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절대라는 게 어디에 있어요?
“리크루팅 방식을 부서별 리크루팅으로 바꿔 보자고 제안을 하고, 여기 계신 부서장님들, 그리고 임원분들 앞에서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때가 바로 얼마 전이었던 거 같은데, 그게 벌써 1년 반 전이었어요.”
지난 1년 반.
다들 열심히 했다.
그래서 다 같이 좋은 결과물도 만들어 냈고.
그럼에도 난 여전히 모직에 많은 아쉬움과 미련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 아쉬움과 미련이 지금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였다.
임원들 없이, 오로지 부서장급 인사들만 모인 이 자리에서 난 그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나의 진심을 전달했다.
이제쯤이면, 지난 재경모직의 불안전했던 인사에 솔직한 내 속마음을 털어놓아 봐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리크루팅 방식을 바꾸고, 신입 사원 대신 경력직 사원들의 비율을 높이고… 저희 인사부에서 그걸 해낼 수 있었던 건 결국 여기 계신 부서장님들의 협조와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자리에 참석한 부서장들의 협조와 지원에 고마움을 표현해 준 뒤, 어쩌면 모직 인사부 과장으로서의 마지막 내 역할이 될 수도 있는 내용들을 꺼내 놓았다.
“처음 입사 1년 차 신입 사원들의 퇴사율을 확인하고, 리크루팅 방식을 바꿔 보자는 제안을 올렸을 때 마음이 상당히 안 좋았어요.”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자연스러웠으나, 내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할 즈음부터 부서장들의 표정은 무거워졌다.
“우리 재경모직이 신입 사원들에게 존중을 받는 기업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서요.”
그 말에 부서장들 대부분은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지, 그 맥락을 짚지 못하겠다는 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이유였습니다. 리크루팅 방식을 바꿔 보자는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죄송스럽게도 부서장님들, 모직의 임원분들을 상대로 강한 표현들만 일부러 골라 사용을 했던 이유요. 조금만 싫은 소릴 하면 금방 토라져서 다음 날 말도 없이 출근을 안 할 지도 모르는 신입 사원들을 붙잡고 앉아서, 너네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거냐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 말에 그제야 조금씩 분위기가 가벼워지며,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즘도 회식할 때 가급적이면 고깃집을 피하시나요?”
“가더라도 구워 주는 집을 가는 편이죠.”
여기저기에서 여전히 MZ세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부서장들의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데는 회식비 많이 나오지 않나? 저희는 아예 에슐린 같은 뷔페에서 주로 하는 편이에요. 요즘 세상에 술 한 번 잘못 권했다가는 꼰대 부장 소리 듣기에 십상이고, 차라리 그런 뷔페에서 하면 1차에서 깔끔하게 끝낼 수도 있고 해서 차라리 저는 그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그래도 거긴 회식을 종종 하긴 하나 보네요. 저희는 두 달에 한 번, 어떨 땐 분기에 한 번. 그렇게 하는 편이에요. 당장 저부터도 회식하자는 말 한번 꺼내기가 조심스럽고 부담스럽거든요.”
한번 말문이 트이자, 너도나도 그간 쌓여 있던 불만들을 장난 삼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내가 물어봤다.
“그 이유가 도대체 뭔 거 같으세요?”
“이유요? 무슨 이유요?”
“부서장님들이 MZ세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유.”
“…….”
“아님 부서장님들이 신입이었을 때와 비교해 요즘 MZ세대가 조직의 눈치를 너무 보지 않는 이유라고 해야 할까요?”
나는 그 이유를 지난 1년 반이라는 모직 인사부 생활 동안, 지금 이 시대를 인사적인 관점에서 연구를 해 본 결과 어렴풋이나마 찾은 것 같다.
“그건 아마도 MZ라는 세대, 그리고 그 세대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조직 생활에서의 무례함을 개인적 솔직함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신입으로 뽑아 온 우리 재경모직의 수준이 문제였을 겁니다.”
“……!”
“워라밸, 조직 안에서의 1인분,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겠다… 당연히 그런 마인드가 잘못은 아닙니다. 성장보다 그런 부분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 요즘 부쩍 많아진 게 사실인 것도 같고요. 그런데 이게 분야가 달라 비교 대상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삼성전자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일과 삶의 균형, 조직 안에서의 1인분,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겠다… 그러면서 지원을 할 거 같습니까?”
“…….”
“아뇨, 애초에 삼성전자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MZ세대 그런 거 다 떠나서 워라밸, 조직 안에서의 1인분,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겠다…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하는 사람들일 겁니다. 그러니 삼성전자에 지원하는 거겠죠. 왜? 이미 그 조직 안에 들어가면 그런 게 불가능하다는 걸 다 알고 있거든요. 그러면서도 지원을 하는 겁니다. 삼성전자는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일류 기업이니까요.”
난 자리에 모인 부서장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췄다.
