지는 그래도 제가 과장님 상사입니다.”

“그래서요?”

“우와… 이제 갈 날 얼마 안 남았다고 벌써부터 그래서요, 이래 버리네.”

뺀질거린단 말이야….

“그냥 편하게. 제가 그동안 신입 사원 채용 때도 그랬고, 우리 부서장님들을 상대로 MZ세대에 대한 이해만 부탁드리고, 그들의 시선에서만 뭔가를 주문했던 거 같아, 오늘 이 이 자리를 빌려 부서장님들 이하, 기성 직원들의 편을 좀 들어 드릴까 해서요.”

“……?”

“너무 저 혼자 깨어 있는 척을 했어요. 따지고 보면 제가 제일 그렇지 못한 사람일 텐데. 같이 자리해 주세요. 모직의 업계 1위 탈환. 그거 우리 다 같이 해낸 거잖아요. 그 내용에 대한 우리끼리의 가벼운 축배조차 든 적이 아직 없는 거 같아서요.”

김 부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해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는 조금 이따가 박 차장 데리고 같이 들어갈게요.”

카톡!

김 부장이 박종근 차장을 데리러 몸을 돌렸을 때였다.

하늘이로부터 카톡이 한 통 들어왔다.

―태양이 복학하겠대.

듣기 좋은 소식이었다.

―잘됐네. 네가 생각 잘했다고 하면서 맛있는 것도 좀 사 주고 그래라.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그간 내가 하늘이한테 고맙단 소릴 들어 봤던 적이 있었던가?

―그날 오빠 집에서 같이 시간 보낸 이후로, 혼자 생각이 많았던 거 같아. 오늘 아침에 밥 먹다 말고 뜬금없이 복학을 하겠다네.

지금 곧 사람들을 만나러 들어가 봐야 할 거 같다고 답장을 찍고 있을 때였다.

―오늘 마치고 뭐 해?

문자가 연거푸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저녁 살게. 약속 없으면 같이 저녁이나 먹지?

그러자고 답장을 보내 놓고, 연수실 쪽으로 걸어갔다.

곧바로 박종근 차장을 데리고 온 김원호 부장이 내 옆으로 나란히 섰고, 한발 앞서서 박종근 과장이 연수실 문을 열었다.

연수실 안엔 먼저 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서장들이 가벼운 다과를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나의 등장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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