“만약 조직이 후지지 않고, 선배들이 후지지 않다면, 조직이 일류이고 선배들이 일류라면 하루 종일 굽는 것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그것도 부서 회식 날 잠시 고기 몇 점 굽는 게 그렇게까지 못 할 일일까요?”
“…….”
“이제 우리 재경모직, 국내 패션업계 안에선 1위 기업 아닙니까. 여기에서 조금만 더 하면 우리도 일류가 되는 겁니다. 일류가 되기 위해선 조직원들의 수준이 먼저 일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제가 지난 1년간, 방돔 지사를 통해서 무리한 사업 확장을 해내고, 우리 자체 오프라인 유통판을 확보하려고 했던 진짜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 말을 당부했다.
“여러분들의 부하 직원들이 우리 재경모직의 조직 기강을 뒤흔드는 걸 용납하지 말아 주세요. 여러분들의 부하 직원들이 우리 재경모직 안에서 일류가 되어 보겠다고 애쓰는 다른 직원들의 사기를 꺾어 버리는 모습을 그냥 눈감아 주지 말아 주세요. 워라밸, 1인분,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겠다… 그런 건 우리 재경모직 안엔 없다고, 만약 그런 걸 원하는 거라면 그런 게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렇게… 우리 재경모직을 일류로 만들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부서장님들.”
* * *
일주일 뒤,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국제 공항.
고성표 부장은 일주일 전, 한국 본사에 있는 강인성 과장으로부터 손정훈 과장의 파리 출장 일정을 전달받았다.
다음 달이면 손정훈 과장이 모직 생활을 정리하고 식품 쪽으로 넘어갈 거란 소문은 이미 방돔 지사에도 파다했다.
일주일 전 강인성 과장과의 통화를 통해 해당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한 고 부장은 무슨 일인지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본사 인사부 사무실에서 함께 근무를 한 건 반년 정도.
그나마도 진짜 일다운 일을 같이해 본 건 고성표 부장이 파리 지사로 옮겨 온 이후부터였다.
손정훈 과장의 지시대로 방돔 구역 쪽에 새로운 지사 사무실 건물을 알아보고, 그 건물을 직접 매입, 1층에 시니어즈 이미지 숍 오픈을 준비해 보는 일련의 과정이 본사에서 인사부 생활만 해 봤던 고성표 부장에겐 무척 버겁고 부담스러운 업무였다.
그런데 그 힘든 시간들이 지나 좋은 결과물이 맺히는 순간, 버겁고 부담스럽기만 했던 그 시간들이 즐거웠던 경험들로 바뀌어 있었다.
그로 인해 좌천인 줄만 알았던 이곳 파리에서 가족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생활해 본 지난 1년 반이라는 시간에 고 부장은 진심으로 손정훈 과장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제 곧 지사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모직 본사로 복귀를 하게 된다면, 손정훈 과장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계산이 물 건너간 거 같아 아쉬웠다.
“과장님!”
30분 전부터 입국 게이트 앞을 지키고 있던 고성표 부장의 눈에 작은 짐 가방을 하나씩 끌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손정훈 과장과 강인성 과장의 모습이 보였다.
고성표 부장은 두 팔을 크게 흔들며 자신의 위치를 그 두 사람에 확인시켰다.
게이트를 완전히 빠져나온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 얼른 손정훈 과장의 짐 가방을 건네받은 고성표 부장.
그는 곧바로 주차장 쪽으로 두 사람을 안내하며, 가는 동안 손정훈 과장을 상대로 다시 한번 그들의 파리 일정을 확인했다.
“삐에르 에슈메 사장하고는 제가 이번 주 월요일에 미리 만나 봤습니다.”
“아, 그래요?”
삐에르 에슈메.
방돔 지사가 생뚜앙 지사였을 시절부터, 지사장이 명절만 되면 직원들에게 나눠 줄 명절 선물로 그곳 마카롱을 준비하는데, 손정훈 과장이 그 집 마카롱 레시피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강인성 과장의 전달로, 그곳 사장과의 미팅을 잡는 과정에서 며칠 전 월요일에 고성표 부장이 직접 그 가게 본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혹시 그 집 사장을 직접 만나 본 적은 있으세요?”
“저번에 왔을 때, 비행기 타기 몇 시간 전에 한국에 가져갈 거라고 제가 급하게 그 집에 들러서 마카롱이랑 티라미수를 산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때 가게에 있었던 사람이 사장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민머리.”
“맞아요. 풍채 좋고. 배 이만큼 튀어나왔고.”
고 부장은 아마도 그때 봤던 사람이 그 가게 사장이 맞는 거 같다며, 그와의 첫 만남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강 과장한테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정사정을 해서 미팅을 잡는 데까지는 어떻게든 성공을 했는데, 미리 말씀드리지만 레시피를 팔 마음은 절대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 절대라는 게 어디에 있어요?”
하지만 고 부장은 다시 한번 자신이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원 밀리언 유로를 현찰로 가져와도 래시피는 팔 수가 없답니다.”
“그런데 미팅은 왜 해 보겠다는 거래요?”
“자기 집 마카롱 맛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부분에 있어 고맙게 생각을 한다네요. 그리고 찾아오겠다고 하는 시간대엔 자기도 항상 가게에 나와 있고. 오피셜한 자리라면 거절을 하겠지만, 자기가 가게에 나와 있는 시간대에 찾아오는 거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낼 용의가 있다고 해요.”
“그때 잠깐 봤을 때도 꼬장꼬장해 보였어요.”
“그럼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오늘 일정 말고도 고 부장은 손정훈 과장의 다음 일정에 대한 확인을 재차했다.
“내일은 지사 방문을 하겠다 하셨고, 그다음 날 일정은 강 과장한테 듣기로 비워 두라 하셨던 거 같은데….”
짐작이 가는 곳이 있었다.
지난번 지사 방문 때에도 남필우 사장과 함께 전 손홍명 회장의 아들, 손정엽을 만났다는 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
역시나 손정훈 과장은 그 일정에 대해서 크게 숨길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날은 사촌 형을 잠시 만날 계획입니다. 강 과장 통해 들으셨겠지만, 이번 일정은 모직 쪽 인사 업무와는 상관이 없으니까 너무 불편하게 의전을 안 하셔도 됩니다. 그저 지사 방문 일정은 지사장님께 왔다고 인사 정도를 드리는 선에서 끝낼 거예요.”
“중간에 저랑 저녁 식사 한 끼 정도는 같이할 수 있으신 겁니까?”
지난 1년 반 동안 모직 안에서 손정훈 과장이 만들어 낸 기적에 대해 그 기적의 중심에 있었던 방돔 지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 기적을 가장 일선에서 지켜보고, 또 방돔 지사 현장에서 경험을 했던 인물이 바로 고성표 부장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이번 기회에 손정훈 과장과 좋은 관계를 형성해 보고 싶었다.
비록 이젠 그가 모직을 떠나 식품 쪽으로 건너가는 게 확정이 되었더라도, 재경모직을 대한민국 업계 1위 기업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손정훈 과장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져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그럼요. 부장님만 시간이 괜찮으실 거 같으면, 지금 바로 삐에르 에슈메로 가서 거기 사장이랑 미팅하고, 호텔 들러서 짐 풀고 같이 식사하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저는… 네, 저는 좋습니다. 그럼 메뉴는 어떻게 고를까요?”
“부장님은 한식이 그립지 않으세요?”
“저야 집사람하고 애까지 다 같이 넘어와 있는 건데요, 뭘. 한식은 매일 먹습니다. 저 말고 과장님이 드시고 싶으신 걸로 하죠. 오랜만에 오셨는데, 다이닝 코스도 괜찮을 거 같고….”
그에 손정훈 과장은 짧게 고개만 몇 차례 끄덕이다가, “메뉴는 가는 길에 천천히 고민해 보죠.”라고 대답했다.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했다.
강인성 과장이 차 트렁크를 열어 짐 가방을 싣는 동안 고성표 부장은 차 뒷문을 열어 손정훈 과장이 탈 수 있도록 도왔고, 짐을 다 실은 강 과장은 직접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그러는 동안 고성표 부장은 지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전 공항에서 손정훈 과장 일행을 픽업했고, 오늘은 개인 의전을 한 다음, 내일 지사로 모시고 가겠다는 짤막한 보고를 넣었다.
차에 오르며 고성표 부장이 혼잣말을 하듯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지사장님이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여쭤보네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러지 말고 지사장님이 직접 레스토랑을 예약할 테니까 같이 드시자고 하네요?”
“괜히 번거롭게 안 그러셔도 되는데….”
“오늘 공항 픽업도 과장님께서 한사코 한 사람만 나오라고 해서 제가 대신 나온 거였지, 안 그랬음 지사장님도 같이 나왔을 겁니다. 하하하.”
“…….”
“어떻게 할까요? 지사장님한테 그렇게 하라고 전화를 넣을까요?”
“네, 뭐. 지사장님만 괜찮으실 거 같음,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저도 그렇고, 지사장님도 과장님께 감사한 게 많습니다.”
“감사는 무슨.”
“식품으로 옮겨 가신다고 하셔서 많이 아쉽기도 하고요. 어쩌면 지사장님이 과장님 못 보낸다고, 우는소릴 하실 수도 있어요.”
“에이…….”
“그만큼 올 한 해, 저희 방돔 지사가… 과장님 계획과 함께 정신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말입니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강 과장 안전벨트 맸지?”
“네, 부장님.”
“뭐 한다고 거기 앉았어? 그냥 과장님이랑 같이 뒤에 앉지.”
“어떻게 그럽니까, 부장님이 직접 운전을 하시는데.”
* * *